김시습전(金時習傳) 율곡(栗谷) 저(著)
성주산(聖住山) 무량사(無量寺) 극락전(極樂殿)
성주산(聖住山) 무량사(無量寺) 일주문(一柱門)
김시습전(金時習傳) 율곡(栗谷) 저(著)
※ 김시습전(金時習傳), 율곡(栗谷) 율곡전서(栗谷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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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객(有客) 나그네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有客淸平寺 유객청평사 청평사에 나그네 있으니,
春山任意遊 춘산임의유 봄 산을 마음 가는대로 노니노라
鳥濟孤塔瀞 조제고탑정 외로운 탑은 고요한데 산새만 지저귀고,
花落小溪流 화락소계류 작은 시냇물에 꽃잎이 떨어져 흐르네.
佳採智時秀 가채지시수 아름다운 나물은 때를 아는 듯 돋아나고
香菌過雨柔 향균과우유 향기로운 버섯은 비를 맞아 부드럽노라.
行吟入仙洞 행음입선동 길 따라 읊조리며 신선의 계곡에 들어서니,
消我百年憂 소아백년우 나의 백년 근심이 녹아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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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잠(雪岑(1435-1493), 절의(節義)와 윤기(倫紀)의 백세지사(百世之師)라고 율곡(栗谷)은 평가,
어려서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英敏),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신동이라 불렀다, 당시의 재상 허조(許稠)는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이다
※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詩)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하시고
비단(緋緞)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 혹은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時習)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노산(魯山:단종을 이름.)은 3년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 걸고 3일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호는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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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설잠(雪岑)은 비오는 날 조그만 나룻배에 마포 절두산 나루터에서 버려진 사육신 시신을 수습하여 건너편 노량진에 묻어주고, 그 길로 남행하여 블문에 귀의 하여 법명(法名) 설잠(雪岑)으로 득도(得道)하였다, 보령대천 성주산(聖住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入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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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 매월당집(梅月堂集)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저서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집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여 수에 이른다. 그의 뛰어난 대표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산행즉사(山行卽事)」(7절)·「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7절)·「도중(途中)」(5율)·「등루(登樓)」(5율)·「소양정(昭陽亭)」(5율)·「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5율)·「고목(古木)」(7율)·「사청사우(乍晴乍雨)」(7율)·「독목교(獨木橋)」(7율)·「무제(無題)」(7율)·「유객(有客)」(5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도중」·「등루」·「독목교」·「유객」 등은 모두 『관동일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관동지방으로 떠났을 때의 작품이며, 대체로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서 수작(秀作)이 많다.
『금오신화』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등 5편이 전부이며, 이것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호재(好材)로 제공되어 왔다. 그러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怪奇譚)이다.
이 전기의 틀을 빌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그의 역사사상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소재로 인식하였으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이란 논문에서 역사적 위기도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파악하고, 항상 인간의 마음씀씀이를 중시하였다. 그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한 점은 단순히 성리학적 견해만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이론이기도 하다.
또한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에서는 삼대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공헌을 하였기 때문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고대문화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도 단군조선으로부터 당대인 세종대까지의 역사를 문화사, 사상적으로 파악하여 발전적 역사관을 보였으며, 금오신화 중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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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김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시·서·역·예기·주례·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월·운·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음양유현(陰陽幽顯: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존심 양성)58)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선문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와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란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 두라고 일렀다. 3년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불교의 화장의 명칭)하고 그뼈를 취하여 부도(浮圖)(작은 탑)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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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었다.
한명회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히노라.
설잠(雪岑) 김시습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히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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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생(我生)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百歲標余壙(백세표여광) 백년 뒤 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울때
當書夢死老(당서몽사노) 꿈속에 살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庶畿得我心(서기득아심) 거의 내 마음을 알았다 할 것이니
千載知懷抱(천재지회포) 천년 뒤에 이 내 회포 알아나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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