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트로이 군은 해변에 나타난 목마가 아테나이 여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말을 듣고 트로이 도시의 신전으로 목마를 끌고 간다. 같은 신을 섬기는 문화권에 속해 있기에 신성한 존재에게 바쳐진 제물 속에 감추어진 비밀에 대한 의심으로 제물을 파괴하거나 불태우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선택으로 인해 트로이는 10여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버티어내던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린된다. 오디세우스는 신성함에 대한 트로이 인들의 존중심을 이용하여 전쟁의 승리를 도모한 것이므로 양심의 가책과 함께 신들의 노여움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트로이 전쟁을 위해 그리스 군을 이끌고 출정한 아가멤논은 가장 소중한 자신의 딸을 제물로 희생하는 선택을 하고 그 결과로 인해 승리 후 귀국한 뒤에 원한을 품은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에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응징으로 살해당하는 처지가 된다. 비극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강아지의 모습처럼 순환적 고리를 형성하고 나타난다.
또다시 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이 부재한 아티카 왕국의 궁궐에는 실종 상태에 있는 아티카의 왕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기 위해 몰려든 수십 명의 구혼자들이 식객처럼 눌러앉아 먹고 마시면서 흥청거리고 있다. 손님을 환대하라는 그리스 문화권의 제우스 신법에 따라 이들을 추방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 있는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다.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는 무기를 들고 적으로 오지 않는 이방인에 대해서 친절하게 맞이하라는 보편적인 원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두윈 족의 문화나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하다가 세 사람의 천사 즉 하느님을 맞이하여 축복을 받는 장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공명정대하게 사람과 신을 대하고 섬기며 인륜에 어긋나는 잔악함을 벗어나는 길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함을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자료들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는 음유시인 호머가 노래하는 인류의 여명기로부터 거의 3,000년이 지난 셈이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 상황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기로 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관철된 시기가 불과 150여 년 전후임을 생각해 본다.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인정된 시점도 불과 100여 년 남짓 된다고 할 수 있으니 세세한 곡절까지 따지면 인류의 윤리적 발전의 여정은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북아프리카의 스페인 영토인 세우타에 밀려 들어온 이주희망자 몇 만 명이 세계적인 화제가 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지중해는 여전히 이민을 꿈꾸며 위험천만한 보트를 타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의 무덤이 되고 있고 이에 따라 유럽의 국경에 대한 통제와 이주민 배제의 정책적 흐름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북미에서 미국의 이민 정책도 더욱 차가워지고 있다. 제우스의 법은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차원의 환대와 포용성도 그 생생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적인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화두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관련 기술들이 모든 관심을 빨아들이고 있다. 경제적 자원과 전력과 물, 희소 광물과 데이터 등을 블랙홀처럼 끌어당기고 있다. 이 기술적 블랙홀이 감추고 있는 암흑의 영역 속에서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상상하기 어렵다. 사건의 지평선과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거기에 비길 수 있을 것인가. 윤리적이고 공감력을 지닌 인간적 조건이 인간의 의사결정의 최종적 변수로 남아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이고 언제까지일지 궁금하다. 어떤 행위와 선택의 책임을 인간에게 묻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는 인간의 역사적 지평 안에 있는 것이겠지만 알고리즘이 주도권을 쥐는 순간 우리는 망자의 세계에서 부유하는 혼백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기술적 연결의 맥락이 무한대로 펼쳐진 이 시대에 이메일과 전화와 문자와 SNS의 공세는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날마다 보도되고 있는 보이스 피싱의 수법과 그 피해사례들은 낯선 이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정말 참신한 기법으로 진화발전하는 노쇼사기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미리 저장된 전화번호가 아닌 낯선 전화는 받기가 두렵다. 문자에 포함된 링크를 누르면 큰일이 난다고 경고하는 세상이다. 기술적으로는 광대한 연결의 가능성이 펼쳐지는데 우리들의 마음은 점점 좁게 좁게 졸아들고 있다. 낯선 사람이 내미는 손을 두려움 없이 마주 잡기가 꺼려진다. 저 미소 뒤에 어떤 상업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지 의심스럽다. 그가 들고 있는 가방 속에 위험한 물건이나 흉기는 없는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된다. 낯선 거리의 낯선 얼굴들과 목소리들이 두렵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는 것보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 어떤 형태로든 물릴까 봐 겁이 난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제한된 한 시절을 살다가 가는 이 삶에서 사람에게서 기쁨을 얻고 사람에게서 상처를 입기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5,110만 명가량 된다고 한다. 5% 정도는 이주민이라고 한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수도권에서 살아가는 인구의 비율은 또 얼마일 것이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구는 무릇 또 얼마가 될 것인가. 인구가 소멸되어 가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환대의 정신을 발휘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인가. 제주에서 실종상태로 신고되었다가 발견된 시신이 얼마가 된다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마음이 거기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당신에게 내가, 또한 나에게 당신이 투명한 인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노래하듯,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하략- "
낯선 이의 전화를 기쁘게 받을 수 있고 그가 내민 손을 의구심 없이 마주 잡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