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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43강-5 (2013. 09. 02.)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六
須彌頂上偈讚品(수미정상게찬품) 第十四.
八. 菩薩偈讚(보살게찬)
7. 西南方의 智慧菩薩(남방지혜보살)
(4) 開悟(개오)
8. 西北方의 眞實慧菩薩(서북방진실혜보살)
(1) 饒益衆生(요익중생)
(2) 了妄證眞(요망증진)
(3) 正見名佛(정견명불)
(4) 非覺名覺(비각명각)
9. 下方의 無上慧菩薩(하방무상혜보살)
(1) 無上爲名(무상위명)
(2) 諸佛所得(제불소득)
(3) 諸佛所行(제불소행)
(4) 除相現理(제상현리)
(5) 法無所住(법무소주)
(6) 推德眞實慧菩薩(추덕진실혜보살)
10. 上方의 堅固慧菩薩
(1) 讚佛(찬불)
(2) 衆生受苦(중생수고)
(3) 讚僧寶(찬승보)
(4) 見聞利益(견문이익)
(5) 佛德無盡(불덕무진)
則見正覺尊(즉견정각존)이 超出語言道(초출어언도)로다.
정각존이 語言道에서 초출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처님 소견하고 똑 같아지는 것이지요. 寂滅眞如相을 제대로 안다.
그것은 곧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고, 존재의 실체를 안다고 하는 것은,
곧 寂滅한 모습을 아는 것이고, 寂滅한 모습이야 말로 “진여 상이다.”
실체 = 寂滅 = 진여 상. 같은 뜻입니다.
則見正覺尊. 正覺尊 = 부처님이지요? 그야말로 바르게 깨달은 분.
그 사람은 언어의 길을 뛰어넘었다.= 초출했다. 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言語說諸法(언어설제법)이면,
言語로, 말로서 모든 법을 설하지요? 그렇게 할 것 같으면
不能顯實相(불능현실상)이요.
능히 실상을 드러내지 못해요. 말만 쫓아가다보면 말 넘어, 불교에는 “아이 저, 말만 쫓아간다. 낙처도 모르고 저 말만 쫓아간다.” 우리가 사석에서 그런 소리 참 잘하지요? 우리가 이야기하다가 딸릴만하면 “저 말만 쫓아간다. 낙처를 알아야지,” 말이 떨어지는 곳, 말의 의미가 떨어지는 곳, 돌아가는 곳을 알아야 된다. 그런 표현을 하는데 여기 그 말이지요.
語說 = 언어로, 언어로써 諸法을 설할 것 같으면 실상을 드러내지 못해요.
존재의 실상을 이해 못한다.
平等乃能見(평등내능견)이니,
평등하여야 능히 볼 수 있나니
如法佛亦然(여법불역연)이로다.
불법과 같이 또한 그러하는 도다.
正覺過去世(정각과거세)와, 과거세와 그리고
未來及現在(미래급현재)하사,
미래와 현재를 正覺 = 바르게 깨달아서
永斷分別根(영단분별근)이실새.
영원히 분별의 뿌리를 끊었을 세.
是故로 說名佛(시고설명불)이로다.
그런 까닭에 부처라고 이름 한다. 부처라고 說名한다. 그 다음에
8. 西北方의 眞實慧菩薩(서북방진실혜보살)
爾時에 眞實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爾時에 眞實慧菩薩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1) 饒益衆生(요익중생)
寧受地獄苦하야 得聞諸佛名이언정
不受無量樂하야 而不聞佛名이로다
所以於往昔에 無數劫受苦하야
流轉生死中은 不聞佛名故로다
寧受地獄苦(영수지옥고)하야,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아서
得聞諸佛名(득문제불명)이언정,
지옥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얻어 들을지언정
不受無量樂(불수무량락)하야,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 아니하고 = 不受. 아니해서
而不聞佛名(이불문불명)이로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차라리 ‘고통 속에 있으면서 부처의 이름을 듣는 것이 낫다.’ 이런 뜻인데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말하자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낙을 누리는 것이 되는 것인데요. 역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不受無量樂. 한량없는 낙을 받지 아니하여, 부처의 이름을 들어야 비로소 한량없는 낙을 받는다. 不聞佛名.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도다.
所以於往昔(소이어왕석)에, 그런 까닭에 往昔에,
無數劫受苦(무수겁수고)하야,
한량없는 겁 동안 고통을 받아서
流轉生死中(유전생사중)은, 生死中에 流轉하는 것은
不聞佛名故(불문불명고)로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 까닭이다. 결국은 부처님의 이름을 들어야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2) 了妄證眞(요망증진)
於法不顚倒하고 如實而現證하야
離諸和合相하면 是名無上覺이로다
現在非和合이며 去來亦復然하니
一切法無相이 是則佛眞體로다
若能如是觀 諸法甚深義하면
則見一切佛의 法身眞實相이로다
了妄證眞. 妄을 깨달아서 眞을, 진리를 증득한다.
於法不顚倒(어법부전도)하고,
법에 대해서 전도치 아니하고,
如實而現證(여실이현증)하야, 여실하게 환하게 증득해서
離諸和合相(이제화합상)하면, 모든 화합 상을 떠날 것 같으면
是名無上覺(시명무상각)이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깨달음이로다.
現在非和合(현재비화합)이며, 현재 화합도 아니며
去來亦復然(거래역부연)하니, 과거와 미래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
一切法이 無相(일체법무상)이, 일체 법무상이, 형상 없는 것이
是則佛眞體(시즉불진체)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부처님의 몸이다.
若能如是觀(약능여시관) 諸法甚深義(제법심심의)하면,
이와 같이 諸法의 甚深한 뜻을, 깊고 깊은 도리를 관찰하게 된다면,
則見一切佛(즉견일체불)의
法身眞實相(법신진실상)이로다. 법신진실 상을 곧 보게 되는 도다.
(3) 正見名佛(정견명불)
於實見眞實하고 非實見不實하야
如是究竟解일새 是故名爲佛이로다
正見名佛. 바로 보아야 부처라고 이름 한다.
於實에 見眞實(어실견진실)하고, 사실에 있어서 그 진실을 보고,
非實에 見不實(비실견부실)하야,
진실이 아닌 데 있어서는 진실이 아닌 것을 본다.
如是究竟解(여시구경해)일새. 이와 같이 궁극, 끝까지 이해할 세.
是故名爲佛(시고명위불)이로다. 이러한 까닭에 이름이 부처더라.
(4) 非覺名覺(비각명각)
佛法不可覺이라 了此名覺法이니
諸佛如是修일새 一法不可得이로다
知以一故衆이며 知以衆故一이니
諸法無所依하야 但從和合起로다
無能作所作이라 唯從業想生이니
云何知如是오 異此無有故로다
一切法無住라 定處不可得이니
諸佛住於此하사 究竟不動搖로다
非覺名覺. 覺이 아닌 것이 이름이 覺이다 이 말입니다.
佛法은 不可覺(불법불가각)이라.
불법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을 수 없어요.
了此名覺法(요차명각법)이니,
이러한 것을 요달 하면 이름이 覺法이다. 깨닫는 법이다.
諸佛如是修(제불여시수)일새.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을 세.
一法不可得(일법불가득)이로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더라.
知以一故衆(지이일고중)이며,
하나를 아는 까닭으로 많은 것이고, 또
知以衆故一이니,
많은 것을 아는 까닭으로 하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諸法無所依(제법무소의)하야,
모든 법은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但從和合起(단종화합기)로다. 다만 화합으로부터 일어난다.
하나와 많은 것이 어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無能作과 所作(무능작소작)이라. 能作과 所作도 없다.
唯從業想生(유종업상생)이니,
오직 우리 업에 의해서, 업상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能作所作은 주관과 객관이거든요. 주관과 객관.
내 마음이 저 산천을 만들었는가? 아니, 산천이 있어서 내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는가? 불교에서 공부하면 흔히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 해가지고, 저 산천도 내 마음이 만들었다. 그러거든요. 그것이 能作과 所作입니다.
능히 짓는 것과 지어질 바. 그것은 결국은 오직 業生입니다.
업이라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業生이다. 이 말입니다.
云何知如是(운하지여시)오?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가?
異此無有故(이차무유고)로다.
다른 것과 이것이, 저것과 이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말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하면 그것 이해가 안 됩니다. 뭘 지적 하면서 말해야 됩니다.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그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거든요. “내가 있음으로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이 있음으로 내가 있다.ㆍ여러분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여러분이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지적하면서 이야기 했는데요. 부처님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연기법의 원리.
此有故로 彼有(차유고피유)하고, 彼有故로 此有다.
그것이 만고의 아주 연기법원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말로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뭔가 사물을 두고 지적하면서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말로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지 얼른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하면... 구체적으로 딱 지적해야 됩니다.
“책이 있으므로 책뚜껑이 있고, 책뚜껑이 있으므로 책이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그 能作所作. “이것이 없음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 異此라고 하는, 異와 此가 다른 것과 이것이, 저것과 이것이 無有故로고, 있음이 없는 고로다. 없는 까닭이다.
一切法無住(일체법무주)라. 일체 법은 머묾이 없음이라.
定處不可得(정처불가득)이니, 정해진 곳이 없어요.
정해진 곳이 없습니다. 無有定法(무유정법)입니다. 아~, 기가 막힌 구절이지요. 금강경에서 최고가는 구절, 無有定法 名아뇩다라삼먁삼보리 無有定法 如來假說. 고정된 법이 없습니다.
여기 定處不可得이라는 것이 그 뜻입니다.
諸佛住於此(제불주어차)하사, 모든 부처님이 여기에 머물러서
究竟에 不動搖(구경부동요)로다. 究竟에 동요함이 없더라.
9. 下方의 無上慧菩薩(하방무상혜보살)
爾時에 無上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下方의 無上慧菩薩
爾時에 無上慧菩薩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1) 無上爲名(무상위명)
無上摩訶薩이 遠離衆生想하야
無有能過者일새 故號爲無上이로다
無上爲名. 無上이 이름이 된다.
無上摩訶薩(무상마하살)이, “가장 높은” 이 말입니다.
無上을 제가 늘 그렇게 해석하지요. 가장 높은 보살마하살이
遠離衆生想(원리중생상)하야, 중생상을 멀리 떠나서
無有能過者(무유능과자)일새. 능히 그를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세.
故號爲無上(고호위무상)이로다. 그러므로 그 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無上은 꼭 그렇게 해석해야 제대로 됩니다. 그것 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그러면 “가장 높다.” 이렇게 해버리면 더 간단한 번역이고요.
(2) 諸佛所得(제불소득)
諸佛所得處가 無作無分別하시니
麤者無所有며 微細亦復然이로다
諸佛所得處(제불소득처)가, 모든 부처님이 얻었다고 하는 것.
無作無分別(무작무분별)하시니,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어요. 어떤 차별도 없어요. 중생하고 차별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無作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차별도 없어요.
麤者無所有(추자무소유)며 微細亦復然(미세역부연)이로다.
거친 것ㆍ큰 것도 없고ㆍ미세한 것도 없다. 그저 사람이 있습니다.
하~~ “도인ㆍ도인, 큰스님ㆍ큰스님, 종사ㆍ종사” 우리가 철저히 살펴봤지만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일 뿐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라한ㆍ아라한, 아직도 남방불교에서는 자꾸 아라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麤者도 無所有고, 微細한 것도 亦復然이라.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諸佛所得處가 無作無分別이라고 했잖아요.
아무 한 것 없습니다. 차별도 없어요. 분별도 없습니다. 본래 인간을 이와 같이 철저히 그 근본을 드러내고, 철저히 근본을 드러냄과 동시에 최고의 경지에 본래로 존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불법을 알든 모르든 아무 상관없이 최고의 경지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서 보여주는 가르침. 이것이 화엄경입니다. 달리 뭐 어떻게 조작배기 없습니다.
아무 것도, 만들고 뭐 어떻게 달라지고 변하고 하는 조작배기는 없습니다.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가? 그랬잖아요. 부처를 구하는데 공을 베풀어 가지고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공을 베풀어서 부처 되는 길은 없습니다. “부처ㆍ부처” 하는 것은 본래 부처밖에 없습니다. 닦아서 되는 부처는 없다고요.
본래 부처뿐입니다. 그래서 영가스님도 求佛施功早晩成가?
부처를 구한다고 공을 베풀어 가지고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진짜 부처는 공 베풀어서, 수행해가지고 이뤄지는 부처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부처는 언젠가 시간가면 무너져버립니다. 시간가면 무너지고, 변하는 것이 무슨 부처입니까?
(3) 諸佛所行(제불소행)
諸佛所行境이여 於中無有數라
正覺遠離數하시니 此是佛眞法이로다
諸佛所行境(제불소행경)이여,
모든 부처님의 경계여 = 所行境이여
於中無有數(어중무유수)라. 그 가운데 수가 없다.
正覺遠離數(정각원리수)하시니,
正覺이 수를 멀리 했으니, 멀리 떠났으니, 법수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큰 두꺼운 사전이지요. 거기에 보면 온갖 숫자가 나열되어있어 가지고 우선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52위 =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회향ㆍ십지ㆍ등각ㆍ묘각, 이런 이야기, 그것전부 숫자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행한 바 경계에 그런 숫자 없습니다. 숫자 없다고요.
그런데 중생들이 하도 어리석으니까 그런 숫자를 가설해놓는 것이지요.
正覺遠離數하시니
此是佛眞法(차시불진법)이로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짜 법이다.
할 소리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를 적나라하게 “중생의 근기 전혀 상관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드러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4) 除相現理(제상현리)
如來光普照하사 滅除衆闇冥하시니
是光非有照며 亦復非無照로다
於法無所着하야 無念亦無染하시며
無住無處所하사대 不壞於法性이로다
此中無有二며 亦復無有一이니
大智善見者가 如理巧安住로다
無中無有二며 無二亦復無라
三界一切空이 是則諸佛見이로다
除相現理. 상을 제거하고 이치를 나타낸다.
如來光普照(여래광보조)하사, 여래의 광명이 널리 비추사
滅除衆闇冥(멸제중암명)하시니,
온갖 어리석음의 어둠을 다 소멸하시니
是光非有照(시광비유조)며,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며,
亦復非無照(역부비무조)로다.
또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제가 지혜를 광명에 비유하고, 깨달음을 또 광명에 비유하는데요.
할 수 없어서 빛에다가 비유를 하긴 하지만, 지혜는 뭐가 전깃불 비추듯이 비추는 것이 아니잖아요.
於法無所着(어법무소착)하야,
법에 대해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서
無念亦無染(무념역무염)하시며,
생각도 없고 물든 바도 없으시니,
無住無處所(무주무처소)하사대, 머묾도 없고 처소도 없어서
不壞於法性(불괴어법성)이로다.
法性을 무너뜨리지 아니 했더라.
법의 성품은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이잖아요.
그것이 열쇠입니다. 법성게가 열쇠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이치가 깊고, 아~~ 소중하고, 영가 천도도 법성게 하나면 천도 다 됩니다. 법성게 하나면 천도 다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燒臺(소대)에 나가면서 반드시 법성게를 들려드리는 겁니다. 최고 아주 강력한 약을 마지막에 딱 쓰는 겁니다. 그 동안은 시시한 약들, 단위가 아주 낮은 단위의 약을 처방해서 천도될 사람은 벌써 천도됐고, 그래도 천도가 안 되면 최고급 강도 높은 약을 처방하는 것이 법성게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가르침 중에서, 엑기스 중에 엑기스입니다.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다고요. 법성게가지고 천도 안 되는 중생은 영원히 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성게를 한 30편쯤 치고 천도됐다고 믿어야 됩니다.
‘천도됐을 것이다.ㆍ분명히 천도됐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법성게 하나는 빠뜨리면 안 됩니다. 만사 다 무슨 앞에 온갖 그런 의식, 바쁘면 그것 다 못하더라도 법성게하나만 한 30편 외워 줘버려요. 그러면 그걸로 아주 최고 천도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천하의 아주 명문을 이렇게 남겼으니 의상스님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不壞於法性이로다.
此中無有二(차중무유이)며,
이 가운데는 둘도 없으니, 法性圓融無二相. 의상스님이 이것보고 법성게를 만들었지요. 분명히 두 말할 것 없습니다.
亦復無有一(역부무유일)이니,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 둘도 없지만, 하나도 없다.
그래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이 되잖아요.
결국 가서는 中道床에 앉게 된다. 此中無有二며 亦復無有一이라.
大智善見者(대지선견자)가,
큰 지혜를 가지고 바르게 잘 보는 사람이
如理巧安住(여리교안주)로다.
이치와 같이 교묘히 안주하는 도다. 잘ㆍ익숙하게ㆍ능히, 이런 뜻입니다.
잘 안주하도다.
無中無有二(무중무유이)며,
없는 가운데 또 둘도 없어요.
無二亦復無(무이역부무)라.
둘이 없다고 하는 것도 또한 없음이라.
三界一切空(삼계일체공)이, 삼계가 일체 空한 것이
是則諸佛見(시즉제불견)이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소견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뒤로 가면서 발자취마저 쓰는 겁니다. 마당을 쓸 때, 발자취까지도 쓸어버리는 겁니다.
(5) 法無所住(법무소주)
凡夫無覺解일새 佛令住正法하야
諸法無所住케하시니 悟此見自身이로다
非身而說身하시며 非起而現起하시니
無身亦無見이 是佛無上身이로다
法無所住. 법에는 머무는 바가 없다.
凡夫無覺解(범부무각해)일새. 범부는 覺解가 없을 세.
佛令住正法(불영주정법)하야,
부처님이 그래서 정법에 머물게 해요.
諸法無所住(제법무소주)케하시니,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悟此見自身(오차견자신)이로다.
이것을 깨닫고 자신을 보게 한다.
우리가 늘 書者書我者我(서자서아자아)가 되면 안 됩니다.
‘책은 책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하면 안 되지요. 책에서 결국은 자신을 보게 하는 것, 자기 자신을 비춰 보는 겁니다. 그것이 10만 8천리가 됐든, 10만 8천리가 돼도 그것이 1미터ㆍ1미터 가까워지는 도리가 있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획 돌아서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서는 수가 있습니다. 중도 상에 서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ㆍ아무리 걸어도 본래 그 자리이고, 이르고 이르러도 역시 그 자리더라. 출발한 그 자리더라. 그런 유명한 말이 있지요?
非身而說身(비신이설신)하시며, 몸이 아닌 데 몸을 위하여
非起而現起(비기이현기)하시니,
일어남이 아닌데도 일어남을 나타내시니
無身亦無見(무신역무견)이, 몸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것이
是佛無上身(시불무상신)이로다.
이것이 가장 높은 부처의 몸이다.
한 구절ㆍ한 구절, 책 장 넘기기 참 아까운 대목입니다. 이것은 한 시간을 설명을 해도, 다 못할 내용들이지요.
(6) 推德眞實慧菩薩(추덕진실혜보살)
如是實慧說 諸佛妙法性하시니
若聞此法者는 當得淸淨眼이로다
推德眞實慧菩薩. 진실 혜 보살에게 덕을 미루는 것이다.
如是實慧說(여시실혜설),
‘이와 같은 도리를 진실 혜 보살이’ 이 말입니다.
諸佛妙法性(제불묘법성)하시니,
諸佛의 妙法性을 설하시니라.
若聞此法者(약문차법자)는,
만약에 이러한 법을 듣는 사람은
當得淸淨眼(당득청정안)이로다.
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음이로다.
10. 上方의 堅固慧菩薩
爾時에 堅固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上方의 堅固慧菩薩
爾時에 堅固慧菩薩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1) 讚佛(찬불)
偉哉大光明 勇健無上士여
爲利群迷故로 而興於世間이로다
偉哉라 大光明(위재대광명) 勇健無上士(용건무상사)여,
偉哉 = 아~~ 위대 하여라. 대 광명이시며, 용건하시며 무상사시여,
爲利群迷故(위리군미고)로,
온갖 미혹한 군생들을 이익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
而興於世間(이흥어세간)이로다. 세간에 출흥 했도다.
(2) 衆生受苦(중생수고)
佛以大悲心으로 普觀諸衆生이
見在三有中하야 輪廻受衆苦하시나니
唯除正等覺 具德尊導師하고
一切諸天人은 無能救護者로다
佛以大悲心(불이대비심)으로,
부처님이 그래서 大悲心으로, 세간에 출흥 했으니까요.
普觀諸衆生(보관제중생)이, 모든 중생이
見在三有中(견재삼유중)하야,
三有 = 3계 = 색계ㆍ욕계ㆍ무색계. 거기에 있어서
輪廻受衆苦(윤회수중고)하시나니,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 받는 것을 보시나니
唯除正等覺(유제정등각) 具德尊導師(구덕존도사)하고,
오직 정등각하시고 덕을 갖추신 尊導師 = 높고 높으신 도사를 제하고,
그 분만을 제하고,
一切諸天人(일체제천인)은, 일체 모든 천인은
無能救護者(무능구호자)로다. 능히 구호할 사람이 없더라.
부처가 아니고는 궁극에 부처되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결국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을 우리가 갖춰야 비로소 우리도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궁극적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봐야지요. 부처님 아닌 사람도...
어떤 농부가 곡식 싣고 와가지고 저희들끼리,
-추수 해가지고서 토지세를 주잖아요. 그런데 스님들이 왔다 갔다 하거든요. “아~ 중들은 일도 안하고 받아먹기만 해가지고 죽어서 소가 된단다.”
“소가 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괜찮지.” 어디서 법문은 많이 들어가지고는 일꾼들이 그런 소리를 농담으로 주고받는 겁니다. 그 소리 듣고 턱~~ 깨달았잖아요.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혹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경허스님이 그렇게 달았잖아요. 콧구멍 없다는 소식 그 말. 그 말소리를 딱 듣고 그만 환~~ 하게 열려버린 것이지요. 농부들이 장난삼아 하는 소리에도 깨달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꼭 큰 높은 법문을 해야만 중생건지는 것이 아니라고요.
(3) 讚僧寶(찬승보)
若佛菩薩等이 不出於世間이면
無有一衆生도 而能得安樂이로다
如來等正覺과 及諸賢聖衆이
出現於世間하사 能與衆生樂이로다
讚僧寶. 승보를 찬탄하노라.
若佛菩薩等(약불보살등)이, 만약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不出於世間(불출어세간)이면, 세간에 출현하지 아니했다면,
無有一衆生(무유일중생)도, 한 중생도
而能得安樂(이능득안락)이로다.
능히 안락을 얻는 이가 없도다.
如來等正覺(여래등정각)과 及諸賢聖衆(급제현성중)이,
수행하는 스님들을 “일체 현성승” 하잖아요. = 賢聖衆. 그러거든요.
出現於世間(출현어세간)하사, 세간에 출현해서
能與衆生樂(능여중생락)이로다. 중생에게 樂을 주는 도다.
(4) 見聞利益(견문이익)
若見如來者는 爲得大善利니
聞佛名生信하면 則是世間塔이로다
我等見世尊은 爲得大利益이니
聞如是妙法하면 悉當成佛道로다
諸菩薩過去에 以佛威神力으로
得淸淨慧眼하야 了諸佛境界라
今見盧舍那하야 重增淸淨信이로다
若見如來者(약견여래자)는, 만약 여래를 보는 사람은,
爲得大善利(위득대선리)니,
아주 큰 좋은 이익을 얻게 되나니,
聞佛名生信(문불명생신)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음을 내게 될 것 같으면
則是世間塔(즉시세간탑)이로다. 아~~ 이것은 바로 世間塔이다.
보탑입니다. 석가탑ㆍ다보탑입니다. 저~ 앞에 현수 품에서
信爲法藏第一財(신위법장제일재)라. (37-2) 그랬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창고에서 제일가는 재산이 된다. 그런 표현이 있었잖아요. 여기는 뭐라고요? 부처님이름 듣고 신심을 내면 그 사람은 世間塔입니다.
‘세상에 부처님이라는 분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만 그 사람이 그 어떤 신심과 환희심에 가득히 차있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그냥 탑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존경하고ㆍ그를 에워싸고ㆍ공양올리고 하는 탑이 된다.
世間塔입니다. 탑 되는 것 간단합니다. 우리가 신심만 있으면 바로 탑이 되 버립니다. 신심이 출중하면 그 사람이 세상의 탑이 돼버려요.
聞佛名生信하면, 그랬잖아요.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음을 내게 될 것 같으면 則是世間塔이로다. 참 근사한 표현이지요.
我等見世尊(아등견세존)은 爲得大利益(위득대이익)이니,
우리들이 세존을 뵙는 것은 큰 이익을 얻기 위함이니, 그렇지요. 불교 뭐 하려고 믿는데요? 뭔가 이익을 위해서 믿는 겁니다. 그것도 큰 이익을요.
열배ㆍ백배ㆍ천배, 그런 어떤 이익을 위해서 불교 믿는 것이지요.
聞如是妙法(문여시묘법)하면,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을 것 같으면
悉當成佛道(실당성불도)로다. 다 마땅히 佛道를 이루리로다.
諸菩薩過去(제보살과거)에, 모든 보살이 과거에
以佛威神力(이불위신력)으로, 佛威神力을 쓴 까닭에
得淸淨慧眼(득청정혜안)하야, 청정한 慧眼을 얻어서
了諸佛境界(요제불경계)라. 諸佛境界를 요달함이라.
今見盧舍那(금견로사나)하야, 지금 노사나 부처님을 친견해서
重增淸淨信(중증청정신)이로다.
청정한 믿음을 더욱 증장시키는 도다. 거듭ㆍ거듭 증장시킨다.
부처님의 법신. 진리의 가르침. 화엄경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사리이고, 진신사리입니다.
순 가짜 갖다놓고, “부처님진신사리ㆍ부처님진신사리” 이것이야말로 진짜 진신사리입니다. 또 아주 어리석고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그런 방편이라야 통하니, 할 수 없이 아무 것이라도...
사리도요? 우리 불상 전부 가짜, 佛像아닙니까? 사리 상만 만든 겁니다.
사리도 전부 만든 겁니다. 거의가 만든, 대다수 만든 사리입니다.
만들어놓고 “사리” 라 하면 사리. 佛像 조성해놓고 “부처님” 이라하면 부처님이잖아요. 똑 같은 겁니다.
어느 절이라고 제가 지적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전에, 한 2ㆍ30년 전에 한국에 야단법석을 떤 곳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불상 모셔놓고 “부처님” 하잖아요. 똑 같습니다. 뭐 그 부처님하고 다를 바 있습니까? 우리 신심에 달린 것이지요. 사리를 만들어서 모셔놓고 “사리” 라 하면 사리를 믿으면 그 사람에게는 사리인겁니다. 진짜 사리를 갖다놓고, 진짜 부처님 몸을 갖다놓고도, 부처님이 아니라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부처님 아니지요. 그 모든 것은 우리 주관적이 관점에 달린 것이지, 사실은 대상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대상 그 자체가 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그 전에 고려청자에다가 개밥을 주기에, 안목 있는 사람이 개를 먼저 산겁니다. 만 원짜리 개를 2만원 주고 산겁니다.
‘아이고 횡재했다.’ 고, 그까짓 똥강아지 누가 만 원 줘도 안 사갈 텐데 아, 2만원에 사간 사람이 있어요. 그 다음에 저 만치 나가다가 되돌아와 가지고, “아이, 개밥그릇도 줘야지.” 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아, 그 개밥그릇 가져가라.” 고... 그 사람이 개에 관심 있나요? 개 밥그릇에 관심 있는 것이지요. 고려청자를 갖다가 개의 밥그릇에 쓰니까요. 하하하
대상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자기 주관에 있는 겁니다.
주관적인 안목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짜 부처든, 진짜 사리든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내가 부처님으로 믿고 거기에 예배하면, 우리 법당에 있는, 여러분은 사찰법당에 있는 진짜부처님 아닙니까? 껌뻑 넘어가잖아요.
사리도 그와 같은 겁니다. 重增淸淨信이로다. 그 다음에
(5) 佛德無盡(불덕무진)
佛智無邊際라 演說不可盡이니
勝慧等菩薩과 及我堅固慧가
無數億劫中에 說亦不可盡이로다
佛德無盡. 부처님의 덕이 다함이 없다.
佛智無邊際(불지무변제)라.
부처님의 지혜는 邊際가 없음이라.= 부처님의 지혜는 가이없다.
演說不可盡(연설불가진)이니, 아무리 연설해도 다하지 못해요.
勝慧等菩薩(승혜등보살)과,
승혜라고 하는 그런 등의 열 명의 보살과
及我堅固慧(급아견고혜)가, 그리고 나의 견고 혜 보살,
無數億劫中(무수억겁중)에,
그런 이들이 무수 억 겁 중에
說亦不可盡(설역불가진)이로다.
아무리 뛰어난 보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설명 할 수 있나? 다 할 수가 없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一切法無住 라, 定處不可得..._()()()_
아~참, 남들이 명절이라고 흥청대든 말던 딱 요렇게 올려 놓으시네요. 석대원성선생님 참 반듯하십니다. 멋집니다. 아름답습니다. 고맙습니다.
겉만 멋진 척.
표면만 곱게 보이는 빛 좋은 개살구가 저입니다.
저는 개차반 대열입니다.
등왕보살님이 헛 소리 안하신 것 되도록 반성하게 해주십니다.
고맙습니다.
一切法無住라 定處不可得이니 諸佛住於此하사 究竟不動搖로다...
諸佛所得處가 無作無分別이라...
聞佛名生信하면 則是世間塔이라...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佛法不可覺이라 了此名覺法이니 諸佛如是修일새 一法不可得이로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을 우리가 갖춰야 비로소 우리도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법신 부처님을 친견하고 갑니다 대방광불 화엄경 일체중생 早得法 나무대비 관세음
고맙습니다. _()()()_
一切法無住라. 일체 법은 머묾이 없음이라.
定處不可得이니, 정해진 곳이 없어요...
無中無有二며, 없는 가운데 또 둘도 없어요.
無二亦復無라. 둘이 없다고 하는 것도 또한 없음이라..._()()()_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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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眞如想 = 실체 = 寂滅
-正覺過去世와 未來及現在하사 (과거, 미래,현재를 바르게 깨달아서) 永斷分別根(영원히 분별의 뿌리를 끊을세) 是故로 說名佛
-求佛施功早晩成?- 부처를 구하는데 공을 베풀어서 언제 이루어 질 것인가? 부처, 부처, 하는 것은 본래 부처 밖에 없다.
닦아서 되는 부처는 없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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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佛名生信 則是世間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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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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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法無住(일체법무주)
定處不可得(정처불가득)
일체 법은 머묾이 없음이라
정해진 곳이 없도다
어느 작은 한 곳에도 치우치거나,
머물러 집착하지 못하도록
이끌고
발 디디고 안주할 만한
그 어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우리들의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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