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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의 산 응봉산에서 방치와 가꿈을 생각한다
1. 일자 : 2010. 7. 3 (토)
2. 장소 : 응봉산 (999m)
3. 행로 및 시간
[덕구리 들머리(
4. 동행 : 홀로, 다솜산악회
< 응봉산 산행을 준비하며 >
장마가 시작되었다. 내가 매주 산에 간다는 것을 아는 동료들은, “이번주는 산에 못 가시겠네요?” 하고 인사를 한다. 내가 “비 때문에 산에 못 간 적은 극히 드문니다. 이번주도 벌써 행선지를 예약해 놓았습니다”하고 대답하면 모두 의아해한다. 그러나 사실이다. 난 일년에 평균 60번 산엘 가는데, 일년이 52주이고 기타 휴일에 산을 찾는다면 대략 수긍이 가는 수치일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정말 비 때문에 산에 못 간 것은 아마도 3번이 넘지 않을 것이다. 장마철이라 하더라도 주말 이틀 내내 비가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비가 내린다 해도 중간에 2-3시간은 잠시 멈추기 마련이고, 그 때를 이용하여 근교 산을 오르면 되니 내가 영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금주도 주중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주말 일기예보는 흐리기만 한다니, 하반기 첫 산행은 장거리로 계획하고 이곳 저곳을 뒤적이다, ‘응봉산’을 선택했다. ‘다솜산악회’를 통해 예약을 했는데 처음 같이 하는 산악회라 첫 만남에 대한 설레임이 들었다.
응봉산 지도를 들여다 본다. 산은 강원도 삼척 땅과 경상도 울진 땅을 구분짓는다. 삼척에서 산에 오르는 길은 얼마 전 ‘1박 2일’ 행선지로 TV에 방영된 덕풍계곡을 지나는 용소골 코스가 일반적인데 코스가 무척 길고 험하다 한다. 울진에서 오르는 길은 덕구온천에서 시작하여 온정골을 거쳐 정상을 왕복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며 노천 온천으로 유명한 ‘원탕’과 용소폭포가 코스의 백미라 한다. 응봉산의 응자는 ‘매’의 의미다. 전체적인 산세가 비상하는 매의 형상을 닮았다 한다.
산악회 안내 사이트에서 보니 사곡리에서 재량계곡을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온정골로 하산하는 코스와 덕구온천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왕복하는 코스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앞 코스는 6시간이 넘을 듯하여, 5시간 내외가 소요되는 능선으로 올랐다 계곡으로 하산하면 환상의 코스가 될 듯하여, 마음 속으로 덕구온천을 들/날머리로 정하고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 희망사항 >
응봉 산 들머리 향하는 길을 산악회에서 어디로 잡을지 궁금하다. 울진으로 향하는 길은 영주, 봉화를 거쳐야 될 것인데, 이곳은 부모님 고향땅이고 봉화에서 울진으로 가는 길에는 내 외가 집이 있고, 그곳에는 지난 몇 년간 뵙지 못한 외삼촌 내외가 살고 계시다. 어릴 때 외가를 방문했을 때 늘 따뜻하게 반겨주시던 외숙모의 모습이 그립다. 비록 길이 달라 직접 찾아 뵙지는 못하지만, 지나는 길 차창에서나마 그분들의 자취를 느껴보고 싶다.
울진은 동해를 기점으로 본다면 바다에 가까운 곳이지만 내륙의 길을 택한다면 오지 중에 오지다. 대학시절 새벽에 출발하여 오후에 울진에 도착한 기억이 있어, 오가는 길이 녹녹지 않을 것 같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산행에 임하고 시간 여유가 된다면 덕구온천에서 온천 물에 목욕을 즐기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에 쓴 글인데 실제 산행은 계획과 많이 어긋났다.)
< 삼척 가는 길에 >
산행 전날까지 비가 많이 내린다. 토요일 오후부터 비가 갠다하는데 기상청(구라청의 오명이 있음) 예보를 믿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선다. 금요일 오후 다솜에서 전화가 왔다. 비 예보에 인원이 많이 줄 것 같은데, 갈 것이냐고 물어본다. 망설임없이 간다고 했다. 어짜피 난 혼자이니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자그만 힘이라도 보태고 싶고, 경험상 날씨가 궂으면 인원이 줄어 버스에서 여유롭게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비가 온다해도 계속 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 비는 오지 않지만 날씨는 잔뜩 흐려있다. 복정역에서 다솜과 첫 대면을 한다. 대장은 얼굴이 동안이고 머리도 길게 늘어트리고 있어 나이는 분간이 되지 않으나 미남형의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출발 전 예상대로 버스에 자리가 많이 비었다. 뒤편에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버스는 원주부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탈 것으로 예상했는데 강릉방향으로 직진한다. 출발전 그리던 봉화 방향은 물 건너 가 버렸다. 아쉽다.
새벽 월드컵 축구를 보다가 아침을 맞았는데, 우루과이와 가나와의 경기는 연장 후반 말미가 압권이었다. 전후반 90분과 연장 30분도 모두 지나고 추가 시간에 가나가 코너킥 찬스를 얻었고, 시간에 쫓겨 찬 공이 몇 번에 공방 끝에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루과이 선수 하나가(우리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었던 그 친구) 손으로 골을 막았고 그 선수는 퇴장 당하고, 패널티킥으로 이어지고… 정말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극적인 순간이었다.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가나가 찬 패널티킥이 골대를 맞고 나오니, 고개를 숙이고 벤치로 돌아 가는 ‘우루과이의 영웅’은 관중들의 함성에 사태를 파악하고 환호하고, 이어지는 승부차기에서 승리의 여신은 우루과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잠이 확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감격에 겨워하는 우루과이 팀을 보니 저 자리에 우리 선수들이 있어야 하는 아쉬움이 더욱 크게 인다.
버스는 비오는 도로를 내닺는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느라 눈을 감았는데, 버스는 어느새 비가 흩뿌리는 동해를 달리고 있다. 짧게나마 숙면을 취했더니 몸이 한결 게운하다. 버스는 삼척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가서 덕구온천 부근 작은 언덕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대장이 비오는 날씨를 고려하여 덕구온천에서 출발하여 재량밭골을 지나 사곡리로 하산하기로 했단다. 온정골로 하산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곳은 유원지 길이란다. 다음에 오면 된단다. 또 아쉽다.
< 옛골능선을 따라 응봉산으로 >
하산길은 다르지만 그래도
들머리는 출발 전 점찍어 둔 옛재능선 길 초입에 섰다(
< 비오는 숲 길 >
출발 20분 만에 원탕분기점에 도착한다(
헬기장을 지나며부터 길이 좁고 가팔라진다. 그래도 다른 산에 오르막에
비하면 순한 편이다. 길가에 잘 생긴 금강송이 군락지어 있다. 밑둥은
검은색 느낌이 강한데 중간 이후로는 붉은 기운이 강하다. 누군가 그랬다. 솔의 푸르름도 좋지만 붉고 매력적인 껍질의 빛깔은 솔의 자랑인 푸름에 버금간다고, 한껏 물이 오른 짙은 주황빛이 내리는 비에 더욱 선명해진다. 이곳은
금강송의 본고장 울진임에 틀림없다. 좁아진 길을 따라 오르자, 검은
돌이 만들어주는 작은 쉼터에 도착한다(
< 금강송의 위용 / 고사목이 있는 풍경 >
본격적인 능선길로 접어 들었다. 옛재능선이다. 옛 사람들은 울진 땅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삼척으로 이동했나 보다. 길이 이름만큼이나 정겹고 순하다. 이제는 흔해진 금강송 숲 속에 간간이 고사목의 흔적이 보여 운치를 더해준다. 고사목 너머로 먼 산의 실루엣이 살아있다. 살아서 물오름을 과시하는 것과 죽어서 존재감을 잃지않는 것도 모두가 위대한 자연의 일부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 안개가 이는 옛재능선 길에서 >
점차 하늘이 열린다. 앞 산 저멀리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비오는 날에만 느낄 수 정취를 경험한다. 한 시간여, 습기와 무게에 짓눌린 힘겨움을 인내한 보상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산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선다. 지나는 길에 전보다 더 멋진 풍광들이 줄을 잇는다.
오르는 길 곳곳, 돌비석에 정상까지의 남은 거리가 새겨져 있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대략 5.7km 정도인데,
< 제 2헬기장에서 / 피어오르는 물안개 >
제2헬기장은 정말 너른 공간이었다(
어느 산에서와 같이 정상 부근은 된비알 오르막이다. 검은 숲을 지나 마지막 힘을 내니 응봉 산 정상이 나를 맞는다. 작은
헬기장 같은 공터 위로
< 응봉 산 정상에서 / 검은 숲에서 >
< 재량밭골을 따라 사곡리로 >
하산길의 이정표가 정확하지 않아, 망설이는데 후미대장이 길을 안내한다. 주위 표지판이 이 길은 무척 위험하지 다시 생각할 것을 경고한다. 길고 험하다는 용소골도 아닌데 웬 호둘갑일까 하고 잠시 의아해한다. 지도를 다시 본다. 북릉을 타고 1시간 여를 가면 삼거리가 나올 것이고 그곳에서 우측 계곡 길로 내려서면 될 듯하다. 중간에 재량밭골로 바로 빠지는 길만 조심하면 독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하산 길 초입 몇 발자국만에 조금 전 본 경고가 장난이 아니었음을 바로 직감한다. 사람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비에 젓은 나무넝쿨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아무래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것 같아, 잠시 망설이는데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다시 앞으로 전진한다. 좁고 검은 숲이 계속 이어진다. 몇 해가 묵어 합쳐졌는지 가름이 되지 않은 깊숙한 낙엽이 발목까지 잠긴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대장은 길 사정이 이런지 알고 이 길을 택했을까?
이런 험한 길에도 걷는 즐기움이 생기는 것은 꽃들 때문이다. 비탈진 소로 옆으로 원추리가 노란 꽃망울을 피우고 있다. 한여름 지리산 노고단에서 목격되는, 그러나 일반 산에서는 흔치 않은 귀한 꽃을, 응봉산은 힘겨워하는 네게 선물로 보내 주었다. 잠시 후 조금은 평탄해진 그러나 검은 숲은 더욱 울창해진 곳에 보랏빛 싸리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잎은 동물의 먹이로, 껍질은 섬유로 이용되며, 줄기는 연기가 나지 않아 땔감으로 이용된다는 꽃이다. 동물의 먹이감이 됨으로써 후손들을 넓게 퍼트리고 있나 보다. 한참을 더 내려서니 보랏빛의 우산 모양의 꽃, 산수국도 눈에 띤다. 모두 집에 돌아와 식물도감에서 이름을 확인한 것이지만, 이것을 인연으로 그들은 나와 보다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이다.
< 응봉산의 산수국 >
잠시 후 갈림을 만난다. 대장이 길을 헤맨다. 그 통에 흩어졌던 일행이 모두 다시 모인다. 모두들 걷는 속도들이 장난이 아니다. 워킹머신들 같다. 잠시 후 이정표를 만난다. 직진하면 덕풍마을로 이어지는 원래 생각했던 능선길, 좌측은 사곡리 길이다. 또 대장이 길을 헤맨다. 이 길이 처음인가 보다. 사곡리로 가잔다. 와 보지도 않은 길을 안내해도 되는가 모르겠다. 상세 지도도 준비 안했는지 나도 판단할 수 있는 갈림을 자주 헤멘다. 불평은 했지만 대세를 받아들인다. 길 사정이 평탄은 해 졌지만, 여전히 낙엽이 짙은 험로다. 습기를 머금은 낙엽길은 걷기에 미끄럽고 속을 알 수 없으니 꺼림직하다.
하산 길 출발 1시간 30분이 지나도 숲길이 계속되고 계곡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단조로움과 습기 많은 좁은 길에 힘겨움이 극에 달한다. 2시 30분경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자 물소리가 들린다. 재량밭골 계곡의 시작이다. 수량은 많지않다. 주변에 잔 돌이 많이 어수선하다. 길은 더 험해졌지만 변화에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느낌이다. 일행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물 한모금 마시는 사이 벌써 무리와 멀어졌다. 진짜 지독한 사람들이다. 출발 시 가이드는 3명이나 모두 제갈길을 갈뿐 일행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런 것이 무슨 안내산악회인지 모르겠다. 대장은 길도 잘 모르고, 안내를 맡은 자들은 자기들 길에만 신경을 쓰고, 3만원 남짓의 요금으로 큰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지만 오늘 같이 험한 길에는 세심한 안내가 아쉽다.
재량밭골 계곡 초입에 작은 협곡이 눈길을 끈다(
< 원시림 수준의 재량밭골 / 사곡리 무너진 돌과 벌통 >
기대가 없어지니 마음가짐이 독해진다. 홀로 서기로 한다. 거침없이 계곡을 건너고 주의하여 길을 찾는다. 재량밭골 계곡은 주변이 온통 원시림 수준이다. 어제 비가 왔는데도 수량은 그리 풍부해 보이지 않지만 마구 자란 나무과 풀들이 길을 막고 있고 수년간 쌓인 낙엽은 볼쌍사납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자란 숲을 원시림이라고 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보존해야 한다지만, 등산로로 만들었다면 지금 이곳의 상태는 보존이 아니라 방치 수준이다. 자연이 더 아름다우려면 때론 섬세한 인공의 손길이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지저분한 계곡길은
길이 평지 길로 바뀐다. 20여분을 걸어 내려가니 마을 어귀가 나온다. 곳곳에 돌 들이 무너진 낙석지대가 나온다. 특이하나 위험한 모습이다. 그 와중에도 부지런한 농부는 그 돌틈 사이에 벌집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한뼘의 땅도 놀리지 않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저 멀리 마을 어귀에 오전에 헤어진 버스가 보인다. 어스름해지는 저녁, 찬거리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 낯선 이방인에게 인사를 하는 수염이 막 돗아나는 학생에게서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왠지 모를 그리움과 막막함과 안스러움이 잠시 돌아서는 그 학생에게로 눈 길을 머물게 한다. 참 오랜만에 맛보는 느낌이다. 오래 전, 동네 어귀에서 당시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하고 바라 보던, 먼 곳에서 이사 온 동네 누님의 눈 길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에필로그 >
우여곡절 끝에 마친 응봉 산 등산은 자연의 방치와 가꿈에 대한 내나름의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시의 상태를 보존한다는 미명 하에 자연을 방치해 두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끌어 모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에게 개방했으면 세심하게 주위를 다듬어야 본래의 가치를 더욱 두드려지게 할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오지 산행에 적지 않게 당황한 하루였다. 어제의 분노가 하루가
지난 오늘은 많이 수그러졌다. 얼마 전 읽은 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