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보>에 비로소 모든 분들의 세계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14세까지 세계가 내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가문에서는 <강희보>에 단자를 제출하지 아니했음이 반증되고 있다.

<건륭보>에는 휘 희경이 초명 제남에서 희경으로 휘를 바꾼 내역이 적혀 있으나 군수공의 계자 휘 제남은 기록되지 않았다.
휘 희경의 묘소가 금천(서울시 금천구)에 있다고 적힌 것으로 보아 살았던 지역은 서울 혹은 수도권으로 추정된다.
또한 군수공의 아들 사인공을 계자로 맞이한 대사성공은 왕족(王族)으로 양녕대군의 증손 파징수(波澄守) 이종암(李終巖)의 딸과 혼인하여 서울에서 살았고 그 분들의 선산은 경기도 광주에 있어서 서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건륭보>를 만들 때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 온 단자가 하나 있었는데 미처 검증을 마치지 못하여 별보(別譜)로서 수록되었다.
별보에 의하면 휘 제남이 군수공의 계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휘 희경의 구휘(舊諱)와 비교해 보면 “悌男”과 “稊男”으로 글자가 다르다.
계자 휘 제남의 생부(生父)는 누구인가?
如水가 만든 <전자족보>를 이용하여 이름, 자, 호, 초명, 일명 등 모든 호칭을 검색하여 보아도 한자와는 상관없이 “제남”이라는 호칭을 가진 분은 오직 한 분 휘 희경뿐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랑장공파에서 판사공파나 대호군공파 후손으로 계자가 된 특별한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 조선시대 계자 제도는 아들이 없는 사람은 가까운 형제나 사촌의 아들로 계자를 삼는데 8촌 범주를 넘어가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또 대개 종가(宗家) 쪽으로는 장남이 계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쪽, 즉 동생 쪽으로는 차남 이하에서 계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제사를 모시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기제사(忌祭祀)는 종손만 모실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종손이 없으면 나머지 후손 중에서 가장 서열이 빠른 사람이 종손으로 역할을 하게 되므로 저절로 장남이 계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원리에서 생각해 본다면 사용공([氵敞])의 차남 의령공(宜寧公, 智成)이 생원공(淑)의 계자가 되셨으므로 사용공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 대사성공의 계자는 그 다음 서열 병참공(集成)의 종손 사인공으로 선택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인공이 종가의 계자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병참공 제사를 모실 종손이 필요하게 되므로 계자를 찾는다면 같은 원리에서 병참공의 제사를 모시는 군수공의 계자는 당연히 휘 희경(제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리하면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아직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으니 휘 희경(제남)이 군수공의 계자가 되어버리면 휘 희경(제남)의 아들 모두가 군수공의 손자가 되어버리므로 휘 희경(제남)의 생부(生父) 휘 석조(碩祖)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휘 희경(제남)의 아들 중 한 사람이 본가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집안에서 계자를 데려오는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다면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정리 되어 훗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또 하나의 큰 변수로서 당시 조선 사회 전체를 뒤집어 놓은 역사적 소용돌이가 작용하였다.
휘 제남의 후손이라 주장한 분들은 전라도 순천에서 살았고, 휘 희경의 아들 도승지공 휘 흡(洽)의 묘소는 강원도 춘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분들은 원래 서울에서 살았는데 왜 이렇게 천리 밖으로 흩어져 버리게 된 것일까?
그 분들이 아직 계자 문제를 매끈하게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전에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서남북 사방으로 피난을 떠나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어버림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을 가정하여 추정해보면
1592년 1월 1일 현재 휘 희경(제남)께서 돌아가셨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거나 휘 희경(제남)의 가정에서 병참공과 군수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가족이 흩어져버림으로 인하여 종손 휘 협(浹)의 후손이 병참공과 군수공 그리고 아버지 휘 제남의 제사를 모시고, 차손 휘 혼(混)의 후손이 아버지 휘 희경의 제사를 모시게 됨으로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은 사회 전반을 뒤집어 놓았고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강원도 춘천으로, 전라도 순천으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계자 관계를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연락마저 두절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세계표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군수공의 뒤를 잇는 방법은 휘 희경(제남)이 계자가 된 것으로 표현하면 나머지 아드님들이 모두 군수공의 손자가 되어버리므로 휘 석조의 후사가 끊어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휘 희경(제남)은 휘 석조의 아들로 그대로 있고 휘 희경(제남)의 장남 휘 협(浹)이 군수공의 손자로 사손(祀孫)된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대단히감사합니다..
별보 에 8세 휘숭조의 아드님 계자제남 이라고 하셨는데 (제)자가 맞는지확인 부탁드립니다.
8세~~14세 휘숭조 옆에 14세 익자 내려오면서15세 휘세필 휘 세환 16세~17세 한집안에가계도로보이는데~
중요한것은 계자제남의 (제) 자 아닌 다른자는아닌가요? 만일 다른자라면 모든오해가 풀리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