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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악]
■ 여이징 (呂爾徵)
1588년(선조 21) - 1656년(효종 7)
[문과]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위(20/34)
[문과] 인조(仁祖) 4년(1626) 병인(丙寅) 중시(重試) 병과(丙科) 4위(07/08)
[생원] 광해군(光海君) 2년(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7위(4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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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강화부유수, 부제학,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증승지 여숙(呂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여순원(呂順元)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여유길(呂礻+谷吉)이다. 어머니는 신씨(愼氏)로, 현감 신준경(愼俊慶)의 딸이다.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이 되고 1616년 경안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양강(楊江)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심명세(沈命世)가 가담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사양하였는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는 여이징의 태도를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여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2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된 뒤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부빈객(副賓客)·대사성·대사헌·강화부유수·부제학·도승지·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선유(先儒)의 격언 20여조를 찬술하여 인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묘비명을 지었고 또한 천문·역산(曆算)·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집(東江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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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4권 / 비갈(碑碣)
이조 참판 여공의 묘갈(吏曹參判呂公墓碣)
공의 휘는 이징(爾徵)이고, 자는 자구(子久)이며, 호는 동강(東江)이다. 함양인(咸陽人)으로, 고려의 대장군 여임청(呂林淸)의 후손이다. 대대로 고관대작이 나왔으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휘 칭(稱)이 태조를 보좌하면서 공을 세워 이름이 드러났다.
고조의 휘는 세침(世琛)으로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숙(淑)으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순원(順元)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유길(裕吉)로,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상의 삼대가 추증된 것은 우윤공과 동생인 관찰공(觀察公)이 귀하게 되어서였으며, 한성 우윤이 이조 판서에 추증된 것은 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현감 신준경(愼俊慶)의 딸이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일곱 살이 되었을 적에 상서공(尙書公)을 따라 가산군(嘉山郡)으로 갔는데, 종자(從者)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자 나머지 한 짝도 버리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아깝다. 잃어버리긴 마찬가지인데 차라리 두 짝을 함께 잃어버렸으면 두 짝을 얻은 자가 신을 수 있을 텐데, 아깝다.” 하였다. 그러자 상서공이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명성이 떨어지지 않겠구나.” 하였다.
장성해서는 유천(柳川)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의 사위가 되어 문익공의 형인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에게 배웠는데, 구암이 매우 사랑하여 독서설(讀書說)을 지어 주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병진년(1616)에 경안 찰방(慶安察訪)에 제수되었다. 광해군이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고 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양강(楊江)으로 돌아갔다.
계해년(1623)에 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심명세(沈命世)가 상의 뜻으로 공을 불렀는데,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선비의 출처는 일정한 법도가 있는 법이라서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나아가 뵐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심명세가 돌아와서 그대로 전하자, 상께서 훌륭하게 여겼다.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인년(1626)의 중시(重試)에서 초제(初第)로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소속되었다가 곧바로 전적(典籍)으로 옮겨졌다. 정언, 사서, 지제교, 지평, 헌납, 수찬, 교리, 응교, 보덕, 사인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경오년(1630)에 통정대부로 올라 승지, 이조와 예조와 형조의 참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계유년(1633)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도승지,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년(1636) 12월에 청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상께서 장차 강도(江都)로 행행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묘사(廟社)를 받들고 먼저 갔으며, 금상(今上 효종(孝宗)) 역시 함께 갔다. 적들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상께서는 어가를 되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정축년(1637, 인조 15) 1월에 적들이 강도를 침범하여 화친하자고 위협하였는데, 그때 비로소 강도에서는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구원병이 끊어져 부득이 대신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일이 아주 급박하였으므로 상신 윤방(尹昉)과 승지 한흥일(韓興一)이 금상께 여쭙고는 적진을 왕복하였는데, 공 역시 참여하여 이를 들었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공은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갔으나 상께서는 이미 성 밖으로 나갔으므로, 어가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강화한 것을 허물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강도에서의 일은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허락한 뒤에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기는 하지만, 조금은 의리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해 죽고 사는 즈음에 어찌 깊이 생각하여 신중히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사임하여 체차되었으며, 경기 감사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이를 핑계로 체차되었다.
뒤에 한성부 좌윤, 예조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함경 감사가 되었는데, 온 도 사람들이 청백함에 탄복하였다. 부빈객(副賓客)으로서 심양(瀋陽)에 들어갔다가 도착하기 전에 체차되어서 돌아왔다.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체차되어 돌아온 뒤에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이조 참판, 예문관 제학,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역임하였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부제학이 되었다.
기축년(1649)에 상께서 승하하시고 금상께서 즉위하였다. 선왕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효릉(孝陵 인종(仁宗))의 묘호(廟號)인 인(仁) 자를 썼는데, 헌장(憲長)으로 있던 김집(金集)과 간장(諫長)으로 있던 김경여(金慶餘)와 연신(筵臣) 유계(兪棨)ㆍ심대부(沈大孚) 등이 거듭하여 쓰는 것을 간하였으나, 상께서 답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역명(易名)의 예법은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널리 의논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미진한 바가 없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께서 진노하여 엄한 내용의 전지를 내렸다. 이에 김집이 지나치다고 간하자, 상께서 이르기를 “나도 후회하고 있다.” 하였다.
부제학에서 체차되고서 좌윤으로 옮겨졌다. 공은 전서(篆書)를 잘 썼는데, 선왕의 시보(諡寶)의 전자(篆字)를 써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되었다. 행 도승지(行都承旨), 공조 참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처음에 상께서 시호를 의논하는 데 대해 노하였다가 뒤에 비록 풀어지기는 하였으나, 끝내 크게 쓰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때까지도 지난날의 일을 허물해서였다.
공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수가 적었다.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책을 좋아하였다. 이에 일찍이 선유(先儒)들의 격언(格言) 20여 조목을 찬(撰)하였으며, 또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이어 시를 지어서 올리니, 상께서 가납하였으며, 사림(士林)은 칭송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있어서 옛 법을 터득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의 묘명(墓銘)이 공의 손에서 많이 지어졌다. 두 차례 문형(文衡)으로 천거되었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는데, 문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뒤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많이들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또 천문(天文)ㆍ역산(曆算)ㆍ율려(律呂) 등에도 정통하였는데, 8세 때 악성(樂聲)에 해박하기가 비길 데가 없었으므로 악사(樂師)가 크게 놀랐다. 일찍이 장악원의 직을 맡았을 적에는 한창 대비(大妃)에게 축수(祝壽)하기 위한 음악을 연습 중이었는데, 상께서 하교하기를 “음률을 아는 사람이니, 우선은 다른 직책으로 옮기지 마라.” 하였다.
또 역상(曆象)에 밝아서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경연(經筵)에 참가하여 《서경》의 칠정(七政)을 강론하였으며, 물러 나와서는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올렸다. 공은 집에 거처하고 있을 적에는 담박하기만 하여 절대로 가산을 늘릴 뜻을 품지 않았으며, 때때로 끼닛거리가 떨어졌는데도 태평하기만 하였다.
외가(外家)가 자못 부유하였는데, 조모가 측실 출신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공에게 외가의 가업을 부탁하였다. 공은 측실 소생을 잘 어루만져 길렀으며, 성장하자 장획(臧獲)을 주어 그로 하여금 외가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공은 만년에 들어서 두문불출한 채 거문고와 바둑으로 유유자적하였으며,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차운하여 회포를 부쳤는데, 몸은 비록 조시(朝市)에 있었지만 뜻은 항상 물러나 쉬는 데 있었다. 병신년(1656, 효종 7) 12월 24일에 졸하니, 향년이 69세였다.
공은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인 첨정(僉正) 이량(爾亮)의 아들인 성제(星齊)를 후사로 삼았다. 성제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필승(必升)이고, 딸은 이공(李公)과 권공(權公)에게 시집갔다.
양근(楊根)의 수청동(水淸洞)에 있는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첫 부인인 한씨(韓氏)는 강도(江都)에서 사절(死節)하였는데, 종생질부(從甥姪婦) 홍씨(洪氏)와 함께 불에 타 죽어 시신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양근(楊根)의 월계(月溪) 남쪽에 장사 지냈는데, 공의 무덤과의 거리는 5리이며, 유의(遺衣)로 합장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수 간지 들어 있는 바로 그해에 / 歲在二首
거룩하신 분이 있어 천명 응했네 / 有聖應命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거니 / 有招不進
길을 감에 지름길로 아니 간 거네 / 行不由徑
견고하고 확고하지 아니하다면 / 不堅不確
그 절조는 올바르지 않게 된다네 / 節操不正
끝내 지위 아경 자리 올랐거니와 / 終秩亞卿
때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닌 것이네 / 不爲不遇
그런데도 사람들이 애석해한 건 / 世咸惜之
공보 자리 오르지를 못해서였네 / 器非公輔
한강이라 그 상류에 골짝 있거니 / 漢之上流
그 골짜기 이름 바로 수청동이네 / 厥洞水靑
그 언덕에 공이 길이 잠들었기에 / 公宅萬世
이 비명을 빗돌에다 새기었다네 / 刻此墓銘
<끝>
[註解]
[주01] 사잠(四箴) : 공자가 안자(顔子)에게 가르친 사물(四勿)에 대하여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으로, 시잠(視箴)ㆍ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을 말한다.
[주02] 칠정(七政) : 일ㆍ월ㆍ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천(天)ㆍ지(地)ㆍ인(人)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
(冬)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03] 혼천의(渾天儀) : 《서경》에 나오는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 해ㆍ달ㆍ별의 천상(天象)을 그려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인데, 사각(四脚)의 틀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키면서 관측하도록 되어 있다.
[주04] 이수(二首) : 해(亥) 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간지에 해 자가 들어간 계해년(癸亥年)인 1623년을 말한다. 해 자의 전서체(篆書
體) 윗부분의 모양이 이(二) 자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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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