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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인천 95코스 제1부
선학역-선학음식문화거리-길마재-
선유봉-문학산-문학산옛이야기길
2024년 8월 14일
1.코스 소개
1)코스개요
- 물길이 열리고 새 문물이 밀려들었던 인천에서 만나는 역사 문화거리를 지나는 코스
- 개항기의 흔적이 남은 다양한 박물관과 이국적 정취가 흐르는 차이나타운에서 인천항이 간직한 옛이야기와 마주하는 코스
2)관광포인트
- 하수처리시설을 지하화하여 그 위에 조성된 갯골을 살린 생태공원 '학익에코테마파크'
- 오래된 창고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한국 근대문학과 관련된 전시를 하는 '한국근대문화관'
- 개항기 인천의 풍경, 철도, 은행 등 자료를 전시한 '인천개항박물관'
- 한국 최초의 짜장면 집인 공화춘을 개조한 박물관 '짜장면박물관'
- 세계 명작 동화가 그려진 벽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
3)여행정보(주의사항)
- 학익에코테마파크는 가을에 갈대숲이 장관을 이룸
- 인천차이나타운은 인천항 개항기에 중국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음
- 시점 :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406-9, 선학역 3번 출입구. 교통편) 인천 1호선 선학역
- 종점 : 인천시 중구 북성동3가 6-9, 선린문 부근. 교통편) 지하철1호선 인천역에서 도보 500m
- 주요 경로 : 선학역3번출입구 2.6Km 문학산 6.9Km 남항그린공원 3.6Km 숭의역 3.9Km 자유공원 입구
- 길이 17.0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어려움
2.비류백제의 발상지, 미추홀 문학산을 넘다
제1부 : 선학역 3번 출입구 앞에서 서해랑길 94코스 탐방을 마치고서 곧바로 서해랑길 95코스 탐방길을 출발한다. 선학음식문화거리 못 미쳐 길가의 바위에 앉아 길동무와 함께 휴식을 취하며 캔맥주를 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뜨거운 몸을 누비고 술기운이 올라온다. 숨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 94코스 탐방길이 눈앞에 또렷이 그림을 그린다. "여유 없이 앞으로 내빼기만 하는 것은 탐방이 아닙니다. 탐방길을 여유롭게 즐기세요." 서해랑길 94코스 탐방길의 논현포대가 대포를 쏘아대며 탐방객을 질책한다. "따끔한 질책은 맞는 말이지만, 도보여행 팀을 따라가는 탐방객은 제한 시간 때문에 그렇게 탐방할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라도 탐방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요기를 마치고 몸과 마음을 달랬다. 여유와 풍요가 넘치는 서해랑길 탐방을 즐기자. 본격적으로 서해랑길 95코스 탐방에 나선다.
서해랑길 95코스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에서 출발하여, 미추홀구 문학동과 학익동, 연수구 청학동과 옥련동, 중구의 여러 거리와 차이나타운을 거쳐 중구 북성동3가 차이나타운 제3패루 선린문 뒤 자유공원 출입구에서 끝난다. 서해랑길 95코스는 인천의 중심지 연수구와 미추홀구, 중구를 통과하는데, 탐방 중심은 인천의 태동지 문학산과 문학산성일 것이다. 탐방 거리는 17km, 예상 소요시간은 6시간이다.
경원대로 서쪽 보도에서 선학음식문화거리로 이어간다. 평일 낮이어서인지 음식점들로 즐비한 선학음식문화거리는 한산하다. 선학음식문화거리를 올라가면 문학산 동쪽 자락을 감아도는 학나래로와 만난다. 서해랑길은 학나래로를 가로질러 선학산법주사 담장 오른쪽 길로 진입하여 문학산 등산로로 이어간다. 문학산 등산로 입구에는 문주가 설치되어 있고, '문학산에움길'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부터 문학산 등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곳에서 일정 때문에 95코스를 탐방할 수 없는 길동무와 작별하고 홀로 문학산에움길을 따라간다. 운동기구들이 갖추어진 체력단련장을 올라서 내려가면, 희영아파트 갈림길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선유봉과 길마재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 길은 선유봉으로 곧바로 올라가고, 오른쪽 길은 길마재를 거쳐 선유봉으로 올라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길을 따라 길마재로 이어간다.
여름낮의 문학산에움길은 볕이 들지 않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럼에도 습도가 높은 탓에 후텁지근하다. 갈림길에서 길마재는 금방이다. 홀로 걷는 길, 인적은 없다. 길마재에서 직진하여 북쪽으로 넘어가면 미추홀구 문학동에 이르며,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선유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길마재 언덕에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지만 곧바로 선유봉 비탈길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에 조성한 목재계단을 올라가면 선유봉,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선유봉은 길마재 위에 있어 길마산이라고도 이르는 것 같다.
선유봉 전망대에서는 인천광역시 북쪽 지역이 잘 조망되는데, 미세먼지로 인하여 풍경은 흐릿하다. 멀리 원적산과 계양산은 보이지 않고, 바로 아래에 자리한 미추홀구 문학동과 관교동이 내려다 보인다.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지는 당연히 문학산 북동쪽의 승학산을 중심으로 한 인천도호부 관아와 인천향교가 있는 이 지역일 것이다. 이후 개항기 때 인천의 중심부는 개항장인 바다 쪽 제물포로 옮겨져 현재 중구 지역이 중심이 되는 것 같다. 전망대에서 안내도를 확인하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연수구, 중구, 동구 지역을 살핀다. 주몽의 장남 비류가 미추홀(매소홀)에 도읍을 정하여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추홀 인천이 현재의 번영에 이르게 된 것은 강화도조약의 결과로 개항한 영향과 공업단지 조성이 초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경기장과 그 동쪽의 남동구 지역을 살피고 선유봉전망대를 내려가, 연수구 선학동에서 연수동으로 넘어간다. 그윽한 소나무가 자라는 전망암봉이 문학산을 바라보며 남쪽을 활짝 열어준다. 이 암봉에서 남쪽 지역의 조망이 멋지다. 문학산 남쪽에 자리한 연수구 지역, 바로 아래의 연수동과 그 왼쪽 동춘동, 바닷가의 매립지 송도동, 청량산 아래의 청학동과 옥련동 등이 광대하다. 연수구 동쪽에는 남동구 고잔동과 논현동, 소래포구가 가늠되고, 동춘동과 송도동 바다 건너는 시흥시 월곶동, 배곧동, 정왕동이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오이도, 그리고 오이도와 대부도를 잇는 시화방조제도 가늠된다.
문학산과 문학산성은 미추홀구 문학동에 속한다. 비류백제의 발상지요, 인천의 태동지 미추홀 문학산으로 올라간다.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고, 미추홀의 중심 유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문학산성이라고 한다. 그 동안 문학산 정상에는 미사일 기지가 있어서 정상에 오를 수 없었다. 미사일 기지가 영종도로 이전된 후 2015년 10월 15일 인천시민의 날을 맞이하여 문학산 정상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학산 정상은 미사일 기지가 철거되어 넓은 광장으로 남아 있다. 정상표석, 북쪽 전망대와 남쪽 전망대, 문학산역사박물관, 쉼터파고라 등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문학산역사박물관에서 야외에 전시하는 게시판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게시판은 인천의 태동과 관련하여 비류와 미추홀, 문학산과 문학산성 등에 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 게시판들을 살피며 북쪽과 남쪽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기뿜은 크다. 아쉬운 것은 문학역사박물관에 들르지 못한 것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바로 아래는 제2경인고속도로 문학IC와 문학대교, 그 아래를 통과하는 미추홀대로, 청량산 아래 문학동을 관통하여 미추홀대로와 만나는 매소홀로 등의 도로가 인천 중심지를 관통한다. 그리고 북서쪽 미추홀구 주안동에 솟은 수봉산이 나즈막하게 누워 있고, 북쪽의 원적산과 계양산은 어림만 할 뿐이다. 미추홀(彌鄒忽) 혹은 매소홀(買召忽)은 무슨 뜻일까? 미추홀 혹은 매소홀은 ‘뭇골’ 즉 수성(水城)을 음차한 것으로 물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추홀과 매소홀 지명을 신라 경덕왕 때 '소성(邵城)'이라고 한자로 표기하는데, 소성은 ‘맷골’, 즉 ‘거친 들의 고장’이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결국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 '소성(邵城)'의 옛 인천 지명은 '습하고 물이 짜며 거친 들'이라는 공통 뜻을 드러낸다.
문학산 정상에서 서쪽 출입문을 나가 임도를 따라 삼호현 고개로 내려간다. 삼호현까지 내려가는 길을 '문학산 옛이야기길'이라 명명하고 비류와 미추홀, 문학산과 시, 문학산과 설화를 주제로 한 게시판들을 전시하고 있다. 먼저 '비류의 미추홀(彌鄒忽) 건국이야기' 전시길이다. '비류의 미추홀(彌鄒忽) 건국이야기'는 설명 없이 주제 그림만 그려진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주제들을 적으면, '비류의 등장, 건국을 결심하다, 남쪽으로 떠나다, 새로운 터전을 찾다, 바닷가에 정착하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다, '물의 나라' 미추홀,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 미추홀 해상왕국을 꿈꾸다, 미추홀의 요새 문학산, 인천 역사의 중심 문학산' 들이다. 비류의 미추홀 건국 이야기를,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온조왕조에서 알아본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한편 세주(細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로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비류의 미추홀 건국이야기 전시를 지나면 문학산과 관련한 시 작품 게시판들이 전시된다. 조선시대의 문인들과 현대의 시인들이 문학산과 문학산성에 관하여 창작한 시들을 한시는 번역하고 현대시는 원문대로 게시하여 전시하였다. 권시(權諰, 1604~1672)의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라는 한시(漢詩)가 번역되어 전시되고, 명품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시한 한상억의 '문학산의 노래' 도 눈길을 끈다. 문학산 시 작품 게시판 전시가 끝나면 문학산에 얽힌 설화 게시판이 전시된다. 술바위, 산신우물, 갑옷바위, 안관당의 설화가 그림과 함께 내용을 적은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산 옛이야기길'이 끝나간다. 앞에는 미추홀구 학익동과 연수구 청학동을 가르는 연경산, 북쪽에는 미추홀구 문학동이 자리한다. 주몽의 큰아들 비류가 도읍하였다는 미추홀,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삼호현으로 내려간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거리 : 17.9km
전체 소요시간 : 6시간 44분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 앞에 서해랑길 94·95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95코스는 거리 17km, 예상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어려움이다.
서해랑길 95코스 탐방을 출발하며 서해랑길 94·95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서해랑길 95코스 탐방을출발하여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를 뒤돌아보았다.
연수구 선학동 경원대로 서쪽 보도에 설치된 문학산 입구 280m 이정목 기둥에 서해랑길 9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선학동(仙鶴洞)은 문학산의 동쪽 길마산 주변 지역이다. 옛부터 도장마을, 또는 도정이나 도재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도장리였다. 일제 말기인 1940년에는 일본식으로 무학정(舞鶴町)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광복 뒤인 1946년 1월 선학동이 됐다. 이 마을의 뒷산 꼭대기를 선유봉(仙遊峰)이라 부르는데, 선학동은 그 아랫마을이라 해서 선유봉의 ‘仙’ 자와 문학산의 '鶴' 자를 붙여 새로 만든 이름이다. 원래 동네 이름인 도장은, 다른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안방’이나 ‘규방(閨房)’을 뜻하는 우리 옛말 도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네가 산줄기에 쌓여 그 안에 안방처럼 푸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에 많이 붙는 이름이다. 도장마을은 지금도 큰도장, 작은도장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잇도장 등 세 마을로 나뉘어 있다. - 인천광역시사
선학역 3번 출입구 앞의 서해랑길 안내도와 그 오른쪽 앞의 서해랑길 9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이정목을 돌아본다.
경원대로 서쪽 보도를 따라가면 선학음식문화거리 입구가 나온다. 서해랑길은 음식문화거리로 이어간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선학음식문화거리 입구에 표지판이 붙은 문주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경원대로467번길을 따라 선학음식문화거리를 통과한다. 평일 낮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하다.
경원대로467번길을 따라 선학음식문화거리를 통과하여 그 끝의 학나래로를 가로질러 문학산 등산로로 이어간다.
학나래로를 가로질러 선학산법주사 담장 오른쪽 연수둘레길로 이어간다.
문학산 등산로는 왼쪽으로 이어가고 오른쪽 길은 희영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이다. 선유봉 1.16km 지점이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지역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맨 오른쪽의 승기천은 표시가 없다.
문학산 등산로의 연수둘레길은 문학산에움길이라 명명하는 것 같다.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체력단련장을 지난다.
문학산 입구에서 480m 지점, 길마산 정상까지 0.66km가 남아 있다. 오른쪽 희영아파트는 0.55km 아래에 있다.
왼쪽은 곧바로 선유봉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길마재를 거쳐 선유봉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직진하면 고마리길을 통해 삼호현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왼쪽 선유봉과 문학산으로 이어가 삼호현으로 내려간다.
길마재 언덕의 쉼터에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다. 심터 꽃밭에 봉숭화들이 붉은 꽃들을 피웠다.
오른쪽은 고마리길을 통해 삼호현으로 이어진다. 왼쪽 연수둘레길은 선유봉과 문학산을 거쳐 삼호현으로 내려간다.
선유봉 정상에 오르는 비탈길은 나무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선유봉 정상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왼쪽길은 배갯골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이며, 문학산은 직진한다. 선유봉 전망대에서 조망한 뒤 문학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이 선유봉을 길마산이라고도 이르는 듯.
선학동 도장마을 위쪽에 길마산(吉馬山)이 있다. 문학산의 동쪽 끝 줄기에 붙어있는 야트막한 산인데, 그 모양이 길마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길마’는 짐을 싣기 위해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며, 소나 말의 등에 길마를 얹는 것을 보통 ‘길마를 지운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요즘은 소나 말이 물건을 싣고 다니는 것을 볼 기회가 거의 없으니 길마라는 말도 낯설기만 할 수밖에 없다. 어떻든 이렇게 보면 길마산(吉馬山)이라는 한자 이름은 원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소리만 대충 따다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길마산이라는 산은 우리 나라 곳곳에 적지 않게 있으며, 구개음화(口蓋音化)된 발음으로 질마산, 또는 질마재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 인천광역시사
선유봉 정상에 기묘한 바위가 자리한다. 바위를 보호하여 전망대를 조성하였고, 그 옆에 조망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선유봉은 문학산의 일부이다. "문학산은 인천도호부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 학의 모습과 같다 하여 학산,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둑산이라고 불려왔다." 안내도를 통하여 위치를 확인하며 조망한다.
미세먼지 때문에 풍경이 흐릿하다. 인천의 태동지 미추홀구 지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뒤에 승기천의 발원지 수봉산, 오른쪽에 승학산 자락이 보인다.
미추홀구 숭의-도화-주안-용현동에 걸쳐있는 높이 1백4m의 수봉산(壽鳳山)은 원래 한자 이름이 수봉산(水峯山)이었다. 1986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지명총람』에도 ‘수봉산(水峯山)’으로 적혀 있는데 언제 어떤 이유로 수봉(水峯)이 수봉(壽鳳)이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산은 흔히 만월산(滿月山)이라고 잘못 불리고 있는 주안산(朱安山)의 한 줄기인데, 인천시의 북쪽에 있는 계양산(桂陽山)과 같이 황해 바다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지금은 산 주위 멀리까지 모두 육지가 돼버렸지만, 옛날에는 이 산의 동쪽 산줄기 외에는 주변 모두가 평지이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생긴 전설로 보인다. 멀리서 보면 바닷물 위로 산봉우리가 솟아 물 가운데 있는 섬과 같기 때문에 수봉(水峯)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으리라고 본다. 또 옛 사람들은 수봉산의 정기(精氣)가 좋아 사내 아이를 많이 태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같은 ‘물과 정기’의 전설이 산을 신령스럽게 포장하다 보니 전설의 새 봉황의 봉(鳳)자를 넣어 수봉산(壽鳳山)이라 바뀌었다고도 본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수봉산은 ‘높은 곳’을 뜻하는 순 우리말 ‘수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수봉산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수리봉으로 불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리’자가 점차 떨어져 나가 ‘수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수봉’은 그저 평범한 하나의 보통명사였던 셈이고, 여기에 ‘봉’과 비슷한 뜻인 ‘산’자가 덧붙어 수봉산이 된 것이다. - 인천광역시사
미추홀구의 중심지 인천도호부관아와 인천향교가 승학산(承鶴山) 자락 문학동에 자리한다. 맨 왼쪽 뒤는 수봉산이다.
승학산(承鶴山)은 북망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주안동, 문학동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인천도호부 관아가 위치해 있어 읍주산으로도 불렸다. 승학산은 문학산(文鶴山)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서에서 동으로 길게 평야가 만들어져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승학산에는 조선시대부터 인천도호부 관아, 인천향교가 위치했으며 1900년 무렵 세워진 문학초등학교와 최근에 개교한 관교 여자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높이 123.13m의 승학산 정상부를 깎아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승학산 뒤쪽과 문학경기장 뒤쪽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彌鄒忽區) 관교동(官校洞)이다.
미추홀구(彌鄒忽區) 관교동(官校洞)은 조선시대에 인천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문학동과 함께 조선시대 인천부 부내면의 일부였던 이곳에는 지금의 시청 격인 인천부의 청사가 있었던 것이다. 부(府)의 중심 동네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면의 이름도 부내면이 됐는데, 사람들은 이 동네에 대해 별다른 이름 없이 그저 ‘읍내’라 부르곤 했다. 그 주변에는 승기리, 동촌, 서촌 등의 자연 부락이 있었다. 그러다가 1903년 각 지역의 동네 이름을 바꿀 때 이들 동네가 읍내리와 동촌승기리로 나뉘어졌으며, 1906년에는 읍내리가 관청리(官廳里)와 향교리(鄕校里)로, 동촌승기리는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로 다시 나뉘어졌다. 이중 관청리는 이름 그대로 인천부 청사라는 관청이 있기 때문이고, 향교리는 인천향교가 있기 때문이며, 승기리는 승기마을이라는 동네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모두 새로 결정할 때 이중 관청리와 향교리가 합해져 관교리가 생기고,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는 승기리로 합해졌다. 결국 ‘관교’라는 동네 이름은 관청리의 ‘관’과 향교리의 ‘교’가 합해져 생긴 이름이다. - 인천광역시사
앞쪽은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이고 그 뒤쪽이 인천SSG랜더스필드 야구장이다. 야구장 왼쪽 뒤는 미추홀구 관교동이다.
인천 문학경기장(仁川文鶴競技場)은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린 경기장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종합경기장으로, 수용인원은 축구경기장 5만 1237명, 야구경기장 3만 명이다. 1994년 7월 착공하여 2001년 12월 2일 개장하였다.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하여 건설하던 도중 1996년 6월 30일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한·일 공동개최가 결정됨에 따라 월드컵 개최를 위하여 설계를 변경하였다. 해발고도 87m의 문학산 줄기를 55m 깎아내 5만 1237석 규모의 축구경기장과 3만 석 규모의 야구경기장을 갖추었으며, 여기서 생긴 토사는 송도 신도시 매립지에 사용되었다. 축구경기장 옆에는 조명시설을 갖춘 7500석 규모의 보조경기장이 2000년에 완공되었으며, 지하통로로 축구경기장과 연결된다. - 두산백과
선유봉(仙遊峰) 전망대에서 조망하고 내려오면 멋진 소나무가 있는 전망바위가 있으며, 뒤쪽에 문학산이 솟아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문학산(文鶴山)은 학산(鶴山) 또는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엔 배꼽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산봉우리가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배꼽 모양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옛날 산 형태를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 문학산으로 통칭되고 있다.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서 유서 깊은 역사의 장소다. 또한 문학산에는 인천도호부 관아와 인천향교를 비롯해 지방 지정 기념물인 문학산성, 학산 서원 터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늘에 제를 올리던 도천현, 전송객이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들을 크게 세 번 불렀다는 삼호현(三呼峴)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 함께 600년생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문학산에는 삼국 시대의 유적인 문학산성, 고려 시대의 문학사(文鶴寺) 터, 조선 전기 건물인 문학 문묘(文廟)와 인천도호부 관아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 밖에도 학산서원 터, 안관당(安官堂) 터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량산(淸凉山) 오른쪽 자락에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던 한나루 포구와 능허대가 있었다고 한다.
연수구의 가운데에 우뚝 서서 송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淸凉山)은 산세가 아름답고 좋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청룡산’, ’청릉산’, ’척량산’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 중종 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그 뒤에 나온 『인천부지』 등에 보면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淸)’, ‘빼어나다(秀)’라는 말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일제시대였던 1937년 일본인들이 한국을 오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인천의 모습을 예쁜 색깔로 정밀하게 그려 만든 그림 지도 「경승(景勝)의 인천」에 청량산을 ‘송도 금강(金剛)’이라 이름 붙여놓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청량산이라는 산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으로 전해 오며, 그가 고려 우왕 2년(1376)에 이곳에 흥륜사를 세우면서 이 이름도 지었다고 한다. -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과 그 뒤쪽 송도동 송도국제도시를 조망한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지역과 왼쪽 동춘동 지역을 조망한다. 왼쪽 뒤는 남동구 고잔동과 논현동 지역인 듯.
왼쪽은 연수구 연수동 함박마을, 청량산 아래는 연수구 청학동, 그 오른쪽은 연수구 옥련동 지역이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청량산은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있어 오대산으로도 불리던 산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화엄종의 고승인 징관조사가 열반에 들며 “내 법(法)을 동쪽 해뜨는 작은 나라에서 꽃피우리라”고 예언했고, 이에 따라 그의 두 수제자가 백마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송도에 있는 이 산 중턱에 다다랐는데 더 이상 말이 움직이지 않아 이곳에 백마상(白馬像)을 세우고 산 이름을 청량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적 입장에서는 청량산이 원래 척량산(尺量山)인데 ‘청량’과 ‘척량’의 발음이 같아 와전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척량’이란 ‘금자로 땅을 재는 형국’, 즉 금척량지형(金尺量地形)의 준말로 이 산의 모양이 그런 형세라는 뜻이다. 산 이름을 청릉산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이 산의 동쪽 기슭에 청릉(靑陵)이라는 무덤이 있어 원래 산 이름이 청릉산이었다고 주장한다. 『대동지지』나 『인천부읍지』에 거론되고 있지만 지금 그 터를 찾을 수 없는 청릉은 백제를 세운 온조의 형 비류(沸流)의 무덤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인천광역시사
전망바위에서 문학산을 조망한다. 문학산에는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인 문학산성이 있다고 한다.
문학산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문학동, 관교동, 학익동과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선학동, 연수동, 청학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주봉인 문학산을 중심으로 동서 2.5㎞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북으로 산줄기가 뻗어 가다가 다시 좌우로 갈라져 서쪽으로는 용현동으로, 동으로는 인천도호부 관아와 인천 향교 뒤를 감싸고 승기천까지 이어진다. 남쪽으로도 산줄기가 이어져 청량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학산의 정상은 산의 동남부에 위치한 군사 지역이며, 서쪽 봉우리는 연경산으로 정상부에 ‘연경정’이 있다. 정상부 및 남서쪽은 군사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산의 북쪽은 제2 경인 고속 국도가 관통하며, 동쪽에는 문학 경기장이 건설되어 있다. 문학산의 등산로는 연수 둘레길의 일부로 조성되어 수리봉~길마봉[또는 길마산]~전망대~정상[공군 부대]~연경산~노적산의 능선 코스를 따라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로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나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연경산 입구 등산로 일원에는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체력 단련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520m 아래에 연수구 연수동 함박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문학산 정상 입구 640m 지점으로 직진한다.
연수동에 함박마을은 이곳에 함(咸)씨와 박(朴)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곳에 지금은 물론 옛날에도 함씨와 박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근거는 별로 없다. 동네에 있는 산의 모양이 함박(함지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거나, 동네에 함박꽃이 많이 피었기 때문에 함박마을이 됐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 역시 실제 지역 사정과는 잘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함’을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에서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고, ‘박’은 농사를 짓는 ‘밭’이나 ‘바깥’이라는 ‘밖’의 변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골짜기나 마을을 뜻하는 우리말 ‘골’을 합하면 함박골, 즉 ‘큰 밭 마을(골짜기)’ 또는 ‘큰 바깥 마을’ 정도의 뜻이 된다. 이곳 함박마을이 문학산 기슭에 있는 곳이고 보면 그 해석의 타당성이 적지 않다 하겠다. 또 다른 해석은 ‘함’을 역시 ‘크다’는 ‘한’의 변형으로 보면서 ‘박’은 ‘밝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밝’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신제(天神祭)’ 사상이 담겨 있는 말로서, 이에 따르면 함박마을은 ‘크게 밝은 마을’이란 뜻이 된다. 이는 옛날 이곳이나 주변 산에서 천신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해석이다. 마을 바로 위가 비류(沸流) 백제의 도읍 전설이 얽혀 있는 인천의 진산(鎭山) 문학산이니 그럴 듯한 풀이가 아닐 수 없다. - 인천광역시사
전망대가 있는 선유봉과 소나무가 멋진 전망바위를 확인한다. 왼쪽 지역은 미추홀구, 오른쪽은 연수구 지역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풍경이 흐릿하다. 오른쪽은 연수구 연수동, 그 뒤는 연수구 송도동, 왼쪽은 연수구 동춘동, 그 왼쪽 뒤는 남동구 논현동, 그 오른쪽은 남동구 고잔동, 그 너머는 소래포구와 시흥시 지역일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연수동 장미근린공원, 오른쪽 뒤에 청량산, 그 앞은 청학동, 왼쪽은 연수동 함박마을, 그 뒤쪽은 동춘동, 중앙 뒤는 송도동이다. 맨 왼쪽 남동구 고잔동과 논현동 해안, 소래포구, 바다 건너 시흥시 월곶동과 배곧동, 오이도를 가늠한다.
장미공원은 연수동 문학산 산자락에 위치한 근린공원이다. 인천의 시화인 장미를 소재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와 휴식, 놀이, 운동 등 다양한 일상 및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장미원을 중심으로 야생화, 연꽃 등을 계절별로 연출하여 사계절 내내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며, 문학산의 산림과 맹꽁이 서식처를 보존하여 생태기능을 강화하고 자연학습 체험도 가능하다. 공원 내부에는 어린이놀이터, 생태학습원, 운동시설, 야외무대,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 장미가 피는 5월에는 여러 색깔과 품종의 장미를 볼 수 있으며, 장미축제도 펼쳐진다. 유럽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건축 시설물과 장미넝쿨 길도 있다. 장미정원과 시원한 폭포수가 그려진 계단은 포토존으로도 인기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
전망대에서 조망한 뒤 문학산 정상으로 오른다. 왼쪽에 선유봉, 오른쪽에 연수구 연수동과 동춘동, 건너편 남동구 고잔동과 논현동, 소래포구를 가늠한다.
왼쪽 570m 아래에 연수구 연수동 함박마을이 있으며, 문학산 정상 입구는 오른쪽 480m 지점에 있다.
문학산 정상을 바라본다.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인 문학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인 문학산성의 건립 연대는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문학산성 안팎에서 삼국시대 백제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문학산 동쪽 구릉 지대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문학산 일대에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며, 문학산 주변에서 초기 백제의 타날문[두드림무늬] 토기 조각이 많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에도 대규모의 주거지가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학산성은 문학산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산 정상을 중심으로 성곽이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 되도록 한 바퀴 둘러쌓는 방식] 석성(石城)으로, 처음 쌓을 당시에는 토성(土城)의 형태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둘레 577m의 소규모 석성으로 남북 간 길이와 비교하면 동서 간 길이가 더 긴 타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 성내에 우물 터가 남아 있었지만 1959년 미군 부대 건설 공사로 정상 부분을 깎았을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1959년 미군 부대 건설 공사로 서벽의 대부분이 훼손되었고, 지금은 동벽, 남벽, 북벽의 일부만이 보존되고 있으나, 보존 상태는 좋지 못하다. 최근 등산로를 보수하면서 보존 상태가 양호한 남벽 일부 구간을 개방하였다. 문학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안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문학산 인근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축조 시기를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성곽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백제 건국기 비류의 근거지 미추홀이 인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미추홀의 위치 비정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맨 왼쪽 아래에 연수동 장미공원, 청량산 앞쪽은 청학동, 그 오른쪽 자락에 능허대와 한나루가 있으며, 옥련동 지역이다.
왼쪽은 삼호현 0.9km으로 곧바로 이어지며, 서해랑길은 문학산 정상 0.25km를 거쳐 삼호현으로 내려간다.
문학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옛 초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 문학산성 동문이 있었을까?
문학산성은 문학산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처음 쌓을 당시에는 토성(土城)의 형태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둘레 577m의 소규모 석성으로 남북 간 길이와 비교하면 동서 간 길이가 더 긴 타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 성내에 우물 터가 남아 있었지만 1959년 미군 부대 건설 공사로 정상 부분을 깎았을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또 동문과 서문 등 두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각종 자료를 살펴보면 이중에서 동문은 군부대가 들어섰던 1959년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서문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이미 조선 시대에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내 시설은 배수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수구 두 개만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학산 정상에 있던 미사일 기지가 영종도로 이전하면서 2015년 10월 15일부터 문학산이 개방되었다.
군 관계 시설물 왼쪽으로 100m를 올라가면 문학산 정상이다.
왼쪽에 쉼터가 있으며 쉼터 벽면에 문학산과 문학산성에 관련한 내용을 게시하고 있다.
쉼터에 미추홀구 문학산역사관에서 조성한 야외전시물이 게시되어 있다.
1.백제 건국 신화를 품은 문학산성(文鶴山城) : 문학산성은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관방시설로 문학산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싼 소규모의 테뫼식 산성이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가 쌓은 식성(石城)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백제가 쌓은 토성(土城)이었다가 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문학산성에서는 임진왜란(1592), 신미양요(1871), 한국전쟁(1950) 시기에 군사 거점으로 일부 전투기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성내에는 봉수대, 우물, 안관당(安官堂), 동·서문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문학산성 명칭 변화 : 문학산성은 읍치(邑治)의 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남산석성(南山石城)과 남산고성(南山古城)으로 통칭되었으며, 지명에 따라서는 인천산성(仁川山城), 문학산성(文鶴山城), 미추홀고성(彌鄒忽古城), 문학산고성(文鶴山古城), 혹은 문학고성(文鶴古城)으로도 불렸다. 또한, 비류 건국 신화와 관련하여서는 비류성(沸流城), 에분성(恚憤城) 등으로도 기록에 나타난다.
3.문학산의 유래와 명칭 변화 : '문학산(文鶴山)'은 '두루미가 날개를 편 듯 둘레를 광범위하게 에워싼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학(鶴)'의 고유어인 두루미는 '두르다, 둠, 두름'과 같은 의미이고, '문(文)'은 옛 우리말에서 대개 '크다'의 뜻 으로 풀이된다. 또한, 1708년 학산사원(鶴山書院)이 건립되고, 인근에 문묘(文廟)가 자리하고 있어 각 단어의 글자가 합쳐져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남산(南山), 성산(城山), 문학산(文鶴山), 학산(鶴山), 봉화산(烽火山), 봉화둑산, 배꼽산 등이라 불려왔으며, 현재 '길마산-수리봉-문학산(주봉)-연경산-노적산을 통칭하는 범위로 여겨진다.
미추홀구 문학산역사관에서 조성한 야외전시물이 게시되어 있다. 문학산이 소개되는 조선후기 옛 지도 사진이 있다.
인천 역사의 원류, 문학산(文鶴山) : 인천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약 4.5km의 산록이 이어져 있는 문학산(217m)은 인천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해왔다. 문학산은 바다와 인접한 지리적 환경으로 선사시대 생활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며, 기원전 18년 비류 세력이 정착한 미추홀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에는 문학산과 승학산 사이의 분지에 읍치(邑治)가 형성되어 전통시대 인천의 행정·교육·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군사적 요충지 역할도 해왔다. 미추홀 2,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학산은 인천 시민들의 마음의 주산(主山)으로 지금까지도 자리하고 있다.
쉼터 건너편의 그늘공간 벽면에도 문학산 관련 자료가 전시된다.
문학산 주변의 선사시대 삶의 흔적 : 문학산 일대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찍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편 등이 문학산 주변에서 소량 수습되었고, 문학동 유적 및 학익동 고인돌 등의 청동기시대 유적도 이 주변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현재 문학경기장이 들어신 자리에서는 문학동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장방형(長方形)·방형(方形)의 집터 7기와 배수로로 추정되는 도량형 유구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유적에서는 돌도끼, 돌화살촉, 반달돌칼, 민무늬토기편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인천의 청동기문화를 확인할 수가 있다.
미사일 기지가 이전된 문학산 정상은 정비되었다. 문학산 전망대 입구에 문학산 정상 표석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 '문학MUNHAK' 문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문학산은 남산, 성산, 배꼽산, 봉화둑산 등으로 불렸으며, 산꼭대기의 성은 남산 고성, 에분성, 비류성이라 불렸다. 문학산은 1458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모두 ‘남산’으로 기록되었고, 문학산성도 ‘남산 고성’으로 기록되어, 이때까지 인천도호부의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782년(중종 6)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숙종 임오년(1702)에 학산 서원을 세우고 무자년(1708년)에 사액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남산’이 ‘학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을 인천도호부 쪽과 그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학이 양 날개를 펴고 있는 형국으로 보여서 학익동[인천광역시 남구]이라 명명하였으며, 산의 남서쪽에 청학동[인천광역시 연수구], 북동쪽에 문학동[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동쪽에 선학동[인천광역시 연수구] 등 학과 관련된 땅이름이 산재되어 있다. 또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산성말 동쪽에 학산말이 위치하고 있다. 언어학적 해석으로는, 우리말 ‘둠’ 또는 ‘두룸’에서 온 것으로 ‘두룸’이 두루미로 발음되다 보니 사람들이 산의 이름을 한자로 바꿀 때 두루미, 곧 학(鶴)으로 오해하여 학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해발 217m 문학산 정상 표석이 북쪽 전망대 입구 왼쪽에 있다. 전망대로 가서 조망한다.
조망안내도를 통하여 서북동쪽을 조망하며 위치를 확인한다.
문학산, 시민의 품으로 : 문학산성은 문학산 정상부에 있는 돌로 만든 산성이며, 1962년부터 문학산 정상부에 군부대가 주둔하며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다가 인천시와의 협의 끝에 2015년 10월 15일 인천 시민의 날, 마침내 정상부가 개방되었다.
승학산이 앞쪽의 미추홀구 문학동과 뒤쪽의 관교동에 걸쳐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 문학경기장, 그 뒤는 남동구 구월동이다.
오른쪽에 승학산, 왼쪽 뒤에 수봉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학익동, 학익동, 숭의동, 주안동 지역이 펼쳐져 있다. 바로 아래 제2경인고속도로 문학IC를 문학교가 동서를 가르고, 북쪽에서는 미추홀대로가 내려와 문학교 아래를 지난다.
미추홀대로(彌鄒忽大路)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지하차도부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역삼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7.5km, 왕복 4~12차선의 도로. 도로명은 인천의 옛 지명인 '미추홀(彌鄒忽)'에서 유래되었다. 제2경인고속도로 문학IC 와 접속하는 도로이며, 2002년 개통된 문학터널을 통해 연수구 청학동 방면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2009년에는 청능교차로~컨벤시아교(舊 송도2교) 구간이 개통하여 컨벤시아대로와 직결되었다. - 나무위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이 뒤쪽에 자리하고, 앞에 연경산, 맨 왼쪽 뒤에 노적산이 보인다.
연경산(衍慶山)은 학익산(鶴翼山) 혹은 청명산이라고도 한다. 학익산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문학산은 이전 이름이 학산(鶴山)이었는데, 학익산과 문학산 주봉(主峰)이 두 날개처럼 펼쳐져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학골, 핵굴 등으로 불렸다 한다. 그러나 본 명칭인 연경산에 대한 구체적인 지명 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연경산의 높이는 175.86m이며 문학산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그 서편에는 노적봉이 있다. 주봉인 문학산에 군부대가 있는 까닭에 출입할 수 없다. 그 대신 연경산에 오르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부근에 연경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1980년대에 세워졌다. 연경산 등산로는 하루에도 수백 명이 오르내리는 곳이다. 한국 도로 공사 군포 지사에서 등산로 입구 굴다리에 전등을 설치하여 통행 및 벽화 관람에 적당한 밝은 조명을 확보하고, 미색으로 도장한 후 굴다리에 타일 작품 10점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벽화 그리기 및 입구에 화단 가꾸기 행사를 하여 아름다운 등산로를 조성하기도 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미추홀구 학익동 지역이 펼쳐져 있다. 중앙 아래에 삼호현, 그 뒤에 연경산, 중앙 뒤에 노적산이 보인다.
노적산(蘆積山)은 『해동 지도(海東地圖)』에는 제월산(霽月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노적봉이라고도 한다. 노적산이라는 이름은 1917년 지도에 처음 나타난다. 문학산의 다섯 봉우리 중 주봉인 문학산(文鶴山)과 서쪽 봉우리인 연경산의 서쪽에 위치한 산이다. 높이 148.9m의 정상에는 전망대를 갖추고 있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천광역시 연수구, 인천광역시 중구를 조망할 수 있다.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인천시립 옥련사격장이 있으며, 더 아래로 내려가면 송도초등학교로 내려가는 옛길과 연결된다. 연경산 남쪽으로 2012년 6월 30일 개통된 수인선이 지나가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에 문학산성 서북벽, 철조망 뒤에 삼호현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있다.
문학산 정상표석 뒷면에 '미추홀 고도(古都) 문학산 날개를 펴다 2015.10.15.'가 적혀 있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증보문헌비고』에 문학산성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미추홀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으로 현재 인천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 하여 남산이라고 하고,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또 산 위에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비류왕이 도읍한 곳이라고도 하며 왕이 분개하여 죽은 까닭에 분성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문학산성은 이중으로 된 성으로서 외성은 석성으로 주위가 약 200m이고, 내성은 토성으로 주위가 약 100m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동북면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는 조선 시대에 만든 높이 3m 의 고분형의 봉수대가 있어 마치 배꼽처럼 보여 문학산을 ‘배꼽산’ 또는 ‘봉화둑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봉수를 허물어 버려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통신하는 봉수는 고려 시대에도 이미 실시하고 있었으며, 문학산의 봉수는 남으로 안산의 정왕산, 북으로 부평의 축곶 봉수에 응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학산 정상의 미사일 기지는 영종도로 이전하였고, 2015년 10월 15일 문학산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학산역사박물관은 군 시설물을 리모델링한 것 같으며, 그 왼쪽 뒤에 문학산 남쪽 전망대가 있다.
문학산역사관 출입문 위에 '문학산역사관', '미추홀 2000년 역사의 태동지, 문학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적혀 있다.
1.소개 : 문학산역사관은 미추홀 2,000여 년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문학산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문학산 문화유산의 보존과 지역정체성을 발현하기 위해 관할 군부대의 승인을 받아 군사시설을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게 됐습니다. 이는 문학산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첫 발걸음이고, 그 여정을 시민들과 함께 하는 역사관으로 자리매김 하겠습니다.
2.관람안내 : 개관시간 - 10:00~17:00 (매주 화~일요일)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명절 연휴, 기타 필요 시
3.유의사항 : 문학산 정상부에 위치한 군사시설이라는 제약된 환경을 일부 개선하여 역사관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다중이용 문화시설에서의 기본 에티켓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남쪽 전망대 난간에 문학산 조망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도를 보면 남쪽과 서쪽, 동쪽 지역 조망이 트여 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조망 풍경이 흐릿하다.
왼쪽의 청량산 앞은 연수구 청학동, 그 오른쪽과 뒤는 연수구 옥련동, 청량산 오른쪽 자락에 능허대와 한나루가 있다.
맨 오른쪽에 미추홀대로가 지나며, 그 왼쪽은 연수구 연수동, 그 왼쪽은 동춘동, 중앙 뒤에 송도동 국제도시, 바다 건너는 시흥시 배곧동과 정왕동 오이도이며, 시화방조제가 가늠된다.
오른쪽은 연수구 연수동, 그 뒤는 송도동 인천신항과 국제도시, 왼쪽은 동춘동, 그 왼쪽은 남동구 고잔동, 그 왼쪽은 논현동, 소래포구가 가늠되며, 바다 건너는 시흥시 월곶동, 배곧동, 정왕동 오이도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왼쪽에 선유봉이 솟아 있고, 오른쪽은 연수구 동춘동이다. 건너편은 남동구 남촌동, 고잔동, 논현동, 소래포구가 가늠된다.
중앙에 선유봉, 왼쪽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봉은 남동구 간석동의 만월산인 듯.
문학산 남쪽 전망대 출입구 쉼터에 비추홀과 문학산 관련 내용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1.비류 전승(沸流傳承)과 미추홀, 그리고 문학산 : 백제 건국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 전승과 비류 전승이 남아 있다. 온조 전승에 따르면 온조가 백제의 시조이고, 온조의 형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였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후회하다가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비류 전승에는 백제 시조 비류의 주체적인 모습이 강조되어 있는데,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도읍을 세우자고 제안하고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더불어 삼국사기, 잡지(志), 삼국유사』 『고려사, 인천부지 《仁川府誌) 등의 문헌에서 인주(인천의 옛 이름)가 미추홀이다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이 인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문헌자료에는 문학산이 미추홀의 근거지로 기록되어 있어 이 일대가 인천 역사의 태동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세종실록과 동사강목에는 작은 샘(小泉), 비류정(沸流井) 등 백제 우물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고, 중보문헌비고에는 문학산에 큰 무덤이 있고 석인상이 엎드려 있는데 이 무덤이 미추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2. 문학산 제사유적 : 문학신 삼호현에서 정상 방향으로 약 150m 떨어진 능선에서는 제단으로 추정되는 빈자리 기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잔, 기와 등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주로 출토되었는데, 청동기 시대 화살촉과 '순화원년(淳化元年, 990년)'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도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주민의 거주지나 산성과는 동떨어져 있고, 문학산 북쪽에서 삼호현을 지나 능허대나 한나루[大津]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유물을 고의적으로 깨뜨린 양상이나 잔과 같은 특정 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양상 등으로 보아 바닷길로 떠나는 사람들의 안녕이나 풍어 등을 기원하던 제사유적으로 추정된다.
미추홀구 문학산역사관 서벽의 야외전시로, 문학산 주변의 옛 마을 풍경과 사진으로 보는 문학산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산의 옛 모습 : 인천 역사·문화의 태동지, 문학산(217m)과 그 주변의 모습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민간부터 공적인 영역에서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인천시립박물관 박경성 관장의 인천 지역 고적 조사 결과를 비롯하여, 화도진도서관의 인천 지역 옛 사진 자료에 대한 아카이브 사업 등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문학산의 옛 모습과 그 안에 내포된 역사·문화적 가치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군부대 주둔으로 출입이 제한되었던 문학산 정상이 인천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시점에 문학산의 역사와 가치를 지역 내에서 재조명하고자 개관한 미추홀구의 '문학산역사관'에서는 문학산과 그 주변 문화유산에 대한 자료들을 일반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학산역사관 서쪽 벽면에 문학산의 옛 모습 야외전시판이 게시되어 있다.
문학산 정상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지역인 것 같다. 서해랑길은 문학산역사관에서 삼호현고개로 이어간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증보문헌비고에 문학산성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추홀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으로 현재 인천의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이라고 하고,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비류는 주몽의 아들로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했는데, 이는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 안내판
쉼터파고라 벽면에 문학산역사박물관 야외전시 '문학산의 관방(關防)' 게시판이 붙어 있다.
미추홀구 문학산역사관 야외전시 3번째는 쉼터파고라 벽면에 전시된 '문학산의 관방(關防)' 게시판이다.
조선시대 문학산 주변 관방 시설의 흔적 : 관방(關防)은 험난한 곳에 설치하여 굳게 방어한다는 의미로 문학산의 관방 시설은 문학산성 그리고 부속시설로 봉수대가 있었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 1542~1592)이 산성을 수리하고 백성과 함께 왜병으로부터 산성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영종과 제물포에 군사진지를 설치하고, 문학산성과 서해 도서 진보(鎭堡)의 봉화대를 연결하는 등 인천부를 중심으로 해양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라는 의견이 비변사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특히, 1871년 신미양요 당시에는 문학산과 봉수대 등에 군사를 배치하여 매복 및 요망(瞭望)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소성진중일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 책은 신미양요 당시 구연상(具然相, 1832~미상)이 인천도호부에 머물며 쓴 일지로, 미국 전함의 종적과 인천의 군기·군수 내역 등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문학산을 중심으로 설치된 군사 진지의 현황과 산신신앙에 대한 정보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고문헌 자료이다.
광복 이후 문학산의 미군부대 주둔 : 전통시대부터 군사적 중요 거점이었던 문학산은 광복 이후 군사기지로 사용되기도 했고,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지점의 하나인 청색해안(Blue Beach)의 마지막 종착점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천항으로부터 문학산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미군의 유류보급 및 미사일 부대 등이 주둔하며 문학산은 군사 기지로 변모하게 된다. 이어서 1979년 한국군이 주둔하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문학산은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산 서쪽 출입문의 옛 초소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정면에 청량산이 누워 있고, 그 뒤 연수구 송도동 송도국제도시 빌딩들이 솟아 있다. 임도를 따라 삼호현으로 내려간다.
오른쪽 문주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비류의 미추홀 건국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 건국한 이야기가 설명 없이 주제 그림만으로 전시되어 있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림의 주제를 차례로 적으면, '비류의 등장, 건국을 결심하다, 남쪽으로 떠나다, 새로운 터전을 찾다, 바닷가에 정착하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다, '물의 나라' 미추홀,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 미추홀 해상왕국을 꿈꾸다, 미추홀의 요새 문학산, 인천 역사의 중심 문학산' 들이다.
비류(沸流)는 고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형.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초기 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 초기에는 비류 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 유역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온조 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을 생각된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 집단이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마한 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비류의 미추홀 건국이야기 전시를 지나면 문학산과 관련한 시 작품 게시판들이 전시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름가에 서니/ 온갖 시름 사라져 시원스럽네/ 뜻과 정신은 세속의 밖에서 늘고/ 푸른 산과 파란 바다는 내 앞에 떨어지네/ 비단 봉우리 휘감아 뽑아 평지에 늘어놓고/ 바로 은하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쏟았네/ 오고 가는 것들이 어찌 이리 아득한지/ 무릉도원의 안개비 사이로 고깃배 떠 있네/ 꿈에서 깨니 밝은 새벽 해조(海潮) 넘치고/ 산악에는 음양의 두 기운이 찰랑이며 노니네/ 푸른 하늘 우러러 보니 나는 기러기 드물고/ 까마득히 먼 생각은 이 한 몸 떠있다는 것이네/ 스님은 나를 위해 계단에 서서/ 조그만 것들 가리키니 고깃배들이네/ 종횡으로 앞뒤로 문두 요란한데/ 소상에 바람이 부니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이네/ 땅은 광활하고 아침 밝아오자 하늘은 빵 풀려 비올 기운 거두었네/ 고갯마루는 불전에 기댄 모습이고/ 조수 밖 고깃배 눈에 들어오네/ 속념은 구름 따라 사라지고/ 유장한 정은 바다와 함께 흘러가네/ 유연히 청순한 의미로/ 오래도록 창주에 머물었으면 하네
인하 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이가림 시인의 미추홀구를 소재로 한 시집인 『바람개비 별』에 이 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옛 비류 백제의 배꼽/ 다 문드러진 흉터 자국이나나/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 그 꼭대기에 올라/ 두 눈을 씻고 또 씻어/ 두리번거려 보지만/ 버짐 먹은 배꼽산엔 배꼽이 없다/ 아아, 슬픈 미추홀 땅이여!/ 푸르른 생기 뛰놀던 혈맥마다/ 쇠못에 찔려/ 거의 뇌사 직전의 빈사상태로 나자빠진/ 시든 몸뚱어리가 되고 말았는가// 등허리에 올라서서/ 힘껏 발을 굴러 보아도/ 옆구리를 쿡쿡 찔러/ 잠깨워 보아도/ 그저 힘겨운 듯 고개를 들어/ 거무스레한 안개 두른 먼 도시를 멀거니 내려다볼 뿐/ 큰 기침 소리 한번 시원스레/ 내지르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은 이끼를 기르는 바위가 숨 쉬고 있고/ 그래도 아직은 굴참나무 숲길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 따위를 주워 먹는/ 다람쥐 새끼들이 늘고 있기에,/ 커다란 금속 배꼽을 단 레이더가/ 쉬임없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일그러진 산을/ 오늘도 오른다
칠언율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邊一道上孤岑(천변일도상고잠) 西海滄波萬丈深(서해창파만장심) 落照半腰雲片片(낙조반요운편편) 烈風高頂石森森(열풍고정석삼삼) 時平老卒看烽燧(시평로졸간봉수) 地僻居人祭樹林(지벽거인제수림) 歸馬更穿松竹影(귀마경천송죽영) 怪聲相喚綠毛禽(괴성상환록모금)
하늘가 한 줄기로 높고 외로운 봉우리 솟아있고/ 서해의 푸른 물결은 한 없이 깊네/ 해가 져서 구름의 허리를 조각조각 내듯이 반으로 가르고/ 노은 정상의 빽빽한 돌무더기에 바람이 세차네/ 평화로운 시절에 늙은 병사는 봉화대 살펴보고/ 궁벽한 곳에 사는 사람은 수에서 제사 지내네/ 말을 돌려 다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림자를 뚫으니/ 푸른 빛깔의 털을 가진 새들이 괴이한 소리로/ 서로서로 지저귀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文鶴山登細路賖(문학산등세로사) 彌鄒曾據設邦家(미추회거설방가)/ 雨過頻得鴛鴦瓦(우과빈빈득원왕와) 春到偏開望帝花(춘도편개망제화)/ 古井生雲疑覇氣(고정생운의패기) 叢祀無主付神鴉(총사무주부신아)/ 殘城又捍龍蛇刦(잔성우한용사겁) 壞粉張鱗石噴牙(괴분장린석분아)
문학산 오솔길을 더디게 오르니/ 일찍이 미추가 나라를 세운 곳이네/ 빗줄기 지나가자 원왕 기와 눈에 자주 띄고/ 봄의 진달래는 한쪽에만 피었네/ 옛 우물에 구름이 서리니 패기는 아닐는지/ 주인 없는 사당은 신령스런 까마귀가 지키네/ 무너진 성곽은 임진년 난리를 막아서인지/ 흙이 무너져 켜켜이 비늘 모양이고 돌은 뾰족하게 닳았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시자 한상억의 '문학산의 노래'가 게시되어 있다. 능호대는 능허대의 잘못일 것이다.
이천년 그 머얼리/ 비류 고집부려 씨 뿌리고/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는/ 월미를 치는 파도 소리에 깨이고/ 그 물결따라 문을 열었나니/ 하 많은 선민의 피와 치욕이/ 저 해안을 흘러 갔어도/ 고스란히 지켜 온 갸륵한 뜻과 모습./ 문학의 메는 창공에 푸르러/ 서기 어리고/ 명사에 해당화는 꺾였어도/ 오백년 능호대의 바람은 맑아라.
문학산과 시 게시판 전시가 끝나면 문학산에 얽힌 설화 게시판이 전시된다. 술바위 전설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사모지고개 아래쪽 벼랑의 움푹 파인 곳에 있는 큰 바위로 술바위(중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는 예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뚜렷하게 남아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선비가 사모지고개를 넘다 벼랑의 움푹 파인 곳에 있던 큰 바위에서 발을 멈추었습니다. "아이고 고개를 넘으려니 힘이 드네. 쉬었다 가야지." 선비는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목이 마르니 술이 한 잔 먹고 싶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바위 뒤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요? 여인은 선비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술잔을 내었습니다. "목이 마른 듯하니 한 잔 하시지요." "네 고맙습니다." 받아 마시다 보니 연거푸 석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선비가 눈을 뜨니 다시금 어제 마신 술 생각이 났습니다. 다시 사모지고개 큰 바위를 찾아갔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시 여인이 나타나서 술잔을 건넸지요. "고맙소." 그렇게 다시 석 잔을 마시고 한 잔을 더 마시려 하자 여인이 사라졌습니다. 술맛을 잊지 못한 선비는 바위에 무릎을 대고 이마를 찍으며 술을 더 달라 애원했지만 여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바위에는 술이 간절했던 선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산신(産神)우물 전설 게시판들을 지나와 뒤돌아본다. 전시 내용을 옮긴다.
현재 문학동 55번지에는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아이가 없는 부부가 이 우물에서 정성을 다하면 아 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삼신 우물' 혹은 '산신 우물'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아이를 갖지 못해 매우 슬퍼하던 부부가 있었어요. "여보 저기 작은 골짜기에 산신우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우리 우물에 가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어요." 부부는 우물가에 가서 산신 할머니에게 매일 밤 소원을 빌었어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신 할머니 아이 없는 우리 부부에게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세요." 이렇게 백일이 흘렀습니다. 백일기도를 다하고 부부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기겠지요." "아무래도 부정이 탈 수 있으니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든지 말을 하지 맙시다." 그런데 가는 길에 어떤 아낙이 부부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부부는 약속한 대로 답을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몇 년이 흘렀지만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요.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아낙에게는 아이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백일기도의 치성이 그 아낙에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갑옷바위 설화 전시 게시판들을 지나와 뒤돌아본다. 갑옷바위 전설을 옮긴다.
사모재고개를 넘어 청학동 쪽으로 약 15m 가량 내려가면 오른쪽 연경산 비탈에 갑옷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바위는 둘레에 큰 금이 나 있어 흡사 뚜껑을 닫아 놓은 돌함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장수가 바위 아래 석함을 파고 있어요. "인천에 적이 쳐들어오면 이 갑옷과 투구로 지켜내야 하니 잘 보관해야겠다." 석함을 파낸 곳에 투구와 갑옷을 넣고 바위로 뚜껑을 덮었어요. "이곳에 장수가 보물을 숨긴 것 같은데, 뭐가 있는 지 한번 볼까?" 그런데 사람들이 갑옷과 투구를 넣은 바위를 건드리기만 하면 벼락이 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들이 생겼어요. 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무서워했어요. 하루는 안관당을 지키던 호기심 많은 당지기가 이곳 바위를 찾았습니다. "이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길래 사람들이 건드리기만 하면 벼락을 맞아 죽는 건지 알아봐야겠다." 당지기는 망치로 바위 아래쪽을 깨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깨지기 시작하는군, 그런데 하늘이 이상하네."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천지가 진동하며 내리꽂는 벼락에 당지기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안관당(安官堂) 전설을 그림이야기로 전시한 게시판들을 지나와 뒤돌아본다. 게시 내용을 옮긴다.
1949년 이경성의 고적조사에 따르면 봉수대 동쪽 밑에 남북 7m, 동서 3m의 건물 유지와 초석 및 석단을 확인하고, 이곳을 '안관당(安官堂)'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인천부사 김민선을 모신 사당이라고 전해지는 안관당은 근대시기까지 남아 있었으며,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안관당 내부에는 목조로 된 상에 의복을 입힌 남녀 상과 크고 작은 목마, 창, 검 등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안관당 사당에는 안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셔져 있어요. 동네 사람들은 사당에 소원을 빌며 굿을 했지요. 청학동에 살던 어는 문중의 부인이 지나가다 사당에 있는 안관 할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비웃었어요. "안관 할아버지는 정말 못생겼네! 동네 사람들은 저 얼굴에 왜 소원을 빌까.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 다음 해 그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생김새도 못생겼고 행동도 이상했어요. 그 아이는 씨익-씨익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어요. 동네 사람들은 쑥덕거렸죠. "씨익할배 지나가네." "그 부인이 사당에 있는 안관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타서 저런 아이를 낳았대."라며 수군거리며 무서워했어요.
문학산에 얽힌 설화를 살피며 내려와 뒤돌아본다. 문학산 정상으로 올라가며 이 전시물을 살피는 게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