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용운, 류완희
선사시대 집단 무덤에서 남성들의 두개골만 발견되었는데, 모두 왼쪽 머리뼈에 타격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덤에 여성의 두개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다른 부족이 침입하여 남성들을 모두 때려죽이고 여성들을 약탈해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수렵을 하든 농사를 짓든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을 약탈하여 아이를 낳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여성노동과 남성노동은 서로 동등하게 보완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수렵과 농경인 외부노동과 가사와 육아인 내부노동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계급과 자본으로 폭력사회가 도래하면서 생물학적 약자인 여성노동은 보조노동 내지 주변부노동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여성이 담당했던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가사와 육아노동을 비하하면서 여성노동을 외부로 끌어낸 것입니다.
밖에서 일을 하여 성공한 여성을 커리어 우먼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어찌보면 여성노동을 약탈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의도해낸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남성 한 사람이 일해서 먹고 살았는데, 점점 두 사람이 벌지 않으면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시인을 잘 알지만 그가 다음과 같은 「직업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직업부인은 요즘말로 하면 '직업여성'이 아니라 여성노동자가 되겠죠.
첫새벽 굽은 길을
곧게 가는 저 마누라
공장인심 어떻던고
후하든가 박하든가
말없이 손만 젓고
더욱 빨리 가더라
당시 노동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고, 직장여성이 일터로 향하는 모습을 활달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첫 새벽에 바쁘게 일터로 가는 여성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후하든가 박하든가”에서는 시인의 임금관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류완희는 1923년 문학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온 사회주의 경향의 문학동인인 신경향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일제하라는 민족현실에 눈감았던 백조파 문학의 감상성과 자연주의 문학의 퇴폐성에 대하여 비판을 하며 민족해방과 노동자의 입장에서 계급적인 시를 썼습니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인 여성노동자를 화자로 당시의 노동상황을 형상화한 시를 보겠습니다. 이 시는 1920년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봄이 되었다면서도 아직도 겨울과 작별을 짓지 못한 채,
- 낡은 민족이 잠들어 있는 저자 위에
새벽을 알리는 공장의 첫 고동소리가
그래도 세차게 검푸른 하늘을 치받으며
30만 백성의 귀 곁에 울어나가기 시작할 때
목도 메다 치어죽은 남편의 상식상을
미처 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려온
애 젊은 아낙네의 가쁜 숨소리야말로…
악마의 굴 속 같은 작업물 안에서
무릎을 굽힌 채 고개 한번 돌리지 못하고
열두 시간이란 그동안을 보내는 것만 하여도, 오히려 진저리나거든
징글징글한 감독놈의 음침한 눈짓이라니…
그래도 그놈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이놈의 세상
오오 조상이여! 남의 남편이여!
왜 당신은 이놈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가셨습니까?
-아내를 말리고 자식을 애태우는…
ㅡ류완희, 「여직공」³⁵⁾ 전문
모두 3연 18행의 시입니다. 계절은 겨울과 봄 사이입니다. 시간은 새벽입니다. 창작자는 계절과 시간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조용한 새벽을 낡은 민족이 잠들어 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민족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입니다. 식민지상황에 처해 있는 민족이 해방과 개혁의 대상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공장은 새벽에 가동을 합니다. 공장 굴뚝연기가 하늘로 뿜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30만 백성은 아마 당시 서울인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2연에서 여성노동자의 사연이 나옵니다. 남편이 목도를 메다 죽었습니다. 이걸로 봐서 당시 화자의 계급은 서울의 도시노동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도시노동자 남성들은 철로나 건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내고 상식상을 올리는데, 화자는 상식상마저도 치우지 못하고 공장에 바쁘게 나와야 하는 현실입니다.
화자는 스스로 노동현장을 악마의 굴 속 같다고 합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노동현장 작업물 안에서 무릎을 굽힌 채 고개 한 번 쳐들지 못하고 12시간 노동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화자는 이런 노동현실이 진저리가 납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에게는 성희롱이라는 또 하나의 덫이 놓여 있습니다. 감독의 음침한 눈이 징글징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감독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화자인 여성노동자는 이런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놈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3연에서는 조상 탓과 ‘남의 남편’인 다른 남성 노동자들을 탓합니다. 이놈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갔느냐고.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말려 죽이고 자식을 애태워 죽이는 세상을 왜 그대로 두고 갔느냐고 원망합니다. 3연에 이놈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갔느냐는 부분에서는 어떤 냄새가 납니다. 여성노동자가 자기 한탄에서 벗어나 남편들이 왜 세상을 개혁하지 않았느냐는 상당한 의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없는 시였다면 이 시는 자기 한탄에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창작자가 화자인 여성노동자를 시에 투입시켜 당시 식민지하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버스안내양을 한 최명자라는 여성노동자의 시를 보겠습니다. 아주 직설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시가 됩니다.
새벽부터 비상이 걸렸다.
또 누구 높으신 나으리가 오시나보다
상무 과장 계장 병신 같은 지부장
평소에 관심도 없던 안내원 숙소에
지대한 관심과 호의를 표한다
꼴사납지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비번 안내원 동원해 대청소시키고
숙소에 빨래 널은 것
이불 펴고 누운 것
지저분하다고 다 치우라고 한다
잠에 밀린 아이들 신경질 난다
명칭만 도서관인 점호장소에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새 책상 갖다 놓고
국화꽃 화분도 서너 개 들여놓고
예쁘게 생긴 애들만 골라 안내도 시킨다
이 회사의 복지시설은 모든 회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고
점심 얻어먹는 것만큼 칭찬 늘어놓던
제 볼일 다 본 나으리 떠난 뒤
수선스런 설거지를 한참 해야 된다
정비공 동원해 빌려온 책상 갖다 주고
안내원 동원해 화분 돌려주고
썰렁한 안내원 숙소에는 비웃음 섞인
우리들만 통하는 깔깔 웃음이 지쳐 남는다.
-최명자, 「손님 오신 날」 전문
일벌레들이 가정에서 더 훌륭한 역할을 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일벌레는 배우자에게나 아이들에게 더 만족을 준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일벌레의 수입에 대한 만족보다 가족을 대하는 부지런함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은 음식이요, 오락은 휴식이라고 합니다. 과연 자신의 노동이나 주변사람의 노동이 음식인지 어떤지시로 형상화하여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보람과 모순이 있다면 그 보람과 원망을 그대로 표현하여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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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김윤태 외, 『한국대표노동시집』, 도서출판, 2003. 85쪽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중에서
2025.2.2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