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여름은 정말 지독하게 더웠다.
7월 내내 35도 이상의 기온이 이어졌고, 아마 연속 열대야 기록은 그해가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그해에 뜻밖에도 차가 생겼다.
이장우 선생이 프랑스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중고로 팔긴 뭣하고 해서 나한테 넘긴 금똥색 프레스토88이었다.
요즘 스틱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든 당시로선 아주 드문 오토매틱이었으며 차량 상태도 양호했다.
다만 핸들이 파워 스티어링이 아니어서 정지된 채 핸들을 조작해야하는 주차 등의 상황에서는 많이 힘들었다.
원형과 고교동기인 우재호선생이 어떻게 미리 낌새를 채고 혹 내가 차를 가질 형편이 못 되면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그때 형편이 마누라가 벌고 나는 여전히 쪼들리는 강사여서 아직 차를 가지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에서였을까?
별 생각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선생이 실제 그 말을 꺼냈을 때 마누라에게 얘기를 해보았더니 이제 우리도 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윤진이가 막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이고, 가까운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도로연수는 후배에게 했다.
영대 안을 몇 바퀴 돌고 인근 경산, 청도, 진량 등 차량의 흐름이 별로 없는 곳을 2차례에 걸쳐 돌고왔다.
그리고 드디어 목련아파트까지 끌고 가는데 몸은 꼿꼿하게 경직되어 잔뜩 긴장된 채 끌고 왔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경적 소리라도 들리면 나 때문인가 하여 더욱 움츠러들고…
야튼 그렇게 약 한 주 정도 끌고 다니니 더 이상 차를 모는데 힘든 느낌은 없었다.
그 프레스토는 에어컨이 없었다.
이장우 선생이 그 전에 타던 차인 스텔라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스텔라가 덩치에 비해 배기량이 떨어져 힘이 많이 딸리던 차였으므로 에어컨까지 켜니 낭패를 당한 적이 있어 새 차를 사면서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학자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사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 하면 되지.' 하는…
야튼 당시 현대 영업점에서 근무하던 권새형님이 힘 써준 덕분에 폐차장에서 에어컨을 하나 구하여 달게 되었다.
그날도 이렇게 더웠고 뉴스에서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왔었다.
첫 연수 끝에 차를 집으로 몰고 온 것이 6월 중순경이었다.
그해 여름 휴가 때는 그 차 때문에 밖으로 한번 가자고 했다.
그래서 택한 코스가 신혼여행을 갔던 동해비치관광호텔이었다.
신혼여행 때나 그때나 별로 고급호텔은 아니었던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에게는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에 처음으로 올려 그곳에 도착하여 주차를 해놓고 보니 차 밑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호텔 직원을 불러 혹 왜 그러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요? 에어컨을 틀면 그렇게 되요."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정말 뭘 알아야 면장도 해먹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 때와는 달리 그날 밤은 윤진 때문에 침대방에서는 못 자고 온돌방에 투숙을 하면서 뉴스를 보니 대구가 39도란다.
"야, 잘 나왔네!" 하면서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환호성은 금방 '저 불가마속으로 어떻게 들어가지.' 하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다음날은 신혼여행코스를 다 돌 수는 없었으므로 영덕에서 안동쪽으로 가서 시간이 허락하면 하루 더 자기로 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몹시 더워 창문을 꼭 닫고 에어컨을 켰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시원한 바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세 명이 그 염천에 얼굴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한참을 갔다.
그제야 이상한 것을 감지했지만 그냥 에어컨이 고장난 줄만 알았다.
그러다 중간에 어디 들러 물어보니 에어컨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에휴~'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떠난 그날 시작한 폭염이 달포를 넘겼다.
그래도 그때는 그 차가 있어서 참 많이도 다녔다.
그때는 큰형님이 임시로 서한에 살 때였는데 그곳으로 처음 차를 가져갔고,
보성으로 이사하는 것 도와주다 펑크가 나서 큰형님과 함께 낑낑거리며 타이어를 간 적도 있었다.
여름 휴가도 내서에서 보내던 시기라 내서도 가고, 울릉도 갈 때는 포항 선착장에 대놓기도 하고.
내서서는 당시로는 생소한 오토였던 관계로 고헌형님과 원형이 차를 몰아보며 신기해했다.
당시 흰 엑셀을 타던 고헌형님은 "내차보다 한결 낫다."고 한 마디를 했고.
처가 식구들과 울릉도 갔을 때는 차문을 덜 닫아 3일이나 실내등이 켜져 있었지만 방전이 다 되지는 않았었던 기억이 있고...
한편 윤진을 어린이집에 태워다 주고 오는 길에 집앞에서 버스에 받혀 죽을뻔하기도 하고.
그차의 마지막은 98년 8월 15일이었다.
그때는 여름 휴가모임을 지금의 국민휴가일에 맞추지 않고 격년으로 오는 제헌절과 광복절 연휴 때 가졌다.
그래서 그해 광복절에 부계의 제2 석굴암서 모임을 가졌는데 오후부터 비가 왔다.
모임을 마치고 오는 길에 마누라가 친구집에 잠시 들렀다 가자고 해서 들렀다.
신호 앞에서 신호를 무시한 배달 스쿠터가 지나가는 바람에 급정거를 했더니 바퀴가 흙받이쪽에 붙어버렸다.
임시조치를 한 후에 정비소에 가서 수리 견적을 뽑아봤더니 그때(꼭 10년 전이네) 돈으로 5~60만원쯤 한댄다.
결국 그 돈을 들여서 더 타느냐마느냐 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어렵사리 목련에다 끌어다 놓은 차를 그 다음날 영대 근처의 해동폐차장이라는 곳에서 견인차가 와서 끌고갔다.
타이어 네 개를 새로 간 지 한달도 안 되었는데…
부계 갔다오는 길에 기름을 만땅으로 채우고 하루도 안 되었는데…
차안 조수석 밑에는 거금을 주고 산 윤진 랜드로바가 있었는데…
윤진 신발은 당시 몰랐지만 우리가 안타까워하니 폐차장 사람이
"기름요? 빼가면 됩니다. 타이어요? 필요하시면 빼놓으세요." 한다.
그러나 기름을 빼놓으면 어디에 두고 어떻게 쓸 것이며 타이어는 또 어디에 두나?
포기하는 수 밖에.
그 차가 인연이 되어 이제는 차가 없이는 하루도 생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상주에도 1주에 한번 강의를 나갔는데 새차가 나올 때까지 한 달을 기차로 버스로 다녔더니 정말 피곤했다.
뒤로 아토스와 지금은 아반떼이다.
모두 세하덕에 새 차를 중고차 가격으로 산 것이다.
아토스는 현재 형진에게 넘어가서 큰집에만 가면 볼 수가 있다.
어언 경력 14년에 18만 Km정도 주행을 한 셈이다.
그 금똥색 프레스토는 아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얻은 교훈도.
"한 여름에는 절대로 차창을 닫은 채 팬만 돌리지 말자."
첫댓글 첫정이란 게 무서운 법이지. 그래도 4년을 탔다니 참 오래도 탔다. 어떤 차를 타도 프레스토만큼 감동을 주지 못할 걸. 우리도 처음 엑셀을 탔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거든.
그 회색 다음 소나타 2로 갔다가 산타페로. 아토스는 세컨드 카지...
엑셀이 회색이었나 감청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세하한테 값에 팔았는데...
아무래도 본인 생각이 맞겠지...
쥐색,,,100마넌 준것같어,,,지금이라면 줬을텐데...서로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93년말에받았나94년초에 받았나 그랬지.
그러게. 두고두고 맘 쓰이는 일이다.
내가 기억한 색깔이 더 맞네...
나도 98년식 아토스 5년 타고 원진에게 넘길 때 돈을 좀 받았는데... 그래도 내가 더 어려운 처지여서인지 덜 미안한 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