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모동 백화산 금돌성 답사 여행기
일전에 어렵게 찾아간적이 있었으나 초입에서 금돌성 안내 표지판을 보고 너무 큰
산성이라 다음날을 기약하고 돌아서 올라온적이 있는 곳이다.
백화산 금돌성은 아침일찍 산을올라 저녁까지 돌아봐야 할 대단히 큰 산성이다.
문헌에는 1500년 전 신라 29대 김춘추시대 쌓은 산성이라 접했지만 실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던 산성이다.
연휴를 이용 큰맘먹고 금돌성 답사를 계획, 어제 저녁 모동에 도착 1박을 하고 새벽에
짐을 꾸려 모동저수지를 지나면서 신선한 아침바람을 가르며 달려간다.
금돌성은 그 어느 산성보다 놀라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이다.
황산벌. 계백장군의 묘옆에 백제군사 박물관에는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000번지 에
금돌성이 있다. 태종무열왕이 진주하고 백제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금돌성에서 태종무열왕 이 소부리성으로 와서 의자왕의 항복을 받다 라고 황산벌 연역에 기록하고 있다.
무열왕이 친히 이성에서 김유신장군 휘하 5만의 신라군을 독려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신라시대 산성중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위치의 산성이다.
백화산은 백두대간 지맥의 명산으로 영남과 호서를 눌러앉은 옛 고을 상주의 진산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삼국통일 대업의 첫 꿈을 실현(660년)한 대첩지 저승골,
조선 임란(1592년) 구국 의병의 충혼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금돌성은 내. 왜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의 총 연장길이는 약 20km, 높이 4m,
폭 3.6m 석성으로 1500년의 오랜세월만큼 거의 모두 무너져 원형을 보기란 불가하다.
삼국사기 신라왕조신록, 백제왕조신록을 참고하자면
서기 660년 6월 21일 : 신라 태종무열왕 백화산 금돌성에 머물고 태자법민(30대 문무왕)
김유신 품일 흠춘 반굴 관창 등은 군사 5만과 백화산 금돌성에서 황산벌 전투에 출병하였다.
서기 642년 백제장군 윤흥이 대야성을 함락하고 김춘추의 맏사위 품석 죽죽 용석 등이
참살되자 백제를 고립화 하고 정벌 정책을 편다.
서기 645년 김유신이 상주장군에 임명되고 백제 정벌을 위한 출정함.
서기 649년 신라 28대 진덕왕 1년 김유신을 출정시켜 도살성에서 반전의 전기를 삼아 12성을 빼앗고 그 논공으로 김유신을 이찬벼슬로 올리고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서기 654년 3월 진덕왕이 죽고 김춘추가 신라 29대 52세의 나이로 태종무열왕이 됨(신라금성이찬
상주행군대총관 김유신은 이때부터 금돌성을 쌓고 백제공격을 완성함)
서기 660년 1월 태종무열왕은 상대등 금강이 죽었으므로 이찬 이며 상주행군대총관 인
김유신을 상대 등으로 신라대장군으로 임명함.
서기 660년 3월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신라왕자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3만 대군으로 백제정벌을 명함- (나중 설명을 참조 하시길)
서기 660년 6월 21일 태자법민에게 소정방을 영접케하고 태종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
품일 흠춘등과 정병 5만을 당군과 호응케하여 백화산 금돌성에 진주함.
서기 660년 7월 29일 백화산 금돌성에서 태종무열왕은 백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으로
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서 무열왕은 당상에 의자왕은 당하에서 술잔을 따루어 바치며
항복하고 제복감천을 당나라에 전첩을 알림.
이렇게 중요한 역사 고적지가 지금까지 왜 잊어져 있었는지 의문이 나시겠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필자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알리려고 한다.
백화산(해발 933m) 정상은 예로부터 '한성봉(韓成峰 큰 성이있는 산의 제 1봉)'이라 불렀고
명산인 만큼 반야사, 보문사, 용문사, 두역사, 진불암(1961년 발행 한 불교사전에
수록된 백화산에 있었던 절들) 등 수없이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왜놈들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백화산 정상의 봉우리 한성봉을
사로잡았다는 뜻으로 포석봉이라 개칭하고 표지석까지 세운다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왜놈들은 또다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던 백화산을 통째로 없애고 싶었을 것이다.
백화산의 도도한 역사와 기 는 일제를 압도하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충분하다.
때문에 백화산의 이름 자체를 지도상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 결과 지금까지 지명에도 없는 무명산으로 존속되어왔다.
아마 전국적으로 왜놈들이 지명을 바꾼 지역은 수 없이 많이 있지만 호적에서 지우듯이
지명 자체를 없애버린 일은 유일무이하게 이곳 뿐일것 이다.
그만큼 역자적으로나 역사정기로나 중요한 지역이라는 증거다.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져 있던 곳이다.
그러나 필자는 더 울화가 치미는 것이 있다.
사학자들이 이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백화산 금돌성을 모를리가 없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쉬쉬하며 지금까지 버려진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바로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사학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고 이00의 제자들이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송두리째로 바꾸어놓은 일본놈이 만들어 놓은 우리나라
역사기록을 일본인에 의해서 배우고 길러진 사람이다.
그는 해방이후 우리나라 사학의 최고 자리에 올라 모든역사를 왜곡 했고 그 왜곡된
역사책으로 우리들은 배웠고 또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 조직에서 눈에난 교수들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직업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눈치만 보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는법
순수 민간단체인 상주 "백사모"(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는 이렇게 얼룩진 역사를
가만 두지 않았다.
수십년의 꾸준한 지명찾기 운동을 전개했고 노력한 결과 마침내 2007년 12월 27일
국토지리정보에서 백화산이란 지명을 재정하고 포석봉이란 왜놈들이 붙인 이름을
한성봉으로 지명 변경 고시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
사학자들도 그어떤 관청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아니 바로 잡으려 마음이라도 가졌으면......)
그일을 백사모는 해냈다.
그들은 면이 너무 두꺼워 낮뜨거운지도 모르는가 보다.
이 당연한 결과를 왜 이렇게 힘들게 오랜세월을 지나야 했을까......
그것도 순수 시민운동으로...... 필자는 정말 말하기 싫습니다.
백화산 능선에 올라서니 산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1500년이나 지난 석재들은 방금 흩어놓은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너무도 깨끗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자연석이나 채굴한 그 자체로 쌓았던 석성임을
알 수 있었다.
원형을 보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또 기대한다. 혹시 발길이 닫지 않는 바위기초석에 원형이 남아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올랐을까......
나의 간절한 바램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정말로 바위석 위에 쌓여진 성곽이 완전하진 않지만 윤곽이 남아있는게 아닌가.
이정도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름대로 이놈들을 조합하여 어느새 눈으로 석성을 쌓고 있는게 아닌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내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 서성 거린다.
보시는 능선이 산성이 지나온 능선이다.
아직 산성을 반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시간은 정오가 가까워 오니
서둘러야 할것같다.
한 30분만 더 올라가면 정상을 밟을 수 있다.
그곳에서 준비한 점심을 맛나게 먹어야 겠다.
상주시는 이곳 금돌성을 꼭 복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규모만큼 복원비용도 많이 들어갈 것이며 고민할 것이다.
한번에 해결하려는 생각은 세월만 흐르는법. 장기간 10년으로 계획 한다면
서너명의 석공으로 충분히 복원할 수 있다.
나무는 자라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어느새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한다.
내년이라도 백화산 금돌성 복원공사를 착공하길 바랍니다.
금돌성 전경은 사진방에 있습니다.
9205. 10. 08 금성곽
첫댓글 하루 빨리 금돌성이 복원 되길 기원해 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잘봤습니다.어디서나 이렇게 수고 하시는분들이 계셔서 참 살맛나는 세상인거 같습니다. 목밑이 막히기도 하고 손끝이 떨리기도 하는 이런기분 으로 잘 봤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