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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새, 눈물>을 들으면 떠오르는 여인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샀던 송창식의 1집 앨범에는
<꽃, 새, 눈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담백한 클래식 기타 반주로만 연주되는 곡조도 참 좋았지만
최인호가 작사하였던 가사가 너무나 참 시적이었다.
그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 떨어져서 꽃이 되었네.
그 꽃이 자라서 예쁘게 피면, 한 송이 꺾어다가 창가에 앉아.
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어. 지는 봄 서러워 부르고 말아.
아, 가누나. 봄이 가누나. 아, 지누나. 꽃이 지누나.
내 젊은 날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나 못지않게 이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부산의 산복도로 위의 다 쓰러져가던 판자집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겨울 석 달 내내 고골리의 <외투>같이 암울한 코트 하나로 때워야 하였지만
그래도 두터운 안경 너머로 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까뮈의 이방인과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고독을 지껄이던 친구.
그 친구는 재수 시절 서울에 우연히 놀러왔다가
남산에서 자기보다 3살이나 많던 숙대 여학생을 사귀었다.
그 여학생은 전라도 광주의 부잣집 딸이었다.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던 가난한 재수생과 부유한 여대생의 사랑이었다.
둘은 엽서를 주고 받으면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소설 같은 낭만적인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그 친구가 부산의 어느 대학에 입학할 때 그녀는 졸업반이 되었고
낭만과 현실 앞에서 그녀는 현실을 택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서울에 올라올 차비도 없었던 친구는
나에게 그 여자를 찾아가서 설득하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몇 차례나 청파동에 찾아가서 그녀를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전화가 드물어서 건물 하나에 혹은 한 층에 전화가 한 대 있었던 그 시절
가까스로 통화를 해서 마침내 숙대 앞 어느 다방에서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친구의 실연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던 나는
간곡하게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하라고 조르고
나의 애절한 설득에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내 친구의 사랑은 가고 말았다.
그 뒤로 그 친구는 <꽃, 새, 눈물>을 자주 부르곤 하였다.
청춘의 봄이 그렇게 덧없이 가버린 것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었으리라.
그 친구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자꾸만
그날 밤 어둠컴컴한 다방 한 쪽 구석에서 반짝이던 그녀의 눈물이 생각나곤 하였다.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을 아쉬워하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대학 입학 후 청춘사업을 인생 최대의 사업으로 삼고
무려 30회가 넘도록 열심히 부지런히 미팅, 소개팅, 고팅 등등에 나갔다.
그렇지만 나의 청춘사업은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상대가 마음에 들어 애프터를 신청하면 바람 맞기 일쑤였고
가물에 콩 나듯이 파트너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면 이번에는 내가 별로였다.
그러다 2학년 봄에 나는 숙대의 산업미술과 학생과 미팅을 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순간 파트너의 아름다운 얼굴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정성을 다해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하였다.
참으로 운 좋게도 그녀 또한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였다.
자기도 미팅을 많이 해보았지만 나처럼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대나...
나는 하늘을 날듯이 기뻐하면서 천지신명과 사랑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짝을 만나 나의 청춘사업이 날개를 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숙대 앞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옛날 친구의 청춘사업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청춘사업을 펼치기 위해서.
향토장학금으로 올라온 돈과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모두 식사비, 술값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받은 고운 사진은 나의 보물 1호가 되었고
그녀가 써야할 레포트는 바로 나의 레포트가 되었다.
1달 사이에 10번 정도를 신림동에서 청파동으로 출근하면서
청파동의 거리가 어느 정도 눈에 익숙해질 봄기운이 완연해질 오월 초,
당시의 정치상황과 학교의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청춘사업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연일 대책을 세우면서 도서관에서 학과 사무실에서 철야 회의를 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교문 밖으로 나가 시가행진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나도 그 속에 끼여 최루탄 가스를 헤치고 교문 밖으로 나가서 데모를 하였다.
연일 계속 되는 데모 속에서 나는 그녀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5월 17일 학교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들이닥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다음 날 우리들은 계엄령에 항의하기 위해 영등포역으로 갔다.
며칠 전에 시위를 하였던 영등포역에는 소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전경들의 진압과 공수부대 군인들의 진압은 그 수위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휘갈기고 쓰러진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았다.
선발 시위대가 무지막지한 진압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영등포 역 뒤쪽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을 갔다.
그 날부터는 광주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문들이 난무하였다.
집에서는 당장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고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부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6개월 가까이나 계속되었던 기나긴 휴교,
뉴스에서 전두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분노를 표현하였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심하게 꾸짖으시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종용하셨다.
전두환은 물론이고 그런 전두환을 옹호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아버지와 싸우기도 하였다.
미칠 듯이 갑갑한 현실 속에서 울분으로 점철되었던 나날들이었다.
당시는 거북선 담배 한 갑, 300원, 차비 왕복 40원, 커피 한 잔 150원 하던 시절,
아침에 엄마에게 500원을 받아서 들고 나오면 무조건 서면으로 나갔다.
서면 천우장 뒷골목 근처의 클래식 음악다방 전원다방,
인심 후하던 그곳에서 차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죽쳤다.
기다리던 개교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서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 되어버렸고
혼란의 와중에 전화번호도 연락처도 잃어버려서
숙대의 그 여학생도 저 머나먼 나라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9월말이 되어서야 마침내 개교를 하였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다시 연락처를 구하게 되어 마침내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다.
어디에서 전화를 걸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공중전화였던 것은 틀림없다.
마침내 통화가 되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순간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빨리 만나자고 하였다.
그러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였다.
지금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하였다.
그렇지만 차분히 생각하니 그녀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겨우 한 달을 만나고 6개월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으니...
그 한 달 동안 열심히 만날 때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그래,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바보같이 마음속으로만 좋아하였지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나는 머뭇거리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참 좋아하였었는데... 이제는 안 되는구나. 그래, 행복하게 잘 지내.
수화기를 전화기에 걸어놓고 공중전화 박스를 나올 때
왜 그렇게 마음이 휑하던지...
사실 나는 처음에는 그녀에게 차이고 난 뒤에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나중에 연애박사였던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서 대충 짐작을 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매우 강한 호감을 표시하였다.
자기 입으로 지금까지 미팅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자기의 독사진을 나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고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소아마비로 발을 저는 친구도 데리고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애교스럽게 나보고 레포트도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그러나 나는 10번을 만나는 동안 그녀의 손을 잡아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얼굴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슬쩍 슬쩍 훔쳐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는 게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은 아직은 실례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같이 길을 걷다가 어깨가 서로 부딪치거나 몸이 살짝 닿을 때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면서 부딪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막스 밀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애독하고 감동받으면서
육체적 사랑이 아닌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였던 탓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여자를 잘 모르던 너무나 순진한 시골총각이었던 셈이다.
친구의 결론은 나의 마음은 그 여자를 좋아하였는지 모르지만
나의 눈빛이나 바디랭귀지는 여자를 거부하였고
그게 그녀로 하여금 나에 대해 실망하게 한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냉담하게 바뀔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정말 그 친구의 말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무튼 최초로 연애다운 연애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가고 말았다.
그 뒤로는 <꽃, 새, 눈물>을 들으면 왠지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서 피어난 예쁜 꽃,
그 예쁜 꽃을 꺾어다가 그녀의 창가에 앉아 새처럼 노래 부르고 싶었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어이없이 지나가버린 나의 봄을 아쉬워하며 서글프게 노래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때로 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울 때는
하숙방 창가에 기대 앉아 잘 칠 줄 모르던 기타를 들고 앉아서
새처럼 하염없이 그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하였다.
그 뒤로 여러 번의 청춘사업이 있었고 숱한 좌절과 도전 속에서
마침내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들 셋 놓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지금의 아내가 내 일생 최고의 여인이라는 데 한 점 의심이 없다.
그렇지만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꽃, 새, 눈물>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녀의 이름과 이제는 가물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철없던 젊은 날의 아련하고도 씁쓸한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다가오는 요즈음 기타를 들고 이 노래를 자주 부른다.
그저께 청개구리 모임에서도 불렀고 오늘 명상모임의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도 불렀다.
그녀도 이제는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너른돌
첫댓글 그 여인은 인연이 아니였나봅니다. 그러니 운명의 신이 이여지지 않은 거지요.. 노래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시군요~ 운명으로 이여지지는 않했으나 추억은 영원하지요^^
그렇겠지요. 아내를 만나기 전의 모든 여자들은 어쩌면 아내를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내에게 너무 아부성 발언인가?^^;;
구구절절이 애틋하네요.그당시 풋풋한 사랑이 그려지내요.사랑=육체적사랑+정신적사랑 이 아닐까 싶네요.휴교령이내려질때 우리학교엔 1공수가 지키고 학생출입을 통제했었는데 그때 검은베레모를 쓴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었죠.너른돌님처럼 애틋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만 가슴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을거여요.오늘은 왠지 ....
젊은 날 짧게 지나가버린 해프닝같은 만남이었지만 한번씩은 마냥 보고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 여자 자체가 보고싶은 것보다는 다시 그 풋풋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누구나 한번 쯤 겪었을 법한 젊은 시절의 애틋한 연애 감정이 잘 전해옵니다. 저도 이 노래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청춘은 아름다운가 봅니다. 그리고 그 젊은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노래들을 좋아하지요.
이 순간, 저의 회상에도 최류탄 개스... 자취방의 연탄개스 냄새... 그리고 지금 나처럼 늙어 있을 몇몇 사람들의 풋풋한 면면...이 깔려 있네요.
최루탄 냄새, 가두 행진 이제는 최루탄은 수출만 한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너른돌님의 사랑은현님을 제외한 단 한사람의 여인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 더욱 안타까울 뿐...그렇게 생각함이 속편하다는... 근데 역시 머리 좋은 분의 기억력이란...히유 난 혀를 내두르고 있답니다
바이올렛님, 단 한 사람? 저는 실속은 별로 없어도 양은 상당했지요. 미팅 소개팅 등을 포함해서 총 60명 정도.... 청춘사업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 부단히 도전한 결과 마침내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글에서 젊은날 옛추억이 주룩주룩 흘러 내린다는.......
요즈음 갑자기 젊은 날의 옛 추억이 강하게 떠오른다는...^^
우린 이렇게 가끔은 다른이의 고운사랑 앓이에 마음을 담그곤 하지요.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다운 소중한 추억이야기 이건만 그 때는 미처 몰랐기에.....노래 언저리에서 함께 우는 마음 지워지지 않는거겠지요.
제가 오늘 제대로 읽지는 못하였어도 다음을 기약할 겁니다. 그리고 만날 기회를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