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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12 문에 웅크린 죄 금주에 우리는 지구 반대편 아메리칸 드림의 현장에서 들려온 대형 살인 사건에 당황해야 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와 군사 대국으로 세계 평화를 지켜내고 있다는 미국의 심장부 , 그것도 학문의 전당인 대학교 내에서 33 명의 학생과 교수들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90 년 대 말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15 명이 동급생에 의해 살해된 이후 경찰이 학교에 파견되어 치안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 같은 대형 총기 살인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이 세상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과 인간의 잔혹함의 극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 , 우리의 인생은 너무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생명과 인생을 군인이 경찰이 지켜주지 못합니다. 돈이 지켜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도 형제도 지키지 못합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보호자요 우리의 산성이요 방패가 되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합니까 ? 마음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그럽니다. (잠 4:23) 마음을 지키면 몸을 지킬 수 있으며 행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아니꼽고 치사해도 마음만 지켜진다면 이겨내고 당당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끝나는 겁니다.
대부분 미국 땅에서 이민 1세대 ,1.5 세대들이 인종차별과 경제적 빈곤에 외로움과 따돌림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어 냅니다. 그 원동력은 참을 수 있고 기다리며 마음을 지켜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3세의 조승희라는 젊은이는 하루 아침에 33 명을 죽이는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수학적으로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에 마음이 점점 곪아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애인한테 치였습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감당 못한 채 자학하고 분노하다가 결국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단순히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죄에게 조정을 받게 되어 나도 불행해 지고 너도 불행해 지는 결과를 만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덴의 동쪽에서 형이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 사건의 발단이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렸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만 열납되고 형의 제사는 무시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로 인해 가인의 상태를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좋은 일에 , 경건한 일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향한 사람의 마음을 , 우애의 마음을 지켜 내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 7 절입니다. === 죄가 가인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죄가 동생을 쳐 죽이도록 유도합니다. 결국 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서 죄의 상태를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가 문에 짐승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여차하면 막 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경고합니다.
에덴동산을 파괴시킨 죄가 사나운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죄의 욕망을 가진 인간을 종으로 삼아 버리니 죄를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그런 의지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은 표적이 빗나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의 아들은 선의 표적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가인은 열납되지 않은 책임을 아벨에게 돌립니다. 저 아벨만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받으셨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아벨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킬 때에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것이 저 부자 때문이라고 부자와 지성인들을 다 죽여버려야 노동자가 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부자를 없애면 내가 부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없어져도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는 부자들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란히 책상을 같이 하고 있는 직장 동료를 죽이고 싶은 앙심을 품고 삽니다. 부모조차 떨구어 내어야 할 짐으로 늙은 부모만 없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고 동료를 죽이고 부모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 내가 불행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성격 나쁜 것까지 남을 탓합니다. 너 때문에 내 성격이 이렇게 변했다고 원망합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내 남편이고 내 부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져다놓아도 불평을 합니다. 어느 환경에서든지 불평 불만입니다.
못 가졌을 때에는 못 가졌다고 불평이요 가졌을 때에는 더 가지려고 불평입니다.
평등하지 못했을 때에는 평등하지 못해서 불만이요 평등하고 나면 특별하지 못해서 불만입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의 문제요,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감사합니다. 어느 직장에서도 행복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목사 때문도 아니요 장로님 때문도 아니요 바로 나 때문입니다.
가인의 경우는 회개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됩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 이웃의 문제, 물질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고민이 물질이나 환경이나 정치, 혹은 이 세상 누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일단 짚고 넘어갑시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고민해야 할 일에 고민하지 않으면 고민할 필요 없는 일에 고민하게 됩니다.
또한 고민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고민의 노예가 되고 어느새 원치 않는 엄청난 함정에 그대로 빠져들어 문에 웅크린 죄에게 당하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은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아담이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옳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이 아담을 긍휼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을 전가한 까닭에 그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기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6절)." 이때 가인은 "하나님 죄송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제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만져서 제사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는 아벨의 제사가 성공했지만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가인이 성공한 것입니다.
아벨에게는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에게 찾아와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있습니다. 그럼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
그것을 가인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8 절을 보시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동생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고치고 죄를 다스리라고 주신 말씀을 가지고 가인은 동생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회개하고 자기를 돌아 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부흥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 받을 때 아멘으로 받으시고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것 회개하고 잘나낼 것 자를 수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나를 괴롭게 만드는 모든 인생의 문제를 나 자신의 죄와 허물에서 찾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이번 부흥 성회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위한 축복의 자리를 만드십시오 하나님은 이번 성회를 통해서 우리 한사람 , 한사람의 마음을 만지실 것입니다.
아벨을 살해한 다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듯 가인을 부르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제가 죽였습니다." 했으면 살 길이 있었을 터인데 그는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이런 어리섞은 인생이 어디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그래도 용서의 음성으로 찾아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저버리고 맙니다.
다윗을 봅시다. 그에게 엄청난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하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밧세바 때문입니다, 환경 때문입니다. 하는 불평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모태적부터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직선적으로 바로 응답하는 것이 모든 고민의 바른 해결의 열쇠입니다.
주님의 종말론적인 마지막 음성이 들려올 때에 우리는 진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모든 원인이 제게 있습니다.” 할 때에 비로소 바른 길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살기가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 먹을 것이 넘쳐나고 편리하고 향락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인간성은 더 삭막해져 가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허무합니다.
그러니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먹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짐을 감당할 길 없다보니 술로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술에서 깨고 나면 고통스런 인생의 현실은 문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경제적인 풍요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그 경제적인 풍요를 잡기 위해 오늘도 내 주변에 나로 인해 누가 다치고 아파하는 지도 모르며 오로지 나의 행복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서 달려 갑니다.
유리하며 방황하는 나그네로 더 깊은 절망의 나락속으로 빨려 들고 맙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풍요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막상 그 풍요가 주어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작년에 개발 보상비로 3조1519억원이 풀린 경기 북부 파주 운정 지구에서는 “자식에게 10억원씩 물려주는 게 유행”으로 “파주·고양에선 돈 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나돈다고 합니다.
90 년대 중반 끼지만 해도 쌀 한가마니 지고 금촌 역 앞에서 막걸리 먹던 농부들이 룸쌀롱에서 수백만원짜리 술을 먹으며
밤 10시가 넘어 은행 지점장에게 급하게 쓸 돈이 필요하니 1000 만원만 가져다 달라는 전화만 해도 30 분 내로 은행 직원이 나와 수표를 건네는 호사스런 대접을 받는 사장님이 되었답니다. 보상금으로 340여억원을 받은 윤모(48)씨는 금촌동 지역 은행에 100억원 넘는 돈을 예치했는데 그 대가로 은행은 6000만원이 넘는 고급 외제 SUV를 윤씨에게 사줬답니다.
예대마진(대출이자에서 예금이자를 뺀 부분)만 해도 그런 차를 몇 대씩은 사줘도 될 만하기 때문이랍니다.
부러우십니까 ?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이 지역이 술과 도박, 사기 , 재산 분쟁 , 이혼 , 살인 , 강도사건으로 병들고 있다고 합니다. 범죄율이 4 배나 상승했답니다. 평일에도 살롱 급 술집은 8 시 전에 와야만 자리가 있을 정도로 호황이고 사기 도박단에 걸려 돈 날리고 자살하고
문중 땅 팔아먹고 쇠고랑 차고 유산분배 문제로 작년 설에는 큰 형이 막내 동생의 부인과 여조카 2 명을 엽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사벌에 돈 풀렸고 고덕에 돈이 풀리면 이 평택도 유흥과 소비로 흥청일 것입니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날파리들처럼 죽음의 늪을 향해 치닫게 될 것입니다. 문에 웅크리고 있는 죄에 가인처럼 당할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가치는 돈과 재물 , 건강과 지식이 주는 풍요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부부가 부부 세미나에 다녀와서는 대판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유인즉 부부 세미나 도중, 인도자가 부부들에게 이렇게 묻고 답하도록 했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과 또는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 아니다.' 참 묘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렵니까 ? 이에 이 부부가 답을 했는데, 남편은 '그렇다'라고 했는데, 부인은 '아니다'라고 답을 한 것입니다.
괜히 쓸데없는 가상의 질문을 해서 싸우지 마십시오 이와 유사한 질문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야나기하라'라는 우찌무라 간조 문하에서 성경을 배운 일본의 석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양심으로
동경 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퍼붓다가 교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다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동경 제국대학이 아닌 동경대학의 초대 총장을 맡아 큰 일을 한 분입니다. 어느 날, 한 신문 기자가 야나기하라 총장에게 "당신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야나기하라는 "나는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엉뚱한 대답을 들은 기자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야나기하라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우리 일본이라는 나라는 수만의 신들이 득실거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인 성경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의 보화이기에 이 사람이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걸까요? 무엇이 야나기하라를 이토록 감격시키는 것일까요? 무엇이 한 사람의 생을 뒤집어 놓는 것일까요? 어째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며 가슴을 치고, 뒤집어 지고, 모든 것을 버릴 정도가 되는 것일까요?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어째서 찬송을 불러도 가만 부르지 못하고 눈물이 찡한 것일까요?
기도를 해도 어떻게 저렇게 오래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늘 조롱을 당하면서도 왜 전도하러 다니는 것일까요?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바꾸어 놓은 것일까요? 인생이 죄의 짐에 눌려 있습니다. 평생토록 허덕입니다. 향락으로 잊으려고 애를 써봐도 그 때 뿐, 시시각각 문에 웅크리고 있는 죄라는 괴물은 우리의 심장을 물어 뜯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문에 웅크린 죄는 우리의 목덜미를 물고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굴복시켜 버리고 맙니다.
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됩니다. 복은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복음이요, 그 말씀 말씀이 복음의 소리요, 그 행동 하나 하나가 복음의 액션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죽어 마땅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끌려오며 이미 생을 포기했습니다.
문 앞에 웅크린 죄에게 목덜미를 물릴 채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살아났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정죄는 사탄이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 사탄의 정죄함에 꼼짝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아멘! 어디 그뿐인가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a)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나는 죽고 너는 살아라, 나는 질병의 채찍에 맞고 그 대신 너는 나음을 얻어라!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님은 세상에서 뒤쳐진 자들, 잘 살아보려고 애쓰다 애쓰다 힘이 딸려 뒤로 쳐진 자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거룩한 인간, 그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어둡고 음침한 뒷골목에 버려진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내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세상이이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났고 죄에게 목덜미를 물려 죽음의 짐을 지고 헐떡거리는 우리를 찾아 내시어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벅찬 감동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이들은 모두 삶이 변화됩니다. 삶이 뒤집어 집니다. 그 분만 생각해도 힘이 솟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마 11:28)
복음은 희열입니다! 감격적인 희열입니다.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복음은 공짜입니다! 복음은 면죄부입니다! 복음은 해방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희열의 감격입니다! 이 희열이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넘쳐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 바자회하는 교회를 기다리는 것 아닙니다. 주차장 넓은 교회를 기다리는 것 아닙니다. 경로 잔치하는 교회를 기다리는 것 아닙니다. 도서관 하는 교회를 기다리는 것 아닙니다.
죄에게 목덜미를 물리고 오늘도 죽음의 현장으로 한 발자욱 끌려가는 인생에게 자유를 주는 교회를 기다립니다. 죄의 짐을 짊어 지고 삶에 허덕이다 지쳐 쓰러진 인생들에게 죄의 짐을 벗겨주는 예수를 주는 교회를 기다립니다. 세상은 문에 웅크린 죄에게 물렸습니다. 그래서 세상 노래 들어봐요 맨 이별에 눈물에 슬픔에 고통의 노래입니다. 세상이 기다리는 교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회는 문에 웅크린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교회요 성도입니다.
죄에게 물린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친척과 친구와 자녀들이 문에 웅크린 죄에게 목덜미를 물려 지옥의 구덩이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교회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물질도 건강도 아닙니다. 물질은 세상에서 약삭빠르고 뼈 빠지게 일하면 얻습니다. 건강은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에서의 자유는 오직 교회만이 줄 수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자유를 얻으십시오 문에 웅크린 죄를 걷어 내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죄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