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 공부이야기
대혜 스님(1089-1163)은 송나라 고종원우(哲宗元祐) 4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 속성은 해(奚)씨고, 자는 대혜(大慧)며, 호는 묘희(妙喜)이다. 16세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하고서,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비구승의 자격을 갖추었다. 그로부터 편역(遍歷)하면서 제가(諸家)의 어록을 열람하였다. 특히 운문(雲門)과 목주(睦州)의 어록을 애독하였는데, 선종 5가의 분파가 있다는 것에 승복을 하지 못하고 '5가의 종파도 모두 하나의 달마(達磨)에서 비롯된 바, 왜 그리 많은 구분을 짓는가?‘ 라고 생각하였다.
대혜는 설매(雪賣)의 송고염고(頌古拈古)를 비롯하여 널리 고로(古老)의 공안을 탐구하였다. 그리고 대양산(大陽山)의 원수좌(元首坐), 동산(洞山)의 미화상(微和尙). 견시자(堅侍者) 등에게서 조동(曹洞)의 종지를 배웠다. 조동종(曹洞宗)은 면밀한 종지로서 전하고 계승하는 것(傳承)을 중요히 여겼는데 여기에 대혜스님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선(禪)이 전하고 받음으로서 (傳受) 가능하다면 어찌 자증자오(自證自悟)의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의문을 가졌다.
21세 때 담당문준화상(湛堂文準和尙)을 찾아갔다. 담당스님을 찾아가 자기가 아는 바를 남김없이 토로하자, 담당준(湛堂準)선사가 대혜스님에게 말하기를, "고상좌(杲上座)여, 나의 선법을 그대가 일시에 이해하여 설법하라 하여도 즉시 설법을 잘하고, 뿐만 아니라, 염고송고(拈古頌古)나 소삼보설(小參普說)할 것 없이 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 실오(實悟)가 아니다. 그대가 성성(惺惺)히 사량(思量)할 때는 문득 선(禪)이 있으나 겨우 잠들었을 때에는 문득 없어진다. 만약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당적(當摘)하겠느냐?, 라고 물었다.
대혜 스님이 대답하되,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담당스님을 모시며 바른 불법을 공부한지 7년이 지나서 27세 때에 그의 스승 담당문준 스님이 천화(遷化)하였는데, 스승이 남긴 유언은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에게 찾아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혜스님은 세월이 십년이나 흐른 37세 4월 드디어 천령사 회상을 찾아가 원오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원오(원오)스님은 오조 법연(法演)의 제자로서 법연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법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원오 스님은 바로 임제종 양기파의 적손이었다.
대혜 스님이 원오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이 몸이 아직 깨어있을 때는 자재하여 분명하지만, 자못 깊은 잠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여 자재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임종을 맞이하여 육신이 흩어지고, 중생의 고통이 맹렬하게 일어날 때 어찌 이 자재하는 마음도 거꾸로 뒤집어지지(回換顚倒) 않겠습니까?" 원오 스님은 다만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고 그만 하라. 다만 망상을 쉬어라. 그대가 지금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 그대 스스로 오매항일처(寤寐恒一處)에 도달하리라.‘ 라고 대답하였다. 대혜스님은 처음 듣는 바라 역시 믿어지지 않았지만, 매일 스스로 '내가 깰 때(寤)와 잠잘 때(寐)가 분명 둘이거늘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선(禪)을 말하리오,' 라고 생각하며 다만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망령된 말이라면 내 병을 제거할 것이 없지만, 부처님 말씀이 과연 중생을 기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가 아직 미달한 것이다.' 라고 반성하였다.
원오 스님을 모신 지 42일이 경과한 5월 13일, 스승의 승좌설법(陞坐說法)을 듣게 되었다. 원오스님은 그 설법에서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여하시제불출신처(如何是諸佛出身處) 즉 "어느 곳이 모든 부처님의 나온 곳입니까,’ 라고 물었다. 운문 스님이 말하길 '동산이 물 위로 가느니라(東山水上行)'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어느 곳이 모든 부처님의 나온 곳입니까?', 라고 누가 묻는다면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서늘하구나(薰風自南來 展閣微凉生)' 라고 대답하겠다." 라고 원오스님은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 대혜 스님은 홀연히 생각의 앞뒤가 끊어졌다.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예리한 칼로 한번 내리침에 모두 끊어진 것과 같았다. 이에 원오 스님은 대혜 스님에게 사찰내에 택목당(擇木堂)에서 일상사를 전폐하고 오직 정진에만 힘을 쏟게 하였다. 이 때 바야흐로 꿈꿀 때(夢時)가 곧 깰 때(寤時)와 같고, 깰 때(寤時)가 곧 꿈꿀 때(夢時)와 같음을 알게 되어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뜻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이때 심경을 "이 도리는 타인에게 내보일(拈出) 수도 없고, 비슷하게라도 들어낼(呈似) 수도 없으니 마치 몽중 경계와 같아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혜 스님은 움직이는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不生), 티 하나 없고 고요한 마음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오 스님은 이것을 인가하지 않고 이것이 오히려 무기(無記)에 빠진 것임을 알고, "애석하다. 죽기는 하였으나 다시 살아나지는 못했구나. 이때라도 언구(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야 (死中得活), 모든 사람을 속이지 않느니라."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매번 원오 스님 방에 입실하여 점검을 받았는데 원오스님은 다만 '유구(有句) 무구(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有句無句如藤倚樹)' 라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뿐이었다. 대혜 스님이 입을 열어 대답만하면 아니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승이 항상 묻는 질문에 대혜 스님이 비유를 들어 말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狗子)가 뜨거운 기름 가마(熱油 )를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여도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말씀드리니 “비유가 좋기는 하구나." 대답하였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서 어느 날 원오 스님 방에서 또 '유구(有句) 무구(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는 화두(有句無句如藤倚樹)를 물음에 대혜 스님이 드디어 스승인 원오 스님에게 되묻기를 "스님께서 오조 회상에 계실 때에 이 화두를 물었다 하셨는데 오조께서 뭐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원오 스님이 웃고는 답을 하지 않으시자, "스님께서 당시에 대중이 있는데서 물으셨는데 지금 설명한들 무엇이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니, 이 말에 원오 스님이 부득이 말하기를 "내가 오조께 그 질문을 물었는데, 오조께서는 '본뜰래야 본뜰 수 없고 그릴래야 그릴 수 없다' 고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또 묻기를 '나무가 넘어지고 등나무가 마를 때는 어떠합니까?' 물으니 오조께서 '서로 따라오느니라(相隨來也)'라고 하였느니라."
대혜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확연이 깨닫게 되어 이르되,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오 스님이 "네가 공안을 통과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라며 말씀하시며, 곧 여러 가지 선문(禪門)의 어려운 공안을 연이어 물었다. 세 번 구르고 두 번 구르면서(三轉兩轉) 묻는 것을 모두 다 대답해내니 마치 일없이 태평한 때에 대로를 가는 것과 같아서 걸림이 없었다. 원오 스님이 비로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속일 수 없구나(吾不欺汝也)" 라고 말씀하시며 인가하였다. 원오 스님은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주고 대혜스님에게 기실(記室)을 맡게 하니 원오 스님의 전법제자(傳法弟子)가 되었다.
그 뒤에 촉(蜀)나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은거하고 한 동안 살다가 그 후에 호구사(虎丘寺)에 머물면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던 중에 화엄경 제7 지장보살이 무생법인처(無生法忍處)를 얻은 곳에 이르러서 홀연히 담당준(湛堂準)선사가 물었던 앙굴마라지발구산부(央掘滅持鉢救産婦)의 공안의 의미를 밝히게 되었다. 앙굴마라지발구산부(央掘滅持鉢救産婦)는 앙굴마라가 발우를 들고 가서 산부를 구했다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앙굴마라가 산부를 구한 사건에서 따온 말이다.
희대의 살인자로 이름난 앙굴마라가 부처님을 만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앙굴마라가 하루는 탁발하러 나가서, 마침 임산부가 해산하는 집 앞에 서있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희대의 살인자 앙굴마라가 왔다고 소리치고 도망쳤다. 이 소리를 듣고 해산하던 산부가 겁에 질려서 그만 해산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앙굴마라는 울면서 부처님께 찾아가 어떻게 하면 산부를 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살인자 앙굴마라가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사문 앙굴마라가 왔다' 고 소리치라 하였다. 앙굴마라가 그렇게 하자 임산부는 편안하게 해산을 하여 산부와 아기를 다 구할 수 있었다. 이것을 놓고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연유로 임산부가 안전하게 해산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담당준 선사가 이 공안의 뜻을 대혜 스님에게 물었던 당시에는 전혀 대답을 못했는데, 뒤에 어느 날 화엄경을 보면서 문득 이 공안에 대한 의미가 드러났던 것이다. 이때 나이가 40세 전후이다.
한편 대혜 스님은 사대부(士大夫)를 상대로 선(禪)을 펴고 있었다. 42세(紹興2年)에 스님은 운문암(雲門庵)에서 서원(誓願)을 세우기를, "차라리 이 몸으로써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를 받을지언정 마침내 이 입으로써 사람의 인정(人情)을 위한답시고 불법을 헛되이 말해서 일체인(一切人)의 눈을 멀게 하지 아니하리라." 라는 원(願)을 세웠다. 대혜 스님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수행자에게는 원(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사대부들을 가르칠 때에도 원(願)을 세워 공부할 것을 강조하였다. 서장 증시랑(曾侍郞)의 답서(答書)를 보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대서원을 발하되 '원컨대 이 마음이 견고해서 영원히 물러섬이 없이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몰록 생사(生死)를 잊고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깨달아 증득(證得)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할지다' 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서 오래 오래 공부를 하다보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