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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유학을 한 사람으로서 서구문학과 학술
그리고 문예 등을 재 조정하여 평화담론을 위주로 사회운동을 한 사람이고
사회민주주의 사상체계를 창작과 비평이라는 출판사의 대표직을
맡으면서 사회운동의 기수로 부각되고 이면에 서서
사회적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개인적으로는 백낙청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도 없고,
그분이 제기한 대화록 이나 미국의 채털리부인을 쓴 로런스 작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실토 를 하였고.
한계례 30 주년 담화내용의 인터뷰 를 잠시 들여다 보고 중간에
시청을 포기한 적이 있는 그것밖에는 없읍니다.
또한 문학 언론을 이용하여 운동권 단체들과 수많은 교류를 이어나가면서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자 들과 접촉문화를 많이 가진 사람으로서
그들의 대부라고 칭송할 만큼 카리스마를 지닌자라고 할 수 있으며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직 간접적으로 정권을 창출하게 한
주도적 입지를 지닌자라고 언론들은 조심스렇게 내놓고 있읍니다.
구체적인 철학적 사고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평화 담론입니다.
이 평화담론으로서 남북관계에서 통일을 차치하더라도 서로 극복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운동을 사회전반에 퍼뜨려야 하고
민족주의 보다 더 앞선것이 평화라는 사실에 대한 명제에 충실해야한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화진보 담론이라는 학술적 체계로서
김대중을 위시하여 운동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자 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 주장은 문제인정권은 그대로 답습합니다.
백교수는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협력 교류하여
평화를 유지하므로서 점차적으로 사회적 개혁의 소통점을 찾아가면서
그 맥을 찾아 한민족의 평화를 국제적시야에서도 당연한 그 테두리를
내 놓으므로서 민족문화의 공통점을 자연하게 찾아나서자 라는 것을 말 합니다.
하지만 한겨례 신문과 인터뷰 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표명과는 달리
노무현 정권이후 이명박 보수층에게 정권을 준것이
죽써서 개 준 꼴이라는 평가를 하였고
6,10 항쟁 에 대하여는 이북과는 관련없는 순수한 민주항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높이 평가 했고
5,18 사건은 오히려 이북과 이남의 갈등초래 현상을 더욱 심화 시켰다고
보면서 재 조명 해야 한다는 의지를 피력했읍니다.
또한 세월에 호에 의한 초불집회를 과감하게 초불혁명이라고
인정했고 그것으로 는 모자란다는 것을 위시하여
재벌개혁을 앞장서는 한겨례신문 활동을 높이 평가 하였읍니다.
보다 분명한 것은 이북의 정치체제와 공산주의 혁명에 대하여
전혀 비판 이 없다는 사실을 선호 한다는 이면적 반연감이 있읍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며는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책을 담론으로서 서로의 사상진영과 체제진영으로
묶지말고 끌고나가야 하며, 이는 이남 스스로 인권민주주의 의 본질을
명제 삼아 민중운동으로 이를 성취해나가야 한다는
미소띠는 조용한 어조 였으나. 내면의 이중성을 피할 수 없는
비판을 숙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읍니다.
그 눈매는 상당히 독한기풍을 볼 수 있었고, 토론과 대화의 담론에는
미치지 못하고 항상 자기주장을 펴는 어떤 카리스마로서 자기의론이
옳다는 데 더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읍니다.
보수당론자와 토론을 하여 쟁론을 펼치면 백낙청교수는 밀리게 되어있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대사 부터 현대문학에 이르기 까지 독재성을 발휘한
언론문학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권민주주의 의 사상체계의 거두 이희영 교수 역시 나중에 자성론을
펴고 반성한 사례에 반하여 아직도 백낙청교수는 고집하는 학설입니다.
그것은 백낙청은 민중혁명의 혁명성을 정당화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연으로 이를 선포하거나 표면에 나서지 않는 특징이 주어져 있읍니다.
하지만 백낙청의 보다 중요한 비판의 배경은 모든 문학인들에 대하여
사회주의 기치를 내 걸지 않는 문학인들을 통제하는 간섭도 적지않게
발휘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나라 문학인들이 이렇게 의기소침하고 대 자유스러운 미학적 관념을
피혁하지 못한 것이 창작과 비평이라는 출판자의 독점된 행페 로서
이루어진 배경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인데
문학인의 자유의지적인 관념을 통제하는 운동권의 민중론으로 전체주의
사상을 심화시켰다는 단편적인 사회주의 론 자라는 사실을 말 합니다.
그것을 우리나라의 문학과 비편을 선도하는 창비사의 사업주라는 사실을
말 합니다.
이양반은 그러므로 절대로 토론문화에 적응할 수 없는 태도와 식견을 지니고 있읍니다.
오로지 지휘체제나 자기주장의 독단성을 선호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기 것이 옳다 라는 것을 의미하고 동조세력이외에는 적대화 시키는
그러한 편견으로 세상을 내려다 본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문학과 지성이라는 것은 자유의지로서 개별적인 인식점과 미학적인 개념
그리고 합리적인 문화에 대한 창달에 대해서는 자유로와야 합니다.
결국 백낙청 고수는 이러한 창비사의 대표를 소유하므로서 소비자의
문학인들에게 편굴된다고 할 수 있는여지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문학인들중에서 백낙청의 재벌적의미의 독단의 창비사를 비꾸고서는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는 단계가 심회되어진 순순문학인의 침묵을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문학이나 지성적인 문화마져 이 지경을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테두리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갑자기 문학의 침체기가
도래 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존재성의 외면표정은 아주 아름다운 미소에 훈련되고
이러한 면모를 감추고 있읍니다,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백낙청의 평화담론이나 기후 영향 평가론 그리고 민족사의 대화록 등에 대하여
자기의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나리라 보지만 비판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 비판 해 봅니다.
민중론이라는 것은 민중의 바닥까지 각 보거나 아주 경험적으로 갈등기를 지닌
과정이 주어져야 하는 환경을 답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담론이라 말 해서는 아니고 목적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며는
담론이란 맑고 밝은 물과 같은 성품으로 하나의 이치로 명백한 투명한 의지를
자연적으로 승화 하는 것을 담론이라 합니다 (淡論)
그러므로 물 바닥까지 다 보아야 만 담론이라 할 수 있읍니다.
백낙청의 인생환경기반에서 이러한 과정이 첮째 없읍니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서 공부하다가 미국에 가서 학술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 명망으로 서울대 영문학교수로 재직 한 것 밖에는 없읍니다.
물론 영문학에서 민중론을 꺼낼 수 는 있지만 전문성이 아니며
오로지 객관적이 어조로서 사념처에 머물러 진 지식의 악학궤범 정도 입니다.
그것을 평화담론을 주장할 수 있는 필요충분한 어떤 본질에 접근하기는
그렇고 목적론으로 사회의 수평적 잣대로서 인권을 주장하는 운동가 의
전면에 나서는 것이 더욱 더 옳읍니다.
서민의 정체성을 교과서적으로 보는 경향을 말 합니다.
구체적이지 못하는 사례에 집중할 수 있다는 우려를 말 합니다.
하지만 항상 돈많은 입장엣 창작과 비편의 배고픈 작가들이거나 운동권을
향하여 로비한 흔적 이외에는 별로 없읍니다.
잘은 모르지만 백낙청을 비꾸고는 문학인들이 설 자리가 별로 없지 않는가 하는
문학지의 독재로 군림한 이력만 드러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김지하의 비판처럼 빈 깡통이라는 정면비판에 동의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ㅡ
우리나라의 문학계의 커다란 모순입니다..
두번째로 평화담론에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수중의 물길의 부분적 이데아로서
전부를 이해하려는 고집성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언제나 전쟁의 위험과 동시에 감수해야하는 명제입니다.
또한 이남과 이북의 상대적인 대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평화담론을 꺼내는 것은 이데아적이지 실제적인 현실체제에서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고 상호주의 원칙을 자기스스로 리드 해 나간다는
것은 아니되면 객관적으로 육하원칙에 맞추어 담론을 주장 할 수 밖에는 없읍니다.
자칮 잘못하면 도리어 이북과 대처한 이남정부를 부정하는 테에마에 묶이여
자기도 모르게 리이드를 잘 못하게 된다면 이북에 의한 정견 자체로 용인 수용하는
어필을 가져야 한다는 모순이 적적하게 베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아도 지식노동으로 사회적 지위 한 분야를 차지 할 수는 있읍니다.
백낙청 교수의 손길을 볼때 노동이라는 가치의 분야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않거나
서민들이 처절한 생존경제 나 가사노동 등의 현실적인 분야에 대하여는
열외된 층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서민의고통을 분담하는 이력을 지니거나 경험하는
사례가 있어야지 이론적으로 아무리 객관화 한다 하더라도 정치적 사회운동의
양상을 바로 볼 수 있으며 체감의 영역으로 정당화 시킬 필요는 있읍니다.
이를 생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이북의 정치에
대하여 어느 비판력도 가지질 못하면서 옹호하는 자세로 비판은 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뷰 내용을 보게되면 민중저항운동에 대하여 주도적인 역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객관적인 논조로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이 좋다라는
책임 있는 주장의 언변은 단 한 마디도 없읍니다.
쉽게 말하여 솔선주범이나 정치운동을 하려면 주도적 실행관계에 관련 되어있다는
확실한 표현을 해야 합니다.
독재성과 은밀성으로 책임의 한계를 벗어나는 뒷짐을 지는 행태로 유도하려는
그런목적을 이면에 감춘 것을 말 합니다.
사회운동이란 명백한 개방성을 전제 하지 않으면 모호해지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토론자의 스타일은 아니므로 소통의 의미에서 자기 책임을 빠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교수에게 한계에 해당한다는
것은 실로 사실인 측면이 있읍니다.
책임을 담보할 수 없는 자 들의 말을 신뢰 할 수 없는 것이 이성적인 통찰의
기본 정의관임을 생략시킨다 는 것은 믿을 수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위원 자격으로 김정은을 방문하였는데
그래놓고 평화담론에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다는 담론은 이치가 맞지 않읍니다.
상대방이 듣기 싫어도 옳은 말이나 정당한 견햬를 항사 피력하는 것이
선비 의 성품이며 취 할 바의 도리입니다.
분쟁과 쟁론과 일정한 토론없이 평가되는 민중운동가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 순수한 의미에서도 저촉 됩니다.
그러므로 평화담론자는 양변을 전부 비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의 평화속성을 주장 하려면
하나의 이치인데
이북에 대한 비판은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는 위협을 감수해야하는 것을
피해야 하므로 반론을 제기 하지못하거나 역사적 근거의 책임관계를
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로지 대한민국정부의 일편을 신랄하게 비판을
유도하는 체계에서 문학과 비평을 논한다는 자체가 일방적이며
자기 내면에 주어진 어떤 불안한 지성을 감추는 것과 같으며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안이한 태도로서 자기 지성을 유지보존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입니다.
잘은 몰라도 백낙청교수는 운동권 및 지식인 작가들에게 무수한 돈을 썼을 것이라고
감히 추정 할 수 있읍니다.
세력의 동원은 어떠한 종류이던간에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담론자는 아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재적 의미의 정부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는 목적론에 대하여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략과 지성은 있으나, 실세를 감당할 만한
의미의 용기나 주장성은 없다는 것을 말 합니다.
나로서는 창비 출판의 독단적인 문화적 예술적 문학관에 대하여 독재성을
발휘하여 현재의 작가쥬류를 퇴보하게 한 장본인이라 주장할 수 있는
우려의 배경을 백낙청 교수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의 루신의 문화혁명을 답습하는 사례로 소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류신은 자기의 출신과 유학시절등의 고뇌를 함게 담고 있으며
모순과 정당성을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에 반하여
백낙청 교수의 유학생활과 초년기의 어떠한 사고적 고찰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학이 일편으로 흐르거나 세력을 가지고 지배 하는 입장의 독점력의 전제하의 문학은 자생 할 수 도 없고 발전성도 없는 것입니다.
이거 누가 키워놓았는지 기가 막힙니다.
보수문학 역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전부 기생문학이고 순수문학자들은 숨도 못 쉬게 만든 것이지요.
대부분 작가들은 생활형편이 어렵거나 하면 출판기념일 몇번 열고
생활비에 보태야하는 그런 입장으로 전락되어진 이상한 기생문학만
세상에 전달 하였고, 세상사의 지평을 열만한 포부를 가진 작가들도
어떠한 줄맥을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의기소침하게 만든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담론을 주장하려면 정치일선에 나와서 정당한 비판을 받고
극복해야 합니다, 이를 생략하면서 문학계의 점거를 이유로 뒷 배경을
잡고 놔주지 않는 학자라면 이미 목적 학자이지 학자일 수 도 없는 것입니다.
나무 맨드름하다. 결론입니다.
솔제니친이나 많은 노벨문학상이나 학자들의 출신 배경을 한번 보십시요
모두가 인고의 세월을 직접 참여하고 현 정부를 신란하게 비판하면서
탄핵을 받고 탄압을 받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설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또한 동학적 개념으로서 역사적인 평가에서 흘러나온 학문의 진수는
들여다 보지도 안했다는 사실이고 단지 서국적 문명의 첨예함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의미만 수용하고 젖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학문의 종합적 사례에서 순수한 담론은 나오게 되어있읍니다.
백낙청은 목적론자이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이 필요치 않는 평화 담론은 대한민국 민족사에 대하여 단지 전술일 뿐입니다.
이면에는 통일관이 내재 되어있다 입니다.
그러내야 합니다, 처음에는 오해가 있다 하더라도 솔직해야만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정당성이 성장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상대성원리로서 동시적인 견햬가 맥을 잡고 나가야 하는
절충적인 문제가 아니면 힘의 문제라는 사실로 해결됨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김일성이가 경제도약을 하고 우리나라 보다 더욱더 잘 살게 되었다면
지금 한국이 이렇게 나라를 유지 하고 있을까에 대한 반론을 전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백낙청 교수는 칠판에서 교과서 처럼 이론적으로 알은 어떤 지식의
상태를 시험삼아 일으키는 하나의 의견으로 개진하는 분야로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낙청 교수의 평화담론은 모순이다라고 비판합니다.
정치란 책처럼 되어지지 않읍니다.
왜 정치에다가 이를 개연시켜 이를 목적하여 이루려 하면서
평화담론자라는 이상한 제목을 주장하는지 모르겠읍니다.
콩나물 거래 하는 것에 대하여 회계자료를 갖다 대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재벌기업이나 보수기득권 정부에 대한 비판이 주어진다 하여도
옳고 그름의 반듯한 정의를 동시에 내 놓고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재벌기업의 특징은 정경유착의원인에서 오는 관점입니다.
이것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지요ㅗ.
이만큼 성장한 기업들의 모티부는 어찌했던간에 피와 땀이 함께
함축된것을 모순적인 제도로 찾지않고 재벌기업을 해체 하라는 식의
혁명성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읍니다.
나무 한구르가 수십년을 자랐는데 그 중간을 잘라버린다고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고 생명존중의 양태적 기본 헤게모니가
전혀 없는 혁명론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항상 문학인이면서도 늘 한쪽에 치우치고
부정적 인식으로 민중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은 많은 무리를 자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병폐로 지금 드러나고 있는것과 같읍니다.
백낙청 교수의 사주팔자식을 한번 살펴보겠읍니다.
이것은 제 전문이기 때문에 믿던 안믿던 그것은 나의주장에는
변함이 없읍니다.문학적인 하나의 패럴독스의 분야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는 정확하지만...
백낙청
? 壬 甲 戊
? 申 寅 寅
시 일 월 년
공망 술해 갑자 순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입 계 갑 ,,,,,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자,,,,,
임 일주에 인월 을 보고 천간에 갑목과 무토가 투출하였으며
갑목이 더 힘이 주어져 있으므로 (년지 인목이 하나 더 있음)
식신격이 됩니다 ( 임에서 인목을 보면 양에서양을 보니 수행목하여 식신격입니다)
식신격은 식복은 있다하여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초년운을 가진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신신이 두개 이상 있으면 상관성으로 변합니다.
상관은 관청을 치는 머리가 영리하고 자유분방하며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자유의지가 강합니다.
그리고 인신사해가 전부 있으므로 역마지상으로 자리이동수가 많다는
것을 뜻하고 인신사햬의 전부 출현은 지세지형으로 개혁가 라고 할 수
있읍니다.
저돌적인 기질이 강하고 좌고우면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목적한 바 대로
밀고 나가는 부르도자적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질 자체는 학문성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론적 자세는 되어있지않고 소통을 부재 시키는 단면이 주어지는 성품구조입니다.
물가에 있는 원숭이 형국인데 (임신 일은 물가에 있는 원숭이)
월지 년지에 천간에 나무가 있으니 공간이동하는 조화를 많이 부리는
성품이라 상당히 좋은 귀격에 들어갑니다.
자식이 어떻게 놓여 져 있는지를 모르므로출생시를 몰라 ? 로 표현 했읍니다.
상관격이 인 목이 되면 스프링작용이 상당히 강합니다
반발력이 주어진 특징인데 월지와 일지가 인 신 충으로서
형제간에 부모지간에 소원하고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창조적인 역활을 담당하는 위치를 점 할 수 가 있다 입니다.
술해 가 공망이므로 금수의 자기의 일주가 공망이라
술해에 집착이 강합니다. 비견 고집이 심하다 할 수 있읍니다
술의 지장간 신금이 있어 학문에 집착이 강하고
해의 임일주의 비견성이므로 고집이 강한 경쟁생미 있다 입니다.
제가 보는 관점은 토론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론이 없는 학술은 이미 뼈대가 주어지지 않읍니다.
상관이 뛰어나니 문학 예술 학문등의 추구성이 높아
천무성이 많은 사주인데 역마시장이라 고향을 등지고
외국으로 가는 형국이 됩니다.
년지가 인년이라 지살도 함께 주어졌으므로 조상터를 등지는 것인데
백낙청 교수는 집안과는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한 이 사주는 신약사주 입니다.
힘이 강하지 않아 자기 주장보다 남의 주장에 대하여 신뢰를
하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자기 지세지형으로 모든 사주구조가
생지 이니 (생하는 오행 인 신 사 해 를 말함)
대운 계해운에 온통 물이 들어오므로 인목을 더욱더 생하게 되며
자기자신은 약해지는 운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세가 한편으로 치중되어 자기주장이 강한 쪽으로
계속 흘러가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담론자는 절대 아니다라는 속성을 사주자체에 가지고 있읍니다.
시지에 토운이 많으면 중화되는 기질을 가지는데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임신일주를 보게되면
임에서 재물은 병화인데 병화에서 일지 신을 12 운성을 짚어나가면(이를 육갑을 잡는다고 합니다 ㅎ )
병지가 됩니다, 사주내에 정화가 없으니 합거되지 않아 부인이 있어서 서로
떨어져 역마성으로 사는 것이 편할 것이고, 편재이니 아버지 와 역시 떨어져
살고
인수 인 임에서 금은 경금인데 경금에서 신을 잡으면 장생이 됩니다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것이고, 인수가 학문이므로 학문성이 뛰어난다고
할 수 있읍니다.
관성인 무에서 신을 잡으면 역시 병 입니다, 역마이지요.
외교적 사교술이 천재이다 입니다. 다만 재성이 약하므로
외교전술적으로 뛰어나지 소유면에는 불리하다 입니다.
사주의 구성은 귀격인데 신이 약하다는 특징이 있고 .임일주가 양이라서 종(從)지 못합니다.
종하는 사주라면 사회운동가로서 아주 적격이지만 그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 합니다.
종하게 되면 자기 명을 포기하고 세력이 강한 쪽으로 뭉칠 수 있다라는 것을
말 합니다. 우두머리를 하지 종속되는 관계는 거부한다 입니다.
그러므로 좌파진보자의 대부격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늘 자기주장을 놓지 않는데 인신사해 지세지형이고 충을 만나 있으므로
학문적 정치적 충돌이 예상됩니다.
그냥 학자로 남아야지, 정치나 사회운동에 개연하게 되면
충의(冲) 불리한 화가 생겨날 수 있읍니다.
인 묘 진 년에 대운 계햬가 당도하면 아주 어려운 코스를 진입하게 되는데
요인은 인묘진이 삼재인데 다가오는 임인년 부터 3 년간 구설수가 심해지는
삼재운을 타기 때문입니다.
일지로 삼재를 봅니다.
그러므로 사회운동가로서는 하나의 학설에 분분할 뿐이 사주구성을 하고 있으므로
정치참여에 좌중해야 하는 운세로 나아가야 할 수 있읍니다.
백낙청 교수에 대하여 인간적인 비판은 하지않읍니다만
평화적 담론은 여러모로 보아서도 비판을 받을 만 한 모순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점을 숙고 해야 하리라고 마땅하게 생각합니다.
학술적 정의, 민중운동적 정의 관념으로서는 부족하므로
담론을 해서는 아니되고 차라리 주장을 하는 목적론에 귀추해야 하는 사주입니다.
백낙천의 평화담론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보수당의 전문학술가들은
백낙천을 분명하게 토론장에 끌어 들여 논쟁을 해야 하는
감정평가를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 사상처럼 자이비판을 받아야 만 정당화 될 수 있는 담론이 된다
할 수 있읍니다.
실체적 현실세계에 대한 담론규정은 잘못된 것이며 신뢰 할수 없는
경지에 머무르고 있다 할 수 있읍니다.
다음에 계속 소개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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