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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49 - 사노라면 2
S#1. 전자동 앞
추운 겨울. 학생들 종종거리며 오가는데, 만수가 허겁지겁 달려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S#2. 이교수 랩
명환, 중희, 정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달려들어온 만수. 헉헉대며.
만수 : 들었어요? 들었어? 아직 못 들었지?
중희 : 문이나 닫어. 바람 들어오잖어.
만수 : 민재가.. 민재가요.
정태, 명환 돌아보는.
만수 : 글세 민재가..
명환 : 버벅대지 말고 빨랑 할말 하고 앉어 일해.
만수 : 휴학계를 낼건가 봐요.
모두 놀랐다.
중희 :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민재가 왜 휴학계를 내.
만수 : 모르죠. 민재가 왜 그랬을까. 정만수도 버티고 있는데 지가 왜 그 랬을까요. 예?
명환 :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만수 : 방금 창섭이 만났는데 민재가 걔한테 상의를 했다네요. 휴학계를 내면 어떻게 되느냐. 군대문제는 어떻게 되나. 복학은..
정태 : 창섭이가 누군데.
만수 : 내 동기. 걔도 일년 휴학했었거든. 근데 민재는 그놈하고 친하지도 않어.
아니 물어볼 게 있음 우리한테 물어봐야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한테 먼저 물어봐.
명환 : 그럼 아직 휴학계를 낸 건 아니잖아.
만수 :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말리려고 민재를 찾았죠. 그런데 어디서 찾았는지 아세요?
정태 :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 있다) 제발 좀 본론부터 말해줘.
만수 : 이교수님 방에 있는거야. 둘이 아주 심각하드라고. 그래서 제대로 말도 못 듣고 쫓겨나왔어.
모두 조용한데.. 정태 벌컥 몸을 돌리더니 밖으로 나간다. 그런 정태를 보다가.
중희 : 민재, 이 자식. 정말 사고칠래나.
명환, 답답한지 머리를 쓸어넘긴다.
S#3. 이교수 연구실
테이블 쪽에 마주 앉은 이교수와 민재.
서로 말없이.. 민재는 자기 앞의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고 이교수는 찻잔을 빙빙 돌리고 있다가..
이교수 : 악기연주같은 건 하루 연습을 쉬면 사흘치를 까먹는다구 하드라.
우리 연구도 마찬가지야. 특히 이런 첨단 분야를 일년씩 쉰다는 건 아주 위험하지.
민재 : 알고 있습니다.
이교수 : 그런데도 일년 휴학을 하겠다.
민재 : ...생각을 해보고 싶어서요.
이교수 : 무슨 생각인데 일년씩 해야 되니? 그리고 연구를 하면서는 그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어?
민재 : (좀 웃고)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야될지.
이교수 : 남들하고 같이 진학을 못한게 그렇게 억울한거니? 견디기 힘들어?
민재 : ...처음에는 그런 기분도 있었는데요. 그게.. 전부가 아닌 거 같아요. 그냥.. 내 자신이 아메바같단 느낌이 들었어요.
이교수 : 아메바?
민재 : 예. 생각도 없고 방향감각도 없고, 그냥 떼지어서 꿈틀거리는 그런거요. 이제까지 살아온 게 다 그랬던 거 같아요.
이교수 : (말없이 보는)
민재 : 숙제하라면 숙제하고 시험치라면 시험공부하고 잘한다고 남들이 칭찬해주면 좋아하고.
점수 몇점 더 나오면 기뻐하고, ...그렇게요.
이교수 : 그게 나쁘다는 거니?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민재 : 나쁘다기보단..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년 뒤에도 이십년 뒤에도. 똑같이 살고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드니까..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졌습니다.
이교수 : 니가 얘기하던 로봇의 꿈은 어떻게 된거야?
민재 : ... 솔직히 말씀드리면. (망설이다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주 대단한 로봇을 만들어내면, 그게 정말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이교수, 잠자코 보다가 찻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차탁으로 가서 뜨거운 물을 더 따른다. 그리고는.
이교수 : 그런 고민은 내 전공이 아니라서 난 모르겠어. 그리고 어차피 니가 해결봐야 되는 문제인 거 같고.
민재 : (일어선다) 죄송합니다.
이교수 : 선생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라는 거야.
민재 : 제 나름대론 열심히 생각해본 겁니다. 그래서..
이교수 : 내가 보기엔 생각이 아니라 합리화를 시키고 있는 거 같은데?
민재 : ...예?
이교수 :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다. 그래서 여러 핑계를 대고 있는거야.
민재 : (굳어지는)
이교수 : 니들 요즘 도망가는 게 유행인가본데. 김정태한테도 똑같이 말해놨어. 조금만 더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 결과를 리포트로 써서 제출해. 리포트가 맘에 들면 휴학하는 거 도와주지.
혹시 아니? 내가 휴학기념선물이라도 줄지 모르잖아.
이교수, 냉정하게 뜨거운 물만 후후 불어 마신다.
민재, 굳었지만 문쪽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인다.
S#4. 기숙사 앞 / 낮
민재 걸어오고 있다.
계단을 오르려다가 보면, 정태가 입구를 나서다가 민재를 보고 멈춘다.
민재 : (멈추지 않고 정태를 스쳐가며) 날이 춥네.
정태 : 그러네.
민재, 입구로 들어간다. 정태, 그런 민재를 보는.
S#5. 민재/ 정태의 방 / 낮
민재 책꽂이의 책들을 끌어내고 있다.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빈 박스들이 몇 개 늘어져있고.
민재, 책들을 박스에 넣는데 정태가 들어선다.
민재, 그런 정태를 보고 계속 일한다.
정태는 침대에 기대서더니 우두커니 민재가 하는 꼴을 보고만 있다.
민재 결국 신경이 쓰여서 멈추고.
민재 : 나가던 길 아니었어?
정태 : 너, 휴학할거냐?
민재 : 누구한테 들었어?
정태 : 만수선배.
민재 : (웃고 일 다시하며) 만수선배가 알았으니 이제 카이스트 학생 반이 안거네.
정태 : 할거야?
민재 : 엉.
정태 : ... 이유가 뭐야.
민재 : (책을 고르는데만 신경쓰는)
정태 : 말해봐.
민재 : ... 너, 이년 전에 갑자기 휴학했을 때, 그땐 이유가 뭐였어?
정태 : 지금 말장난 하자는거야?
민재 : (웃는) 너 요즘 나만 보면 시비거는 거 알어?
정태 : (웃지않는) 말장난이 아니면, 내가 학교 떠났던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민재 : (참고) 이유없이 학교에서 도망친걸론 니가 선배잖아. 그러니까 이 후배 자꾸 괴롭히지 말라고.
정태 : (여전히 냉정하게) 그래서 지금 내 흉내를 내고 있는거야?
민재 : (아무래도 기분이 나쁘다) 좀 따라하면 안되냐? 특허냈어?
정태 : 꿈 깨. 너같은 놈은 일년이 아니라 십년을 헤메고 와도 소용없어.
민재 : ..나같은 놈이라니. 무슨 뜻이야?
정태 : 잘 생각해봐.
민재, 정태를 노려보다가 다시 참고 책을 하나 든다. 그 제목을 보다가.
민재 : 이 책 너 없지? 가질래?
정태 : (노려보다가 돌아서 방을 나간다)
S#6. 동아리방 / 낮
민재가 테이블 위에 박스를 올려놓는다.
주위에는 진수와 대욱, 지민이. 마이클이 둘러서 있고. 경진은 떨어져 야전침대에 앉아있는 중.
민재, 박스에서 디스켓뭉치를 꺼내 진수에게 주며.
민재 : 로봇축구에 관련된 자료들 정리해놓은거야. 그리고 이 안에 책들이랑 자료들, 훑어보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
마이클 : (박스에서 책 한권을 꺼내들며) 오우 이 책은 나 가져도 되? 이거 내꺼.
진수 : (얼른 마이클의 손에서 책을 빼내며 걱정스러워 민재에게) 근데 이렇게 다 우리 주고 나면 선배는요.
민재 : 나중에 혹시 필요하게 되면 다시 빌려달라고 할게.
마이클 : (슬그머니 아까의 책을 다시 빼내는)
대욱 : 무슨 책인데? (그 책의 제목을 살펴보고)
민재 : 참 지민이 너 2학년 때 회로이론 듣는다구 했지? 여기.. (박스에서 노트며 책들을 챙겨내며) 내가 노트한거하고..
리포트 썼던 거. 족보도 있다.
지민 : (받으며) 이런 거 받으면 무지하게 좋아야 되는데.. 어째 불안하고 그러네. 오빠 정말 이런 거 다 줘도 돼?
진수 : 선배. 전공책은 갖고 있어야 되잖아요.
민재 : 필요한 사람 없으면 버려.
대욱 : 예에?
민재 : 아참. 대욱이 너 자명종 고장났다고 했지? (박스에서 시계를 찾아낸다)
침대에 걸터앉아 보고 있던 경진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아이들에게 물건들을 찾아주던 민재, 나가는 경진을 힐끗 돌아본다.
S#7. 복도 / 낮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던 경진. 한쪽에 세워져있는 음료수 자판기를 본다.
그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져본다. 백원짜리 동전이 딱 하나 나온다. 경진 그 동전을 들고 서서 자판기에게.
경진 : 내가 지금 백원밖에 없는데 근데 무지 목이 마르거든. 아주 목이 타요. 타. 그니까 사정 좀 봐주라. 한번만 깍아줘 응?
자판기 : (물론 대답이 없다)
경진 : 야. 그럼 백원어치만 줘. 한모금만 마실게. 자. (동전을 넣는다)
자판기 : (조용...)
경진 : 너 진짜 그럴래? 어? ...우씨. 나쁜 놈. (자판기를 툭 때린다) 인정머리 없는 놈. (발로 툭 찬다) 어쭈. 대꾸도 안해?
장풍 먹인다. 조오아. 달마대사의 금강지공이다. 에이이... (요란하게 장풍을 쏘는 준비자세를 하는데)
민재 : (E) 뭐하냐.
경진 움찔 놀라서 돌아본다. 민재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경진 민망해서 우물거리다가 반환레버를 눌러서 백원짜리를 도로 꺼낸다.
민재 : 동전 줘? 뭐 마실거야?
경진 : 아니 됐어.
민재 : 점심 먹었어?
경진 : ... 아니.
민재 : 가자. 사줄게.
앞서 걷다가 돌아보면 경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민재 : 안가?
경진 : (우물거리며 발로 바닥을 긁으며) 싫어.
민재 : 어이구 웬일이야. 민경진이 밥을 사양하구?
경진 : 이게 마지막으로 사주는 밥이야. 그럴려구 그러지?
민재 : (좀 보다가) 내가 지금 이민이라도 가냐.
경진 : 일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어. 니가 진짜루 이민 가버릴지도 모르고 내가 그동안 내 별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민재 : (난처해서 웃고) 왜 그래. 너 그러는거 보니까 진짜로 나 휴학하는 거 섭섭해하는 거 같다.
경진 : (혼잣말로) 멍청이.
민재 : (못듣고) 뭐?
경진 : (고개 들더니 반짝 웃어보이며) 가자구. 마지막이든 뭐든 사준다는 밥은 얻어먹어야지. 그래야 민경진이지. 암.
경진 씩씩하게 민재를 앞질러 걸어간다.
S#8. 박교수 랩 / 낮
남희 앞에서 만수가 떠들고 있다. 지원은 자기 컴 앞에서 작업 중이고.
만수 : 솔직히 우리 랩이야 며칠전만해도 전도가 양양했죠오. 전자과의 유망주, 이민재에 김정태까지 우리 랩에 들어올게
확실했으니까. 그럼 정만수의 올해는 아스팔트 왕복 10차선이었다구요. 좌청룡 우백호. 크아..
남희 : 아니 그러니까 민재만이 아니구 정태까지 랩을 나가겠다는 거야?
만수 : 나가겠다..가 아니고 나갔다니까. 그래서 이 석사이이이년차 정만수가 이렇게 심부름 복사를 계속하구 있잖아요.
(들고있는 서류 뭉치를 흔들어대는) 내가 지금 이럴 군번입니까? 예?
남희 : 명환씨도 마음이 많이 쓰이겠다.
만수 : 헤에. 인조인간 정명환이 그럴리가 있어요? 갈테면 가라, 니들 아니면 학생없냐. 이건데요?
남희 : 그래두 랩장 마음은 그런게 아니야. 후배들이 잘되면 잘 되는대로, 못되면 못 되는대로 마음이 쓰이게 돼있어.
만수 : 근데, 왜 명환선배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써요?
남희 : 넌 선배가 되갖구 후배들이 걱정되지두 않니? 수다거리 만나서 신나?
만수 : 걱정 되죠. 그래서 이렇게 떠들어대는거라구요.
남희 : 뭔 소리야.
만수 : 걔들 아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만나면 따끔하게 충고도 하고 잔소리도 할거 아니에요.
그래서 입이 아파도 떠들어댄다구요. 이게 걱정하는거에요. 난. 그러니까 남희선배두 민재나 정태보면
알아듣게 잘 타일러 주세요. 예? 지원아 너도 들었지?
지원 :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해도 되요?
만수 : 말해봐 말해봐. 다 접수할게.
지원 : 만수선배가 그런 식으로 떠들고 다니면 걔들,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게 되는거 아니에요?
만수 : ...뭐?
지원 : 그냥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는 일을 그렇게 기정사실화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구요.
만수 : ....내가?
지원 : 솔직히 이 학교 다니는 사람,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공부고 학교고 그만두고 싶다.
내가 왜 여기 계속 서있어야 되나. 그리고 그런건 남들이 떠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희 : 지원이 너도 그런 생각한 적 있어? 뜻밖이네..
지원 : 나도 사람이잖아요. (모니터를 보며 작업을 계속하는)
만수 : 그러니까.. 넌 내가 사이비 기자처럼 떠들고 다닌다 이거지. 파파라치처럼.
지원 : (흔들림없이 작업하며) 옆에서 보긴 그래요.
남희, 만수의 눈치를 본다. 만수, 머쓱해서 서있다가 조용히 나간다.
남희 : 만수, 저래뵈도 걱정이 되서 그러는거잖아.
지원 : 미안해요. 가끔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남희 절레절레...
S#9. 석학의 집
경진이 접시의 마지막 남은 것을 싹싹 긁어먹는다. 물까지 마시고.
경진 : 아아 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민재 : (그 앞에서 보고 있다가) 너 매달 부모님께서 용돈 보내주시지?
경진 : 거럼. 충분하게 보내주시지.
민재 : 그 돈은 다 어뜩하고 맨날 그렇게 구걸하고 다니냐.
경진 : 모으지. 알뜰하게.
민재 : 글세 모아서 뭐하는데.
경진 : 일부는 망원렌즈를 사기도 하고. 일부는 여행비로 모으고. 그러다가 쓸데없는데 순식간에 낭비하고.
다시 첨부터 모으기 시작하고.
민재 : 쓸데없는 데라니.
경진 : 밥 한끼 사줬다고 별걸 다 묻네. 넌 어뜩할거야. 짐들 다 처분하고 그 담에 어디로 갈건데.
민재 : 일단 집으로 가야지. 가서 엄마 일도 좀 도와드리고 그러면서 등록금도 좀 모으고.
경진 : 솔직히 말해봐. 너 다시 학교에 돌아올거야?
민재 : ...
경진 : 거봐거봐. 대답 못하지. 내가 너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갈까봐 걱정한거야.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난 너에 대해서 짜르르
꿰구 있어. 내 컴퓨터에 보면 니 파일만 열두개다. 이민재1. 민재녀석2.. 민재란놈3...
민재 : ...저번에 보내 준 글은 잘 읽었어.
경진 : (머뭇) 내가 보내준 거 뭐.
민재 : 죽어서 저승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농담중에 가장 웃긴 거. 인생은 심각하고 진지하다.
이 애기만 나오면 죽은 영혼들이 배를 잡고 딩군다며.
경진 : ...내가 보낸 줄 어떻게 알았어. 정태는 말안했다던데.
민재 : 대한민국에 그런 짓 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경진 : (시무룩...)
민재 : 아무튼 그동안 여러 가지로 즐거웠다.
경진 : 시끄러.
민재 : 조용히 들어봐. 난 지금 너의 좋은글에 대한 답사를 하는 중이야. 그리고...너의 별나라연구가 초스피드로 진행되길 바라고.
니가 너의 고향별보다 지구별을 더 좋아하게 되길 바라고 그리고 너의 그 사람.
경진 : 잠깐. 내 그 사람이라니...
민재 : 니가 아주 많이 좋아했다는 사람 있잖아. 그 사람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경진 : (보다가 웃는)
민재 : 잘 안되더라도 더 좋은 사람을 얼른 만나기를 바란다. 이상.
경진 : (웃다가 멈추고 딴데를 보다가 다시 민재를 돌아보는데 더 이상 웃지 않으면서) 너 디게 웃긴다.
민재 : 나 원래 시나 산문에 약하잖아. 니 글처럼 멋없어도 이해해라.
경진 : 난 널 잘 아는데 넌 날 잘 몰라. 난 그렇게 쉽게 포기안해.
민재 : 뭘 포기안해.
경진 : 뭐든지. 내가 포기하기 싫은건 절대로 포기 안해. 죽을 때도 이렇게 말하고 죽을거야. 아아..난 포기안한다아..못해애...꼴깍.
그래서 내가 보기에 너 지금 디게 웃겨.
민재, 보다가 한숨쉬고 관두자해서 물을 들어 마신다.
경진 갑자기 안을 향해 버럭 소리지른다.
경진 : 언니. 음악 좀 틀어줘요. 웃기는 음악 뭐 없어요?
바 쪽에서 잔을 정리하던 미순.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진영을 보며.
미순 : 웃기는 음악도 있냐?
S#10. 인공위성 건물 / 밤
S#11. 내부 연구실
퇴근준비를 한 서교수가 방을 나서려다가 돌아보는 곳.
저만치 연구실 구석에 경진이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모니터나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
서교수 : 뭐해.
경진 : (못 듣는다)
서교수 : 민경진.
경진 : (그제야 돌아보고 에구해서 일어선다)
서교수 : 안 들어가? 할 일 남았어?
경진 : 할 일은 없는데 할 생각이 남아서요.
서교수 : (웃더니) 자넨 생각이 너무 많단 얘기 못들어봤어?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든데?
경진 : 그건 오햅니다. 사실은 생각하는 걸 아주 무서워합니다.
서교수 : 무서워 해? (흥미있다. 다가오더니 근처에 앉는다) 앉아봐.
경진 : (다시 앉는)
서교수 : 4학년들. 지금쯤이 아주 위험해. 논문 다 끝내고 석사 올라갈때까지 할 일없고 방탕해지기 쉽지.
생각하는 게 무섭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경진 : 말 그대롭니다. 저는 생각을 하면 자꾸 그 생각에 빠져들기때문에 그래서 생각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냥 실천을 해버립니다.
그럼 더 생각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서교수 : 그건 사고를 많이 친다는 얘기같은데?
경진 : 맞습니다. 근데 사고를 치고나면요. 그런 내 자신이 아주 싫어져요. 내가 싫다. 난 왜 이럴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니까
그 생각을 계속 하기 싫어서 다시 다른 일을 저질러버리는 겁니다.
서교수 : (웃는) 대단히 힘든 인생관이구만.
경진 : 그렇죠? 맞습니다 교수님. 저 아주 힘들어요.
서교수 : ... 뭐가. 공부가? 인생이?
경진 :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나같은 인간이 있거나말거나 세상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죽어도 지구운행엔 차질이 없을거고 물리법칙 또한 그대로일 것이며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태어날 겁니다.
서교수 : 그만 됐어. 그만하면 자네 생각의 흐름을 알겠다구.
경진 : 그렇죠? 이게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안 걸립니다. 그래서 빨리 뭔가 저질러야 되는데 갈길을 잃었습니다. 괴롭습니다.
서교수 : (웃으며 보다가) 민경진.
경진 : 예?
서교수 : 가끔은 괴로워도 괜찮아.
경진 : ...
서교수 : 어째서 괴로운 걸 피하려고만 하지? 세상의 모든 법칙은 고통 속에서 발견되는거야.
자네들이 지금 구구단처럼 외는 가장 쉬운 법칙도 처음엔 그렇게 발견됐어.
경진 : (멍해서 보는)
서교수 : 사람 사이도 그렇지 않을까. 상처받을 게 겁나서 피하기만 하면 결국 아무런 관계도 시작될 수가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경진 : ...그럴까요?
서교수 : 뭐. 자네가 고민하는 게 사람 관계라면 말이야. (웃는)
S#12. 민재, 정태의 방 / 밤
민재가 불을 켠다. 민재가 짐을 정리하느라고 어수선해져 있는 방.
민재의 책상 위는 컴퓨터만 달랑 놓여있고. 책꽂이는 비어있다. 방에 정태는 없다.
민재, 우두커니 서서 빈 방을 보고 있다가 걸어들어와 들고온 비닐 봉지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정태와 함께 마시려고 맥주들과 안주를 사왔었다.
S#13. 동아리 방 / 밤
대욱이 로봇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지민이 한쪽의 눈치를 보며 대욱을 끌고 나간다.
대욱 : 우리 먼저 갑니다.
지민 : 오빠. 안녕.
그들이 눈치보는 곳에는 정태가 침대에 누워서 두 팔을 베고 천장을 보고 있다. 대꾸도 없다.
애들 나가고 문이 닫긴다.
S#14. 지원/경진의 방 / 밤
자현이 가운데 퍼질러 앉아서 자동차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돌아본다.
경진이 비실비실 들어오고 있다.
지원은 세수 뒤의 로션 정도를 바르고 있다가..
지원 : 이제 오는거야?
경진 : 어... (자기 침대로 가서 털썩 엎드려 버리는)
자현 : 니 컴퓨터 좀 썼다. 내가 프로그램 몇 개 깔아놨는데.
경진 : 어.
자현 : 나중에 필요없으면 지워.
경진 : 어.
자현 : (지원에게) 얘 왜 이래. 나보다 말을 적게 하잖아.
지원 : (기웃해서 경진을 들여다보며) 어디 아프니?
경진 : 어.
지원 : 어디? 감기 든 거 아냐?
경진 : 가슴이 아파.
자현 : 엥. (떨어져 앉으며) 옮는 거 아냐. 감기냐? 전염성이야? 나 지금 아프면 안돼. 자동차 다 뜯어놨단 말야.
지원 : (경진을 보다가) 자현아.
자현 : 왜.
지원 : 얘 오늘 일찍 재우자. 그만 가봐.
자현 :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알았어. 야 민경진. 많이 아프면 낼 아침에 전화해. 내 후딱 가서 약 사다 줄게.
경진 : 어..
자현 나가고, 지원 스위치 쪽으로 가며.
지원 : 옷 안 갈아입을거야?
경진 : 어.
지원 : 불 끈다.
경진 : 어..
지원, 그런 경진을 보다가 불을 끈다.
S#15. 기숙사 앞 / 밤
민재가 혼자서 철봉을 하고 있다. 난이도를 높혀보다가 시들해서 철봉 위에 걸터 앉는다.
S#16. 동아리방 / 밤
불이 꺼져 있고. 침대 위는 비어있다.
어둠 속에서 모니터의 빛만 비추는데, 컴퓨터 앞에 늘어져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는 정태. 혼자 맥주 캔을 비우고 있다.
S#17. 캠퍼스 전경 / 새벽
그 위로 울리는 자명종 소리.
S#18. 지원의 방
지원, 잠에서 부시시 깨어나며 자명종을 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다가 보면 옆 침대에 경진이 어제의 옷 그대로 앉아있다.
지원 : 너 설마 그렇게 앉아서 밤 샌거야?
경진 : (멍해서) 사람이 어떻게 이러고 앉아서 밤을 샐 수가 있냐. 앉아서 생각하다가 졸고, 졸다가 좀 자고,
자다가 일어나 생각하고... 그랬지.
지원 : 무슨 생각을 그렇게 밤새고 해?
경진 : 지원아.
지원 : (자고난 이불을 단정히 펴며) 왜.
경진 : 만약에 내가 말이야. 나의 모든 자존심과 모든 프라이버시와 모든.. 모든 걸 다 버리고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했는데
거절을 당하면 말이야. 그래도 나 계속 이 지구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원 : (물끄러미 보다가) 그렇게 되면 나한테 와. 내가 술 사줄게.
경진 : (지원을 돌아본다)
지원 : 탕수육 안주하고 같이 사줄게. 그럼 살만하겠니?
경진 : (보다가 피히.. 웃는)
S#19. 이교수 랩
이교수, 다이어리를 들고 들어온다
테이블에 모여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하는 명환과 중희, 만수. 민재와 정태는 보이지 않는다.
이교수, 빈 책상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자리에 앉는다.
따라 앉는 아이들, 이교수의 눈치를 살핀다.
이교수 : (다이어리 펼치며) 지난 번 킥오프 미팅때 몇가지 지적사항이 있었지? 다 정리했어?
명환 : (자료 내밀며) 여기 있습니다.
이교수 : (받고) 우리쪽 자체 진단도 포함시켰니?
명환 : 일단, 업체쪽에서 요구하는 공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이교수 : 그래? (자료를 넘겨본다) 첫단추를 잘 꿰어야돼. 시작부터 괜한 꼬투리 잡히면 서로가 힘들어져.
명환 : 네.
만수,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교수의 심기를 살피고.
이교수 : 민재하고 정태는 당분간 랩에 안나오는거 알고 있지? (시선은 여전히 자료에 가 있다)
아이들 :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서로 얼굴만 보고)
이교수 : 어쩌면 아주 그만 둘 수도 있고. (고개 들고) 그러니까 니들끼리 업무분담을 잘해서 차질없게 진행하란 말이야.
명환 : 알겠습니다.
이교수,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아이들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자료에 옮긴다.
명환, 표정없이 복사물을 들여다보고 만수와 중희는 걱정스런 얼굴로 낮게 한숨을 내쉰다.
S#20. 박교수 연구실
어지럽게 자료가 쌓인 중간 테이블. 그 위로 들리는 요란한 댄스음악.
보면, 박교수가 자기 책상 뒤에 DDR 판을 놓고 모니터에 나오는 그림을 보며 신이 나서 스텝을 밟고 있다.
중간중간 팔동작까지 폼나게 해보면서..노크소리가 들리지만 못 듣는다.
문이 열리며 이교수가 들어서다가 어이없어 본다.
박교수 신나서 몸을 돌리다가 이교수를 발견한다. 어이구..해서 중지는 하는데 미련이 남아서 모니터를 봐가며..
박교수 : 어서 오세요. 햐아...근데 이거 보기보다 어렵네요. 어려워요.
이교수 : (참고 보는데)
박교수 : (영 음악을 끄지 못하고 몇번 더 겅중거리며) 한번 해보실래요? 제일 쉬운 모드로 놓고 하면 초보자도 할수 있는데.
이교수 : 죄송하지만 급한 게 아니면 그 음악 좀 꺼줄래요?
박교수 : 아.. 이거.. 그러죠뭐. (할수없이 끄는) 자 말씀하시죠.
이교수 :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요.
박교수 : 어이구 부탁이라뇨. 아무거나 시키기만 하세요. 뭐 할까요.
이교수 : 산에 가신다고 그러셨죠. 저번에.
박교수 : 아 지리산이요? 근데 아무도 같이 안간다고 해서..
이교수 : 학생 하나만 데려가 줄래요?
박교수 : 학생이요? 누구요. 아 맞다맞다. 저번에 그러셨다. 거기 보내고 싶은 학생이 하나 있다고. 누군데요?
이교수 : 데려가셔서 다른건 안해주셔도 되는데요. 저.. 그거 하나만 좀 가르쳐주셨으면 하고.
박교수 : 에. 전 산에서는 강의 안하는데.
이교수 : 강의를 해달라는 게 아니구요. 그때 말씀하셨던 거 있잖아요. 정상만 보고 올라가느라고 주변의 산을 못봤다...
뭐 그런 얘기. 그거 좀 그애한테 해줬으면 하는데요.
박교수 : .... (보다가) 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이교수 : 네?
박교수 : 산에는 같이 갈 수 있지만요. 뭘 봐라. 마라는 얘긴 못해요. 산은 보는 사람의 마음만큼밖에는 안 보이거든요.
마음이 좁은 사람한텐 요만큼, 마음이 좀 넓은 사람한텐 이마안큼만 보인다구요.
이교수 : .... (말을 잃었는데)
박교수 천진하게 웃어보인다.
S#21. 박교수 랩
남희, 정신이 없어서 보는 곳.
박교수가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며 손에 든 수첩에 생각나는 것마다 적어넣고 있다.
박교수 : 양념..양념... 라면도 가져갈까. 아냐아냐. 찌개에 밥 먹어야지. 그리고 양말도 하나 더. 그리고..
남희, 지원과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쉬어보인다.
지원, 웃고 작업한 종이들을 챙기는데 마이클이 민재를 끌고 들어온다.
마이클 : 사부님. 민재형 왔어요. 내가 찾아서 왔어요.
박교수 : 오오 그래. 잘했어. 수고했어.
민재 : (어리둥절해서 절하고) 부르셨습니까?
박교수 : 다름이 아니고 말이야. 민재군 요즘 하는 일도 없고 심심하대매.
민재 : ...예?
박교수 : 내일 나하구 같이 산에 가자고.
민재 : 산이요?
박교수 : 아무것도 준비할 거 없어. 그냥 몸만 와. 옷이나 따뜻하게 입고.
마이클 : 어어어. 그런거면 왜 마이클은 안 데려가요. 이거 너무해요.
박교수 : 어허. 넌 프로그램 정리해놓으란 것도 안해놨지.
마이클 : 오늘 밤에 다 해요. 다 할 수 있어요.
박교수 : 넌 아르바이트도 하잖아.
마이클 : 사장누나한테 얘기하면 되요.
박교수 : 그리고 넌 이민재가 아니잖아.
마이클 : 홧?
박교수 : 난 이민재하고 갈거야. 그러니까 마이클은 안되지. 그럼 민재군. 내일 새벽 여섯시..는 내가 힘들고
일곱시에 전산동 주차장에서 보자구.
민재 : (벙해있다가) 저어.. 전 내일 집에 내려가는데요.
박교수 : 아 그거 이삼일 늦는다구 전화드려. 자 그럼 다 됐지? 내일 봐.
민재 : 저 교수님.
박교수 : (벌써 돌아섰다가) 응?
민재 : 생각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박교수 : 고마운데?
민재 : 전.. 등산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겨울산은..
박교수 : 아 내가 다 알아서 아주 쉬운 코스로 갈거야. 걱정 마.
아니 근데 민재군은 농구도 잘하고 운동은 뭐든지 잘하는 걸로 아는데.
민재 : 산엔 가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박교수 : 아이구 잘됐네. 그럼 이게 처녀등정이 되는건가.
민재 : 그리고.. 별로 생각이 없는데요. 죄송합니다.
박교수 : (보는)
마이클과 남희 지원도 본다. 잠시 썰렁한 침묵이 있다가..
박교수 : 민재군.
민재 : 예 교수님.
박교수 : 내일 아침 일곱시 15분까지 기다릴게. 안오면 나 혼자 가야지 뭐. 근데 같이 가면 좋겠다. 자아.. 그럼..
(다시 수첩을 보며) 에구에구. 가스를 사야된다. 남희양.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박교수 부지런히 나간다. 민재, 미처 잡지도 못하고 어색해서 서있고.
남희, 얼른 시선을 돌려서 못 본척 해준다.
S#22. 복도
민재, 심난해서 걸어오는데 호출기 소리. 민재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 본다.
번호를 확인하고 주변의 공중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저만치 보이는 공중전화. 그 위로,
경진 : (E) 어이 이민재. 지금 바로 쪽문쪽으로 나와줘야겠어.
S#23. 쪽문 근처
자전거를 타고 온 민재가 내려서 두리번거리는 위로 계속.
경진 : (E) 에구 추워. 나 여기서 떨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랑 좀 나와. 얼른. 아이구 발시렵고 손시려워.
저만치 쪽문 뒤에서 동동거리며 서있는 경진이 보인다. 민재를 발견하자 한손을 번쩍 들어보인다.
S#24. 상점 건물 앞
학교 쪽문 근처 주택가.
앞장서 오는 경진, 담벼락 모퉁이 출입문 앞에 선다. 돌아보면 조금 떨어진 곳에 민재가 따라오고 있다.
경진 : 빨랑 와! 여기야, 다 왔다구!
민재, 올려다보면 1, 2층에 음식점이나 가게등이 있는 낡은 건물이다.
민재, 뜨악한 표정으로 경진을 보는데 경진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민재를 본다.
S#25. 지하실 창고
반층 높이에 있는 창문으로 볕이 들어오고 내부는 아무것도 없이 터엉 빈 공간이다.
한쪽에 간이 싱크대 정도가 달려있을 뿐인 내부.
계단을 내려오는 경진, 민재가 뒤따라 들어온다. 경진, 가운데로 나선다.
경진 : 어때. (기대에 차서 본다)
민재 : 뭐가 어떠냔 거야.
경진 : 봐봐. 이렇게 넓고 자유롭고 멋진 공간은 절대로 못 찾을걸. 학교도 가깝지. 여기 싱크대에 물도 나오지.
바로 저 문밖에 화장실도 있지. 그리고..
민재 : 경진아.
경진 : 내가 지난 일주일내내 돌아다녀서 구한거야. 어때?
민재 : 이거 혹시 나 땜에 구한거냐?
경진 : 어.
민재 : (보다 어이없어 웃는) 너 지금 뭐하는거야.
경진 : 방 보여주고 있잖아. 이거 진짜 운이 좋았어. 딱 6개월동안 세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조건이 맞는 사람을 못 구하고 있었대.
그래서 무지싸게 얻었어. 너 어차피 대학원 붙으면 기숙사 들어갈거잖아. 그러니까 한학기만 여기서 잘 버티면된다 이거지.
민재 : (슬슬 화가 나는) 민경진.
경진 : (구석으로 가며) 잠깐만... 기다려봐. 여기다 뒀는데...
경진, 구석에서 포스터 패널을 찾아서 보여준다. 별사진이다.
경진 : 짜잔. 이 포스터 멋지지? 내가 제일 아끼는 걸루 갖다 놓은거야. 너무 넓으니까 썰렁하잖아. 이거 붙여놔. 엇다 붙일까.
(벽을 둘러보는데)
민재 : (버럭) 야! 민경진!
경진 : 깜짝이야. 왜 소릴 질러. 안그래도 잘 들리는데.
민재 : 너 왜 그렇게 나를 우습게 보니?
경진 : ...내가? 내가 언제.
민재 : 너한테 몇번씩 부탁했었지.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두라고. 그랬어 안그랬어.
경진 : ...그랬어.
민재 : 내가 휴학을 한다는 거 너한텐 웃기게 들렸어? 내가 그냥 사춘기 애처럼 유치하게 구는 거라고 봤어?
그래서 무시하기로 한거야?
경진 : ...
민재 : 내가 그냥 웃고 있으니까 한번 잘 달래보자 그런거야? 그럼 말 들을거다 그렇게 생각한거냐고.
니들한텐 유치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난 심각해.
경진 : ..나도 심각해.
민재 : 아니. 너한텐 심각한 게 하나도 없어. 언제나 그렇잖아. 세상 모든 게 다 장난으로 보이지?
넌 지금... (방의 공간을 가르키며) 이래놓고 재밌냐? 재밌어?
민재, 제 분에 못이겨 서성거리다가 문쪽(계단쪽)으로 가는데.
경진 : 재미없어. 난, 전재산을 다 걸었는걸.
민재 : (돌아본다)
경진 : (우울하다) 벌써 계약 끝냈어. 니 이름으로 계약했어. 보증금도 다 내고.
민재 : 뭐야?
경진 : 사실은 여기 계약한 거 벌써 며칠 됐어. 니가 나 밥사준 날. 그날. 벌써..
민재 : ..그럼 니가 쓸데없는데 니 저금 다 써버렸다는 게.. 여기 보증금을 낸거야?
경진 : (끄덕이는)
민재 : (어처구니가 없다가) 내놔.
경진 : ..뭘.
민재 : 계약서 내놔. 내가 갖구가서 도로 계약금 찾아 줄테니까. 됐지?
경진, 우울하게 바닥만 보다가 주머니에서 계약서가 든 봉투를 꺼낸다.
민재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경진 : 그래도 포기 안해.
민재 : (여전히 화가 안풀려서) 뭐?
경진 : 진짜 드럽구 치사하지만.. 사람 좋아하는 게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인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포기 안해.
경진, 계약서 봉투를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민재를 스쳐 나가버린다.
민재, 멍청이 섰다가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 봉투를 집어든다. 그러다 후딱 문을 돌아본다.
그제야 경진이 한 말이 좀 이해가 되었다. 민재 정말로 황당해졌다.
S#26. 쪽문 근처
달려온 민재,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오가는 학생들 중에 경진은 보이지 않는다.
S#27. 노천극장 근처
민재,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두리번거리며 극장쪽으로..
S#28. 노천극장
입구 쪽으로 들어선 민재, 계단좌석쪽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돌아서는데..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
경진 : (E) 뭘 보냐?
민재 움찔해서 무대 쪽을 본다. 사각이라 아직은 보이지 않는 무대쪽.
민재 슬그머니 다가서서 기웃하여 무대쪽을 보면 경진이 민재쪽에 등을 보인 자세로 한쪽 기둥을 보고 말을 하고 있다.
경진 : 사람 성질난 거 처음 봐? 너! (다른 기둥 손가락질하며) 그리고 너! 웃지 마. 나 지금 기분 드러우니까 니들 다 웃지 마.
민재, 몸을 가린 채 나서지 못하고 숨어 보고 있다.
이제 경진은 좌석계단을 향해 돌아선다.
경진 : 그래. 나두 알고 있었어. 이렇게 될 줄 나도 알았다고. 입 밖에 내는 순간 모든 게 다 박살이 날 줄 알았대니까.
근데... 그래도 너무 허무하다. (멍하니 허공을 보는)
민재 : (난처해서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경진 : (흠흠 기침을 하더니) 그럼 민경진의 짝사랑이 박살 난 기념으로 노래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조금씩 울먹이고 있다. 그래도 힘을 내어 두 손을 모으고 목을 가다듬고 그리고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소절 못 부르고 목이 메어 그만둔다. 울먹이다가.
경진 : 아아.. 아.. 이거 너무 추워서 잘 안되는군요. 이대로 기숙사까지 순간이동을 하고 싶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노래를 다시 부른다. 눈물을 닦으며.
숨어있는 민재. 난감하고, 괴롭고, 당황하고..
S#29. 처장실 앞 복도
박교수, 허겁지겁 달려온다.
처장실 앞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가 에그..해서 다시 닫고 노크를 한다.
S#30. 처장실
처장 아연해서 보는..
처장 : 뭐라구요. 세미나에 참석을 못해요?
박교수 : (그 앞에 앉아있다) 네. 못하게 됐습니다.
처장 :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세미나가 바로 모레잖아요. 박교수께서 준비를 하신거구요.
박교수 : 그렇죠. 제가 준비를 해왔죠.
처장 : 열두개 대학에서 모이는 건데 그럼 그 분들은 누가 접대를 합니까?
박교수 : 제가 다 조치를 해놨습니다. 우리 과의 양교수님께서도 도와 주신다고 했구요. 전자과에 이교수님도 도와주실 거구요.
그리고 물리과에 서교수도..
처장 : 잠깐만요. 이건 전산과의 보안관계 세미난데 다른 과 교수님들이 뭘 도와주신다는 거에요?
박교수 : 모르죠. 하여간 제가 있으나 없으나 전혀 상관없을 정도로 준비는 다 되어있습니다. 믿어주십쇼.
처장 : (어이없어.. ) 박교수.
박교수 : 네. 듣고 있습니다.
처장 : 도대체 그렇게 중요한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뭡니까.
박교수 : (따라서 진지하게) 처장님. 세상에는 중요한 일의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더 중요한 거. 쪼끔 덜 중요한 거. 그렇지요?
처장 : 글세 뭐가 그렇게 더 중요하냐구요.
박교수 : 이번 세미나에서 저의 역할은 어서 오십쇼.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이러면서 안내를 하는 겁니다.
처장 : 그게 그냥 안내가 아니잖아요. 주최학교의 대표교수역인데.
박교수 : 바로 그렇습니다. 주최학교의 대표역. 이게 더 중요하냐. 아니면 한 젊은이의 인생이 더 중요하냐.
이게 문제의 포인트입니다.
처장 : 한 젊은이의 인생이라니요.
박교수 : 저는 명색이 교숩니다. 다른 학교 교수님들과 악수를 나누는 것보다는 내 연구가 더 중요하고.
내 연구보다는 내 제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장 : ...그래서요?
박교수 :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등산화를 한 켤레 사러 가야 됩니다.
처장 : 뭘 사러 가요?
박교수 : 보나마나 그 제자는 등산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어서더니 정중히 절을 하고)
저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문쪽으로 가는 박교수를 아연해서 보고 있는 처장.
S#31. 처장실 밖 복도
정중하게 나온 박교수, 문을 닫는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우흐흐..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보인다.
S#32. 캠퍼스 / 밤
겨울의 밤 교정. 이곳저곳.. 불켜진 건물 하나..둘..
S#33. 동아리방
정태가 혼자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 몸체가 없는 로봇을 하나 올려놓고 이리저리 밀어보고 있다.
그러는데 노크소리.
정태 : (돌아보지도 않고) 예에..
문이 열리며 지원이 들어온다. 정태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다.
지원 : 오늘도 여기서 잘거야?
정태 : (그제야 놀라 돌아보고) 어.. 웬일이야.
지원 : 그냥..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어서.
정태 : (웃고 일어나서 의자를 밀어준다)
지원 : (앉고)
정태 : (선 채로 어색해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지원 : 애들 말로는 너 계속 여기서 산다며.
정태 : 그게.. 만사가 귀찮네. (저만치 있던 의자를 들들 끌어와 대충 거꾸로 걸터앉는다)
지원 : 여행 안가?
정태 : 그것두 귀찮고.. (웃는)
지원 : 내일쯤 산에 가보지 그래?
정태 : 글세..
지원 : 내일 아침 일곱시. 전산동 앞의 주차장에 가면 산에 가는 팀이 있는데.
정태 : (건성으로) 그래?
지원 : 박교수님하고 민재하고 산에 간대.
정태 : (보는)
지원 : 박교수님이 먼저 민재한테 같이 가자고 하셨어. 그랬더니 민재는 생각없다고 했고.
정태 : 민재가? 교수님이 가자는데 싫다고 했다고?
지원 :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민재는 교수님 말을 거역할 애가 아니니까.
정태 : ...그렇지.
지원 : 그러니까 아마 올거야. 사람이란 이제까지 살아온 습관을 그렇게 금방 바꿀 수 없잖아.
정태 : ...그렇겠군.
지원 : 같이 가.
정태 :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젓는) 보기 싫어. 민재 그녀석. 보기만 하면 속이 터져.
지원 : 느네 아직 제대로 못 싸웠잖아.
정태 : ....
지원 : 나중에 얘기해줘. 둘 중에 누가 더 맞았는지.
정태 : (지원을 보면)
지원 : (미소를 감추고 딴 데를 본다)
S#34. 전산동 앞 / 이른 아침
이른 아침이라서 인적이 드문데.. 박교수의 차가 요란하게 와서 주차장에 선다.
완전한 (혹은 요란한) 등산복 차림의 박교수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연방 털모자를 눌러쓰며 주위를 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건물 입구에서 나오는 정태. 작은 배낭을 메고 등산복 차림이다. 박교수에게 꾸벅 절을 하더니.
정태 : 끼워주실까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교수 : 에잉 정태군도?
정태 : 예 제가 먹을 건 다 챙겨왔습니다.
박교수 : 요리에 설거지도 할건가?
정태 : 물론입니다.
박교수 : 좋아좋아. 붙어. 근데 이 친군 안 올건가? (시계를 보는데)
정태 : 저기 오는데요.
돌아보면, 민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평소의 파카 차림에 배낭을 메고 있다.
정태를 보고 멈칫하다가 박교수에게 인사를 한다.
박교수 : 정확하군. 일곱시 일분 전이야. 자 일행이 하나 늘었어. 가자구.
아침은 가는 길에 사먹고. 점심은.. 에.. 어디서 먹을까.. 아아아.. 짐부터 실어야지.
박교수 부지런히 차 뒤의 트렁크를 열러 간다.
민재 : 오랜만이다.
정태 : 그래.
잠시 어색하게 마주섰는데.
박교수 : 아 뭣들 해. 빨랑 짐 실어. 겨울해는 짧다구.
S#35. 교정
달려가는 박교수의 차. 동반석에는 민재가 뒤에는 정태가 타고 있다.
S#36. 석학의 집
아침, 아직 문 열기 전 시간.
진영과 마이클이 헤벌레해서 구경을 하는데 백곰이 중앙에 서서 가곡을 부르고 있다.
백곰 :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 철따라아 고운 옷 갈아입는 산..
미순이 출근을 해서 들어오다가 백곰을 보고 기가 막혀서.
미순 : 이거 보세요. 여보십시다.
백곰 : (노래를 부르다가 언짢아서 돌아본다) 지금 한참 클라이막슨데..
미순 : 아니 남의 문도 안 연 가게에 와서 웬 아침부터 금강산이에요?
백곰 :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모르세요 이 노래?
진영 : 산 얘기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미순 : 글세 왜 아침부터 산이냐고. 느들은 청소도 안하고 산소리가 나오냐.
마이클 : 아이 사장누나. 우리 사부님하고 민재형하고 산에 갔어요. 나는 안 데리고 갔어요.
미순 : 민재가?
백곰 : 산. 그것도 겨울산. 이건 바로 사나이들의 세곕니다. 그런 뜻에서 미순씨. 우린 온천이 나오는 산이라도..
미순 : (무시하고 마이클에게) 민재가 산에는 왜 가. 지금 휴학을 하니마니 지정신이 아닌 애가.
마이클 : 그래서 갔어요. 우리 교수님이 그래서 데리고 갔다구요.
미순 : 왜. 민재가 절에 들어가겠단 소리라도 한게야?
진영 : 어유 언니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정신없이 하세요.
미순 : 내 안그래도 오늘은 민재 불러다가 술이라도 멕여볼까했는데...
백곰 : (미순의 말을 자르며 가곡조로) 산할아버지이.. 구름모자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라서..
미순, 으이그해서 보는..
S#37. 산. 등정로 입구
그곳에서 보이는 산세..
입구 이만치에 주차장이 있고 박교수의 차가 세워져 있고 정태와 민재가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고 있다.
박교수는 옆에서 심호흡을 해가며 기분이 아주 좋아있고.
박교수 : 지리산은 아니지만 오늘은 민재의 첫산행이니까 이정도 산으로 시작해보자고. 자 다들 올라갈 준비가 됐나?
정태 : 예.
민재, 배낭을 메려고 하는데.
박교수 : 잠깐잠깐 민재군.
민재 : 예?
박교수 : 그 신발을 신고 갈건가?
민재 자기 발을 내려다보면 운동화다. 민재 옆을 본다. 정태는 등산화 차림이다.
박교수 : 언제나 산을 대할 땐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준비와 예의를 갖춰야 되는 법. 가만 있자.. 내 트렁크에 굴러 다니는
등산화가 하나 있었는데. (트렁크를 뒤지더니 새등산화 한 켤레를 꺼내서 내준다) 신어봐. 대충 맞을거야.
민재 : (받아들어 보다가..) 이건 새건데요?
박교수 : 그래? 거기 왜 새것이 있을까. 정태군. 등산양말 남는 거 있지?
정태 : 예.
박교수 : 그거 빌려줘. 면양말 위에 덧신으면 되고.
정태, 배낭을 풀기 시작한다.
박교수 : 민재군.
민재 : 예.
박교수 : 어째서 산에는 한번도 안와봤지?
민재 : ...그냥.. 별 의미를 못 느꼈습니다.
박교수 : 어떤 부분에서?
민재 : 글세요. 정상에 오른다는 게.. 어떤 뜻이 있는지.. 운동이라면 가까운데서도 할 수 있으니까.
박교수 : 그래. 그럼 오늘은 무조건 정상까지 가는거야.
정태 : 정상까지요?
박교수 : 정태군은 이 산에 몇번 와봤대니까 안내를 해. 민재군은 잘 따라가도록 하고. 그리고 난 여기서 쉴거야.
음악을 들으면서.. 이렇게 바람을 맞으면서..
정태 : 교수님은 안 올라가시게요?
박교수 : 그렇지. 난 오늘 산의 요 부분을 보러 왔어. 이렇게 중턱에 앉아서 보이는 요만큼의 부분.
민재 : 저도 꼭 정상에 올라 갈 생각은 없는데요.
박교수 : 어허. 자넨 아직 중턱에서 즐길 군번이 못되요. 나처럼 정상까지 허덕허덕 올라가보고..
그리고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뼈저리게 느낀 사람만이 이렇게 중간에서 즐길 수 있는거야.
민재 : (보는)
박교수 : 자아 그럼 이따 보자구. 저녁 먹기 전까진 와야 돼. 배고프면 나 먼저 먹는다.
박교수, 두 팔을 활개치며 어슬렁거리며 저리로 간다.
정태. 민재에게 등산양말을 건넨다. 민재, 받아든다. 그리고 좀 한심한 기분에서 산을 올려다본다.
거기 있는 산.
S#38. 등산로1
정태가 앞서서. 두어걸음 뒤에서 민재가 따라올라오고 있다.
정태, 걸으며 뒤를 돌아보면 민재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S#39. 등산로2
정태가 먼저 올라온다. 뒤를 돌아본다. 민재가 보이지 않는다. 정태, 멈춰서 기다린다.
잠시 후 민재가 올라오고 있는데.. 서툰 산행길이라서 벌써 지쳐있다. 미끄러지며 뭔가를 잡고 겨우 발걸음을 옮긴다.
정태가 멈춰선 옆까지 와서도 멈추지 않고 지나쳐 간다.
정태 : 쉬었다 갈래?
민재 : 좀 더 가서 쉬지뭐. 아직 반도 못 온 거잖아.
정태 : 급할 거 없어. 산은 어디 도망가지 않는다구.
그 말에 민재 멈춘다. 허리를 펴고 거친 숨을 쉬며 앞으로 남은 길을 본다.
S#40. 등산로 3
등산로에서 벗어난 양지녘. 정태가 먼저 주저앉는다.
민재, 배낭을 벗으려고 하는데..
정태 : 쉴때는 되도록 배낭을 벗지 않는 게 좋아.
민재 : (멈춰 보는)
정태 : 그냥 메구 앉아서 기대. 벗어놓으면 나중에 일어설 때 더 힘들어.
민재 : (배낭을 멘 채로 정태의 옆에 앉는다)
그렇게 각자 앞을 보고 있다가.
민재 : 왜 따라왔냐?
정태 : 패주려고.
민재 : 날?
정태 : 그래. 어디 적당한 장소 잡아서 죽게 패주고 싶어서.
민재 : (웃고..) 여긴 어때. 아무도 없고 조용하잖아. 죽게 맞아줄 수 있는데.
정태 : 어쭈.
민재 : 지금은 기운도 없어서 반항도 못할거야.
정태 : 체.. (김새서 앞을 보다가) 패서 될 놈이면 벌써 팼지.
민재 : 그렇게 한심해 보였냐. 내가?
정태 : 니 옆에 있는 내가 더 한심해보였어.
민재 : (돌아본다)
정태 : (민재를 보지 않고) 내 딴엔 할만큼 다 해봤거든. 너보다 내가 먼저 랩을 그만두고 너보다 내가 먼저 휴학을 해버리면..
그럼 니가 얼만큼은 다시 생각해볼 줄 알았어. 너. ..완전 나쁜 놈. 눈썹 하나 까딱 안하드만.
민재 : ...그래.
정태 :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그때도 여기 왔었다. 나 전에 학교에서 도망쳤을 때.
민재 : (따라 둘러본다) 그랬냐.
정태 : 그 때 정말 드럽게 외롭드라. 그래선가. ...니 생각했다. 여기 어디쯤에서. ...민재놈이 옆에 있었음 좋겠다..
같이 앉아서 술이나 퍼마셨음 좋겠다.. 그런 생각.
민재 : (좀 울컥하는 기분. 말없이..)
정태 : 나한텐 말이지. 민재 니가 베이스 캠프였나봐. 어딜 헤메구 다녀도 너 있는데만 돌아가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런 기분 있지.
민재 : (아무 말 못하는..)
정태 : 그래서 니가 헤메는 걸 보면 화가 나는거야. 난 헤메도 되지만 넌 안돼. 날 위해서 그래.
민재 : (잠시 말이 없다가) 그게 내 문제였어. 이제 좀 알겠어.
정태 : 니 문제가 한두개냐.
민재 : 난.. 언제부턴가 나를 하나 설정해놓고 살아온 거 같아. 남들한테 보이는 나 말이야. 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잘난척하고..
적당히 모범생인 나.
정태 : 넌 태어날 때부터 그런 놈이야.
민재 : 나도 그런 줄 알았어. 난 말이지. 내 인생에 탈선이란 건 절대로 한번도 없을 줄 알았어.
그래서 사실은.. 나.. 느이들을 좀 얕잡아보고 살았어.
정태 : (보는)
민재 : 느이들이 좀 우스웠어. 정태 넌 머리는 나보다 좀 좋을지 몰라도 사는 게 제멋대로다. 지원이도 경진이도 다른 애들도 다..
나보다 어리거나 뭔가가 모자란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제일 먼저 꼭대기에 올라가는 건 내가 될거다.
정태 : ... (헛기침을 하고) 고해성사같은 건 안해도 돼. 나중에 말한 거 후회할거면 하지 마.
민재 : 이 정도로 후회한다면 난 진짜 못난 놈이지. 나보다 더한 고백을 하고 그리고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 놈도 있는 걸.
정태 : 뭔 소리야.
민재 : 있어. 그런놈이. 나보다 열배쯤 용기있고..그리고..절대 포기할 줄 모르는 놈이. 나는 언제나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나..
그걸 신경쓰고 살아왔는데 말야. 그 놈은 반대야. 남을 위해서라면 내가 어떻게 보여도 상관없다. 그런 식이거든.
그래서 아주 날.. 부끄럽게 만들었어. 그 놈이.
정태, 보는데 민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민재 : 가자. 이쪽으로 가면 되나.
정태 : (따라 일어선다. 먼저 걷기 시작하는 민재를 보다가) 이민재.
민재 : 왜.
정태 : 헤메지 마.
민재 : (멈춰 선다)
정태 : (그 등에 대고) 계속 날 얕잡아봐도 좋으니까 좀 더 베이스 캠프가 되줘라. 어?
민재 :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태 : 야 이 망할놈아. 내 말 좀 들어.
그러나 민재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계속 걸어간다. 정태 보고 있다.
멀어지는 민재의 모습 위로 양희은의 '봉우리' 노래의 서곡이 시작된다..
S#41. 등산로 4
노래 계속되고..
갈림길이다. 먼저 도착한 민재가 잠시 망설이다가 왼쪽으로 접어든다.
민재의 모습이 사라지고.. 잠시 후 정태가 도착한다. 정태는 생각할 것 없이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S#42. 등산로 5
노래는 계속...
정태 점점 걸음을 빨리하며 걸어오고 있다. 앞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며 걷는다. 민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S#43. 등산로 6
민재 혼자서 걸어오고 있다. 길은 이제 거의 끊어져서 걷기가 불편한 곳이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아 쌓인 눈에 빠진다거나.. 미끄러지려다 겨우 나무를 잡고 지탱한다거나...)
S#44. 등산로 7
정태 헉헉대며 뛰어올라가다가 두리번거리고 다시 길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S#45. 등산로 8
민재, 길 없는 곳을 헤쳐나가다가 그대로 미끄러진다. 보이지 않는 옆이 비탈길이었다.
비탈길을 굴러 엎어지며 미끄러지다가 멈춘다. 일어서려다가 에라.. 그냥 누워버린다.
누운 곳에서 보는 하늘.. 나뭇가지.... 등... 노래 계속되고..
S#46. 등산로 9
정태가 다급해서 길을 살피며 오고 있다. 좀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위를 살피다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정태 : 이민재.. 야 이 자식아. 너 어딨어. 이민재...
S#47. 등산로 8
누워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민재, 팔을 치운다.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들리는 정태의 목소리.
정태 : (E) 이민재애.... 대답 안해... 이민재...
민재 좀 웃는 거 같더니 끄응 몸을 일으켜 앉는다. 정태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민재 무거운 배낭을 추스리며 일어선다. 몸에 묻은 흙을 털고..
그 때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정태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태 : (E) 이민재. 야 이 놈아. 대답해애..
민재, 얼굴을 부비고 그리고 위를 향해 소리지른다.
민재 : 김정태.. 여기다 여기.. 나 여기 있다구우..
그렇게 소리지르고 난 민재, 울듯한 얼굴로 그러나 미소짓는다.
노래 크게 오르고...
민재의 등 뒤로.. 첩첩 산중....
*출처 : 대본과시나리오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