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칸토어의 방식은 무한소수를 이용한 것이다. 무한소수가 실수를 나타내므로, 무한소수를 직접 다룰 수는 없다. 따라서 유한소수를 무한히 늘어놓는 수열을 생각하고, 이 수열 자체를 하나의 수처럼 다루는 방식이다. 데데킨트의 방식처럼 집합을 수처럼 다루거나 칸토어의 방식처럼 수열을 수처럼 다루는 것은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게 보이지만, 여기에는 현대 수학의 철학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수와 유리수가 다른 점

이렇게 만들어진 실수는 유리수와는 다른 특징이 많다. 실수와 유리수 모두 무한히 많지만, 집합론의 관점에서는 무한한 정도가 다르다. 이를 농도라고 한다. 자연수, 정수, 유리수의 농도는 모두 같으나, 실수는 더 큰 농도를 갖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늘의 과학 [자연수 vs. 실수]편을 참조하라. 또, 유리수로 이루어진 수열이 어떤 값에 무한히 가까워진다고 해서 그 값 자체가 유리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실수로 이루어진 수열이 어떤 값에 무한히 가까워진다면 그 값은 반드시 실수가 된다. 이것은 실수의 모델인 수직선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성질을 완비성(completeness)이라 한다. 이것은 유리수와 실수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실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엄밀한 사고가 더 큰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수학이 발전했던 중국보다 유럽이 왜 미적분학을 먼저 발명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아마도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수학에 바탕을 둔 유럽의 수학이 계산 자체보다는 수의 성질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수가 유리수인지 무리수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이로부터 실수란 무엇인지, 실수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이런 생각이 극한 개념을 거쳐 미적분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소해 보이더라도 논리적으로 분류하고 엄밀하게 사고하는 것이 더 큰 아이디어를 창출해낸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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