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28~30.
첫쨋날.(2006.07.28.)(금산)
장마 초기엔 남쪽이, 후반부엔 경기 북부와 강원도가 수마에 휩쓸려 난리인데
그나마 피서를 가 주어야 강원도가 도움 받겠다지만
28일 아침에도 계속 비가쏟아지나, 남쪽에는 날이 개었다니 남으로 간다.
28일 아침 7시반 떠나는데 와이퍼를 제일 빠르게 해도, 차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라-
이런 상황에도 집을 떠나야 하나, 하는 심란스런 마음으로 비속을 전진한다
평소 과속 카메라만 피하면 백이삼십으로 가던길을 칠팔십으로... 그래도 빠른것 같다.
옥산 휴게소 부터 비는 그쳤으나 구간구간 간간히 빗발이 내린다.
가면서도 딱히 정해진 일정도 아니다 보니 웅석봉 올라 지리산 조망 할까?
이럴까 저럴까 ? 궁리들을 하며 가다보니,삼천포로 빠진다
창선 삼천포대교를 건너남해 창선도로 들어선다
3개의섬을 5개의다리로 연결했으며,
5개의 다리가모두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졌단다
지족해협의 멸치잡이 죽방렴 도 구경하며, 그림같은 경치에 발길이 더뎌진다
우리나라에서 달리고 싶은 길 중 하나라 하더니, 과연 명불 허전이다
처가 어디에선가 본 우리식당을 찾아가니 작고 초라 하지만
멸치 회무침이 있어 맛있게 먹는데 갈치회도 보인다.
다음에는 갈치회를 먹어야지 !!!
해안 경치에 취해서 가다 쉬다 하다보니,오른편에 금산의 수려한 모습이 나타난다
오늘은 가볍게 드라이브나 하며 다랭이 마을에 가 일찍 쉬려했지만,
지난번 왔다가 구름속에묻혀 제대로 금산 조망을 못한 아내가 山 欲心이 발동하나 보다
남해 금산(錦山 701m).
이성계가 치성을 드리며 왕이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두르겠다 하였으나
즉위 후 비단으로 두르려니 비용이 많이 들겠어서 신하의 건의로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내려
금산이라 하였단다.
오후 3시 50분 금산 매표소에서 등산 시작이다.주차요금 4천원,
오후니까 2천원만 하자니 들은체도 않는다.
입장료 천육백원씩.
오르기전 하늘도 맑고 푸르러, 전에 안개 구름때문에 조망을 못 본 처는,
오늘은 조망이 좋겠다며 좋아한다.
무더운 오후라 그런지 작년 포항 내연산 오를때 처럼 힘드는데 쉼터는 왜 그리 많은지
한 두구비 돌때 마다 통나무 반쪽에 누런 페인트 칠한 의자가 유혹하여 엉덩이와 등으로
인사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길은 계단길이고 호젓하여 사람도 별로 없어 좋은데 왜이리 힘드는지!
아마도, 생각지도 않은 산행으로 가볍게 여기고 오르기 때문에인가 보다
중턱쯤에 샘이 있지만 음용불가라 하여 세수만 하고 올라간다.
한동안 오르니 갑짜기 해골 같은 거대한 바위, 쌍홍문(雙虹門)이다.
언듯 보면 영락없는 콧날이 반듯한 해골의 눈구멍 같다.
쌍홍문부터 산죽이 많고 산죽 보다 키가 큰 시누리대도 많다.
"由虹門 上錦山"(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에 오른다.)라는 주세붕의 글처럼,
쌍홍문은 금산 38경중의 제일경이라 해도 되겠으나 제15 경이란다.
옛날 석가세존께서 돌배(石舟)를 만들어 타고 이 쌍홍문의 우측으로 나가 먼 앞바다의
세존도(世尊島)의 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큰 해상 동굴이 만들어 졌다고 전해져 온다.
맑고 맑던 날씨가 갑자기 안개 구름이 몰려와 백여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쌍홍문의 해골 눈구멍 같은 곳도 흐릿하고, 바로 옆의 사선대(四仙臺)바위도 흐릿하니
아래쪽 바다야 보일리도 없어, 처는 이번에도 조망을 못 보게 됐다며,
伏중 한낮에 구슬땀을 흘리며 올라 온것을 억울해 한다
여기도 지리 천황봉 처럼 삼대가 공덕을 더 쌓아야 하려나.....
오른쪽 바위는장군이 칼을 짚고 東을 향하여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장군암(將軍岩)이라 하였으며
錦山의 첫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장군이라 하여 수문장 이라고도 한단다.
쌍홍문 지나 조금 오르면 보리암(菩提庵)이 있고 신라 신문왕 3년(683년)에 기도처로
창건 되었고 보리암은 기도 효혐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에서 물마시고, 물이 부족한 곳이라 작은 물병에 물 담아 봉수대로 오르는데
곧 금산의 최고봉인 봉수대다.
조선조때 왜구의 침략을 속히 알리기 위하여 봉수대를 쌓았다 하며
높은곳이라 안개구름만 아니면 다도해 조망이 빼어 나겠으나 보이는데가 없다.
하산하며 화엄봉, 단군성전은 사진을 찍지 말라는 부인이 있었고,
상사바위 가는길에 들깨잎을 한잎 따 냄새 맡은 처는 향이 기가 막히게 좋다 한다.
짙은 안개(濃霧)때문에 우리가 본게 상사바윈지 모르겠다.흔들바위도,
이리저리 다녔으되 제대로 본것 같지도 않으니 괘씸한 안개로다.
올랐던 길로 내려와 오후 7시 10분에 산행을 마쳤다.
앵강만 부근의 전복죽 으로 소문난 집을 찾아야 하는데
이리 저리 헤매어 8시 반 지나 죽집에 가니
이름난 집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아 기다려 9시 반이나 되어 저녁 먹고
설흘산 자락의 다랭이 마을 민박집에서 고단하고 긴 휴가 첫날을 마친다.(2006.07.28)
둘쨋날(2006.07.29.)(설흘산,응봉산)
가천 다랭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계단식으로 다닥다닥 붙은 논밭으로
우리 선조들의 바지런함과 억척스로움이 눈물 겨웁다
하지만 바다를 향해 요리조리 자리잡고 새파랗게 자라는 벼가 자라는 논은
그대로 그림이된다
처랑 암수바위 찾아가니 남자 성기모양과 임신부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고,
숫바위를 숫미륵, 암바위를 암미륵 이라고도 하며
유래는 조선조 영조27년(1751년)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에따라 땅에 묻힌
암수 바위를 꺼내어 미륵불로 모시고 논 다섯 마지기를 위토로 하여
매년 바위 발견날인 음력 10월23일 제사를 지낸단다.
원래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으나 바닷가이다 보니 풍어도 빌고 있다.
민박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8시쯤 등산로 입구에 다달은다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치올라 왼쪽은 응봉산, 오른쪽은 설흘산.
먼저 설흘산으로, 처는 앞서가고 아들을 기다려 천천히 따라 간다.
양편으로 숲이있어 그늘길이고, 설흘산 북쪽 사면을 돌아 삼거리에 오니
위에서 남녀 네사람이 내려오고 설흘산 봉수대 백미터라 표시 되어 있다.
설흘산(488m)봉수대는 3m 정도 높이의 잡석으로 쌓았고 가천 다랑이 마을과 그 앞의 바다가 잘 보이고
뒤로도 앵강만 바다가 두루 잘 보인다.
곳곳에 떠있는 섬을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왔던길로 되내려와 응봉산 으로 가는데 왼편으로 육조문 가는길이다.
육조문은 무슨 문인지 궁금 하지만 직진하여 응봉산으로 간다.
응봉산 안부에서 응봉산정상(472.7m) 까지의 오름도 제법 가파르고 여름철에 그늘없어 힘들다.
하지만 설흘산과 달리 바위가 어울러진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정상에서 시원한 물 마시고 아들은 차량 회수하여 날머리인 선구 마을로 오라고
서로 헤어져 우리만 계속 진행이다.
응봉산 내려와 다음 봉에 올라 가니 아들이 소리쳐 부른다.
아직도 응봉산 에서 안 내려가고 쉬고 있나보다.
물고기 등뼈 같다는 표현과 공룡의 등 같다는 표현처럼 왼편은 바다,
오른편 건너의 산 능선 사이에 푸른 지붕의 그림 같은 마을을 좌우로 조망 하며
10시에서 11시 방향으로 멀리 여수 반도를 바라 보며 날등을 지나는 아슬아슬한 진행에
자주 나타나는 원추리꽃 가끔 보이는나리꽃 싸리꽃.....
아름다운 경치에 더운 줄 모르고 놀며 쉬며 간다
게가 두 앞발을 벌린것 같은 방파제의 작은 항구 뒤로는 야산이 게의 등딱지 같은 항촌마을도
아름답게 보인다.
위험한 구간 한곳은 나무 말뚝에 나무계단을 만든곳이 있고 날등을 걸으며 끝까지 가니
선구 마을이 보이지만 수직절벽이라 이리저리 길 찾으니, 왼편으로 국제신문 리본이 보여
힘들게 내려오니 오른편으로 마을이 조망 된다.
바람 부는 시원한 그늘 있으면 쉬려고 계속 걸어도 그런곳이 안 나타나 할수 없이 바위에 앉아
처를 기다리니 나타난 처가 물 마시라며 물병을 준다. 물도 동이나고.
선구마을이 보이는데 한참을 더 걸어야 되겠다.
드디어 선구마을 보건진료소 그옆에 커다란 몇그루의 느티나무와 왼편의 펜션.
자동차와 아들을 만나 오늘 산행 끝이다.
바닷가의 횟집에서 모듬회로 점심, 몽돌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다
끝.
첫댓글 한국의 산하(네이버 등등) 에서 링크한 사진은 다음카페에서는 배꼽으로 나오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포토포토에서 링크하시거나 다음카페에서 직접 링크하셔야 사진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