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영웅 이창호 9단이 치우쥔 8단에게 졌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믿음이 컸던 팬들에겐 자못 충격으로 전해온다. 그뿐 아니라 한국바둑이 연이어 중국에 밀리고 있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 같은 현상은 비단 이번 삼성화재배만의 일이 아니다. 근년 들어 빈번해진 '사태'이다. 양적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중국에 밀리는 현실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지난해부터 벌어진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3번 우승한 반면 중국은 6번을 우승했다.
보유 중인 세계타이틀도 한국 3개(삼성화재배ㆍ응씨배ㆍ후지쯔배), 중국 5개(비씨카드배ㆍLG배ㆍ도요타덴소배ㆍ춘란배ㆍTV아시아). 그중 삼성화재배가 곧 중국으로 넘어가게 됐으니 한국 열세의 골은 더 깊어진다.
한국바둑은 세계대회 23연속 우승 퍼레이드를 펼치는 등 1990년 중반부터 세계최강의 위상을 날렸다. 조훈현ㆍ이창호ㆍ유창혁ㆍ이세돌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기사를 보유한 것이 그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현재 1인자가 한국기사라고 주장할 입장이 못 된다.
이창호는 2006년 이후 총 9회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으나 마이너기전인 중환배 1번을 제외하고는 8번을 준우승에 머물렀다. 또 전년도 우승자 이세돌은 장기 휴직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현실이다. 허리진도 중국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선 이창호와 더불어 싸워줄 지원세력의 힘이 미약했다. 전통의 강자 최철한이 16강, 박영훈이 8강에서 자취를 감췄고 신흥강호 강동윤은 32강에서 조기 탈락했다. 또 자신의 최고성적을 작성했던 허영호는 8강 이상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들을 가로막은 장벽은 전부 중국기사였다.
올해 들어 한-중 기사 간의 본선 대결 성적은 45승 67패. 한국측 승률은 40% 남짓하다. 여기에 예선 성적을 보탤 경우엔 30%대 초반으로 더 떨어진다. 분명 한국바둑은 유망주의 발굴ㆍ육성과 기성 세력의 분발이 더욱 절실한 위기의 계절이다.
삼성화재 사이트를 통해 화상으로 생중계한 김승준 9단은 극복할 방법이 하나라면서 이창호ㆍ이세돌ㆍ최철한ㆍ박영훈이 버텨주면서 강동윤ㆍ김지석ㆍ박정환 등의 후배들이 더욱 성장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창호는 비록 준결승에서 발목이 잡혀 결승 진출이 꺾였지만 한국기사 중에서 제일 잘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서른 다섯이다.
■ 국후담... 이번 준결승3번기는 이창호 9단이 프로생활 23년 만에 처음으로 자비를 들여 참가한 대회로 눈길. 프로바둑대회는 지금까지 숙박과 항공료 일체를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지난 봄의 제1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부터 본선진출자에게만 상금을 지급하는 컷오프제와 자비참가제가 도입되어 출전자들은 숙박 및 항공료를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것(중국선수들은 정부의 지원이 있다).
앞선 비씨카드배는 전 대국을 서울에서 열어 중국과 일본 선수들이 경비를 들여야 했던 반면 한국선수들은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삼성화재배 준결승은 유일한 한국선수인 이창호가 개인경비를 들여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이창호가 준결승 출전에 들인 경비는 150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왕복항공료로 50만원대의 일반석을 이용했고, 대회장에서 걸어서 5분 정도에 숙소를 잡은 건국호텔은 1박에 700위안(약12만원) 정도인 4성급 호텔. 식사는 주로 호텔 내의 북한식당 옥류관'을 이용했다(된장찌개가 5000원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