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초 채영석 교수 풍수 간산기] 충무공(忠武公) 김시민 장군의 음택은 투부혈(鬪斧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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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를 꼽는다면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 그리고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대첩을 들 수 있다. 이를 일컬어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으로 부른다.
이 가운데서 일본이 스스로 참패하였다고 인정한 전투가 바로 진주성 전투이다.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그 8배에 가까운 3만여 명의 정예 왜군을 퇴패시켰기 때문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왜군들에게 한국인들의 기개를 알렸다.
그러다가 7일간의 전쟁 마지막 날, 성 밖 전장 순시 중 조총에 맞아 전사한 그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당시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웠던 진주성은 주민들의 단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지붕의 기왓장까지 뜯어 날려가며 밤새도록 싸운 결과, 살아 도망간 왜병의 수는 겨우 2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나가던 10월 9일, 왜병이 물러나자,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김시민 장군은 시체 속에서 죽은체하고 숨어 있던 왜병의 조총에 이마를 맞고 쓰러졌다.
서둘러 치료를 하였으나 워낙 상처가 깊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한 달 11일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가 1592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39세였다. 당초 김시민 장군의 유해는 충북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 능골에 모셔졌으나, 1977년 충주댐 건설로 묘소가 물에 잠기게 되자 후손들이 모여 숙의를 한 결과 선대가 살아온 괴산에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어, 이장하면서 충민사(忠愍祠)를 세운 것이다.
이곳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나라에서 제향(祭享)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勉吾)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선조 24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여,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시민은 처음, 진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나, 1866년(고종 3년) 훼철(毁撤)되면서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되었다가 1976년 묘소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곳 묘소는 푸른 달천이 장군을 호위하듯 넓게 펼쳐져 흐른다. 언뜻 보면 큰 하천(河川)에 비해 음(陰)인 산자락이 작게 보이고, 강 건너 전방으로 나열되는 조안산(朝案山)의 모습이 무질서하게 배열된 것처럼 보여, 간심자(看審者)의 잣대를 흩트려 놓기도 하지만, 호흡을 크게 하고, 하나하나 심안(審眼)하다보면 그런대로 풍수적 조건을 완비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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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큰 물이 흐르는 강하(江河)를 앞에 둔 음택의 경우, 먼저 원근(遠近)관계를 따져보아야 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하수(下手)의 용호사(龍虎砂) 끝자락이 역사(逆砂)를 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 관건이다.
이곳 충민사 입구의 다리 위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청룡방(靑龍方)의 지각(枝脚) 끝을 유심히 살피면 암반이 덮어진 끝자락이 묘역을 향해 감싸려는 흔적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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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강 건너로 전개되는 조안산(朝案山)의 모습을 보면 좌측으로 횡사(橫斜)하여 비스듬히 나열된 봉우리 군(群)은 마치 군대의 깃발처럼 보이고, 오른쪽에 북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어,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으로 보더라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또 다리 중간에서 묘소를 감싸고 있는 백호끝자락을 보면 암반덩어리를 이루는 교과서적인 요성(曜星)이 무덤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요(暗曜)로 매김 되어, 촘촘히 박힌 것을 볼 수 있는데,【담자록(啖蔗錄)】에《요거혈원(曜去穴遠)。징룡지기왕(徵龍之氣旺)。고가귀(故可貴)》라 하여 “요(曜)란 혈에서 멀리 떨어져 용의 기운이 왕성함을 증거(證據)하는 것으로, 그래서 귀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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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터를 일구는 내룡(來龍)은 횡으로 진행하는 횡룡(橫龍)아래에 와(窩)의 개구처(開口處)에 일군 투부혈(鬪斧穴)의 일종으로, 뒤에는 귀성(鬼星)의 흔적이 역력하고, 낙산(樂山)이 횡으로 연결되면서 터에 힘을 불어넣어, 왕성한 지기(地氣)를 모으도록 그 힘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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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흐르는 달천너머에는 양명하고, 평화로운 명당의 품새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며, 아기자기한 산수(山水)들이 품어내는 양기(陽氣) 덩어리를 봉분(封墳)이란 그릇에 퍼 담는 조건을 이루면서, 음기와 양기가 희락(喜樂)하는 터로 매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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