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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개헌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요체로 하고 있다. 쿠데타 세력들은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가 정정(政情)과 사회불안의 원인이 됐다며 강력한 대통령제로 개헌하는 명분을 찾았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펼쳐질 18년간의 엄혹한 독재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쿠데타를 통한 집권과 정권연장을 위해 3번이나 개헌을 단행한 대통령은 세계사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찾기 힘들 것이다.
5차 개헌은 정당정치를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조항들이 추가되는 등 일부 법리적 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대통령의 중앙집중식, 권위주의적 국정운영으로 현실에 반영되지 못했다.
● 제6차, 박정희 3선을 위한 개헌(1969. 10.21.)
역사는 왜 이렇게 되풀이 되는 것일까.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하고 결국 분노한 민의의 물결에 붕괴된 이승만 정권의 전철을 박대통령도 따라갔다. 1차에 한해서만 중임이 허용된 5차 개헌의 조항을 2차까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1969년 6차 개헌이 추진됐다. 한마디로 박대통령의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이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국회에서 개헌선 이상의 의석수를 점하자 야당과 국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헌작업이 추진됐다. 당시 박대통령이 발표한 특별담화(7월25일)는 개헌에 대한 대통령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내 개인이 개헌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또 개헌 문제로써 당장 시급한 경제 건설이나 정부 과업 수행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나의 충정을 단적으로 표현…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야당 당수는 나에게 규탄형식의 공개서한을 보내와 ‘개헌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요해 왔고…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개헌을 안 하겠다 할 권한은 없다…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문제를 통해서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3선 개헌안은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주류와 비주류간 찬반이 엇갈렸다. 그러나 당내 반대세력과 야당에 대한 공작을 통해 반대의견은 묵살됐다. 심지어 야당인 신민당 의원 3명이 3선개헌 지지성명을 발표할 만큼 공작은 극심했다.
공화당은 야당의 본회의장 점거로 표결이 불가능해지자 일요일인 9월14일 새벽 2시 국회 제3별관에서 기명투표를 실시해 재석 122, 찬성 122표 만장일치로 개헌안을 가결했다. 이날은 국회가 본회의를 열 수 없는 휴회일이었다. 이 개헌안은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65.1%의 찬성으로 확정됐다. 국민투표 선거는 정부 여당의 언론통제와 선전·선동, 공무원까지 공공연하게 동원된 사상 유례없는 부정투표였다.
당시 3선 개헌 통과를 둘러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는 일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동아일보는 <‘공명’과 ‘타락’의 사이 / 관권 금력 동원 만성>(10.20.자) 등의 기사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데 반해 조선일보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선 거의 문제 삼지 않고 <‘반대’ 물리친 ‘압도적 찬성’>(10.18.자) <박대통령 신임획득>(10.19.자) 등의 기사만 게재했다.
● 제7차, 박정희 영구집권 위한 유신헌법 개헌(1972. 12.27.)
3선 개헌 이후 실시된 1971년 대선에서 박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고작 95만 표가 앞서는 신승을 거뒀다. 관권, 금권이 대거 동원된 부정선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후보의 득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해 치러진 8대 총선에서도 야당은 개헌안 저지선까지 확보하는 선전을 했다. 그만큼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았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 여당의원들의 이탈표로 이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이 가결되는 이변이 발생하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 민권운동이 다시 활발하게 벌어졌다. 박대통령은 1971년 11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집회·시위·언론·출판의 자유와 노동3권 등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1972년 7월4일엔 남북공동성명을 갑자기 발표했다.
박대통령은 예정된 수순을 밟아가듯, 냉전체제하에 만들어진 헌법이 남북대화 등의 현실 변화와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을 주창하는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헌정질서를 중단했다.
영구집권을 위한 정교한 시나리오는 유신선언 9일만에 비상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을 의결함으로써 그 결론을 드러냈다. 11월21일 비상계엄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선 유권자 91.9%의 투표와 91.5%의 찬성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통과됐다. 제 4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접 선출제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며 연임제한도 없앴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1을 지명하고 국회를 해산할 권리와 긴급조치권을 갖는 등 절대적 권력행사가 가능해졌다.
유신헌법은 가장 반헌법적인 개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대통령이 헌법에도 없는 비상조치로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정치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국회가 아닌 비상국무회의에서 비공개로 제안,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91.5% 찬성의 결과도 유신체제 출범 직후 개헌청원운동 등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극심한 통제와 부정선거의 결과로밖에 볼 수 없다. 박대통령은 국민적 저항을 긴급조치권을 동원해 탄압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초과권력을 허용함으로써 견제와 균형이라는 3권분립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박대통령의 영구집권과 그를 위한 정치적, 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개헌이었을 뿐이다. 궁정동에 총성이 울렸던 1979년 10월26일까지 유신의 길고긴 악몽에 온 나라, 온 국민이 가위눌려 살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사회의 목탁을 자처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유신헌법이 통과되던 그 시점에 박대통령의 충실한 메신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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