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리브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김창식
아침저녁으로 살갗에 서늘한 기운이 와 닿습니다. 가을은 동구 밖에 진(陣)을 치고 시나브로 마을로의 진입을 숙의(熟議)하고 있습니다. 가을에는 시인(詩人)의 귀가 아니더라도 북소리가 들립니다. 북소리는 어디든 멀리 떠나라고 채근(採根)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가을의 초입 짐 리브스(Jim Reeves, 1923~1964)의 노래 '먼 북소리(Distant Drums)'를 듣고 싶습니다. 컨트리 음악(Country & Western, C&W)은 지금은 한물간 음악 장르로 여겨지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의 인기는 대단했고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 가수는 짐 리브스였고요.
가야만하리(He'll Have To Go)
그즈음 함께 유행했던 노래들을 떠올려 보면, 마티 로빈스의 'Don't Worry', 조니 호튼의 'All For The Love Of A Girl', 에디 아놀드의 'You Don't Know Me' 'I Really Don't Want To Know' 'Make The World Go Away', 엥겔버트 험퍼딩크의 'Release Me' 'Am I That Easy To Forget', 자니 매티스의 'A Time For Us', 'A Certain Smile', 브룩 벤튼의 'Think Twice'등이 생각납니다. 자니 캐시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가수와 노래들이지요.
브룩 벤튼은 소울(Soul)로 분류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탠더드 팝(Standard Pop) 또는 컨트리 계열이니 당시 유행했던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Adult Contemporary Music) 음악의 위세를 짐작할 만합니다. 짐 리브스와 비슷한 음색의 가수는 에디 아놀드와 자니 캐시입니다. 짐 리브스보다 약간 하이 톤인 에디 아놀드는 장수하며 많은 명곡을 발표했습니다. 자니 캐시(Johnny Cash, 1932~2003)는 워낙 중요한 인물인지라 이 글의 뒷부분에서 따로 소개합니다.
짐 리브스의 매력 포인트로는 '공단(貢緞) 같은 양질(良質)의 저음', '중후하며 절제된 창법', '동양적인 단아한 외모에서 오는 친밀감'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짐 리브스는 벨팅(Belting) 창법의 대가입니다. 당시 C&W 가수들이 구사한 벨팅 창법은 소리가 갈라지지 않고 한 목소리 나오는 창법인데, 빙 크로스비, 페리 코모 등 스탠더드 팝 가수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짐 리브스 최대의 히트곡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59년에 발표한 '그는 가야만 하리(He'll Have To Go)'입니다.
짐 리브스는 이후 'Adios Amigo' 'Distant Drums' 'Annabel Lee' 'Welcome To My World'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60년대 초 'He'll Have To Go'의 인기는 대단하여서 라디오 음악프로의 1순위 신청곡이었죠. 당시 레코드 가게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를 틀어 주었더랬습니다. 'The End Of The World'로 유명한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가 부른 앤서송(Answer Song) 'He'll Have To Stay'도 덩달아 인기를 누렸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나라에 팬이 많은 스키터 데이비스는 레이 피터슨의 노래 'Tell Laura I Love Her'에 화답하여 'Tell Tommy I Love Him'이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필자의 경우 짐 리브스의 여러 히트 곡 중 'Annabel Lee'와 'Welcome To My World'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Annabel Lee, 옛날 옛적 바닷가에…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to be loved by me,
I was a child and she was a child,
in this kingdom by the sea,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I and my Annabel Lee;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in Haven,
Coveted her and me,
(아주 오래 전 바닷가
왕국에 한 소녀가 살았어요.
애너벨 리라면 당신도 알지 모르죠.
바닷가 왕국에 사는 소녀는 사랑밖에 몰랐죠.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것밖엔.
나도 어렸고 소녀도 어렸지만
바닷가 왕국에서
우린 사랑 이상의 사랑을 했죠.
나와 애너벨 리는.
날개달린 하늘의 천사들이 시샘할만한 사랑을.)
'애너벨 리(Annabel Lee’는 요절한 천재 애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13 살차 나는 사촌 누이이자 부인의 죽음을 추모하여 지은 유명한 시(詩)를 짐 리브스가 색다른 양식(樣式)인 토크 송(Talk Song)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아름답고 슬프며 몽환적인 시의 분위기에 알맞은 음성은 짐 리브스 외에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This Little Bird'를 부른 마리안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도 호소력 짙은 연극적 발성으로 이 노래를 부르긴 합니다만.
옛날 어느 바닷가에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한(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소년과 소녀가 살았는데 이들의 사랑을 시기한 '높은 계층의 친족(High-born Kinsman)'이 야음을 틈타 얼려 죽였고, 소년은 바닷가 무덤 속에 그녀와 함께 누워 밤새도록 울부짖는 파도소리를 듣는다.'는 슬프고도 섬뜩한 내용인데, 침착하고 절제된 짐 리브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반어적(反語的)으로 비극성이 두드러집니다. 한편 '옛날 옛적 바닷가 왕국에(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로 시작되는 시 구절은 1960연대 영어참고서인 '영어정해' 독해 난에 실려 더욱 유명해졌으며, 당시 청소년들이 짐 리브스를 흉내 내어 목소리를 내리깔고 중얼거리곤 했지요.
'아디오스 아미고(Adios Amigo)'도 빠뜨릴 수 없는 노래입니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 깔리는 휘파람 소리가 멋들어진 이 곡은 단짝인 친구에게 사랑을 양보하고 떠나는 이의 심경을 노래한 비가(悲歌)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했네. 나는 떠나지만 친구여 눈물을 흘리지 말게나.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거든 한 아이는 내 이름을 따 지어 주게'라는 노랫말이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결혼해주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Distant Drums'도 가슴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그밖에 들어볼 만한 다른 노래들로는 'Whispering Hope' 'Danny Boy' 'Snowflake' 'Beautiful Dreamer', 'The Blizzard' 'Am I Losing You' 'I Love You Because' 등이 있습니다.
비운(悲運)의 노래, Welocme To My World
Welcome to my world Won't you come on in
Miracles I guess Still happen now and then
Step into my heart Leave your cares behind you
Welcome to my world Built with you in my mind
(나의 세상으로 오세요. 들어오지 않으시려나요.
기적 같이 신비한 일도 때때로 일어나곤 한답니다
근심걱정은 뒤로하고 내 마음속에 발을 들여 놓으세요.
그대를 위해 지어 놓은 나의 세상으로 오세요.)
짐 리브스의 오리지널 곡 '나의 세상으로 오세요(Welcome To My World)'는 우리에 겐 아니타 커 싱어즈(Anita Kerr Singers) 버전으로 더욱 친숙합니다. 이 여성 그룹은 원래 짐 리브스의 백 보컬(Back Vocal)로 활약했죠. 엘비스 프레슬리와 딘 마틴도 노래를 불렀는데 각자 특색이 있으니 비교‧감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아니타 커 싱어즈의 노래는 오래전 대한항공의 로고송--정확히는 이륙(Take-Off)시와 착륙(Landing)시 들려주던 음악--으로 사용되던 바로 그 음악입니다. 이 노래와 관련해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1970년 대 초 항공회사에 입사하여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을 떠난 비행기가 호놀룰루 공항 상공에 이르러 착륙 모드로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지요.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밝은 태양빛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키 큰 야자수 나무가 애수를 자아내더군요. 'Welcome to my world~' 때마침 기내 스피커를 통해 천사의 합창 같은 화음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때 느꼈던 긴 여행 끝 피곤한 그리움과 경건함.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물결이 일고 알지 못할 용기가 솟아나더군요. '세계를 나의 품 안에!' 그 때 갓 입사한 20대 중반 새내기였고 첫 해외출장 이었지요. 그때의 다짐은 나중 한갓 헛된 꿈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어 치과에서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 이 노래는 짐 리브스가 타계한 후 아니타 커 싱어즈가 리메이크해 헌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 멤버 한 사람이 또 비행기 사고로 죽는 불행을 겪습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대한항공은 이 음악을 더 이상 사용치 않았지요. 노래를 부른 짐 리브스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노래를 헌정한 가수 중 한사람이 또 비행기사고로 불행을 당하고, 비행기회사에서는 오랫동안 이 노래를 로고송으로 사용하고……. 이 무슨 비극적 아이러니입니까! 가사를 보면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구하면 얻을 것이니(Knock and the door will open Seek and you will find)'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감미롭고 더 할 수 없는 평화로움을 주는 복음성가 같은 이 노래가 비운(悲運)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주유와 제갈량, 짐 리브스와 자니 캐시
C&W의 대표적 가수 짐 리브스도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왕좌를 차지하지 못하고 2인자의 자리에 머물렀으며--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인기가 많았습니다만--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해 비행기 사고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넘지 못한 벽(壁)은 바로 'C&W의 제왕(帝王)'으로 추앙받는 자니 캐시입니다. 평론가들이 C&W 음악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I Walk The Line'이 그가 부른 노래입니다. 자니 캐쉬는 그밖에 'Ring Of Fire ','Flesh & Blood' 같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그가 부른 'Little Drummer Boy' 등 소품 캐럴도 맛깔스럽습니다.
짐 리브스와 자니 캐쉬, 두 사람 모두 풍부한 저음의 미성이지만 짐 리브스는 보다 서정적이고, 자니 캐시는 더 철학적입니다. 용모도 대조적이죠. 짐 리브스에게서는 동양적인 단아함(여성적)이, 자니 캐시에게서는 박력과 카리스마(남성적)가 두드러집니다. 자니 캐시는 영화에도 출연했고 그의 삶이 근자에 영화로 재조명되기도 했습니다(호아킨 휘닉스와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앙코르 (원제: Walk The Line')'. 오래 전 '형사 콜롬보' 시리즈인 '백조의 노래(The Swan Song)'에서는 매력적인 음악가 범인으로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올백 머리에 위아래 검정 일색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이었죠.
짐 리브스 사망에 즈음하여 어느 신문의 꼭지기사에서 그의 음악적 생애를 조명하며 자니 캐시를 더 앞에 두는 듯 평가한 내용을 보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해 자니 캐시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는데 그 굉량(轟量)한 음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이후 자니 캐시도 함께 좋아하게 되었지요. 그 때 들은 노래가 바로 그의 대표곡 'I Walk The Line'이었고요. 짐 리브스와 자니 캐시. 한 사람은 요절하여 꿈을 펼치지 못한 채 잊혔고, 다른한 사람은 비교적 오래 살며 말년에도 왕성한 음악 활동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연전 오우삼(吳友森, John Woo)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Red Cliff)'을 보았습니다. 제갈량보다 오(吳)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인 주유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지요. 연의삼국지를 보면 주유가 "하늘이시여. 주유를 내셨거늘 어이하여 또 공명을 내셨나이까?" 한탄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딱 들어맞는 비유가 아닐는지 모르지만, 짐 리브스와 자니 캐시의 엇갈린 운명을 생각하면 이들 천재 전략가의 고사(古事)가 함께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지곤 합니다. 주유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어 큰 뜻을 펴지 못했고 제갈량은 비교적 오래 살아 조조와 함께 삼국지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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