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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 한국학 역사 속 인물 죽산(竹山) 안씨(安氏)
현재 총 21명의 죽산(竹山)-안(安) 인물정보가 있습니다. ( 신죽산 8명 + 구죽산 13명)
신죽산안씨 6명
1. 안규홍(安圭洪)에 대하여 1879(고종 16)∼1909.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전라남도 보성출신.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매우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하였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차 심화되어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거의토적하기 위하여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는 한편, 주인에게 거사할 자금으로 전곡포백(錢穀布帛)을 요구하였다. 또한,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安極)의 묵계 아래 안극의 집에 침입, 그의 무기와 가재를 몰수하고 점차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8년 2월 관북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병력은 70명으로 불어났다. 먼저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강성인의 민폐가 매우 심하자 그를 참형시키고 군기를 엄히 하였다. 이로써, 대오를 정비하고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을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軍需將)으로 편제하였으며, 휘하에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의 용장이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보성군 조성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평소 이 일대의 산악지리를 자세히 파악, 파청의 험한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두었다. 미도(米戶)와 히라이(平井)의 2개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들이닥치자 일제히 맹사격을 가하여 적군을 괴멸시킨 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호군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고자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편,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1908년 8월 24일 진산에서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 또,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태세를 갖춘 뒤 1909년 3월 25일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대첩이다. 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는 등 그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장흥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패전의 원인을 분석, 적에게 의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토왜(土倭)의 제거가 시급함을 깨닫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진 이탈자가 늘자, 1909년 7월 일단 의진을 해산하였다. 같은해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富石)부대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 그뒤 대구로 옮겨진 뒤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 안노생(安魯生)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1391년(공양왕 3)4월 군자소윤(軍資少尹)으로 서북면찰방별감(西北面察訪別監)이 되어 국경에서 성행하던 원나라와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여 범금자(犯禁者)가 없도록 하였으며, 6월에는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었다. 강직하고 결백한 성품이 왕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해 9월 세자가 명나라에 갈 때 수행원에 대한 검찰의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행원들은 수행을 기화로 밀무역을 하며 사욕을 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4월 병조총랑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몽주(鄭夢周) 가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3. 안방준(安邦俊)에 대하여 1573(선조 6)∼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의 아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처는 경주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거절,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유15)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장령·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초 지방의 유일(遺逸)을 초치 등용하려 하였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조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에 의하여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는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 李大源傳》·《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삼원기사 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4. 안유신(安由愼)에 대하여 1580(선조 13)∼1657(효종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수초(遂初),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직장 중묵(重默)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홍한(弘漢)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폐모반대소로 옹진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인 1617년에 풀려났다. 1626년(인조 4)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영변에 부임하였고, 1629년에는 제릉참봉(濟陵參奉), 1634년에는 빙고감예관(氷庫監刈官)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상서원직장으로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가 이듬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38년에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부임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163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낙향,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남파유고》가 있다.
5. 안철손(安哲孫)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아버지는 관찰사 노생(魯生)이며, 어머니는 좌정언(左正言) 최유종(崔有悰)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1455년(세조 1)에 소윤(少尹)으로 삼등공신에 녹봉되었으나 박팽년(朴彭年)의 막객(幕客)으로 의심을 받아 처벌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다. 1460년 충청전라도조전경차관(忠淸全羅道漕轉敬差官)이 되어 조선(漕船)만드는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하여 교기(交綺)·마장(馬裝) 등을 하사받을 정도로 세조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그뒤 호조참의로 충청도도체찰부사(忠淸道都體察副使)가 되고 호조참판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지낼 때 도민(道民) 중 불만자들의 무고를 받기도 하였다. 세조의 국휼(國恤) 중에 관기 광한아(廣寒兒)와 동침한 것이 불충이므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비호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다.
6. 안택환(安宅煥)에 대하여 1886(고종 23)∼1910. 한말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일명 진석(辰石). 자는 일언(一彦). 전라남도 보성 출신. 모(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달성배씨(達城裵氏)다. 1908년 보성에서 기의한 의병장 안규홍(安圭洪) 휘하에서 소휘천(蘇輝千)과 함께 유격장으로 활약하면서 그해 2월경부터 파청(巴靑:보성)·진산·원봉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뒤 8월에 보성의 병치전투(並峙戰鬪:병치는 일명 양가랭이)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7. 안창후(安昌後)에 대하여
1687년(숙종 13)∼1771년(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계중(繼仲), 호는 한설당(閒說堂). 본관은 죽산(竹山).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세헌(世獻)이다. 효우학행으로 유림의 포상천거를 받았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평생을 한설당에서 글벗들과 시문에 힘썼다. 1747년(영조 23)에 유교적 도덕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생활윤리를 연작시조로서 시조 24수와 가사 1편과 함께 같은 제목의 한시문을 지었다. 그가 국문으로 시조와 가사를 짓게된 동기는 증조부인 욱(彧)이 김인후(金麟厚)와 임억령(林億齡) 등과 사귀던 집안이었던 데에 있다. 이른바 호남가단의 중심지였던 담양, 장성의 인물들이 많은 국문시가를 지음으로써 보성의 한설당 집안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지연과 인맥을 따라 ‘한설당 25가’(시조 24수와 가사 1편)도 나올 수 있었으며, 17세기에 보성에서 가사 〈남초가 南草歌〉를 지은 박사형(朴士亨)의 영향도 직접적으로 입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시조 24수에는 저마다 소제목을 붙였는데, 가사의 제목은 〈명분설 名分說〉이다. 저서로는 문집 《한설당유고 閒說堂遺稿》가 있다.
8. 안치택(安致宅)에 대하여 1702(숙종 28)∼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신죽산(新竹山). 자는 거광(居廣), 호는 무은재(無隱齋). 병조좌랑 여기(汝器)의 손자이며, 통덕랑 만우(晩遇)의 아들이다. 1729년(영조 5)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1750년에는 지평으로 있으면서 언로가 막혔음을 지적하였다. 이듬해 정언(正言)·지평을 지내고 1764년 장령(掌令)에 이어 사간을 역임하는 등 주로 양사(兩司)의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구죽산안씨 13명
1. 안경수(安駉壽)에 대하여 1853(철종 4)∼1900. 개화기의 관료·정치가.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성재(聖哉). 출신은 분명하지 않으나 서자였다.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다가 1887년(고종 24)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발탁된 뒤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閔泳駿)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의 돌연한 사임으로 3개월 만에 귀국하여 별군직(別軍職)·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전환국방판(典圜局幇辦) 등을 지내면서,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화약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 설립과 신식화폐 발행에 주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핵심적인 친일개화파관료로 등장,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서는 우포도대장 겸 군국기무처회의원(右捕盜大將兼軍國機務處會議員)을, 제2차 김홍집내각에서는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을 지내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4월의 삼국간섭 이후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려는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경무사(警務使)와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군부대신직에서 해임된 뒤 친미·친러파가 을미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일으킨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하였다가 그 사건이 실패하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896년 2월 국왕의 아관파천으로 특지사면된 뒤 경무사와 중추원 일등의관직에 임명되었다. 아울러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회장직을 맡는 한편,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의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898년 7월 경무사를 지낸 김재풍(金在豊)·이충구(李忠求) 등과 더불어 추진하던 황제양위음모가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망명정객 박영효(朴泳孝) 일파와 합세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정계복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주선으로 1900년 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으나,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준용역모사건(李埈鎔逆謀事件, 1894)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미수사건(1898)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07년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2. 안광우(安光宇)에 대하여 1753(영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천택(天宅). 증지평(贈持平) 구(構)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진사과에 합격,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바로 6품에 올라 예조좌랑·사간원정언에 이르고, 1813년 고성군수(高城郡守)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3. 안광직(安光直)에 대하여 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주백(周伯 혹은 胄伯). 서울출신. 참판 진(鎭)의 5대손이며, 구(榘)의 아들이다. 1805년(순조 5) 춘당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25년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1827년 부시관(副試官)으로 있으면서 시험관리 소홀로 견파(譴罷)당하기도 하였다. 1828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라 장령이 되었고, 이듬해 사헌부의 대사간이 되었다. 1832년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835(헌종 1)에는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1841년 대사간이 되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판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854년(철종 5)에는 예조판서가 되었다.
4. 안구(安絿)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자유(子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교훈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여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이 높았으며, 명경거유(名卿巨儒)들이 많이 살고 있는 장의동(藏義洞)에 거주하면서 그들과 교유하였다. 1682년(숙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위계는 통정대부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689년의 기사환국 때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출당하자 그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고, 다만 서책을 벗삼아 생활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의 벼슬은 의빈도사(義賓都事)를 거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5. 안등(安騰)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1400년(정종 2)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정4품직, 뒤의 掌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었다. 이때 사헌부감찰들간의 싸움에 상관으로서 그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화해하도록 종용한 대사헌 김희선(金希善)과 집의 김자지(金自知)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1407년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서 해안방어의 성실유무를 감찰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고,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1415년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의 노모가 상주에 있고 또한 경상도관찰사 이지강(李之剛)의 처부모가 평택에 있었으므로 양자의 관직을 맞바꿔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윤으로 전근되어 돌아와, 경상도 김해근처의 산록에 말을 방목하기 적합한 곳이 있으므로, 주위 7, 8리(里)에 담을 쌓고 양마(良馬)를 기른다면 1만여필을 방축할 수 있음을 건의하여 실시하였다. 1416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6. 안방경(安方慶)에 대하여 1513(중종 8)∼1569(선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선응(善應), 호는 구배헌(灸背軒). 순(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문관부제학 유진(兪鎭)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예문관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이후 사헌부감찰·예조좌랑·함경도도사·영서도찰방(迎署道察訪)·형조정랑·장악원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성균관사예로 《인종실록》을 찬수하였고, 지평·경기도도사·남원부사를 거쳐 1557년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561년 이후 병으로 벼슬을 떠나 있다가 1564년 홍문관교리·동부승지를 거쳐 1565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와의 불화로 외직에 나가 청홍도관찰사를 지냈고, 1568년 장례원판결사·영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용인에 기거하면서 거처를 남록구배헌(南麓灸背軒)이라 하였다.
7. 안상계(安桑鷄)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전은(田隱). 연창위(延昌尉) 맹담(盲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이다. 종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왕위를 노리는 세조 밑에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종초에는 저자도(楮子島)에 물러가 살면서 김종직(金宗直)·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시로써 서로 수창(酬唱)하였다. 1487년(성종 18)에 수원부사를 거쳐 1492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8. 안상휘(安相徽)에 대하여 1690(숙종 16)∼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신보(愼甫). 증이판(贈吏判) 정찬(廷燦)의 손자이며, 형조좌랑 구(絿)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정언을 지내고, 1733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용관(冗官)의 감원과 휼민(恤民)의 정치를 논하면서 정원 외의 궁인을 늘리지 말 것과 삼남지방의 군액(軍額)의 납포를 감하여 도망민을 막고 충군의 어려움을 구하자는 상소를 하였다. 이어 헌납이 되어 죄가 가벼운 죄수가 옥사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1738년 사간으로서 대각(臺閣)이 간쟁(諫諍)의 기풍이 없음을 지적하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관가의 시비에 논의가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해에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한 서원의 복건에 관하여 올린 연계(連啓) 가 당습(黨習)에 관련된다 하여 해남에 정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39년 사간·집의를 거듭 역임하는 등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1748년 세자시강원보덕을 지내고, 1751년 승지에 올랐다.
9. 안윤행(安允行)에 대하여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성지(性之). 목사 상원(相元)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생원시에 합격하고, 1740년(영조 16)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6년에 정언·지평 등을 거쳐 1747년에 헌납으로 재임시에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수금된 윤급(尹汲)·송영중(宋瑩中)의 석방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관에 복귀하여 수찬·교리 등을 지내면서 잦은 직언으로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1751년에 다시 파직되었다. 2년 뒤에 부교리로 재등용되어 승지 등을 역임하고 1760년에는 울산부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에 대사간이 되어 영조에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진현(進見)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다가 또 삭출되었다. 그뒤 다시 대사간에 복귀되었으며 형조참판과 판서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0. 안종해(安宗海)에 대하여 1681(숙종 7)∼1754(영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조경(朝卿). 세자익위사 부수(副率) 상억(相億)의 아들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726년(영조 2) 천거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보임된 뒤 여러 직을 거쳐 공산현감(公山縣監)으로 나갔다. 이때에 흉년과 질병으로 기민(饑民)과 폐사(廢死)가 속출하자 이의 구휼·안집(安集)에 진력,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공조좌랑에 이어 1734년 옥천군수로 있을 적에 불렴(不廉)의 혐의를 받고 삭직되었다가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등을 지내고, 면천군수로 복임하여 고을에 행패를 부린 토호의 작태를 근절시켰다. 1741년 승진하여 청주목사로 나아갔으나 헌납 권현(權賢)의 탄핵을 받은 바 있고, 어사 윤득재(尹得載)가 면천을 지나다가 토호의 말을 듣고 그를 투옥, 용전역(龍田驛)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1. 안진(安縝)에 대하여 1617(광해군 9)∼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율보(栗甫), 호는 학촌(鶴村). 사복시첨정 정섭(廷燮)의 아들이다. 1639년(인조 17)사마시에 합격, 1652년(효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종초에 사간원정언·영광군수·장령·헌납 등을 지냈다. 1664년(현종 5)동래부사를 거쳐, 전주부윤을 지내고 1670년 동부승지·형조참의·승지·병조참의·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74년과 1677년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그뒤 대사간·예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담백, 검약하였으며 효행으로 이름났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윤휴(尹鑴)와의 친교를 끊고 송시열(宋時烈)을 비호하였다.
12. 안초(安迢)에 대하여 1420(세종 2)∼1483(성종 1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자이(自邇). 지고성군사(知高城郡事) 계인(季仁)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4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이조좌랑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고, 뒤이어 이조정랑·경기도암행어사를 거쳐, 1467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1476년(성종 7) 행안동부사로 나갔으며, 그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3. 안표(安杓)에 대하여 1710(숙종 36)∼1773(영조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정숙(定叔). 아버지는 목사 종해(宗海)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으로, 1754년(영조 30)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봉직하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763년에 헌납이 되어 장령을 거친 뒤 1764년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5년에 사간·집의·사복시정이 되었는데, 마침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양리(良吏)를 뽑아 보내야 할 형편이었는바, 그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친히 어명을 받고 가서 그 폐(弊)를 없애고 치화(治化)를 잘 하였다. 그러나 옥사(獄事)에 위반된 점이 있어 파직당하고 중앙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그곳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어 1767년에 형조참의·대사간이 되었는바 왕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할 때 이에 불참한 위율(違律)로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개월 뒤 다시 복직되어 대사간·병조참의 등을 거쳐 여주목사를 지냈다. 그의 인품은 자신에 대해서 몹시 엄하였기 때문에 당시 파당을 이루던 시파(時派)·벽파(僻派)들이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깨끗하고 신중한 행동에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죽산안씨로 분류되어 있지 않는 분 중에 우리 신죽산안씨일 것으로 생각되는 분도 있습니다.
안후덕(安厚德)에 대하여 1905∼1949.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함평출신. 1924년 2월 사재를 정리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28년 2월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 자기 소유 토지를 저당잡히고 4만5000원(圓)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그 금액 중 2만2000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나머지 2만원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에 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이 청년회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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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 재중 종원님의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 안문의 뿌리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습니다.
고집 순서가 안 강 최 라면서요... ㅎㅎㅎㅎ
우리 죽산 안씨 의 귀중한 자료인 것 같습니다..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좋은자료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