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culture)는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 등을 뜻하는 라틴어(colore)에서 유래했다. 문화란 자연(nature) 상태의 사물에 인간이 작용을 가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을 의미한다. 즉 문화는 사회성원들의 공통된 생활양식, 행동양식을 의미하며 자연, 본능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에 전파된 대표적 외래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를 들 수 있다. 우리 국토는 대륙과 해양의 반도적(半島的) 위치로 육로와 연결된 불교가 먼저 들어왔다. 불교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삼국 가운데 불교의 공인이 가장 늦은 나라는 신라였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는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여 그것이 점차 확고한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므로 불교수용에 따른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이 없었다. 삼국은 이렇게 왕실이 먼저 불교를 받아들여 우선 백성의 통합과 정치의 근간을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고 실천하는 모토(motto)로 삼았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공통분모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토속(土俗) 신앙은 농경문화(農耕文化)를 바탕으로 한 샤머니즘(shaman-무속적)이 강한 토속 종교와 갈등을 무마하려는 초창기의 불교 종교문화융합이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이 있다. 우리 민족은 땅에는 토지신 즉 산신(山神)을 하늘에는 천신(天神) 바로 칠성신(七星神)을 모셔 무병장수(無病長壽)와 가택평안(家宅平安)을 기원했다. 이 토속 신앙의 대립을 융합하는 차원에서 불교 발상지인 인도나 전래지인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불교 문화융합으로는 사찰 내 대웅전 뒤뜰에 산신각(당) 그리고 칠성각(당)을 세워 불국토사상과 호국 불교사상이 지배했던 삼국시대에도 종교문화의 융합성을 보여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집중하는데 종교 문화의 융합을 잘한 결과라고 본다. 이렇게 삼국시대 불교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전략(戰略)적 성격도 있었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개신교의 활동은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 아니어서 직접적으로 선교하기보다는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개신교를 통해 유입된 근대문명은 유교적 가치관과 사회질서에 묶여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전통 관념인 부부유별(夫婦有別)과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남녀평등사상을 역행하는 개념으로 이 시대에 도입된 기독교는 국민 정서에 부합을 입증한 교회가 우리 지역사회에 건립된 익산의 ‘두동교회’와 김제의 ‘금산교회’가 있다. 두 교회는 건축양식의 설계 의도는 남녀유별의 유교 관습과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복음을 전하려 한 남녀평등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교회 건물이다. 즉 교회 예배당 평면을 ㄱ자로 지어 한쪽 귀퉁이는 여자석을 다른 쪽 귀퉁이는 남자석으로 예배당을 지어 지금은 남녀 일부가 서로 보이지만 예전엔 가운데 기둥과 오른쪽 벽 모퉁이에 휘장을 쳐 전혀 안 보이게 했다. 두 교회는 남녀유별과 남녀평등을 동시에 만족시킨 종교문화 융합의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이처럼 이념성이 강한 종교의 토착은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에 알맞은 문화융합이 관건이다. 앞으로는 종교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대에 개방과 보수에 중용적인 문화 융합적 수용과 대처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 등에서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