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는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서 있으니, 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고려 공양왕 때에, 당시 큰 세력가인 이성계(뒤의 이태조)에게 정몽주만은 홀로 아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음모를 꾸미고 있던 이성계 지지파의 주동자는 이성계 휘하의 장수인 조영규로 하여금 마침내 다리 위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망하게 되었고, 세상은 이성계의 천하가 되었다.
북한 원로화가 최석근의 작품 『선죽교』.
조선 태종 때에 와서는 정몽주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선조의 가장 높은 벼슬인 의정부 영의정을 주증하고, 비석을 그의 무덤 앞에 세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비석을 세운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밤,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정씨의 자손이 그 무덤 있는 데로 가보니까, 그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이 부서져 있었다.
이것을 본 그 자손은 직감적으로 이것은 선조께서 예가 아닌 조선조의 관직을 받은 소치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씨의 자손은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그 때는 조선조에서 준 추증 관직명을 쓰지 않고, 생전에 고려 때 벼슬인 '고려 문하시중'이라고 하는 관직명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치고, 뇌성벽력이 쳐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정몽주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은 그 당시 그의 자손이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즉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귀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아무리 훌륭한 관직을 주고, 또 훌륭한 비석을 세워준다 하더라도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서 그 충성을 시종일관한 사람의 귀신이므로, 자기를 죽이고 고려를 망하게 한 조선조에서 주는 것은 관직이고, 비석이고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 후손은 조선의 신하이길 거부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높은 조선조의 관직을 준다하더라도 고려의 신하로서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손이 세운 비석은 가령 그것이 조선조 조정에서 보낸 비석보다 좋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몽주의 영은 이것은 즐거이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용인군 모현면의 지명은 이 명현을 흠모한다는 뜻에서 뒷날 그 지방민에 의해서 지어진 지명일 것이다.
▲ 포은 아트홀과 전망대
용인에는 포은대로, 포은 회관, 포은문화제 등 유독 '포은'이란 단어를 쓰는 곳이 많다. 포은은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 선생의 호로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 묘가 있다.
▲ 포은아트홀 앞에 세워진 포은선생 동상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손에 살해 당한 정몽주 선생의 묘가 왜 용인에 있을까. 그 연유를 살펴보면, 태종 이방원은 즉위 6년(1406년)에 자신이 죽인 정몽주 선생을 복권시키면서 개성 풍덕에 가묘 형태로 모셨던 선생의 유해를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토록했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상여가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부근을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선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 등을 적은 천)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본 정몽주 선생 묘소입니다. (노란 동그라미) 안정감 있는 모습입니다.
명정을 잡기 위해 후손들이 따라가 보니 지금의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곳에다 묘를 쓰기로 했다. 그런 연고로 해서 고향 땽 영천에 묻히지 못하고 용인 땅에 묻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 안산
▲ 백호방향에서 수구까지 모습(사진을 크릭하면 확대됨)
▲청룡방에서 수구까지 모습
주변에 험악한 기세는 없고 모든 사격들은 방위에 상관없이 단정합니다. 천하의 명당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