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을 팔아서 가족의 먹거리를 조달해야 했던 어머니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늘 집에 계시질 않았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온 시골소년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어머니가 일하고 있을 마을 부잣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부잣집 아주머니는 배고파 보이는 소년을 위해 아욱국과 밥 한 그릇을 내주셨다. 소년이 느낀 국 맛은 늘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국속에는 말린 새우가 몇 마리 들어 있었고 그 신비한 맛에 숟가락질이 빨라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새로운 맛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시골마을 텃밭에는 누구집이라고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집에서 아욱 몇 포기를 키웠다.
봄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에도 가족들의 식탁에 중요한 국거리 대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생 작물이지만 지중해와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옛 기록에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가포육영》에서 ‘권력다툼 싫어 관직 다 버리고 / 자식에게 글 읽어라 훈도하네. / 벼슬자리 내던지니 찾아오는 이 없고 / 한가한 잎처럼 내 몸을 수양하네.’라고 노래하였다.
아욱은 전 세계적으로 900여종이 존재하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아랍지역에서 주로 먹고 서양에서는 생소한 채소이다. 늦가을에 먹는 것이 특히 맛있는데 ‘가을 아욱국은 사립문 다고 먹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명물기략》에는 아욱의 다른 표현으로 ‘파루채’라고 했는데 맛이 좋아 누각 한 채를 허물고 아욱을 심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표현의 ‘파옥초’는 아욱을 먹고 남자가 힘이 좋아져 부인이 집을 허물고 심었다는 것인데 믿거나 말거나 !
중국 원나라 때 조리서인 《거가필용》에는 ‘봄 아욱을 잘라 버리고 뿌리에서 난 움은 매우 부드럽고 좋아 가을 아욱보다 좋고 8월 중순에 가을 아욱을 잘라 버리면 살지고, 연하게 움이 난다. 상강까지 기다렸다가 거두면 사람의 무릎 높이만큼 자라는데 줄기나 잎사귀가 모두 맛이 좋다.’고 소개하였다. 중국에서는 채소의 왕으로 불리며 《사기》의 기록에는 청렴한 관리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재상 ‘공휴의’가 식사 중 아욱이 맛이 있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뒤뜰에서 가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밭에 가서 아욱을 모조리 뽑아 버렸고 집에서 부인이 베를 짜는 모습을 보고 베틀을 부숴 버렸는데 나라에서 봉급을 받아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데 아욱을 기르거나 베를 짜면 ‘농부와 베를 짜는 여자들은 어디에 팔아 돈을 마련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탄생한 사자성어가 ‘발규거직’인데 ‘아욱을 뽑고 베틀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백성들과 이권다툼으로 문제를 일으킨 욕심 많은 신하의 파직을 임금한테 청할 때 ‘공휴의’의 행동을 예로든 사례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조선 중기 시인 이응희는 「아욱」이라는 시에서 ‘푸른 아욱이 채마 밭에 가득하니 / 농가의 시절은 늦은 봄이로구나. / 반지르르한 잎에 진액이 많고 / 부드러운 줄기에 맛은 더욱 산뜻해 / 기운은 소식의 죽순 보다 낫고 / 향기는 장한의 순채 보다 나아라. / 왕공이 이 맛을 알았다면 / 내 입에 어찌 들어올 수 있으랴.’ 라고 하였는데 왕과 귀족들이 이 맛을 알았으면 내 차지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래 한 것을 보면 맛도 맛이지만 채소로서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욱은 다른 채소에 비하여 단백질과 칼슘, 비타민이 월등이 많다.
칼슘은 어린이 발육에 좋은 성분이니 어릴 때부터 아욱국을 만들어 주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데쳐내면 쌈으로 죽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간혹 국을 끓일 때 바락바락 씻어서 잎에 있는 미끄러운 성분을 없애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잎의 미끄러운 성분은 리그닌 섬유소로 배변활동을 도와 변비에 좋다. 한방에서는 아욱의 씨를 ‘동규자’라고 하는데 이뇨작용과 산모의 젖을 잘 나오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모들은 출산 후 오랫동안 미역국을 먹는다. 매일 똑 같은 국을 먹다 보니 쉽게 질리기도 한다. 가끔은 건새우를 넣은 구수한 아욱된장국을 드셔보시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