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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산(北山)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밝다. 내일 권정생 추모회 때문에 안동 간단다. 더 좋아지면 순천에도 오겠단다.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잖아도 궁금했는데…
지난번의 배관공사가 엉터리로 되어서 모두 파내고 다시 시공한 모양이다. 그러느라 쏟아져 나온 시멘트 파편과 돌조각들을 효선과 소리샘이 “죽어라 하고” 포대에 주워 담았단다. 한 사람 잘못으로 여러 사람이 괜한 수고가 많다. 세상 일이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 더욱 조심할 일이다. 누가 그랬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진 못할망정 해를 끼치진 말라고.
금강과 현보가 할아버지한테 할 말이 있다며 각각 찾아왔다. 너희가 힘들 때 나를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물론 비밀이다. (2017. 5. 16)
⎈ 집수리가 대충 마무리되나보다. 심신양면에 효선이 수고가 많다. 현장에서 일꾼 목사들과 점심 먹고 집으로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 순천향교를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식수(植樹)에 기부금 낸 사람들 이름을 목판에 새겨 도배하다시피 한 풍화루(風化樓)에 누워 낮잠 한 숨 잤다. 늙은 장미나무에 매달린 백장미들이 시들고 있었다. (2017. 5. 17)
⎈ 5.18 기념식장이 감동의 물결이었던 모양이다. 대통령이 정문에서 현장까지 걸어서 입장하고, 눈물 글썽이며 순서에도 없이 일반인과 포옹하고, 뭐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내 눈에는 어느 정치판의 혁신보다 큰 혁신이다. 평범한 상식이 엄청난 무엇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그동안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왔는지를 반영한다. 서글픈 기쁨이다. 권위도 없이 권위적으로 굴던 전임 대통령들의 공(功)이,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참으로 크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환해지는 법이기에…. 제발, 이번 대통령이 모자란 선배들의 전철을 끝내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저절로 간절해진다. 과연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사람이 각계의 인도자로 나서는 새 세대가 밝아오는 것인가? (2017. 5. 18)
⎈ 바오로딸에서 신간을 보내왔다. 리처드 로어 신부의 ‘벌거벗은 지금.’ 받은 자리에서 읽어본다. 좋은 책이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은 즐거움과 서글픔을 한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개별적으로 조건 없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명령하시는 하느님 당신은 매우 조건이 까다롭고 배타적인 사랑을 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자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정작 당신은 안 그러신다. 오히려 당신 원수들에게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는 메시지에 따르면, 하느님이 우리보다 사랑에 인색하시다. 내 평범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주식 중개인 제임스만 해도 툭하면 주먹부터 휘두르는 거친 사내지만 동료의 실수를 눈감아주기도 하고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고문하는 일은 상상조차 못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늘 무엇이 아쉽고 속이 옹졸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쉽게 공격하는 존재로 당신을 나타내신다. 분명히 하느님의 온유한 자비보다 진노하는 정의가 더 강해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있겠다는 것일까? 그런 하느님과 영원히 같이 있으라고? 맙소사, 나는 사양하겠다.”
리처드, 당신은 ‘그런 하느님’을 사양하시오. 나는 그럴 수 없소. 왜냐고? 무얼 사양하려면 먼저 그게 있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세상 천지에 ‘그런 하느님’이 없으니, 없는 걸 무슨 수로 사양한단 말이오? 하하하… (2017. 5. 19)
⎈ 향아, 민들레, 봉봉, 신난다, 보리밥과 함께 무위당 선생 23주기 모임에 참석차 원주 가는 길에 귀래에서 아이들 만나 함께 막국수로 점심. 막국수집이 제법 번창해졌다. 일꾼들도 늘었다. 그래도 맛은 그대로여서 고마웠다. 주인아주머니가 많이 늙었다. 정향과 세 시간 반을 걸어 막국수 먹으러 왔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그랬지,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면 내가 도둑놈이라고. 원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流下) 집에서 잠에 취하였다. 젖먹이의 특징이 먹고 자는 거라더니 내가 과연 젖먹이로 된 건가? 툭하면 졸린다.
밤 시간, 원주 역사박물관에 많은 사람이 모여 무위당을 생각한다. 여러 어른들을 뵙고 반갑게 인사 나누다. 누구보다도 ‘박 전무 형님’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우포늪에서 온 개똥이 어린이예술단의 공연이 기특하다. 고것들이 발랄하게 노래하고 춤추는데 소리만 들리고 노래는 잘 안 들려서 아쉽긴 하지만 뭐 괜찮다. 분위기가 주는 맛과 향이 언어보다 먼저요 더 중요하니까. (2017. 5. 20)
⎈ 유하 집에서 아침상으로 올갱이국을 대접한다. 어제 ‘어머니’가 하루 종일 부론 강에서 다슬기를 주웠는데, 그러고 허리 다리가 쑤신단다. 그 귀한 올갱이국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바로 그 맛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선생님 묘소에 절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도 잠깐 뵈었다. 가는 길 오는 길 봉봉이 혼자서 운전대를 잡았다. 수고가 많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체력이 더 좋아져서 괜찮단다. (2017. 5. 21)
⎈ 오전에 집수리 현장 보일러 시공하는 걸 조금 도와주었는데, 도왔다는 말을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허리 몇 번 굽히고 폈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상체가 자꾸 기울어진다. 웃긴다. 이런 게 사람 몸인가? 점심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호치민(胡志明)을 닮은 문 목사가 “벌써 가세요?” 하며 웃는다. 이 친구가 맘에 든다. 가까이 사귀고 싶다.
문 대통령이 어느 여인을 외교부 장관으로 발탁했다고 매스컴이 흥분한다. 나는 그가 반백(半白)의 머리칼을 휘날리는 게 좋아 보였지만, 그보다 자기 본 모습을 세상에 감추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음부터 염색하지 않았다는 말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과거에 딸을 어느 학교에 보내려고 ‘위장전입’이라는 걸 했다는데 그걸 문제 삼는 정치인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 사람들은 아무 켕기는 짓도 하지 않았는지 나는 그게 약간 궁금하다. 내가 누구를 두고 뭐라고 심판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바로 그 놈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7. 5. 22)
⎈ 시내에 볼일이 있어 외출하는데 닭장에 물 챙겨주다가 버스 시간을 놓칠 번했다. 교문 앞으로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보고 달려가는데 기사가 나를 보고서도 멈춰주지 않는다. 옛날에는 정거장 아닌 데서 늙은이가 손 흔들며 달려오는 게 보이면 버스를 세워줬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나보다. 하긴 그럴 거다. 어딜 가나 쌔고 쌘 게 늙은이들인데 무슨 특별대우를 바랄 것인가? 숨차게 달려 모퉁이를 돌아서니 고맙게도 퇴교하는 꼬맹이들을 싣느라고 버스가 아직 정거장에 멈춰 있다. 하늘에가 아이들을 차에 태워주며 거기 서 있다가 달려오는 나를 보고는 기사에게 뭐라고 한다. 아마 저기 누가 오고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용케 넘어지지 않고 차에 올랐다. 돈을 내는데 요금표에 어른 1,350원이라고 적혀 있다. 손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 백 원짜리 동전 세 개가 있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면 150원을 거슬러 받는 건데 그러지 않고,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내밀며 천 삼백 원이 있다고 했다. 기사가 똑똑한 발음으로 “천 삼백 오십 원이오.” 한다. 멀쑥해서 오백 원을 주고 150원을 거슬러 받았다. 허 참, 그까짓 오십 원 아끼려고 이런 수모(?)를 겪는단 말인가? 기사는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다. 전혀! 아무런 허물이 없다. 정거장 아닌 데라 멈추지 않았고 요금이 1,350원이니 그렇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 마음은 이렇게 어수선한 것인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과연 장난이 심하구나, 생각하면서 창밖을 내다본다. …물론 법도 좋고 원칙도 좋다. 그런 게 없으면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일 테니 지킬 건 지켜야겠지. 하지만 그놈의 법과 원칙이 어떤 ‘사람 하나’를 위해서 깨어지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다면 무슨 그런 삭막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야 한단 말인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던 스승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래, 그래서 그분 그때 참 외로우셨을 게다. (2017. 5. 23)
⎈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책 한 줄 읽지 않고 글 한 줄 쓰지 않고 하루를 멍하니 보낸다. 오랜만에 7학년 마음공부. 틱낫한의 두 문장을 아이들과 함께 읽는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과 사랑을 먹여 기르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모든 것이 살려면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사랑도 그렇다는 내용이다. 까닭 모르게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하루다. (2017. 5. 24)
⎈ 아침 시간, 텅 빈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 ‘천사들과 말하다’ ‘타라 브라크’ 조금씩 옮김. 저녁에는 효선의 지도로 아이들이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신바람이 났다. 춤을 추는데 그 많은 동작을 어떻게 외워서 추는지 신통하기만 하다. 연락도 없이 안골교회 서영수 목사가 나타났다. 불편한 몸으로 예산에서 순천까지 그 먼 길 달려온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저녁 조금 먹고는 시내에서 자고 내일 다시 오겠다며 차를 타고 떠난다. (2017. 5. 25)
⎈ 박수영 테오도로 수사(修士)가 왔다. 그동안 캄보디아와 필리핀에서 신학수업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기에 앞서 순천으로 피정 오는 길에 잠시 들렀단다. 2011년 정향이 한참 아플 때 서울 지하철에서 스치듯이 만난 뒤로 오랜만의 조우(遭遇)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다. 사제 성서본문으로 루가복음 15장 23절의 “먹고 즐기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시절에 맞는 좋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즐거움 뒤에, 아니 그 속에, 아픔과 고통이 담겨있지 않으면 가짜 즐거움이라고 말해주었다.
효선은 어제 부탄가스를 마시고 나서 두통을 호소하며 하루 종일 누워있다. 당신이 아프지 않고 돌아다닐 때 고마워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다고 말해주었다. (2017. 5. 26)
⎈ 토요 명상 시간. 여섯 명이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위로와 지혜를 주고받는다. 복된 시간이다. 날마다 하루를 마감하며 이런 시간을 공유하면 참 좋겠다. (2017. 5. 27)
⎈ 두더지가 히말라야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4천 미터 고지에서 “이 산은 사람의 발이 닿을 곳이 아니다. 여기까지다. 그만 내려가라.” 이런 음성을 듣고서 마냥 울었단다. 아주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것 같다. 그렇다.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하는 데가 있는 법이다. 세상은 왜 현명하고 진정한 ‘포기’를 가르치지 않는가? 무슨 일을 중도에 그만두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손가락질부터 하는 건가?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말에 갇혀서 불행하기만 한 춤을 억지로 추는 것인가? 어차어피 미완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아름다운 중동무이가 그립다. (2017. 5. 28)
⎈ 찔레꽃가뭄이 심하다. 비가 좀 내려야 할 텐데… (2017. 5. 29)
⎈ 이태수 화백 지도 아래 천지인 아이들이 이틀간 작업한 그림(수채화)을 보았다. 몇 작품은 눈을 놀라게 할 만큼 신선하고 발랄하다. 결국, 지도자의 역량인가?
효선은 점심 먹고 서울로… 졸지 않고 잘 갔단다. 고맙다고 했다.
늦은 시간에 영화 한 편 보았다.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영화인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정말 힘든 과제라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고통과 희열이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슨 영화제에서 상 받은 영화란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누가 감히 이런 도발적인 영화를 기획이나마 했겠는가? (2017. 5. 30)
⎈ 간밤에 천둥번개가 심했다. 무서워서 우는 아이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단오명절. 점심으로 아이들이 한 양푼씩 비벼놓은 밥을 나눠 먹었다. 옛날 생각이 난다. 비빔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사이좋게 먹다가 남은 밥이 얼마 안 되면 숟갈로 경계를 그었지! 배는 고팠어도 마음은 푸근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오후에는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어차피 누군가는 이기고 져야 하는지라 이긴 녀석은 멋쩍어하고 진 녀석은 분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인다. 하! 재미있다. 봉봉이 무심과 수고하여 친 차일 아래에서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떠들며 노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울렁거린다. 지금 여기가 천국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풍경소리 6월호를 제본하고 나서 보니 표지가 지난 5월호 표지로 찍혀 있더란다.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할까? 몇 가지 방법을 고려하다가, 가장 손실이 적은 방법으로, 책 사이즈는 좀 작아지겠지만 표지만 다시 인쇄하여 제본하기로 했단다. 무슨 소리냐고? 어디까지나 인쇄소 잘못이니 본문까지 다시 찍어서 새 책을 만들고 나머지는 폐지로 처분하든지 말든지 하고 그리고 손해도 배상하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요즘 세상 아닌가?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더럽고 무정하고 치사한 세상이다. 그런데,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 속에서 답답하고 더럽고 무정하고 치사하게 사는 걸까?
7학년 마음공부 시간에 각자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그런 세상을 살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아이들이 내놓은 답의 공동분모가 “공평한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세상이야 어떻든 간에 네가 원하는 세상을 네가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보라고, 일제 말기에 태어나 형제들이 서로 죽이는 전쟁터에서 자란 할아버지는 싸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는데 그런 세상은 있을 수 없는 세상인 걸 알았지만 그런 세상에서 누구를 상대로든 싸우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그랬더니 서로 싸우는 세상에서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는 세상을 웬만큼 살 수 있었다고… (2017. 5. 31)
⎈ 기차로 광명역까지, 거기서 승용차로 지금여기교회까지. 공간이동을 하면서 톨레의 ‘고요가 말하다’를 맛있게 먹다.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이건 무엇인가? 역까지 마중 나온 집사 한 분이 그동안 욥을 여러 번 읽으면서 자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말해주는데, 입이 말하기 전에 한결 편안해진 그의 얼굴이 먼저 말해주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옛날 만화에서 본 여포처럼 양쪽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얼굴로, 너무 자주 화를 내는 자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었지. 그러던 그가 며칠 전에는 솟아오르던 자기 분노가 십 분쯤 만에 가라앉으며 평온해지는 걸 봤다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한님이 하시는 일에 무슨 빈틈이 있겠는가? 장 목사가 이번 성서산책은 쉬엄쉬엄 놀면서 하자고 한다. “자네도 많이 달라졌구먼.” 이 말은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2017. 6. 1)
⎈ 오전에 두어 시간 이야기 나누고 점심 먹고 곤지암 ‘화담숲’ 산책. 한 재벌이 많은 돈을 들여 인공 숲을 조성했다. 걷기 편하라고 나무와 시멘트로 길을 도배했는데 사방팔방 눈요기할 것들이 많다. 대형백화점에 온 기분이다. 소나무정원이라고 이름붙인 구역에는 아마도 전국에서 간택(?)되었을 소나무들이 건강하게 이식되어 무대 위의 쇼맨들처럼 모양을 뽐내고 있다. 사람들이 거의 줄을 잇다시피 그것들을 스쳐지나간다. 분재정원에는 기묘한 모습의 모과나무, 소나무, 향나무, 소사나무들이 작은 화분에 담겨 요정도만 땅을 차지해도 충분히 산다고 속삭여준다. 한번쯤 가볼 만한 산책코스.
숲에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류 치과 내외가 “목사님 얼굴 보러 왔다”며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는 그 자리에서 돌아간다. 포옹하는데 몸이 한결 단단해진 느낌이다. 안색도 좋다. 아차, 최 간호사 수술 결과가 어떤지를 묻지 않고 그냥 보냈다. (2017. 6. 2)
⎈ 주일예배 마치고 점심 먹고 곧장 출발. 오는 길에 하동 쌍계사에서 하룻밤 쉬기로 한다.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眞鑑禪師) 비명(碑銘)을 읽고 싶었지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1,200년 풍상을 겪었을 빗돌이 대견하고 장하다. 최치원이 지은 글이라는데 글씨가 몹시 단아하고 자유롭다. 笑指門前一條路 纔離山下有千跂(웃으며 문 앞을 가리키면 한 줄기 외길인데 조금만 산 아래로 내려서면 천 갈래 길이구나)라는 문장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고운(孤雲)의 글에 의하면 진감선사는, “성품이 질박하였고 말을 할 때는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헌 솜옷이나 삼베옷을 따뜻하게 입었고 겨나 싸라기를 달게 먹었다. 밥에는 도토리와 콩을 섞었으며 나물반찬도 두 가지를 넘지 않았다. 지체 높은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이 찾아와도 생선반찬을 따로 차리지 않았다. 그런 분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라 생각한 제자들이 대접을 꺼리면 마음이 있어 찾아왔을 테니 거친 밥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면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을 똑같이 대하였다.” 과연 당나라까지 가서 불도를 닦을 만도 했겠다. 이 정도로 살 수 있었다면.
겉은 번드레한데 속은 별로 친절하지 않은 리조트에서 하룻밤 묵는다. (2017. 6. 4)
⎈ 새벽에 길을 떠나 아침명상 전에 학교 도착. 명상 마치고 효선은 바로 현장으로, 나는 잠자리로 각자 헤어졌다. 10시 반에 일어나 산책 나갔다가 시내버스가 왔고 마침 주머니에 잔돈도 있고 해서 버스를 탔다. 공사 현장에 들어서니 효선이 반긴다. 조금 지켜보다가 반디가 대접하는 점심 얻어먹고 향교에 가서 잠들었다. 웬 잠이 이렇게 쉬지도 않고 폐부깊이 스며든단 말인가. 목우당이 와서 나를 깨워 자기 차에 싣고 학교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다시 잠든다. 오후 늦게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가 닭장 앞에서 봉봉과 두더지를 만나 그동안 정문 앞 회양목 가지 아래에서 병아리를 깐 암탉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탉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아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남몰래 새 생명을 까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고 미안하다. 목우당 차로 저녁 식사하러 가는데 내 지레짐작 때문에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 한참 돌았다. 효선은 중노동으로 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반디도 수고가 많았다. 모두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2017. 6. 5)
⎈ “기력이 쇠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된다. 어제 오늘 거의 혼몽한 상태로 지낸다. 번역은 물론이고 책도 한 줄 읽히지 않는다. 일부러 공사판을 기웃거려보지만 무작정 어디에 앉고만 싶다. 거의 종일 잠을 잔다. 그래도 점심은 밥 한 그릇 다 먹었다.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병아리들이 알 속에서 고물거리는 것 같은데 어미닭은 돌아다니는 병아리들만 품어주고 알 세 개를 그냥 내버려둔다. 포근한 수건에 싸서 두더지 방에 두었더니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와 아직 뜨지 못한 눈으로 어미 품을 찾는다.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닭장의 어미닭 품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무쪼록 잘 살아라. 봉봉이 수고하여 닭장 틈새를 꼼꼼히 막았으니 전처럼 족제비 따위의 습격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2017. 6. 6)
⎈ 새벽, 닭장에 가본다. 새까만 햇병아리 아홉 마리가 어미 뒤를 졸졸 따르며 놀고 있다. 저것들 가운데는 어젯밤 어미 품에 넣어준 병아리가 있을 텐데 어느 녀석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다행이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알 속에서 고물거리던 병아리 한 마리가 간밤에 숨을 거두었다. 보일러를 틀지 않고 잤더니 밤에 열기가 부족했던가보다.
목우당이 학교 공작실에서 나무로 문짝을 만드는데 봉봉이 틈나는 대로 드나들며 돕는 모양이 보기 좋다. 남의 집이든 자기 집이든 집짓는 사람은, 본인이야 어찌 생각하든 간에, 복된 사람이다. 그의 수고가 누군가의 안락한 보금자리로 피어날 수 있으니까. 그들에게는 무조건 고맙다고 해야 한다. 돈 주었으니 고마울 것 없다고 말하는 건, 그렇게 생각하는 이의 자유지만, 그러는 게 아니다. 집짓는 이와 그 집에서 사는 이의 관계를 돈이 간섭하도록 놔두는 게 아니다. 하긴 그게 어찌 건축자와 거주자 사이에서만 그러랴? (2017. 6. 7)
⎈ 옛날 ‘제3일’ 편집장이던 이기영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는 9월, 장공(長空) 무슨 학술모임에서 예언자 헤셀과 장공의 삶을 연계하여 얘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 그날에 강연할 내용을 월말까지 간단하게라도 글로 작성해서 보내달란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미리 준비하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따라보고 싶다고, 반드시 강연 내용을 글로 미리 써서 보내야 한다면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내 생각을 알았으니 의논해보고 답을 주겠단다. 그러시라고 했다. 연로한 선배 목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죄송하긴 했지만 얼버무리고 싶지 않았다.
천지인 대표들이 지혜를 구한다며 왔다. 밤중에 술 마시고 말썽 피운 친구들을 징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잘못한 누구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벌주면 좋겠는지 묻는 거냐고 하자 그렇단다.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너희가 할아버지 의견을 물으니 대답한다. 듣고서 어떻게 할 건지는 너희 맘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죄를 지었으면 벌 받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해왔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이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문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벌로 겁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벌 받는 게 겁나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건 엉터리없는 거짓 가설이다. 전과자들이 갈수록 심한 죄를 저지르지 않더냐? 오히려 용서받은 죄인이 선한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는 드물지만 분명히 있다. 사람을 겁주어서 세상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진짜 잘못된 생각은 이제 그만 졸업했으면 한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아온 고통이 너무나 크다. 21세기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상이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 세대가 그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선발대다. 이번에 잘못을 저지른 친구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것으로 이 일을 덮고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의견이다.” 한 마디 덧붙였다. “누가 무슨 벌을 받아서 어떻게 문제가 수습됐는지는 중요치 않다. 문제란 언제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다. 그보다, 너희 모두 이번 일로 소중한 인생의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고맙게도 몇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2017. 6. 8)
⎈ 8, 9학년 마음공부 시간. 장발장 얘기를 들려준다. 그가 빵 한 개 훔친 죄로 감옥생활 19년이라는 혹독한 벌을 받지만 그에게서 도둑질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졌다. 자기를 재워주고 먹여준 신부(神父)한테서 은(銀)식기를 훔친 것이다. 그가 절도 용의자로 잡혀 왔을 때 신부는 그의 죄를 묻는 대신 자기가 선물로 준 것을 왜 두고 갔냐며 은촛대까지 내어준다. 용서에 덤으로 사랑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법정의 차가운 형벌이 아니라 한 인간의 따뜻한 사랑과 용서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이것이 그냥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보자. 비록 그대로 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소중한 인생의 가치 아닌가? 이런 얘기를 아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유도(誘導)하신 한님께 감사드린다. (2017. 6. 9)
⎈ 오늘은 착실하게 번역작업. 타라 브라크, 달라이 라마, 천사들과 말하다…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는 요제프에게 천사가 말한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묻고 있다.… 아래에서 ‘죽음’인 것이… 위에서 ‘삶’이다. 너 또한 죽고 그리고 영원히 산다. 나머지는 모두가 일시적인 환상(幻像)이다. 해변에서 부서지는 파도들, 한없이 이어지는 작은 죽음들… 이것이 곧 삶이다. 세포들이 죽고… 새 세포들이 태어난다. 인간들이 죽고… 새 인간들이 태어난다. 네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마라. 그가 여전히 살 수 있다! 나쁜 건 죽음이 아니라 마쳐지지 않은 임무다. 익은 과일은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과일은 익은 과일이다. …그러니 좋은 것이다.”
저녁 명상 시간, 천지인 부모 배움에 참석한 아버지 어머니들과 함께 하다. 큰 방 가득 둘러앉은 어른들의 모습이 그 자체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 배움터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계획을 에누리 없이 이루시라고 한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2017. 6. 10)
⎈ 효선은 아침 일찍 공사현장으로 간다. 가서 음악 들으며 페인트칠을 하겠단다. 서울에서 인향(仁香) 내외가 손자 데리고 내려왔다. 젖먹이 때 보고 처음 보는데 그동안 많이 컸다. 벌써 유치원생이란다. 함께 점심 먹고 용화사로…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훈훈한 생기가 흐른다. 영주 아버지가 전기톱으로 나뭇가지를 치는데 무용수처럼 나무 위에서 춤추더라고, 두더지가 감탄조로 이야기한다. 그럴 것이다. 무슨 일이든 몸에 익숙하고 신명이 나면 그대로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나도 내 인생 춤추듯이 살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혹시 춤이라 해도 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거의 움직임 없이 움직이는 그런 춤이겠지. (2017. 6. 11)
⎈ ‘천사들과 말하다’에서 천사가 말한다. “식물에게는 성장인 것, 동물에게는 동작인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줌(giving)이다. 줌은 열매가 아니다. 성장이다. 예비(豫備)다. …네가 항상 주지 않으면, 너는 시들어 마른다.”
바닷가 산책. 쓸쓸하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만으로 나에게 삶의 힘이 됩니다.” 나는 왜 이런 고백이 간혹 어떤 사람한테는 되는데 하느님한테는 되지 않는 것인가? (2017. 6. 12)
⎈ 효선이 집수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다. 오늘은 복통에 두통까지 겹쳐 고생이 심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정신없이 쓰러져 잠든다.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데 속수무책이라, 다만 당신의 뜻을 이루시라 기도할 따름이다. 문 목사는 내일까지 공사하고 철수한단다. 아직 마무리할 것들이 많은데… (2017. 6. 13)
⎈ 타라 브라크 번역. 사람이 큰 상실을 겪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인과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인용된 아일랜드 시인 존 오’도노휴(John O'Donohue)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그대 지금 의지할 유일한 것은,
슬픔이 제 스스로 충실하리라는 사실이다.
슬픔은 그대보다 잘 알고 있다,
가야 할 제 길이 있음을.
눈물에 젖은 두 뺨의 둔덕이
마지막 한 방울을 삼키는 그날까지,
슬픔의 끈을 당기고 또 당기리라는 것을.
슬픔이 제 일을 모두 마치면
그대 상실의 아픈 상처는 치유되고
그대 눈을 허공에서 떼어놓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그대 가슴 속으로,
귀향하는 그대를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는
그대 영혼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범강, 유하가 원주에서 함께 내려왔다. 반갑게 만나 환담. 든든한 사람들. (2017. 6. 14)
⎈ 1분 전(前), 1분 후(後)로부터의 자유! 선명한 기억과 아름다운 꿈을 가진 백치(白痴)! 순간순간의 삶.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건 아니다. 새벽같이 집수리 현장으로 간 효선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무 아파서 의료원에 와 있단다. 두더지가 차를 달려 가보니 갑자기 배가 아프고 메슥거려서 내시경으로 살펴보자는 의사에게 우선 약부터 처방해달라고 했단다. 약이 효과가 있는지 숨돌릴만하다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소리샘이 와서 죽을 끓여준다. 이게 다 무엇인가? 무슨 신호인가? 모르겠다. 저절로 알아질 때까지 궁리하지 않겠다. 그냥 순간순간 닥치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2017.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