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에서 덕수궁을 구해낸 제임스 헤밀턴 딜
9월 15일 짙은 구름 낀 아침에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개시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 상륙에 크게 당황한 북한군은 병력을 재정비하여 수도의 방어에 결사적으로 임하였다. 9월 25일 한강 도하작전이 개시되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적들은 치열한 항공공격, 지상포화에도 건물 등을 은폐물로 사용하여 도처에서 저항을 하였다.
한국전 초기에 미 포병 중위로 한국전에 참여하였던 제임스 헤밀턴 딜은 미 제7사단의 제31야전포병대대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제31야전포병대대는 해병대가 인천 지역을 확보한 다음 서울로 진군하는 것이다. 제임스 헤밀턴 딜은 9월 23일에 영등포에 도착하고, 9월 25일에 한강을 건넌 후 해병대와 함께 수도 서울의 탈환에 참가하여 덕수궁 탈환을 바로 목전에 두었다. 전방 관측자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덕수궁에는 수백 명의 적군이 궁전 건물과 정원에 집결해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장비를 일순간에 괴멸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포격개시’란 말 한 마디면 몇 분 안에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불바다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제임스 헤밀턴 딜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심한 그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를 하여 덕수궁을 살리는데 최대한 노력을 하기로 하였다. 즉 적들이 덕수궁을 빠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적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공격을 해오면 아군의 사상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그의 1950년 9월 25일자 수기이다.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측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군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격지휘 소대를 불러내 포격 개시를 지시하였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폭파 위기의 덕수궁』, 국방군사연구소, 1996)
그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최선의 방안을 선택”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날 이후 서울시내는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다. 서울시청의 경우에는 건물에 숨어있던 적이 발악적인 사격을 가해 와 수류탄이 터지고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지만 가까이 있는 덕수궁에는 별다른 가격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덕수궁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보존되기까지에는 이 같은 문화재 수호자들의 식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옛 왕궁을 보존하는 것은 그 옛날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에 맞는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제임스 헤밀턴 딜의 역사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