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믿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2016.9.18.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중앙 보훈 성당; 이기우 신부
오늘 우리는 가장 많은 교우들이 치명한 날로 알려져 있는 9월 20일에 드리는 순교자 대축일을 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주일인 오늘로 앞당겨 지냅니다.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정신적 뿌리는 신앙선조들이 감행했던 순교라는 사건에 있습니다. 국교로 신봉하던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했던 조선 왕조 사회에서 천주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는 신앙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으로써 자신의 전 생애를 바꾸어갔습니다.
지난 날 순교자에 대한 규정에서는 순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굳은 신앙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종식된 오늘날에 와서는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죽음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인한 죽음만을 강조하던 종전의 순교 개념은 신자들의 일상생활과 무관한 것으로 변질되어갔습니다. 순교에 대한 기존의 개념은 순교자들을 우리 평범한 신자들과는 다른 특이한 존재로 만들어갔습니다. 무시무시한 고문과 형벌을 이겨낸 영웅적인 이미지가 순교자들에게 그려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순교의 핵심인 믿음을 넓은 의미로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며,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소용이 없다는 가르침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믿음의 실체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생활화했던 데에서 찾아야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적인 동기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 그리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 또한 순교입니다. 즉, 종전에는 믿음을 증거하는 죽음만을 순교로 보았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도 믿음의 또 다른 측면인 것입니다. 이제 순교의 개념은 믿음만을 생각하던 단계로부터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단계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웃을 대신하여 죽음을 택했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사랑의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시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주교단의 건의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이웃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던 2명의 루터교 신자들까지도 순교복자품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앙의 순수성만이 시복시성의 기준이 되었던 지난 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교우촌 현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선조들이 순교하기 전에 교우촌에서 증거했던 사랑의 실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믿음이 굳건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믿음은 그들의 삶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음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특권적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종이나 소작인들, 백정과 같은 미천한 신분의 신자들도 자신과 똑같이 하느님 앞에 평등한 인간임을 생활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적 사례를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세기 전반에 경상도에서 전개된 박해의 과정에서 감옥에 잡혀 들어온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밀고했던 전자수라는 배교자가 어떤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오자 굶겨 죽이기로 작정되었던 그를 먹여 살려주었습니다. 그 후 전자수가 벌거벗겨져 감옥에서 쫓겨나가자 이번에는 그에게 옷을 입혀 내보냈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밀고자에게 사랑으로 복수를 한 셈입니다.
이 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은 믿음으로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자의 믿음과 함께 그 믿음의 구체적 측면이었던 사랑을 새롭게 인식해야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지혜서 성경에서는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십자가란 바로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공생활을 지내셨습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란 결국 사랑의 복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십자가가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의 십자가에 대한 희망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이 사랑을 포기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는다”는 확신을 그는 피력합니다. 이 세상을 관통하는 인생 최후의 진리가 이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역시 이 확신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