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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자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 8,32-36)
*원래의 제목은 본문 맨 아래 있습니다. 큰 틀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란 생각으로 임의로 붙인 제목임을 앞서 밝힙니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인간을 볼 수 없어 고통을 나누고자 인간이 되셨다. 앞에서 나는 하느님은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사람에게 다 주셨으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느님에게 청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무엇을 가지고 계실까? 하느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무엇을 나누어 주시는 것일까?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은 다만 사랑이실 뿐이므로, 당신 스스로가 약하고, 가난하며, 괴로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베푸시는 것. 사랑하는 것. 당신과 같이 가난하게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을 보라! 당신은 그 하느님에게서 돈이나 성공, 그리고 특별한 은총(주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는 지위 같은 것)을 교묘히 얻고자 하는가? 십자가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나의 힘으로 힘을 내고 나의 기쁨으로 기뻐하십시오. 나에게는 그것 위에는 아무것도 당신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죽지 않도록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가 대신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과 같이 죽고 그분과 같이 괴로워하도록, 당신 스스로가 죽으셨고 괴로우셨던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은 그분처럼 사랑하고 믿는다는 단 한 가지다. 하느님의 약함은 외양간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시종일관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오래된 오해이다. 이단異端은 하느님은 실제로 전능하신데 겉으로만 약하신 체 했다는 것이다(가현설). 하느님의 전능을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이 주시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 세상에 제우스 신을 데려오는 것이 된다. 만약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에 벌어지는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점에서 전능하시지는 않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의 차원에서는 전능하시다. 그러나 힘에 있어서는 전능하시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하느님에 대해 예배한다. 사람들을 “무엇이든지 할 수만 있는 능력만 있다면....” 하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에게 투영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그렇게 생각하는가? 진정한 하느님은 어버이가 가지는 무한한 사랑의 힘과 같다. (개인 생각으로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그것이 어버이라 할지라도 비교 불가능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기에 하느님은 이미 전능하시지 않게 되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그분은 자원하여 자신을 제안하셨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하느님이 당신의 전능한) 창조력을 제안하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는 예측할 수도 없을 정도다.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는 새로운 요소를 가져온다. 자크 마르탱은 이렇게 말했다. “악이 생기는 과정에 피조물이 창조주다”. 즉 피조물이 사물을 만드는 자다. 이것은 하느님의 힘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끌어 낸다. 하느님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유로 친교하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이끌어지는 세계를 원하셨다. 이 얼마나 하느님다운 일인가!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무력함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해방시켰다. 즉 그리스-로마인들은 자연 특히 자연 현상을 신성하게 여겨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의지하고, 자연 현상을 인간의 주인으로 삼았다. 철학자 파스칼도 “하느님이 손수 우리에게 지배자를 부여하신다면 자연 현상은 틀림없이 그 지배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하시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다. 자연과 그 현상이 사람에게 공포와 압력을 가해 주인으로 삼도록 허락하도록 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자연과 그 현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는, 은혜와 축복의 메시지로 그분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신심 깊은 신자들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 성실하게 흠승하고 흠모해야 할 하느님의 손길이 개입하셨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당신을 치료해 주는 손에 키스하는 것과 똑같이, 때리는 손에도 정중히 키스를 하는 것이다. 극악한 범죄까지도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함으로써 그것을 신성시하게 되는 것이다. 불쌍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부인 역시 그랬다. 남편이 암살당한 것을 안 순간 최초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셨다”라는 것이라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정말 그렇다면 하느님은 잔혹하신 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렇게 잔혹할 정도로 위대하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태도를 제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두 가지 명제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이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이다
1.모든 것이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운명론 예정론 결정론은 어느 종교에서나 크나큰 유혹이다. 신을 안 믿는 사람만 결정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묘하게도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유물론자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섭리주의자와 손을 잡는다. 그리스도 신자의 대부분은 운명론자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에 모두 순명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은 어느 때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섭리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그러한 자연 현상 사건들을 전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창조적인 재능의 호소에서 그러한 것들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그는 자기 의지가 아니라 섭리께서 찾아왔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를 거절하거나 맞아들이거나 둘 다 모두 섭리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책임을 지는 삶을 살도록 하자. 섭리주의는 무신론과 같다. 사람은 자기가 섬기는 하느님 보다 월등할 때 무신론자가 된다. 하느님이 선을 행하신다면 하느님은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하느님이 어떤 특정 사건에서, 당신만을 특별히 보호하고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반대로 이웃을 희생시키는 것이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가 해방된 직후, 우리 집 근처에 있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특별한 감사 예식을 거행했다, 하느님이 그들의 수도원을 연합군의 폭격해서 보호해 주셨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수도원 둘레에는 집들만 폭격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사람을 맡기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람이 정한 법과 자유의 내맡기신 것은 하느님이다. 그러니 하느님이 항상 인간을 당신 뜻대로 섭리하시고 이 세상을 지배하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느님은 손수 창조하신 것들 특별히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반영된 것을 찾아보려 한다면 세상을 이야기가 어려우나, 만일 거기에서 사람의 의지의 결과를 본다면 모든 것은 명백해진다. 하느님은 악을 만드시지 않았다. 악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이 악을 만드시고 원하셨다고 믿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또 하느님은 악을 방임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은 악의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뿐 아니라. 악의 반대하신다. 악과 싸우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격려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미치는 데까지 악과 싸우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악 때문에 괴로워하신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죽는 것을 볼 수 없으셔서,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 고통을 받고 죽으셨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빈곤을과 불의와 악에 반대하여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아보도록 하셨다. 중립을 지킨답시고 악을 방임하는 많은 사람들 안에 당신의 모습을 심어 주시지 않았다.
하느님의 유일한 힘과 무기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이 사랑이 허약한 것처럼 여겨진다. 악은 세상에서 찬미를 받으며, 부유하고, 조직화 되었으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맨손으로, 미움도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때로는 혼자서 모든 것을 대적하여 싸우는 약한 어린이와 같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신다. “나는 땅에서 들어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 32).
하느님은 사람이 고통받고 질병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도록 하시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보속補贖,교정敎正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벌을 선고하는 검사와 사형 집행인과 같은 불쾌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버이도 자녀들이 잘 되라고 애정이 담긴 벌을 주지 않는가?” 하고 당신을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어린이와 같이 취급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른과 자유인으로 대해 주신다.
질병과 고통
보속이란 옛 유다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아직도 모든 종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상선벌악을 믿는다. 가톨릭 교회의 4개 교리에도 들어 있는 중요한 교리다. 고통과 불행은 죄가 있음을 의미한다. 성공회에서는 병자 기도를 “어떠한 질병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이 보내신 것임을 먼저 아시오”라는 말로 시작한다. 질병과 고통을 시련이라고 부르면서 이겨내려 하거나, 하느님이 우리의 성화를 위해 부여하셨다고 각인시키며 혹독함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인식은 급할 때 갑자기 하느님을 불러 모든 일을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여기려는 자세다. 하느님을 자신이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중개인이나 체념의 기회로 여기라는 태도인 것이다. 종교 제단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가보면 반드시 질병이나 사고가 하느님의 섭리라고 그 가치와 의미를 해명하는 수녀와 원목 사제를 만날 것이다. 질병과 고통을 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복음서를 주의깊에 읽지 않은 것이다. 복음서에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리스도가 병자를 고쳐 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11,9,1-3;11,4). 그런데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질병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위로자 치유자로 계시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하느님을 고통을 주는 이로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죽인 일이 없으시다. 진정한 하느님은 죽음 위에 군림하시는 주님이시다.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아들을 소생시켜 그의 어머니에게, 오빠를 소생시켜 그의 누이들에게, 딸을 소생시켜 귀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셨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네를 따로 떼어 갈라 놓기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하느님은 살인자다. 부고장에는 “하느님은 기꺼이 그 종을 불러 가셨다”라고 기록되는 일이 있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잔혹한 분이신가? 하느님은 기어코 그 아들을 그 어머니에게서 그 남편을 아내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일까?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인가?
그리스도는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며 슬퍼하셨다. 나인의 과부가 깊이 탄식하시는 것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도록 기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신자는 하느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대로 죽여 버린다고 믿고 있다. 전에 어떤 과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는 남편이 죽었을 때 신앙을 잃었다”라고 했다. 자기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적인 조문弔問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식물의 날 정도로 이런 말을 들었다. “하느님이 남편을 부르신 거예요, 그분이 데려가신 겁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많이 주시지요. 그래서 시련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야 말로 행복하고 감사해야하는 사람이에요.” 옛날엔 그런 말이 위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자유를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포악하고 잔인한 하느님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말을 우리에게 반감만 일으킨다. 사실 하느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죽음에서 소생 하느님은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들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다. 배우자 혹은 자녀를 당신에게 돌려 보내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단절시켜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 이 세상의 무질서 악 죄 등이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를 죽인 것이다. 우리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하고 싸우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악을 극복하고 악이 파괴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충분한 자원과 창조적 능력을 주셨다. 만일 화학 전쟁이나 원자 전쟁 생물학적 전쟁에 투자한 것과 똑같은 돈을 암과 모든 질병 연구에 썼더라면 암 퇴치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결과는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위대한 손길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는 연구하는 편이보다는 문제의 해결법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고에 의하면 사람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야 할 존재이고 하느님은 살리고 고치고 치유하는 분이심을 믿고 있기에 죽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인간의 신성한 의무라 생각한다.
캐나다에서는 결혼식에서, “하느님이 함께 살도록 허락하신 그날까지 당신과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하고 서약한다. 여기에서 또 낡은 하느님에 관한 관념이 사람들 사이에 횡포를 행사한다. 이 하느님은 얼마 동안 부부를 결합시켜 놓고 다음 순간에는 갈라놓는다. 인간의 행복을 시기한 여신 네메시스가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에 다시 도입된 것이다. 전에 어느 신심 깊은 과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아주 행복했어요. 근데 그건 어차피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거예요. 안 그래요?” 또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 행복의 대가를 지불한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하느님을 무엇을 지불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입과 출구에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특히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대로 주님이 다시 가져가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하고 아기를 잃은 섭리주의자인 어머니가 말했다.(욥의 고백도 참조).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 그 어머니에게 아이를 주신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아이가 태어났는지는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다. 의심 없이 하느님의 섭리의 아기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이다. 아기를 어머니에게 주신 것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그 아기를 어머니에게 빼앗아 가는 것도 하느님이 아니다. 그 어머니 아이는 확실히 진단이 내려진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단결하고 좀 더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런 병의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2 원인을 발견하고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을 얻었기에 우리는 제우스가 설치는 영역에서 그를 추방했다. 하느님은 다른 차원은 종의 차원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말씀 하신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우리 말: “가난은 나라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해석해 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시련 싸움, 기아등을 보내시고 악과 결핍을 허용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은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을 보실 수 없어, 그 고통을 나누고자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자유로 그 책임을 해결하도록 모범을 보이신 것은 의심 할 바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익숙한 것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준수한다.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고통이라도 당사자와 관계자를 종교적 위로와 평안을 준다. 중병이나 죽음을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에요”라고 해 보라. 그는 그 고통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감정이 상하고 무력감에 빠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느님 덕분에 이 불행은 적어도 어떤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반박할 것인가? 이런 말을 받는 사람들 편에서 생각할 때는 전통적 이 말과 사고방식도 나쁘진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입장을 보자 자기 아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도록 “너를 위해 위증한 전염병을 아들에게 전염시킨 아빠가 있을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렇다면 하느님도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 복음서를 읽어 보라.
그렇다고 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병의 원인이 신성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신성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병은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병자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은총 혹은 병을 초월한다는 은총이 주어져 있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당신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하느님이 복수자 전염병의 제공자까지 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당신이 그렇게 말한다 해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벌하셨는데요?” 아니다 하느님을 아무도 벌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으며, 지옥으로 보내지도 않는다. 하느님이 개입하실 때는 언제나 사랑의 개입 즉 경고 시사, 용서뿐이다. 만일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의도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를 위해 좋지 못한 일이다. 그런 행동을 하기에 너는 완전히 성숙하고 안전하지 않다“라는 우려에서 나온 훈계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당신들이 이 훈계를 무시해 그 결과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나를 벌 하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셨다. 복음서에는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워 두셨다.”(마태 10장 30절“라고 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데 곧잘 사용되는 구절이다. 이것은 제 1 원인(창조주) 제2원인(인간처럼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거의 구별하지 못했던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 안에 살고 있으므로 그렇게 이해하면 안된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만일 그 구절이 전적으로 그분의 뜻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느님을 당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뽑는 병적인 잔인한 분이 된다. 그럼 그분의 허락이라면 하느님은 당신의 몸이 쇠약해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허락하시는 무관심한 분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그분의 배려라 해석한다면, 실로 하느님은 당신 몸에 쇠약해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 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하느님은 당신의 건강을 초월하여 허약함을 극복하고, 당신이 머리가 다 다 빠져 대머리가 되었을지라도 오히려 머리카락이 많이 있을 때보다 행복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 관례에 따른 말투를 사용하셨으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단순하고 낙천적이고 피상적이라 느껴진다. 예수님은 제일 원인과 제2 원인을 구별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르침에 진면목을 알아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가르쳐 주시라는 것은 명백하다.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일에 집착하여 마음의 여유를 잃을까 경계하는 것이다. 다 망함에 쫓기어 마음을 빼앗기는 것에 경계하는 것이며, 활동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41) 이 복음 말씀 또한 낡은 그리스- 로마식의 사고로, 하느님을 우주의 주인이자 가사 전반을 맡은 하녀로 또 만물의 근거로서 거기에 설명을 부여하는 분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 심리에 비추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히 근절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신앙을 때로는 오히려 신신 깊은 태도라에서 조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달한 현시대에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로 만들 뿐이다. 인간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세계를 계산해 간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때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존재하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압박, 두려움, 고통 따위를 가져다 주며 폭정을 일삼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는, 맹목적으로 전통을 답습하고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진정한 의무에서 훨씬 더 그리스도교적이다. 인간이 전염병, 기아, 어둠에 대해 약하고 무방비한 상태였을 때, 그들은 그 모든 것이 하늘에서 온 징벌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증거를 내리는 하느님을 겸허하게 예배했다, 그들은 자기를 때리는 손에도 자기를 길러주는 손에도 키스했다, 그 손은 같은 손이며 하나였다, 자연이라는 손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주신 계시는 자연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해방시켰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연을 이용)지배하고 관리)정복하라. 내가 그처럼 준엄하고 적의가 있는 불친절한 세계를 창조한 이유는 단 하나다. 나의 일을 개선하고 성취 시킬 수 있는 인간, 즉 물건을 만들어내는 자로서 너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손으로 부여한 그대로의 세계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가 이 세계를 완성 시킬 것이므로, 그로서 내가 한 일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너희는 나에게 감사만 하고 나의 일만 존경할 의무를 짊어진 노예가 아니다. 너희는 나의 자녀들이다. 이 세상을 관리하고 나와 함께 일하며 책임을 지고 주도권을 잡아라!“
2.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하느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고 계시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이 폭력적인인가를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개입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본질과 일치해서, 또한 하느님이 제정하신 사랑의)법과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를 존중하면서 개입하신다.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부르시고 주시지만 결코 강요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은총으로 개입하시지만 결코 자유 의지를 강제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항상 당신을 나타내시지만 그것은 사랑의 표시이지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매개로 삼아서만 나타나신다.(참조 마태 25,35~45). 인생은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의미가 있고 그 사건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하느님은 사건을 직접 좌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사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시사하고 계신다. 하느님은 재해가 일어나는 것을 저지하시지는 않지만, 그 재해 안에 우리와 함깨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난하지만 부자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제공하시며, 병고에 있으면서도 건강할 때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박해를 받으면서도 찬사를 받을 때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불행을 겪으면서도 만사형통할 때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을 원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가 자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도록 바라자, 다정하고 충실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더 활동적이 되도록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계속수행하셨다. 그분은 십가가에 매달리신중에도 사람들을 회개시켰다. 당신이 짊어진 십자가는 권위, 명예, 부 혹은 힘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갈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이것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설명하는 하느님 섭리攝理에 대한 견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29-39)
루이 에블리,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143~170p
*미세하게 편집한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보고자 하시는 분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책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