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강해(121)
내 집은 기도하는 집
(2022. 10. 17. 월)
본문 : 눅19:45-48
어제 새벽엔 우리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을 넘어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시는 모습을 묵상했습니다.
오랜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반가운 마음과 함께 탄성을 질러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탄성 대신에 우셨을까요?
예,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눈물의 제1원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찾으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 의식과 기도의 중심지였고
그들의 신앙에서 강력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집’이자
‘자신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눅 2장에 보면, 열두 살 시절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돌아갈 때에 예수님이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부모님이 그를 찾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을 찾았는데,..
바로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교사들 중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머니 마리아는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하며 책망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예수님의 자의식).
예수님에게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자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그만큼 사랑과 기대에 찬 특별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서시자마자 깜짝 놀라셨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완전히 시장통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문을 들어서면 맨 먼저 나오는 곳이
이방인의 뜰이라는 넓은 장소입니다.
그 이름처럼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뜰 안에 또 담으로 둘러싸여 성전이 서 있고,
문을 지나 들어가면 여인의 뜰입니다.
거기서 또 문을 지나 들어가면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거기서 더 들어가면 제사장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짐승을 잡아 제단에 번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곳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나마 성전에서 가장 덜 신성한 곳이니까,
또 넓은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하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겠지요.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팔았을까요?
우선 소나 양, 비둘기 같은 제물을 팝니다.
제사 드릴 제물을 집에서 끌고 와야 하는데,
가까운 데 사는 사람들은 문제없지만....
갈릴리 같은 데서 온 사람들은 어떻게 그 먼 길을 오면서
소나 양을 끌고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돈을 가지고 와서 여기서 사면 간편하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순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일단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끌고 왔지만,
그것을 검사하는 사람이 합격을 시켜주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흠 없는 제물로 합격하기가 꽤 까다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단하게 흠 없는 제물을 마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허가한 장사꾼에게서 제물을 사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파는 것들은 이미 흠 없는 것들로 판정을 받아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형편없는 것들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또 가격은 어떠했겠어요? 부르는 게 값입니다.
아무리 비싸도 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아무나 장사할 수 있을까요?
성전에서 장사를 하려면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이고,
대제사장은 아무런 대가 없이 허가를 내주지 않겠지요.
또 대제사장이 직접 그 이권을 관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중간의 관리자들을 두고 관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권을 두고 얼마나 많은 쟁탈전이 벌어졌겠습니까? ...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들이 활개를 쳤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요샛말로
하자면 ‘목 좋은 곳’이었습니다.
또 장사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돈 바꿔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은 해마다
한 차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출 30:13 - 반 세겔, 은 5.7 그램 정도).
이 성전세는 원래는 유월절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방문 징수도 했습니다.
마 17:24 이하에 보면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재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낸다’고 대답하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오자
이를 눈치채신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이 환전의 과정에서도 과도한 환율이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통용되던 화폐는 로마의 화폐입니다.
(렙돈, 고드란트, 호리, 데나리온, 므나, 앗사리온, 달란트)가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세를 낼 때는 로마 동전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의 동전에는 황제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용납될 수 없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 돈밖에 없는 사람은 유대의 동전으로 환전해서
성전세(성전 세겔)를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돈 바꿔주는 것도 꼭 필요한 서비스인데,
문제는 돈 바꿔주는 사람들이 오늘 환율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횡포를 부려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바가지를 쓰고 마음이 상한 채 돌아갔을 것입니다.
<쫓아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는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또 다른 나라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이방인의 뜰) 장사치들에게 점령되어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소위 돈 버는 장소로 전락한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아가 제사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당시 제사장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45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오늘 본문(누가복음)에서는 이후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마21:12).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15).
사랑하는 만큼 분노도 크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이
닮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분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가질 때 세상은 변화되어 갑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 하나는 미워서 하는 비판입니다.
망하게 하려는 동기에서 비판하고 조롱합니다.
- 다른 한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거룩한 분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날카롭기는 하지만, 그 마음 중심에는
교회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동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이려는 사람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본 대제사장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47-48절>
47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절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모두 내쫓으신 후에 날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와 반대로 더러운 분노를 발한 것입니다.
게다가 매일같이 성전에 나와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들에게 주님은 정말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붙잡아 가두려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죽여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청하며 그를 따랐기 때문에....
섣불리 예수님을 체포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악의 세력의 집요함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항상 경계하여야 합니다.
<강도의 소굴>
다시 본문 4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시장 바닥이 된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6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강도의 소굴’을 만드셨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지금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솔로몬 성전의 모습과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니 더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뇌물을 상납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바가지를 씌웁니다.
그래서 단순히 ‘도둑의 소굴’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십니다.
도둑은 주인 몰래 훔치는 것이지만,
강도는 대놓고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더 나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멸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셨습니다’.
성전의 타락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제1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의 건강성을 보려면 그 사회의
중심 종교의 상태를 보면 됩니다.
한국 사회의 주류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 – 성직 매매
(신학교육 과정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돈 주면 안수해 주는 단체도 있음).
분열과 신학교 난립 – 결국은 이권 싸움.
직분 매매, 자기 과시성 교회 건축 등등. 각종 이단들의 발호.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빛을 잃은 등잔 같고,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는 소금 같습니다.
어떤 청년은 한국교회를 겨울철 가로등에 비유했습니다.
"겨울에 가로등 빛을 보면 되게 따뜻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막상 주위에 가면 열기가 전해지지 않고 차갑기만 해요.
한국교회는 겨울철 가로등 같아요."
그러나 꼭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망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루터기’, 곧 ‘남은 자’들을 남겨두시고,
그들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실현과
사탄의 방해라는 줄거리로 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에는 항상 ‘남은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소수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6:6-8, 눅17:26-27, 벧전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창19:29, 눅17:28-29).
아합 왕 때에도 많은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19:18, 롬11:2-5).
포로기에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지만, 그
들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1:5에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계 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계6:6).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금산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의
‘그루터기’와 ‘남은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생각하신 성전 - 내 집은 기도하는 집>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46절을 보겠습니다.
46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참된 성전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즉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누구라도(심지어 고자라도) 제외되지 않고,
모든 열방과 민족, 모든 계층, 남녀노소 누구라도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성전,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성전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막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눈앞에 있는 성전은 모습은 어떻습니까?
뇌물을 받아먹고 눈을 감고 있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사람들을 속이고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장사치들의 소음 속에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을 보신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기도하는 집인가?>
여기서, 저는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왜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는 많은 행위들이 있습니다.
제물을 잡아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니,
‘제사하는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왜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요?
묵상 중에 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올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한 과정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기도가 막힙니다.
성전에 와서, 짐승의 피를 흘리고, 각을 뜨고,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도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많습니다. 선교도 하고, 교제도 하고,
교육도 하고(학교), 구제도 하고, 병원도 세우지만,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 불려야 합니다.
그것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많은 순서 가운데, 기도할 때만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첫째, 눈을 감습니다. 왜 눈을 감습니까?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행동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결단입니다.
둘째, 손을 모읍니다. 손을 왜 모읍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셋째,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완전한 복종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과 땅이 소통됩니다.
예수님이 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받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시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위로와 용기를 덧입는 시간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날 교회는 이 민족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막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는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갈 때.....
하나님은 이 민족을 더불어 축복하실 것입니다.
먼저 우리 금산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가십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날,
참 좋은 교회라는 칭찬을 듣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