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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철학과 수학교육
-Ernest의 사회적 구성주의를 중심으로-
정영옥 / 진주교대
Ⅰ. 들어가며
수학교육학에서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수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수학 교수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련된 것일 것이다. 이러한 관련성에 대해 일찍이 Thom은 ‘모든 수학교육은 비록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수리철학에 의존한다’고 하였고, Steiner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학의 개념화, 인식론, 방법론, 철학은 모두 종종 암묵적으로 수학 교수와 학습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 방향, 또는 싹을 포함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전통적인 수리철학에 의하면 수학은 완성된 지식 체계이며,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수학적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과 합리성의 초석이며, 수학적 대상은 모두 객관적이고 초인간적인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수학에서 많은 모순이 초래되었으며,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수학의 확실성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시도로 수학 기초론이 등장하였으나, 결국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반면, 지금까지도 절대주의적 수학관은 지배적이며,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수학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의 활동이 배제된 채, 논리적인 형식에 따라 배열된 수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데 급급한 상황이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수학 기초론이 실패하고 과학철학에서의 혁명적인 아이디어의 출현으로 수리철학 분야는 급격히 변하고 있으며, 좀더 최근에는 사회학 등의 다른 학문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여러 학문을 통합한 관점들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수리철학의 특징은 수학의 객관적인 절대성을 부정하고, 형식적인 산물보다는 비형식적인 과정을 중시하며, 수학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중시하고, 수학의 인간적인 측면을 기술하는 것을 포함하며, 수학을 다각도로 좀더 충분히 고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수학의 고유한 내적인 차원에서보다는 수학 외적․사회적 차원에서 그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수학교육계의 동향은 ‘수학은 인간의 활동’임을 강조하면서 그에 따른 수학 교수 학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피력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관점은 궁극적으로는 수리철학의 근본적인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수학에 대한 이상적인 실체를 상정하면서 수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주의적 관점을 주장해 온 현대 수리철학에 대한 비판과 수학에 대한 인간 활동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절대성보다는 상대주의적이고 오류주의적인 관점을 주장하는 Eernest의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수학교육에의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현대 수리철학에 대한 비판
수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주의적 관점은 수학은 확실하고 도전할 수 없는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플라톤주의,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로 대표된다. 플라토니즘은 우리의 정신밖에 존재하는 수학적 실체의 존재를 가정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신의 계시에 의해서 수학적 진리에 도달한다고 하는 오랜 기간 사람들이 신봉해 오던 존재론이다. 그러나, 16, 17세기 이후에 의식이 변화되면서 사람들은 존재론보다는 인식론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져 왔다. 19세기 수학의 엄밀화 과정 이후 수학자들은 집합론의 역리, 선출공리, 실무한 집합과 관련하여 무모순성의 문제, 수학에서의 존재성의 의미 등 수학의 전체적인 기초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게 하였다.
절대주의 수리철학은 이와 같이 19세기 이후 많은 모순과 이율배반들이 수학에서 초래되었을 때, 수학적 지식의 본질을 설명하고 그것의 확실성을 재확립함으로써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현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수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대한 고찰과 현대 수리철학의 사조인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 수리철학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수학적 지식의 본질
지식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철학의 핵심이며, 특히 오래 동안 안전한 지식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된 수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철학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Plato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식이란 정당화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라는 관점이다. 이 때 정당화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충분히 이용 가능한 적절한 근거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은 이와 같이 적절한 근거가 무엇인가, 즉 그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선험적(a priori)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후험적(a posteriori) 지식이다. 선험적 지식은 이 세계에 대한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만을 기초로 주장되는 명제들로 구성된다. 이 때 이성에 의한 주장은 연역적 논리와 여러 가지 정의에서 전형적으로 규정된 용어의 의미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후험적 지식은 또한 경험적 지식으로 불리며, 이는 이 세계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 주장된 명제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식의 발생에 관한 구분이 아니라 그 정당성의 근거에 따라 구분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지식이 경험적 관찰에 의한 귀납법에 의해 발생하였더라도, 그 지식의 정당성의 근거가 관찰이 아닌 이성에 근거를 둔다면, 그 지식은 선험적인 것이다. 그 반대로 어떤 지식이 처음에 이성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당성의 근거가 이 세계의 관찰에 의존한다면, 이는 후험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구분에 따르면 20세기초까지 수학적 지식은 선험적 지식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 이유는 수학적 지식은 이성만을 기초로 주장되는 명제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성이란 수학적 공리와 가정된 공준의 집합과 더불어 수학적 지식을 추론하는 기초로 사용되는 연역적 논리와 정의들을 포함한다. 즉, 수학적 지식의 기초는 수학적 공리 및 공준과 연역적 증명으로 구성된다. 이 때,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가정은 수학적 지식의 기초는 수학적 공리와 공준 및 사용된 전제들이 진리라는 것과 연역적 증명이 진리의 전달, 즉 진리값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수학적 증명의 간단한 예로, Peano의 산술 공리 체계에서 1+1=2라는 명제의 증명을 분석해보자. 이 증명은 많은 정의와 공리들뿐만 아니라 논리적 추론 규칙과 같은 가정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가정들은 각각 0과 1의 후자로서의 1과 2의 정의, 재귀적으로 덧셈의 성질들을 규정하는 공리들 및 (1) 두 개의 동일한 항이 같은 성질들을 가지며 (2) 여러 가지 수들의 일반적인 성질이 어떤 특별한 수에 적용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논리적인 규칙 등이다. 이러한 가정들을 기초로, 1+1=2는 몇 단계로 증명될 수 있다. 각 증명의 각 방정식은 하나의 특별한 가정이거나 아니면 추론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그 증명의 이전 부분들로부터 유도된다. 이 가정들은 참인 것으로 가정되고, 그 규칙들은 진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 증명의 각 부분에서 1+1=2뿐만 아니라 각각의 방정식은 모두 진리이다. 결국 이 증명은 ‘영의 후자 더하기 영의 후자=영의 후자의 후자’라는 생략된 증명이고, 이는 1+1=2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증명을 통해 1+1=2는 수학적 지식 또는 진리의 한 항목이 되며, 그 이유는 연역적 증명은 그 명제를 주장하기 위한 합법적인 정당화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는 선험적 지식인데, 그 이유는 이것은 추론만을 기초로 주장되기 때문이다.
수학적 지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적어도 2000년 동안 인정되어 왔던 것이다. Euclid 원론과 같은 수학적 지식의 초기 진술은 위와 같이 기술할 수 있고 약간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uclid에서는 무엇보다도, 수학적 지식은 여러 가지 공리와 공준으로부터 논리적 연역에 의해 유도된 여러 가지 정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초가 되는 논리는 규정되지 않은 채 있고, 공리들은 그것들 자신의 자명성을 초월하여, 어떤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은 기본 진리로 간주된다. 기본적인 공리와 기초적인 논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수학적 지식의 절대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공리들이 진리이고 논리적 증명이 진리를 보존한다면, 그것들로부터 유도된 어떤 정리도 진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Euclid 공리와 공준은 모순없이 부정될 수 없는 기본적인 진리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공리들을 부정하면,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평행선 공리를 부정하면 다른 기하 체계, 즉 비유클리드기하가 유도된다. 공리뿐만 아니라 Euclid 원론의 증명들은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엄밀성이라고 하는 현대의 표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증명들은 - 이러한 것들이 그 증명에서 형식적인 정당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연속성과 같은 관념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고, 이는 여러 가지 증명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존의 수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고, 수학의 이러한 흠을 메우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2. 현대수리철학에 대한 고찰
이 절에서는 수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고자 노력했던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의 특징과 그 제한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논리주의
논리주의의 주장은 모든 수학은 논리학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의 주요 지지자는 Leibniz, Frege, Russel, Whitehead, Carnap등이다. 이러한 논리주의자들의 주장은 Russel에 의해서 명백히 다음과 같이 형식화되었다. 첫 번째, 수학의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이것들이 집합론의 개념 또는 Russel의 유형 이론과 같은 비슷한 힘을 갖는 어떤 체계를 포함하는 것을 가정한다면 논리적인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다. 두 번째, 모든 수학적 진리는 논리 추론의 공리들과 규칙들로 증명될 수 있다.
논리주의의 핵심인 두 번째 주장은 환원공리․무한공리․선택공리와 같은 비 논리적 공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다. 또한 논리주의에 대한 심각한 비난은 ‘논리학파의 견해가 옳다면, 수학 전체는 순수히 형식적으로 논리학에서 연역되는 과학으로서, 그 정리들은 사고의 법칙으로부터 획득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수학의 결과가 자연 현상의 다양한 변화를 설명하고 응용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더욱이 수학의 창조에 있어서 지각적이거나 상상적인 직관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 것이든 아니든 간에 새로운 개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수학에서 새로운 지식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본이 되는 논리의 확실성과 신빙성에 관련된 것이다. 이런 논리의 공리들이 정당화되거나 입증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이런 논리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과 모순에 의해 Russel 자신이 수학적 지식을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에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2) 형식주의
형식주의는 상식적인 의미로는 수학은 의미 없는, 종이 위에 있는 기호들을 가지고, 규칙에 따라 하는 형식적인 게임이라는 관점이다. 형식주의의 주요 대변자는 Hilbert, von Neumann, Curry등이다. 형식주의의 주장은 다음 두 가지 논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순수수학은 의미없는 형식적 체계들로 해석될 수 있고, 이 체계 내에서 수학의 진리는 형식적 정리들에 의해 표현된다. 두 번째, 이런 형식적 체계의 안정성은 메타수학에 의한 무모순성을 입증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주의의 대표자인 Hilbert는 수학을 의미없는 형식적인 체계로 번역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의 관점은 일찍이 1899년 <기하학의 기초론>에서 나타난다. 그는 다양한 공리들과 공리들 집합 사이의 독립성과 무모순성에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기하연구에 대한 순수한 논리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런 논리적 접근은 이미 Pasch와 같은 이탈리아 기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들은 기하를 여전히 실제 공간의 학문으로 간주했고, 논리와 엄격한 논증은 공리의 선택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문제들에 대한 안전 장치로 보았다. 반면, Hilbert는 기하의 엄격한 논리적 연구를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기하의 정리는 점, 선, 면이라는 용어가 책상, 의자 그리고 맥주컵으로 대치된다고 해도 타당하게 성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중요한 공적은 이런 철학적 문제를 무시한 그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하기초론에 대한 연구는 공리체계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연구였고, 이 공리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또는 우리가 직관하는 공간 또는 공간의 대상들을 적절히 또는 최적으로 기술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기하는 현실과 무관한 순수수학이 되었고, 기하가 실제에 응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공리는 이제 더 이상 명백한 진리가 아니고 이제는 그것의 진리성을 묻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Hilbert의 관점은 1920년대에 형식주의 기초론에 관한 접근법을 형성했으며, 그는 수학적 방법에 관한 확실성을 확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따라서, 형식주의자들은 참된 수학은 형식적 체계의 모임이며, 각 체계는 자신의 수학에 따르는 자신들의 논리를 세우고, 각 체계는 개념, 공리, 정리 등을 이끌어 내는 자신의 규칙, 정리 등을 가지며, 이들 연역적 체계의 각각을 발전시키는 것이 수학의 과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Hilbert에게는 특히 이런 형식적 체계의 안전성에 대한 확증을 위해서, 이들 공리로부터 유도되는 정리들 사이의 무모순성과 완전성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1931년 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들은 이런 형식주의자들의 의도가 충족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형식주의자들의 의도도 무산되었고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두 반박되어왔다. 수학의 모든 정리들은 형식적 체계의 정리들로 표현될 수도 없고 체계 자체의 안정성도 보장될 수 없으며, 더욱이 아무 의미가 없는 기호들의 연쇄로서의 수학은 생명력이 없으며 특히 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더욱 의미가 없다.
(3) 직관주의
직관주의는 수학이 직관을 근원으로 인간의 정신 활동에 의해 구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직관주의의 창시자들인 Kant, Kronecker, Borel, Lebesque, Poincaré 등은 수학의 논법과 논리적 접근 방식에 많은 비판을 했고 새로운 원리들을 제안하였으나 그들의 공헌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다. 이들의 생각을 종합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네덜란드의 Brouwer였다. 그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직관주의 철학을 제안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수학적 대상은 기본 직관을 근거로 구성적 방법을 통해 확립되고 제한된 논리에 의존해야 하며, 수학적 직관이 이론 형성의 기반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과 이론을 창조하는 데 인간의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Brouwer는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으로부터의 공간형태의 지각이라는 관점을 부정하고 시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내적 형태의 지각을 중요시하였다. 그는 수학이 순수하려면 이런 내적 경험은 우리의 정신 속에 현존하는 모든 경로와 무관한 선험적인 것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이를 기본 직관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수학적 사고는 경험과는 독립적인 기본 직관을 근거로 스스로의 세계를 정립해 나가는 정신적 구성의 과정이다. 이 때 구성이라는 것은 즉각적인 확신에 의하거나 유한 번의 단계로 그 실제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하거나, 또는 임의로 원하는 정도의 정확성으로 그들을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자연수 전체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자연수 전체가 실체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수 전체는 잠재적인 무한집합일 뿐이지 실제적 무한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수 전체의 집합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공리로부터 결론을 연역해내는 수학적 작업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수학의 궁극적인 원리는 논리의 법칙이 아니라 수학적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논리법칙이 당연히 수학적 추론으로부터 귀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직관주의자들은 인간 정신이 수학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닌 것은 진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Cantor의 무한 집합, 초한수이론, Zermelo의 선출공리, 실무한 집합을 사용하는 해석학의 부분들을 배격하며, 심지어는 우리가 고전논리에서 존재증명에 흔히 사용하는 배중률과 더불어 삼분법을 배격하였다. 그 결과 고전 수학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고도로 추상화, 형식화되어 가는 수학에 대한 일종의 비판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직관주의자들이 근거로 하는 개인의 주관적 직관이 어떻게 객관성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 현대 수리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런 절대주의적 관점은 현재에도 많은 지지자들을 갖는다. 이들은 과학적인 일반화는 오류 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수학과 논리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필연적이고 확실한 것으로 본다. 수학적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근거는 연역적 방법에 대한 믿음 즉, 수학의 공리가 진리라는 믿음과 논리적 추론 규칙은 진리를 보존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Euclid를 넘어서, 현대의 수학적 지식은 기본적인 보편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공리들의 집합을 가정하는 것에 의존하는 많은 영역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군이론이나 집합론의 공리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현대의 집합론자들은 Zermelo-Frankel 집합론에 새로운 공리들을 첨가하고 그 부가한 공리들을 본질적으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의 실제적인 기초로 여기며 그에 따른 결과들을 탐색하고 있다. Aristotle이래로 모든 논리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철학자들이 간주해 온 배중률의 법칙조차도 현대의 수학자들과 직관주의자들에 의해 도전 받고 있으며, 그 자명성과 논쟁의 여지가 없음에 대한 의혹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에 대한 확실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 절대주의적 수리철학 또한 모두 실패하였고, 수학의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Ⅲ. 사회적 구성주의의 이해
수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주의적 관점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의 근본 취지는 공리들의 가정된 진리 문제와 수학적 증명이 기초하고 있는 기본 논리에 관련된 것이다. 수학의 진리와 증명은 연역과 논리에 의존하는데, 그런 논리 자체에 대한 기초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이런 부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학적 진리에 대한 여러 가정들의 집합을 더 증가시켜야만 하고 또한 확고한 기초가 없는 가정은 직관, 관습, 의미 또는 무엇에서 파생되었든지 오류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의 확실성을 찾고자 그리고 수학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실패에 의하여 수학적 지식의 절대적 관점을 부인하고 오류주의적 관점을 인정하는 사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오류주의적 관점은 수학적 지식이 오류가능하고 수정가능하며 결코 개정과 수정을 초월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수학적 지식에 대한 신념은 산산이 부서진 것인가? 이에 대해 Ernest는 절대주의에 대한 반대를 확실성과 진리의 왕국에서 수학을 추방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진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수리철학의 변화는 이에 앞서는 철학의 급격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20세기의 철학은 Dewey가 ‘철학의 혁명’이라고 일컬을 만큼 전통철학으로부터 급격한 이탈과 변모를 이루어 왔다. 진리와 인간 이성에 대한 전통 철학적 관념을 거부하고 전통철학의 종말을 고해 온 현대철학의 모든 유형들을 총칭하여 후기 현대철학이라고 할 때, 이러한 철학은 확고 불변한 진리에 대한 도전이고 지식의 상대성을 주장함으로써 회의주의의 성격마저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의 이면에는 사회 문화적 산물로서의 지식을 형성하고 창조해 나가는 인간 주체성의 중요성, 협동적인 지적 탐구와 대화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동 과정에서 비판적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 개인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힘으로서의 사회 문화적 전통과 환경의 중요성, 또한 그런 사회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는 바탕으로서의 인간의 도덕적 선택과 관여의 중요성에 대한 깊고도 새로운 인식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변화가 수리철학에도 스며들어서, 우리는 수학의 확실성과 진리의 기초를 결정하고자 했던 기초주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수학의 확실성과 진리성을 거부하는 오류주의를 맞았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과 이데올로기적 변환에 따라 나타나는 수리철학의 대표적인 조류가 Lakatos, Tymoczko로 대표되는 준경험주의, Kitcher와 Aspray를 위시한 무소속주의(maverick), von Glaserfeld가 주장하는 급진적 구성주의, Ernest, Bauersfeld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수학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학문의 연구 경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사회학의 사회구성주의, 문화연구와 민속지학, 기호학, 수학사 등을 연구해서 수학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수학에서도 이제는 수학의 본질에 관한 논의가 확실성, 객관성에서 지식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한 진리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수학을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창조되고 진화되는 사회적 실체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학의 본질이나 기초에 관련된 문제보다는 지식의 진화 과정과 인간이 지식을 알게 되는 과정을 고려하는 인식론의 흐름이 후기 현대철학에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상대주의적인 후기 현대철학에 따른 수리철학의 여러 사조들을 통합한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사회적 구성주의의 기초
사회적 구성주의는 수학의 본질을 규정하는 규범적 수리철학이 아니라 적절한 판별 기준에 따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적 수리철학이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주의적 존재론을 채택한다. 공유된 접근을 가능케 하는 외양들을 뒷받침하는 세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확고한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간이 구성한 실체는 그것이 결코 그것에 대한 ‘진리의 상’을 제시할 수는 없더라도 존재론적 실체에 맞추기 위해 항상 수정되고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지식에 대한 우리의 모든 표상은 단지 불완전한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지식은 다른 영역에 있는 하나의 극한점에 수렴하는 그러나 도달하지는 못하는 일종의 수열의 부분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수학을 외부 세계에 대한 발견이 아닌 사회적인 구성으로 고려하며, 수학의 객관성의 근거를 사회적인 언어 관습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 규칙과 협약이 수학의 진리를 확립하고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Wittgenstein의 수리철학과 수학적 지식은 수학적 발견 논리에 의해 추측과 논박을 통해 성장한다는 Lakatos의 준경험주의로부터 오류주의적 인식론을 받아들여서 정교화하고 종합한 것이다.
(1) Lakatos의 준경험주의
준경험주의는 Lakatos가 주창한 수리철학에 부여된 이름이다. 그는 수학을 인간의 창조 활동으로 볼 때, 증명과 반박의 방법을 수학적 발견의 아주 일반적인 패턴으로 보았다. 그는 이 방법의 출현을 Hegel 철학이 절대주의와 근본적으로 단절시킨 철학에서의 새로운 접근의 시기이며 또한 뉴턴의 광학의 붕괴와 비유클리드기하학의 발견이 절대주의를 붕괴시킨 시기인 1840년대로 보고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수학 이론의 성장을 뒷받침한 비형식적인 수학적 발견의 방법인 증명과 반박의 방법에는 간단한 패턴이 있음을 고찰하였다. 그러한 패턴은 원시적 추측→증명(원시적 추측은 그것들의 보조정리로 분해하는 개략적인 사고실험 또는 논쟁)→전면적인 반례(원시적 추측에 대한 반례)의 출현→증명의 재점검(전면적인 반례가 국소적 반례로 되는 거짓인 보조 정리의 구별)을 거쳐서 개선된 추측인 새로운 정리가 원시적 추측을 대신하게 되는 증명 분석의 본질적인 단계들을 포함한다. 이 외에도 빈번히 나타나는 표준단계들이 더 존재한다. 즉, 새롭게 발견된 보조정리 또는 새로운 증명에 발생된 개념이 다른 정리들에서도 사용되는지를 알기 위해 다른 정리들이 증명이 조사되는 단계, 지금까지 인정된 원래의 추측과 지금 반박된 추측들의 결과들이 점검되는 단계, 반례들이 새로운 예들로 전환되고 새로운 탐구 영역이 개방되는 단계 등이다. 이 단계들은 역사적 패턴에 맞추어 볼 때, 다소 벗어나는 것도 있고 순서도 다소 변경될 수 있다. 이 단계들이 의미하는 바는, 수학은 인간의 활동이며, 인간 활동의 산물인 수학은 살아 있고 성장하는 유기체가 되어 그것을 생산해 내었던 활동으로부터 어떤 자율성, 즉 그 자신의 자율적인 성장법칙, 그 자신의 변증법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Lakatos에게는 이와 같이 그의 발견술 또는 수학적 발견의 논리가 핵심적이다. 이는 수학의 역사, 방법론 그리고 변증법적인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수학적 발견의 논리는 추측과 비형식적 증명이 제시되는 순환적인 가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응해서 추측 또는 증명의 비형식적 반박이 제시된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것은 가정된 문제와 비형식적 이론의 변경 가능한 개선된 추측 또는 증명으로 유도된다. 이런 절차들이 반복되면서 수학은 계속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학적 지식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 추측과 반박에 의해 성장하는 가설에 불과하며, 반박되지 않을 때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절대주의적 관점에서는 공리인 기초명제로부터 연역적 증명에 의해 정리로 진리값이 전달되는 반면, 준경험주의에서는 수학의 연역 체계에서 가설은 기초명제를 설명하고, 진리값의 흐름은 경험적인 기초 명제로부터 허위성의 재전달 원리에 의해 가정을 향하며 이때 중요한 것이 비판적 논리이다.
Lakatos는 이와 같이 증명과 반박의 방법을 수학적 발견의 동인으로 강조함으로써, 수학의 인간적인 측면 즉, 인간 활동으로서의 수학을 강조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수리철학과는 명확히 분리된 새로운 수리철학을 제시함으로써, 이전에 수학의 비형식적 측면을 무시하고 수학의 형식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표출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2) Wittgenstein의 수리철학
Wittgenstein은 수학은 언어 게임들의 복합체이며, 계속적으로 새로운 언어 게임들이 발명되고 첨가된다는 것을 가정한다. 수학의 언어 게임은 형식적 수학 체계뿐만 아니라 비형식적 수학의 실제들을 구성한다. 이러한 수학에서의 언어 게임은 생활양식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순수히 언어적 활동만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생활양식은 그 자체의 목적, 암묵적 규칙, 행동 패턴, 언어적 관습 또는 언어 게임을 가진 확립되어 있고 살아 있는 인간의 사회적 실제를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수학에 대한 개념화는 계속 발전되었고 그의 후기 철학에서는 수학의 규칙은 단지 수학자들에 의해 동의되거나 거부되는 것이 아님이 강조되었다. 오히려 수학의 규칙은 인간의 사회적 활동의 핵심과 생활 양식에 깊게 침투되어 있으며, 하나의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각 단계마다 독립적인 판단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전체적인 인과 관계에 따라 실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규칙들은 각 단계마다 마음대로 채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수학관에 따른 수학적 지식의 객관성이나 확실성에 대한 그의 관념은 전통적인 절대주의 관점과는 아주 다르다. 그에 따르면, 수학적 지식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러한 지식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언어 게임들과 생활양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어 게임과 생활양식에 대한 가정이 수학적 지식의 일치된 기반을 제공하며, 수학적 지식을 사회적인 것으로 따라서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으로 만든다. 따라서, 수학적 지식의 진리성은 사회적 동의 여하에 달린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동의는 생활 양식을 공유하는 것이고, 생활 양식은 공동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에 기초한 일단의 사회 언어적 실제를 의미하며, 어떤 의미 있는 언어사용에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학과 논리의 진리는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용어의 언어적 규칙과 문법뿐만 아니라 증명을 지배하는 규칙에 의존한다. 이러한 기초 규칙은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한다. 만약 어떤 수학적 명제가 기초가 되는 게임 규칙에 모순된다면, 우리는 그 결과들을 거부하며, 어떤 특별한 이유로 그 게임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그 기초가 되는 규칙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또한 수학에서의 증명은 하나의 대화이고, 초인간적인 객관적인 구조가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만든 절차이며, 증명의 핵심적인 역할은 설득하는 것이고 논리적 구조는 단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수학적 지식은 인간의 설득과 동의에 기초하며 이는 우리가 언어적 관습이나 규준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수학적 지식의 논리적 필연성은 우리의 사회 언어적 실제들에 내재된 언어적 관습이나 규준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언어적 실제들 또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규준들이 반드시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2.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지식의 창조
사회적 구성주의는 수학적 지식의 정당화보다는 발생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 발생 과정을 언어 관습을 기초로 하는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의 경신․순환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개인의 창조에 의한 새로운 수학적 지식이 객관적 지식이 되는 것은 주관적 지식으로부터 공표를 거쳐서 Lakatos의 발견술에 의해 조사와 비판의 과정을 거쳐 인정된 후이다. 이 때 객관성의 기준은 공유된 수학적 지식, 궁극적으로는 공유된 언어에 대한 지식 즉, 언어 관습에 의존한다. 한편 각 개인은 수학을 학습함으로써 객관적 지식을 내면화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주관적 지식으로 삼는다. 그리고 다시 이 지식을 사용하여 개인은 새로운 수학적 지식을 창조하고 공표한다. 이로써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 사이의 순환이 완성된다. 이와 같이 주관적 지식은 현존하는 지식의 재창조와 유지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학적 지식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필요하다. 반면 객관적 지식은 이러한 주관적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된 하나의 형식화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변성, 영구성, 필연성 등 절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성이란 사회적 관습에 의한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1) 객관적 지식의 의미
수학에서의 객관성은 일반적으로 진리라고 인정된 기본 공리와 추론규칙에 의한 증명에 의존하며, 증명에 의해 정당화된 수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최종적이고 수정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류주의적 관점은 수학적 지식의 정당화의 수단인 증명의 규준이 결코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는 충분하다”는 것이며 그것들은 영원히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수학적 증명은 그것이 증명의 명백하고, 객관적인 논리적 규칙들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들, 특히 수학 공동체의 적절한 대표자들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적절히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적 지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명의 규준들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에 의존한다. 이러한 메타지식은 역사적 위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수학적 지식 또는 증명의 규준이 임의적, 비합리적 또는 비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수학자들은 그들의 가장 전문적인 판단과 몇몇 명백히 진술된 규칙들에 기초하여, 합리적인 공공의 비판을 견뎌내는 것만을 수학적 지식으로 인정한다. 더욱이, 전문적인 판단과 사용되는 규칙을 적용하는 데는 한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의 연속성이 있고 어떤 변화도 그 자체가 공동으로 논의되고 정당화된다. 수학적 개념, 정의, 정리, 증명, 이론, 증명 규준들은 성장하고, 변하고 때로는 엄밀성과 증명의 규준들이 변함에 따라 시간의 긴 통로를 지나면서 폐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들의 “객관성”은 실제적으로 상호주관적이며, 시간과 공동체에 의존되며, 역사적 연속성과 전통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관점들을 통합한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객관성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근거를 가지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Ernest는 수학적 지식의 창조 과정에서 주관적 지식은 의식 경험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객관적 지식은 상호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인 결과물로 제시되는 수학적 이론과 실제적으로 수학자들의 활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비형식적 수학적 이론, 공리, 가설, 증명을 포함한 Popper가 인정한 모든 객관적 지식과 암묵적인 지식을 포함한 언어사용에 의해 공유된 관습이나 규칙으로 이루어진다. 객관성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우리의 신념 속에 내재된 실재감은 외부 세계가 아닌 사회적 관습에 기초한 신념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이란 어떤 개인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나 기호에 좌우되지 않는 모든 개인에게 공유될 수 있는 신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마치 외부 세계에 있는 대상과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객관적 지식은 문화와 같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진 규칙에 적합하게 자율적으로 발달하며, 개개인의 임의적 생각에 의존되지 않는다. 객관적 지식과 규칙은 개인의 밖에 있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므로, 그것들은 대상과 같은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객관성의 기초는 자연 언어의 공유된 지식에 있는바, 자연 언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많은 암묵적인 지식의 획득을 포함하며 이러한 지식의 일부가 수학 논리적 추론과 적용의 기초가 된다. 또한 의사 소통의 전제가 되는 언어 규칙과 관습이 수학적 지식과 대상의 객관성의 기초를 이룬다. 수학적 지식의 전제를 언어 관습과 규칙에 둔다고 하는 의미는 수학적 지식 전체가 이들 전제로부터 직접 유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기초가 언어 용법에 고유하다는 것이며 이 기초 위에 수학적 의미와 지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점점 더 새로운 언어 게임이 발달되는 것과 같이 전문가들이 동일한 자연 언어의 기초에 의존하면서 형식적 비형식적인 수학적 대화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언어 관습은 일상의 수학적 지식에 안전한 기초를 제공해 주는 반면, 언어 관습은 시간에 따라 발달하기 때문에 수학에서의 변화의 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학적 지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오류 가능하고 수정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수학의 객관성이란 지식과 대상의 존재성에 관하여 상호주관적인 동의가 있고, 이 존재성이 개인의 주관적 지식에 독립적인 자율성을 가진다. 이러한 수학적 지식의 객관성은 ‘자연 언어’의 공유된 지식에 근거하며, 또한 수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아는 논리의 사용 또한 엄격한 언어 규칙을 따르며, 이러한 자연 언어의 기초에 의존하면서 수학자들은 형식적이고 비형식적인 수학적 대화를 확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2) 주관적 지식의 의미
경험론적 관점에 의하면, 주체는 백지 상태이고 점차적으로 지식은 경험과 교육에 의해 새겨지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주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정신에 새겨질 수 있는 지식의 보편적인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며, 오로지 그들이 알고자 하는 행동적 노력을 통해서 창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주관적 지식은 유입되는 감각 자료와 직접적인 활동을 통한 외재적 세계와의 상호 작용의 바탕 위에서 획득되지만, 이런 경험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은 과학이 실험과 관찰의 기초 위에서 이론적인 지식을 창출하듯이 수학에서도 경험 세계를 바탕으로 가설 연역적으로 생성된다. 즉, 개인의 정신 활동에 의해서 일련의 경험 속에서 추측하고 패턴을 예상하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 경험 세계를 체계화하는 이론을 구축해 가고, 이러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되면, 계속적인 추측에 의해 대체되고 검증된다. 이 이론의 기초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기존의 이론이며, 이론의 형성 과정은 순환적이다. 이러한 개인의 주관적 지식의 성장은 다른 사람 그리고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형상화하고 이 형상화는 언어적 공동 사회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일종의 강제성 즉, 공유된 언어적 규칙과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과 사회에 적합성을 띠게 된다.
사회적 구성주의에 의한 이러한 지식관은 ‘지능은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세계를 조직한다’는 Piaget의 생각이나, 이를 바탕으로 지식은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되며, 인식 기능은 적응적이고 경험적 세계의 조직에 기여하며 존재론적 실재의 발견이 아니라는 급진적 구성주의의 지식관을 보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주관적 지식이 어떻게 합의의 과정을 거칠 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회적 구성주의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기초가 되는 점을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출생 순간부터 외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로부터 감각 자극을 받고 상호작용하며, 이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주관적 이론을 형성하고 계속적인 검증을 해 나간다. 둘째, 언어의 획득을 통해서 공유된 사회적 맥락과 물리적 맥락 안에서 다른 개인들과의 의사소통을 하며, 이를 통해 주관적 이론이나 규칙의 개인적 표상, 공유된 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협약이 구성된다. 따라서, 지식은 단순히 획득, 학습,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추론된 규칙과 강제성을 가진 개인에게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기초로 개인의 창조적이고 주관적인 지식이 구성 또는 재구성되어가는 것이다.
수학적 지식 또한 이러한 관점을 거쳐서 구성되며, 이렇게 발생된 수학적 지식은 개념, 용어 및 이들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이는 일반화, 추상화, 실재화하는 수직적 과정과 정교화, 세련화하는 수평적 과정을 거쳐서 수준별로 계층화하는 속성을 가지면서 좀더 구체적인 수학은 좀더 추상적인 수학의 기초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해 간다. 따라서, 수학의 주관적 지식은 물리적, 사회적 세계의 강제성에 따르는 개인의 자유로운 구성이며, 수학의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의 기초 위에서 사회 구성원의 의미, 상호작용, 규칙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자율적으로 창조되고 재창조된다.
(3) 대화의 역할
사회적 구성주의는 이와 같이 수학을 사회적인 구성으로 보고 특히 수학의 인식론적 기반을 언어로 채택하여 수학을 대화와 변증법에 비유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대화를 사회적 구성주의 수리철학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관념으로 채택하는 근거는 근본적으로 생활양식에 내포된 대화적 언어 게임에 근거하는 의미, 지식 그리고 수학의 사회 이론에 대한 기반을 제공하는 Wittgenstein과 수학적 발견의 변증법적 논리를 제공한 Lakatos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근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화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과 인식론에서 사용되어 왔는데, 그 중 Socrates는 대화를 진리를 밝히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현재에도 많은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이 대화를 중요한 인식론적 관점으로 채택해왔다.
수학에서의 증명, 수학적 지식의 발생의 본질과 메커니즘 그리고 확실성에도 대화와 변증법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수학의 증명은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했는데, 이는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환경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 문화는 토론과 변증법적 추론을 광범위하고 핵심적으로 사용했다는 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이미 고대 그리스에 여러 색조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초기의 의미로는 변증법은 형이상학의 특징이고 ‘논의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논의 방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구성주의는 논리적 수학적 증명의 시작과 그것의 현대적인 발달은 수학적 증명의 뿌리가 변증법, 인간의 대화 그리고 의사 소통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화를 인식론적 기반으로 택함으로써 수학적 지식이 사회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앎과 의사 소통의 행동 속에서 발생됨을 설명한다.
3. 사회적 구성주의와 수학교육
사회적 구성주의에 기초한 수학 교수 원리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학습자의 의미와 사전 지식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수학의 지식과 수학의 이해는 의미 형성에 의존하므로 학생들의 학교 밖의 지식의 가치 또한 고려해서 그들의 아이디어, 해석, 방법 그리고 학교 외적인 문맥과 의미 있는 세계들을 기술하게 함으로써 여러 어휘와 용어에 관련된 의미들을 확장시키는데 관심이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한 아동 나름대로의 수학적 이론을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아동의 수학적 방법들을 기초로 협의와 대화를 통한 수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학습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알고리듬과 표현 기호법 등을 개발하는 교수학적 상황을 제공해야 하며, 수학의 일반적인 정의와 기본적인 준거를 명백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수학의 지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화와 변증법, 즉 언어가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은 수학과 수학교육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지식을 사용해서 수학적 지식을 학생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수학적 지식의 주장들을 비판하고 정당화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수학 학습 대화를 조정하고 지배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수학의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의 사회적 구성 과정과 대화의 역할과 전문적인 수학자의 세계와 학교수학의 세계와 관련시키면 그림 1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수학과 응용의 분리불가능성 그리고 동기와 적절성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수학의 여러 개념, 방법 그리고 여러 도구들을 그것들의 역사적 기원과 문화적인 기원 그리고 그것들의 도움이 되는 문제들, 현재의 사용과 응용, 학습자의 생활과 관심에 직접적인 의미가 있는 사용 문맥들에 비추어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동들은 나름대로 수학의 창조자로서의 그 역할을 의미 있게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Ⅳ. 맺으며
이 글에서는 수학교육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서 현대수리철학과 이에 대한 비판으로 발생된 사회적 구성주의와 그에 따른 수학교수에의 시사점을 살펴보았다. 수학의 확실성과 그 존재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사라지고 이제는 수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구성물로 생각하는 수리철학의 사조가 출현하였다. 수학이 오류없는 객관적 지식의 조직체라면 수학교육에서는 단지 수학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학이 오류 가능한 사회적 구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수학은 탐구의 과정일 뿐 아니라 연속적으로 확장하는 인간 창조와 발명의 장이며 완성된 산물이 아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관점에 따르면, 수학을 지도하는 목표는 학습자가 스스로의 수학적 지식을 창조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수학 학습에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수학 학습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주의 관점을 포기하고, 오류주의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단지 수학적 지식의 절대적인 확실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절대주의 관점이나 오류주의 관점이나 수학의 특징적인 측면을 적절히 부각해서 수학에 대한 규정 또는 설명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리철학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수학의 본질과 인식 및 수학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신중한 배려가 필요하며, 우리는 지금까지 절대주의 관점에서 수학의 외양인 형식과 논리 연역적인 측면만을 주로 취급해 왔다면, 앞으로의 수학교육은 그 과정적 측면인 비형식적인 수학에 대한 보다 더 많은 관심과 학생들이 직접 수학의 비형식적 과정에 참여해서 형식적인 수학에 이르는 경험을 통한 수학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해 과정이 절대적으로 중요시되어야 하며, 수학의 역사 문화적 측면 또한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수학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비판 정신과 반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교수학적 상황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전체적인 변화를 우리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수학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을 학교수학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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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제 2 회 Math Festival 프로시딩 원고 < http://www.mathlove.org >
원문 : http://www.mathlove.org/doc/mf2/507정영옥-사회적구성주의와수학교육.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