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 월러스 스티븐스]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서리와 눈 덮인 소나무
그 나뭇가지를 응시하려면.
오랫동안 추워 봐야 한다.
얼음으로 뒤덮인 노간주나무와
저 멀리 반짝이는 일월의 햇빛 속
거친 가문비나무를 바라보려면,
바람이 내는 소리
몇 남지 않은 나뭇잎이 내는 소리에서
어떤 비참함도 생각하지 않으려면.
그 소리는 대지가 내는 소리
헐벗은 장소에서 부는
바람으로 가득한 소리
눈 속에서 귀 기울여 들으며
스스로 무가 된 자는
그곳에 없는 무와
그곳에 있는 무를 본다.
눈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겨울이 춥지 않다. 어떤 옷으로도 자신을 감싸지 않고 오랫동안 추워 본 사람은 겨울이 불행하지 않다. 때로는 잎과 열매를 다 벗어던진 겨울나무로 결연히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실체와 마주하는 길이고, 욕망의 투영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길이다.
이십 대 초반에 나는 불가피하게 일 년 넘게 길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건물의 그늘과 모퉁이마다 찬바람이 불었다. 실존적으로도 추위가 엄습해 왔다. 어디에서도 추위를 피할 수 없었다. 그 추위와 고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지 않으면 더 견딜 수 없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진정한 나 자신과 가장 가까이 만난 시기였다.
얼마나 놀라운 전환인가, 눈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겨울이 춥지 않다니! 이미 겨울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눈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무가 된 사람은 인생의 추위와 세상에 부는 공허한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무심한 눈사람처럼, 잎을 벗어던진 나목처럼 자신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실체와 마주하는 길이다.
월러스 스티븐스(1879~1955)는 하버드대학과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보험회사 간부로 일하며 『손풍금Harmonium』, 『푸른 기타를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Blue Guitar』같은 뛰어난 시집들을 발표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철저히 분리했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조차 그가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미국시에 상징주의 기법을 도입한 스티븐스는 선불교와 일본 하이쿠의 영향을 받아 쓴 시 <검은 새를 보는 13가지 방법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에서 독창적인 시 세계를 선보였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모든 사물은 유한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다는 사상,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라는 세계관을 추구했다. 대표시〈눈사람The Snow Man>은 평론가들로부터 뛰어난 영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갖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어떤 것의 실체를 보려면 자신이 먼저 헐벗을 수 있어야 한다고 시인도 말한다. 자기 치장과 꾸밈을 버리고 한겨울 속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세상이 부여한 이미지들을 벗고 눈사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그런 사람의 삶은 겨울 소나무처럼 경건하다.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