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世祖 소경공파 민휘(閔暉) 청백리(淸白吏), 대사헌(大司憲)
민칭도(閔稱道)시조(始祖)→ 민세형(閔世衡)→ 민의(閔懿)→ 민영모(閔令謀)→ 민식(閔湜)→ 민명화(閔命莘)→ 민휘(閔輝)→ 민지(閔漬)→ 민상정(閔祥正)→ 민선(閔璿)→ 민공생(閔公生)→ 민신지(閔愼之)→ 민형손(閔亨孫)→ 본인
○ 생몰년 미상
○ [문과] 성종(成宗) 10년(1479) 기해(己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 공은 대사헌(大司憲-종2품)을 지낸 청백리(淸白吏)이다,
○ 증조부는 사농소경(司農少卿)을 지낸 민공생(閔公生) 소경공파(少卿公派) 파조. 조부는 우봉 현감(牛峯縣監), 전농시(典農寺) 판관(判官-종5품)을 거쳐, 행영(行令-정4품)을 지낸 민신지(閔愼之), 아버지는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관) 평안우후(平安虞侯)를 지냈으며, 참판(參判-종2품)에 증직 된 민형손(閔亨孫)이다.
○ 어머니는 증 정부인(貞夫人) 풍덕장씨(豊德張氏)이다, 두번째 어머니는 증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진주소씨(晉州蘇氏) 소우흥(蘇雨興)에 딸이다,
※ 어머니 성씨
→ 위 기록은 족보기록이다, 그러나 국내 최초 족보인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1565년(명종 20) 간행)에 기록과 여흥민씨 족보는 부인 성씨의 본관이 다르다, 즉
장씨는 해풍장씨(海豊張氏)로 목사(牧使)를 지낸 장성지(張誠之)의 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이효충(李孝忠)의 딸, 이 기록은 족보에 별첨 처리 됐는데, 맞는지의 언급이 없다,
[ 씨족원류(氏族源流) 63 페이지, 가정보 206 페이지 참조 ]
○ 형제는 아들만 셋이다, 장남은 민희(閔曦)이고, 공이 차남이며, 삼남은 첨정(僉政-종4품)을 지낸 민윤(閔昀)이다,
○ 자녀는 2남 2녀, 4남매를 두었다, 첫째 장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임천조씨(林川趙氏) 조원경 (趙元卿)의 아들로, 군자감정(軍資監正)를 지낸 조익(趙翊)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장남은 대사성, 황해도 감사를 지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된 민수천(閔壽千)이며, 셋째 차남은 사헌부 집의를 지낸 민수원(閔壽元)이고, 넷째 차녀는 서령 (署令)을 지낸 순흥안씨(順興安氏) 안계로 (安繼老)의 아들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종3품)을 지낸 안수량(安守良)에게 출가하였다,
※ 사위
→ 족보는 사위의 성씨와 이름만기록되었다, 가정보, 성화보, 조익(趙翊)의 문과방목에 따르면, 장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임천조씨(林川趙氏) 조원경 (趙元卿)의 아들로, 군자감정(軍資監正)를 지낸 조익(趙翊)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서령 (署令)을 지낸 순흥안씨(順興安氏) 안계로 (安繼老)의 아들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종3품)을 지낸 안수량(安守良)에게 출가하였다,
○ 묘지는 홍주 서곡 소개천, 합장, 묘갈(墓碣)이 있다,
○ 참고문헌 - 여흥민씨 족보 2002년 판, 씨족원류(氏族源流),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평산부선생안(平山府先生案), 청선고(淸選考), 여주목읍지, 평산부선생안(平山府先生案), 청선고(淸選考)
○ 관인 ○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황해도(黃海道)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501[신유(辛酉)] 부임, ~평산부선생안(平山府先生案)
○ 조선실록 ○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기록에 따르면 성종8(1477)년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 성종 15년(1484) 승훈랑(承訓郞-정6품)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정6품)을 거쳐,
○ 성종 23년(1492) 통선랑(通善郞-종5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정5품)에 올랐다, 2월 내수사(內需司)의 종에게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고 또 부역(賦役)을 덜어 줌은 균등하지 않다 아뢰어 바로 잡았고, 유생(儒生)들에 상소를 받지 않은 승정원(承政院)을 추문(推問)하도록 청하였다,
3월 임사홍(任士洪)을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는 것을 적극 반대 하였는데, 임사홍(任士洪)은 훈구파의 거물로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고,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도 각각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가까운 관계였다, 후에 연산 10년 연산군(燕山君)이 어머니 윤씨의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또 흉년이 들어 금주(禁酒)와 더불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풍악을 잡히고 거리를 돌면서 좌주(座主)·선진자(先進者)·친척들을 찾아보던 유가(遊街)를 금지토록 청하여, 생원(生員), 진사(進士)만 금하도록 하였다,
○ 성종 24년(1493) 8월 통덕랑(通德郞-정5품)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정4품)에 올랐다,
○ 성종 25년(1494) 7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연임 되었다,
○ 연산 2년(1496)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종3품)에 올랐다,
○ 연산 5년(1499) 제주 목사(牧使)가 되고,
○ 연산 6년(1500) 7월 임기가 차자 제주도민이 상언(上言)하여 유임 시켜 줄것을 청하였으나, 유임 되지는 않았다,
○ 연산 7년(1501) 윤 7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종2품)에 올랐다,
○ 연산 8년(1502) 사간원(司諫院) 으뜸 벼슬 대사간(大司諫정3품)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으뜸 벼슬 대사헌(大司憲-종2품)에 올랐다가,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 연산9년 2월 백성들이 가난하여 술을 금지 할것을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는 않았다, 이어서 세종의 8째 왕자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에 외아들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의 방자함을 탄핵하였고, 길이 서용하지 못하도롣 되어 있는 임사홍(任士洪)을 군(君)에 봉함은 불가하다 청하였다, 여러번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3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7월 언로가 막히자 연이어 사직을 청하였다, 계속 사직을 청하고, 이에 체차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9월이 되서야 윤허하였다, 곧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 연산10년 5월 정침(鄭沈)을 가자(加資)할 때 논박하여 대간(臺諫) 전체가 국문을 당하였다, 아랫 사람이 한일이나 관리 감독 소홀로 곤장을 맞고, 6월 사형수로 하옥 되었다, 이어서 수일 후 태(笞) 50대를 맞고, 곧 이어 대사헌(大司憲)으로 복직 하였다, 청백리(淸白吏)이다,
○ 영조 36(1760)년에 편찬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