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어머니는 대문의 빗장을 걸지 않았다
그후 며칠이 지나서 부북면당의 연락‘트’에 가서 연락업무를 마치고, 역시 밤길을 걸어 하남면당의 ‘트’로 가서, 지난번에 제기된 연락업무문제를 삼랑진읍당에 바로 제기하고 토의하여 하남면당에서 군당과의 연락문제를 맡기로 결정했다는 서면보고를 받고 서명해주었다. 이로써 밀양군당의 연락부는 산하 각 면당의 연락부와의 연락체계를 완비했다. 나는, 동북부 산악지대의 3개면 산외면당, 산내면당, 단장면당을 제외한, 8개읍당•면당의 연락체계를 정리했다. 즉 밀양읍당, 부북면당, 무안면당, 청도면당을 부북면당을 통해서, 삼랑진읍당, 하남읍당, 초동면당, 상남면당을 하남면당을 통해서 연락체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레포 활동에 전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5월에 들어가자 밀양군당에서는 『5.10남조선단독선거』에 대한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대해 나와 덕실 아재가 한 조가 되어 밀양 장날에 가서 장군들을 통해 선거참여 여부에 대한 민심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아침에 나와 아재는 장날출입이라 차림으로, 새옷을 아니지만 깨끗하게 빨고 풀을 빳빳하게 먹인 바지저고리에다 진한 감색 조끼를 입고 커다란 망태기에, 아재는 제수꺼리로 쓰이는 곶감, 밤, 대추 등 건과를 담았고, 나는 담배엽초를 꼽꼽하게 물을 뿜어 잘 재려서 한 망태 가득히 담았다. 덕실 아재는 아마 장터 국밥집이나 주막에서 그 좋아하는 막걸리를 자실 기분으로 조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일없이 입이 벙실거렸다. 이젠 대낮에는 제법 햇볕이 따가웠다. 그래서 덕실 아재는 고방에 가더니 보릿대 모자를 두 개 꺼내어왔는데 모자 전 둘레에 곰팡이가 새까맣게 피어있지만 아무 상관없이 머리에 덥석 썼다. 그러나 아재는 잘 맞지만 나는 머리에 덜렁 얹혀서 머리가 들어가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다. 이를 보더니 아재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고 웃었다. “무슨 놈의 대가리가 그리 크나? 모자는 안 되겠다. 동네에서 내 머리보다 큰 놈은 없는데 동네 것 모두 가져와도 안 되겠다.” 나는 웃으면서 수건을 쓰면서 말했다. “모자는 맞추든가, 아니면 잘못 만들어 커서 버리게 된 것이라야 내게 맞소. 그러니 아재, 일없소. 수건 쓰고 가지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장에 가서 ‘자네 말대로 잘못 만들어 큰 것’을 찾아 한 두어 개 쯤 사야겠네. 자 이제 준비됐거든 나가자.” 둘은 나란히 걸어서 나가자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참 보기 좋네요. 부자라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적고 형이 막내 동생 데리고 장에 가는 것 같고만.” 그래서 나는 아지매를 보고 말했다. “우리 진짜 숙질 같지요. 내가 아재라 부르는 게 꼭 맞네요. 허 허 허....” “아하 하 하 ......” 아재는 나를 진짜 조카 같은 생각이 드는지 기분 좋게 크게 웃었다.
그 시절에는 다원에서 밀양 성내까지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당시 남천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곳 못 미쳐 징검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 남천강 강변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살내 앞에서 남천강이 무릎깊이 여울이 되어 흘렀다. 그 여울은 그냥 발 벗고 건널 수 있었다. 이 여울을 건너면 선불(活城里) 들이 나오는데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경부선 철로가 깔린 둑 밑으로 난 굴을 지나면 곧 밀양 성내로 들어가는 동문고개가 보인다.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밀양의 동문시장이다. 이것이 아득한 옛날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바로 밀양장이다. 다원에서 이 동문시장까지는 20리 조금 못 되는 거리이고 여울 건너는데 드는 시간까지 합해서 두 시간이면 되는 길이다. 오전 오후 두 번 있는 버스를 타면 긴늪 공굴 다리를 건너 당시 휴업상태로만 있는 내화벽돌공장 앞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향교가 있는 교동 앞으로 나와서 밀양 성내로 들어가는데, 북문거리로 해서 동문거리에 있는 시장으로 간다. 당시 버스정류소는 밀양교 못 미쳐 있었는데, 밀양교로 가는 도로의 반대방향에 보이는 읍사무소(지금은 밀양감영터) 앞이 바로 시장바닥이다. 정류소에서 읍사무소 앞까지는 400미터 쯤 된다. 당시 보통은 걸어 다니고 차비는 당시 생활에서 그 값이 비싼 축에 들었고, 그래서 일종의 호사에 속하는 편이었다. 덕실 아재와 나는 시장 안으로 들어와 잡화전에 자리를 잡았다. 기둥을 세우고 함석지붕을 인 점포는 장세가 비싸다. 그래서 우리들은 길바닥 빈 구석을 찾아 전을 차렸다. 내야 망태를 좀 벌려 담배엽초를 반 쯤 보이도록 꺼내어 놓으면 되는데, 아재는 곶감이야, 대추야, 밤이야 하면서 조그마한 보자기를 펴놓고 벌려놓아야 했다. 상품을 펴놓고 한 시간 쯤 지나자 저울을 들고 허리에는 돈이든 자루를 찬 사나이가 오고, 곁에 나이가 좀 적은 깍쟁이 같은 총각이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있다. 사나이는 내 곁에 오더니 다짜고짜 내 망태에든 담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곁에 있는 총각에게 눈짓을 하자 총각은 내가 가져온 엽초가든 망태에서 엽초를 엮은 두름을 죽 꺼내어서 제가 가지고온 자루에 넣고 돈 자루를 찬 사나이가 가진 저울을 후딱 낚아채고서 그 자루를 저울의 고리에 걸어서 저울추를 막대기에 이리저리 밀고 당기고 하다가 ‘몇 근이요.’라고 부른다. 그러자 돈 자루 사나이가 ‘〇〇원이요.’라고 하면서 돈 자루에서 돈을 세어 나에게 준다. 처음부터 가격을 정하는데 그쪽만 있고 이쪽은 전혀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위냐! 내가 어리둥절해서 아재를 쳐다보니 아재는, “네는 끝났네. 조금만 기다려라. 과일전은 아직 멀었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건네주는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었더니 리어카를 끌고 오는 중년 여자가 왔다. “요새 과실 값이 안 나가서...” “언제나 우리는 값이 안 나가고, 그편은 값이 늘 나가는 갑제...” “시세가 그런 걸 우짜는교?” “대추나무고 밤나무고 인제는 모조리 뽑아버려야겠네.” 값도 말 안하고 값도 안 들었는데 승강이부터 하고 있으니 정말 어리둥절했다. 아재는 불퉁거리는 소리로, “그만 알아서 주소!” ‘나는 별 희한한 흥정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정말 장사는 수학보다 더 어려운가보다. 이렇게 해서 가지고 간 물건을 모두 처분했다. 아재는 이제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야 했다. 나는 시간이 완전히 빈다. 아재는 나를 보고 말했다. “우선 점심부터 먹어야지. 아직 점심때는 안 되었지만. 자 우리 일단 저 먹거리 전으로 가세나. 자네 뭘 먹을래.” “저야 뭐가 좋은지 알아야제. 아재 좋을 대로 하소.” “그래 저기 주막에 막걸리도 팔고 국밥도 파는데 그쪽으로 가보자.” 하고 앞서 걸어간다. 나는 뒤따라갔다. 아재가 어떤 가게에 가까이가자 아낙이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덕실 서방님, 인제 오시능교!” 우리는 가게에 놓인 기역자판에 나지막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덕출아, 뭐 먹을래.”, “아무거나 좋습니다. 아재 좋아하는 것 시키소.” 라고 하자, 아재는 씩 웃으면서, “난 술 좋아 하는데. 네도 술 먹을래.” 라고 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빨개지는데, 나중에 아재가 업고 갈라꼬요?” 이런 저런 승강인지 농인지, 되고, 말고 씨불이다가, 나에게는 소고기 육개장, 밥 따로 해서 내 앞에 차려왔고, 아재 앞에는 커다란 막걸리대접에 쪽박을 타고 나오고 안주가 여러 가지, 조금조금하게 차려왔다. 아재는 술잔 하나를 내 앞에 놓고 쪽박으로 조금 따르고 자기에는 남창남창 하도록 술을 따랐다. 그리고 술잔을 들고 나에게도 술잔을 들라고 했다. 둘은 술잔을 부딪쳤다. 아재는 첫 잔 한 잔을 죽 들이켰다. 나는 술잔을 반잔도 못되게 마셨다. 달큰하면서도 시큼했다. 그리고 나는 국밥을 먹는 데만 관심이고 바빴다. 아재는 술잔을 계속 비웠다. 아직 점심때가 조금 일찍 인지라 주모가 곁에서 빈 잔을 채워주고 있다. 나는 점심이 끝나고 이젠 할 일이 없는지라 집에 한 번 가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만일 내가 집에 간일을 놈들이 안다면 그로써 당할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고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쯤에는 우리들을 잡는 일이라면 나이도 없고 더구나 인간의 도리조차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이 이를 보고 소문이나 나서 그놈들 귀에 들어간다면 식구를 몽땅, 남녀불문, 노소불문으로 잡아가서 몽둥이로 치고 불로 지지고, 천정에 매달아 비행기를 태우고, 얼굴에 물수건으로 덮고 물고문을 하고........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하던 고문을 동족이 동족에게 그대로 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는 갈 수 없다. 그런데 꼭 가보고 싶은 데가 한 곳 있었다. 김정애 형수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옥죌 만큼 보고 싶어 견디기 어려웠다. 아재에게 말했다. “아재, 내 잠깐 어디 가볼 때가 있는데 한 시간정도 걸리겠는데, 아재 혼자 있겠는교?” 아재는 나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말했다. “여기는 위험한 곳인데 네, 괜찮겠나?” “집에 가는 건 위험하지만, 거긴 놈들이 생각도 못하는 곳이라......” “그래, 갔다 온나. 나도 그 동안 볼일도 좀 보고. 그래 우리 정확히 두 시간 후 오후 2시 반에 여기서 만나자.” 그리고 둘은 주모에게 우리 볼일이 있어 간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동문고개로 야간 올라가다가 오른 편으로 난 영남루로 올라가는 골목길을 잡았다. 그리로 해서 올라가면 말수 형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 앞에 도착해서 집안의 형편을 살펴보니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환자가 있는데 아무도 없다니! 그때 뒤에 인기척이 나기에 뒤돌아보았다. 전혀 모르는 아주머니가 뒤에 서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뉘십니꺼?” 나는 그 태도에서 이 집 주인임을 느꼈다. 그래서 물었다. “이집에 사시던 분이 이사 갔는 갑지요?” “예, 이사 간 지 한 보름쯤 됩니다. 뉘신데요?” “그럼 아주머니,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주머니 아시면 가르쳐 주이소.” “이사 갈 때, 할머니가 자기 집 찾는 분이 있으면 가르쳐주라고 도면을 그려서 대문 안에 붙여 두었는데요. 안에 들어가 보이소.” 그리고 대문을 열고 앞서 들어갔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 대문을 보았더니 이사 간 집의 약도를 알기 쉽도록 그려 붙여두고 있다. 바로 가까이였다. 바로 버스 정류소 골목 안에 오른 편에 난 곁골목이 있고 그쪽으로 들어가 둘째 집이다. 나는 집주인에게 고맙다는 절을 하고 버스정류소로 가는 골목길로 해서 신작로로 나왔다. 나는 바지저고리에 망태를 어깨에 걸치고 창날이든 기다란 작대기에다가 자동차 타이야 고무신을 신은, 눈을 아래로 하고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매가리 빠진 총각이다. 이런 꼴로 형수를 보면 형수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복장을 달리하고 총기 있는 눈매와 꼭 다문 입매로 해서 다시 올까도 생각했으나, 그보다 보고픈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집을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형수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십니꺼?” “형수요. 나 재굽니다.”, “아니, 재구 총각이라고?”, “아이고, 어무이요. 재구 총각이 왔습니다.” 안에서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렸다. “빨리 문 열어라. 뭐 하노!” 문이 열리고 나는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신을 신는 것도 잊고 축담에 버선발로 서 계셨다. 나는 어머니 앞으로 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무이, 그 사이 안녕하신교!” “오냐, 너거 집도 괘않고.”, “예.”, “보아하니 네가 고생이 많은 것 갑제.”, “저야 이렇게 사는 것이.....”, “그런데 어무이요. 형수님은 요?” “죽었뿟다. ..... 이제 한달쯤 되는갑다.” 나의 행동은 갑자기 얼어붙었고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얼른 올라가자.” 올라가서 나는 어머니에게 절을 했다. 어머니는 말씀했다. “죽은 년은 이미 죽은 것이고, 산 놈은 그냥 살아야지.” 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신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살려고 만쇠는 일본 갔다. 제 작은 형한테로 갔다. 우리도 나중에 모두 그리로 갈 거다. 조상 선산이 있는 곳이라 해서 해방됐다고 왔는데, 사람 하나만 궂히고 가게 됐다. 그것도 제 서방하고 갈려서 말이다.” 만쇠(晩釗)는 나의 동무 박말수 형의 아명이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말수 형은 삼형제이고 누이가 하나있다. 맏이 큰형은 이름이 박정쇠(朴丁釗)이고 필명은 박석정(朴石丁), 동요시인으로 일제 때 조선의 어린이를 위하여 좋은 동요를 많이 지었고 『샛별』 잡지를 했다. 해방 후 많은 예술가들이 월북할 때에 월북했고,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동요작가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가운데 형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신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른 일은 잘 모른다. 이 작은 형이 아까 문을 열어주신 작은 형수의 남편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전 1년에 작은형만 두고 조국으로 귀환했는데, 이때부터 모두 일본으로 도로 들어갔다. 나의 동무 박말수는 일본으로 건너가자 곧 밀항함이 발각되어 일본의 조선인 밀항자 수용소인 「오오무라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남조선으로 송환되어, 간첩으로 몰려 이루 말할 수 없는 생사의 가름 길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었다. 이로써 집도 팔고 해서 겨우 감옥을 면하고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러한 고난의 뒤끝인지 지금은 치매를 앓아 사람을 못 알아본다고 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누이만 건강하게 살아있다.
어머니는 고향 밀양에 계실 동안 늘 대문을 열어놓고 사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여성운동가이신 며느리 김정애 선생과 아들인 박말수의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당시 해방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위급할 때 어머니 집으로 올는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언제든지 자기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나는 어머니의 이와 같은 배려로 기적 같은 도움을 받았다. 이해, 1948년 11월의 어느 날 손전등과 단파라디오의 배터리를 사려고 밀양읍내에 들어왔다가 ‘아지트’로 돌아가려는데 내게 미행이 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배터리는 판매자가 사러 온 사람을 의무적으로 경찰서에 신고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이 미행자를 밀양읍내의 이곳저곳으로 좀 끌고 다니다가 어머니 집을 이용하기로 하고 버스정류소 골목으로 들어가자 미행이 계속 따라 오는 것을 보고 오른편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바로 어머니 집의 열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미행이 그 골목으로 따라 들어왔는데 보이지 않자 이집 저집 기웃거렸지만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그 골목 전체를 찾았으나 그 골목은 밀양읍사무소로 가는 도로로 빠지고 있어서 추적대상인 내가 그리로 빠져나간 줄 알고 추적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나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차려주신 저녁밥을 잘 먹었고, 자고 가라는 말씀을 시간 약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갔다. 어머니는 말수 형이 입었던 것이라면서 모직 내의 상하 한 벌을 내주셔서 빨지 못했던 나의 내의를 벗고 바꾸어 입도록 하셨다. 그해 겨울은 이 내복으로 정말 따뜻하게 보냈다. 옛날의 우리 어머니들은 아들딸의 동무도 이처럼 자기 아들과 똑같이 보살피고 사랑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도 자기 아들딸들의 잘못처럼 꾸중도 해서 바로 잡아주셨다.
나는 박말수 동무의 그간의 변동을 듣고, 돌아가신 형수님, 김정애 선생님의 영별을 슬퍼했고 또 동무의 일본으로 돌아갔음을 듣고 몹시 허전한 느낌을 가지고, 덕실 아재와 헤어진 그 장터의 주막으로 찾아갔다. 둘은 밤이 상당히 늦어서 다원에 돌아왔고, 나는 나의 ‘트’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