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부 북아메리카
미국, 어떤 나라일까?
세계 193개국 중에서 우리와 가장 밀접하게 지내는 나라가 미국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까지도 재일교포가 가장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숫자가 3백만을 넘는다하니 해외동포의 규모로 보아도 이제는 미국이 가장 많은 숫자인 것 같다.
미국의 역사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기를 시작으로 볼 때 235년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10분의1도 안 되는 짧은 역사가 아닌가. 그런 나라가 확실하게 세계유일의 초강국이 된지 60여년 넘게 지속하고 있으며, 현 위세로 볼 때 향후 몇 수 십 년이 더 가도 순위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믿어진다. 짧은 역사로 최강국이 된 나라를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지내는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지구상에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이룬 모범 국으로 선진국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역사의 시작이 1776년(조선영조52년)이라고는 하나 그 이전의 행적을 살펴보면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서방세계에 알린(1492년) 콜럼버스가 있었고 그 대륙에는 이미 인디언이라는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620년 (조선광해군12년)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의 청교도와 네덜란드인 등 102명을 태우고 건너간 것을 첫 거주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대륙발견 이후 유럽 여러 나라들은 신대륙에 다투어 건너와 식민지를 개척했고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였다, 이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자주 충돌하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전쟁 후 네덜란드가 축출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권을 놓고 격돌 7년 전쟁 후 프랑스가 패하여 아메리카는 영국의 독점무대가 된다.
그 후 미국인들은 외국의 간섭 없는 “미국인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독립에 성공하였고, 그러나 산업혁명과 더불어 분열하기시작 미국은 또 남북대결 4년간의 처참한 남북전쟁에 돌입하였으며 결과는 북부의 승리로 끝난다.
미국이 짧은 기간에 최강국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신대륙에 이주한 개척정신과 독특한 정치제도(민주주의)가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영국에는 어떤 형태이든 아직도 왕을 모시고 있고 지구상에는 이와 유사한 나라들이 더 있으며 대다수의 나라들은 권력이 소수의 지배계층으로부터 나오는 상명하달식이나, 다수의 민중으로 부터 권력이 결집되는 하의상달식인 미국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성공하여 오늘날 최강국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중심제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경제를 함께 발전시키면서 여타의 신생독립국들도 민주주의와 대통령이라는 명칭을 도입하여 사용하고는 있으나 그들 대부분은 인간의 사악한 권력의 속성에 독재의 발톱을 숨겨놓고 흉내만 내는 위선적인 민주주의를 하는 낮은 단계의 수준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과정에 있는 나라 중에서 미국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답습 발전 하며 앞서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현재 미국 국토의 넓이는 한반도의 약43배(남한만의 약96배)가 넘는다. 러시아를 뺀 유럽 43개국의 전체면적보다도 1.6배가 더 크다. 인구도 3억1천만이 넘어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3위다. 유럽의 영국계가 미 국민의 주류를 이루고는 있겠으나 세계 각국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것이 미국이며, 이 나라가 최강국이라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군사, 경제, 문화, 교육, 우주과학, 첨단과학 등 어느 것 하나 세계 최고 아닌 것이 없다. 국방도 대다수의 나라들은 자국의 방어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미국은 세계 5대양을 누비는 항공모함과 대륙 어느 구석까지라도 무인폭격기를 출격하여 정확하게 타격하고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세계경제의 80%이상을 소유한 나라가 뭉쳐 개발도상 약소국을 도와주자는 경제기구가 G20이라고 하는 다시 말하면 잘 사는 20개의 국가다. 아시아에는 중국, 일본, 한국 3개국이 포함되는데 가장 늦게 가입한 우리나라가 일본, 중국보다도 먼저 정상회의 개최 의장국이 되었다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각종 국제스포츠경기대회를 치르게 될 때 유니폼을 비롯한 행사진행 공용어는 로마자 즉 영어이다. 영어만 구사하면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한 각국 대사나 외교부 직원이 되려면 능숙한 영어구사는 필수사항이다.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을 열거해보면 세계 100대학을 나열할 때 하버드대학과 MIT공과대학 등은 항상 1~2위의 자리에 있다. 우리 서울대학이 100위안에도 들까말까 할 정도인데 도대체 그이유가 무얼까? 우리학생들의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학의 재정자립도와 제도의 개방 교환교수 등 객관적인평가에 미흡하여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울대학을 떨어져도 하버드나 MIT를 들어갈 수 있고, 서울대학을 들어가도 미국의 일류대학을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기본실력의 바탕위에 봉사활동, 인간성, 장래의 비전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그들의 선발방식이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상류층 지도자들의 머릿속에는 어느 분야이든 항상 세계1등이어야 한다는 마인드가 철저하게 각인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미국은 먼 나라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라이자 최고로 소중한 우방이다. 지형 상으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가 더 가까운 이웃이겠지만 역사로 보면 이 강대국들은 우리를 무수히 괴롭혔던 적국들이었다. 중국에는 치욕스러운 공녀를 비롯한 조공을 바치며 사사건건 간섭을 받았고, 일본에게는 국토를 몽땅 짓밟히는 치욕의 역사 임진왜란과 36년 식민통치를 당했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짧은 기간에 놀라울 만큼 빠른 발전으로 그들과 경쟁국의 반열에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직 미국과 가까이하여 단기간에 많은 것을 배우고 부지런히 실천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말 고종황제는 유길준 홍영식을 비롯하여 서광범 서재필 등 젊은 청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30여 동안의 이민사를 돌아보면 서부 안창호, 중부 박용만, 동부 이승만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 이민 1기는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주 임무였으며 그 사실은 선교사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대통령직을 잠시 맡기도년 했으나 오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갔으며, 광복 후 김구보다 1주일 먼저 국내에 들어왔고 당시 미군정이 상해 임정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맥아더의 부하 하지중장이 이승만을 더 알아주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준 셈이다. 미국은 현재도 앞으로도 초강대국이며, 독특한 국가의 이념이 세계평화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실천하는 민주주의 실천 시범 국이다. 일본이나 프랑스처럼 우리 문화재를 대량으로 약탈해가지도 않았고, 대가없이 참전했던 6.25전쟁을 비롯하여 오히려 우리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바쳤던 나라다.
강대국들 틈새에서 좁은 면적의 국토를 가진 우리는 생존권보존을 위해 선진문화를 배우고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미국과의 끈끈한 우방을 유지해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어느 나라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미국민주주의를 익히고 실천해가고 있다. 골프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도 세계를 제패했고, 다문화 다민족정책도 답습해가고 있다. 우리의 우수한 인재들이 미국의 각 대학에 수석을 거의 독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그뿐인가 예술계도 한류바람이 거세계 불어 유럽으로 파리와 런던을 거쳐 금명간 미국 뉴욕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앞서가는 미국문화를 우리가 수용해야함은 이제 안 할 수도 없고 안해서도 안 되는 수준에 와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인재들을 유학 보냈고 현재 한국을 움직이는 시스템의 수뇌부에 다수가 포진되어 있으며 그들의 지식과 과학기술과 사고방식까지도 깊숙이 물들어있다.
혹자들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반미감정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으나 지금 세계는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고 글로벌시대다. 다문화 다민족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아닌가싶다.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이 다민족 다문화사회를 이루며 하나로 융합된 강력한 에너지를 창조해내는 선진민주주의가 아닌가? 그 엄청난 힘이 세계질서를 주도해나가고 있는지가 이미 60회갑을 넘겼으며 이 강한 리더십은 아무도 간섭할 수도 방해할 수도 없는 현실이자 미래일 것으로 믿는다.
독재자들이 일신상의 부귀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민주방식을 도용하여 위선적인 행동으로 반미감정을 부추기며,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몇몇 나라들 때문에 지구촌이 아직 시끄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앞날의 세계는 인권신장을 겸한 민주화가 반드시 성공하여 지구촌은 하나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이민사는 미 동부로 부터
고도 1만972m 시속 975km 그러나 속도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베링해협 알류샨열도 하늘을 지나고 있다. 내 몸은 지금 날짜변경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구름속이다. 구름덩이에 묻혀 우주를 날아가고 있는데 나만 가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 희소가치 때문에 별거 아닌 일로 대단한 뉴스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동쪽으로 갈 때는 날짜변경선을 넘으면 하루를 빼야하고 서쪽으로 여행할 때는 하루를 더한다고 초등학교 때 배워둔 상식이다.
도쿄에서 뉴욕까지 무려 1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기내식도 두 번이나 먹었다. 지구의 자전속도가 시속1,600km라고 하는데 내가 탄 여객기의 1.6배가 빠르다는 얘기 아닌가?
지구가 그렇게 빨리 도는데 내 몸은 왜 미동도 느낄 수가 없을까? 상상할 수 없이 큰 공간 텅 빈 우주공간이라서 느린 것인지 빠르게 나르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항공기의 커다란 뱃속에 담겨가는 내 작은 몸뚱이 하나 거대한 지구상에서는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 아무 느낌도 없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깜박 졸다가 눈을 떠보니 또 기내식이 배부되고 있었다. 남은거리 620km 일리 호수 상공을 나르고 있다. 국내항공 기내식들은 고급스럽고 먹을 만한데 AA항공기의 기내식은 부실하고 비위에 거슬려 먹기가 힘들었다.
우리역사 조선9대 성종23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 후로 1세기 정도 북미대륙은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인들에게 관심의 마당이었다. 모험과 항해술을 가진 자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미개척지의 대륙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가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게 되었을 것이다.
영국 헨리 8세의 가톨릭배척으로 종교의 자유에 공포를 느낀 영국의 Protestant 와 pilgrim Fathers 등이 1620(조선광해군12년)년 메이플라워호를 마련 102명을 태우고 66일간항해 하여 북미 플리머스에 도착 첫 정착을 시작했다. 대호 박 가이드의 해박한 역사의식에 미국역사는 물론 130여 년 전 우리 이민사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미국 이민사 동부는 유학생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서부는 인삼장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박 가이드는 이민사를 총 5기로 나누어 날마다 조금씩 설명해주고 있었다. 한국 이민사는 한국인이 쓰지 않았고 알렌,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이 썼다고 한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면서 우리와 미국의 공식교류가 시작된다. 미국 측 슈펠트와 조선 측 신헌, 김홍집이 만나 비준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5월 미국 전권공사 H.푸드가 부임했으며 6월에는 우리 측 사절단(전권대신 민영익 부관 홍영식, 수행원 유길준 서광범 서재필 무관 등)이 미국으로 간다.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육로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간다. 미국 21대 A. 아서 대통령을 만난다. 이들이 묵었던 10층짜리 호텔은 출입구에 회전문이 있었고 양반이 어찌 틈새로 들어갈 수 있느냐 버티기도 했고 식당에서는 비프스테이크가 나왔는데 덜 익고 피가 흐르는 날고기를 어찌 먹느냐고 끝내 먹지 않고 거부하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한 유길준은 고종이 맘먹고 보낸 장원급제한 인재로 국비 유학생이었다. 워싱턴과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95년 미국을 출발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역사, 지리, 산업, 정치, 풍속 등을 기록한 서유견문록을 국한문 혼용으로 써서 일본에서 출판하였으며 우리에게 서양을 알리는 첫 기록물이었다.
1883년 이후 우리나라에 자전거, 사진기 등 신문물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유입되었고 미국으로 민간인들 입국은 1902년 하와이로 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캘리코라는 상선을 타고 사탕수수농장 취업을 목적으로 1902~1905년까지 약 7천명이 하와이로 들어갔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로는 일본인들이 대거 11만 명 정도 들어갔고 중국인도 4만정도 였다 하니 지금 하와이에 일본인과 중국인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때부터 우리는 멕시코로 들어가게 되는데 유카탄반도로 1500명 정도 갔다한다.
우리 광복군들의 스토리는 선교사들이 잘 안다. 헐버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은 몸 바쳐 우리나라 독립을 도와준 영원한 은인이다. 그들은 미국에 우리 유학생들을 보냈거나 도와주었고 그들(이승만, 조병옥, 김활란, 임영신 등)은 훗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지는 인재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조병옥은 신혼살림을 차린 최초 유학생이었다. 이들의 신지식 취득은 장차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미 동부는 우리 유학생만의 인연이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심는 건국이념의 기초가 되는 큰 역할을 한 텃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뉴욕은 서울거리와 비교했을 때 낙후된 느낌이 들어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 이유를 들어본즉 1930년대에 건설한 도시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니 80년 전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심장 워싱턴 D.C
워싱턴D.C는 우리의 특별시 같은 성격으로 연방정부의 직속 특별구역이다. D.C의 의미는 District Columbus의 첫 약자로 워싱턴과 콜럼버스를 상징하는 말인 것 같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명성 때문인지 미국에는 지명 인명 등 워싱턴이란 명칭이 많다. 독립전쟁을 지휘하여 승리로 장식한 워싱턴 장군의 이름 조지 워싱턴을 상징하는 항공모함을 비롯 워싱턴 D.C에 있는 워싱턴기념비, 미 서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워싱턴 주, 맨해튼 섬에 있는 워싱턴광장, 펜실베니아 남서부 워싱턴군의 군소재지 그 외에 버지니아 출신 대법원판사 워싱턴의 조카를 비롯 법관 예술인 과학자 등 인명도 많다.
미 동부 투어의 시작은 워싱턴 D.C를 돌아보는 순서로 시작이 되었다.
인구 6백만의 워싱턴D.C는 뉴욕, 필라델피아에 이어 미국의 세 번째 수도이자 세계 정치의 지휘본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790년 국회의 동의로 지정되었고 1800년 완공되어 현재까지 아메리카 미합중국 연방의 수도로서 거주인구의 72%는 흑인이라고 한다.
도시 중심의 가로 세로(10마일×10마일) 그 안에 사람이 팔 벌리고 누워있는 형상으로 국회의사당, 백악관, 워싱턴기념비(오벨리스크), 제퍼슨기념관, 링컨기념관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백악관과 제퍼슨기념관사이에는 인공호수도 있고 백인들은 주로 도시주변에 살고 중심에는 흑인들 거주가 많다.
백악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에 제퍼슨 기념관이 서 있는 뜻은 너희들 정치 잘 하나보자 24시간 감시하는 뜻으로 세웠다하며, 링컨 기념관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쯤에는 킹 목사가 20만 명의 흑인이 운집한 청중 앞에서 연설하다 암살당한 장소(1963.8.28)라고 표시되어있었다.
이 도시에는 국회의사당 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하여 그런지 고층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고 백악관은 비록 후문이기는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여 기념사진을 찍어도 말리는 사람도 경호원도 보이지 않아 평범한 보통 건물 같은 분위기였다. 30년째 전쟁반대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할머니 한분의 천막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1달러씩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보고 다소 실망이었다. 17개중 자연사박물관 하나만 개방하였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강원도립 박물관, 자연사박물과, 목포해양자연사박물관 익산 보석박물관을 합친다면 별로 격차를 느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메트로폴리탄을 보지 못해 섭섭했지만 세계 3대박물관이라고 하는 말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에르미따쥐, 메트로폴리탄, 바티칸박물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등 순위를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나 싶다.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을 돌아본다. 미국 등 16개 민주우방국들이 유엔군으로 참전한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숫자가 37,645명이라고 한다. 그중 33,642(약90%)명이 미국군이었다. 숫자로만 보아도 이라크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것이다. 워싱턴D.C 외에도 미국 전역에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나 기념공원 등이 15곳 이상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우리 교민들이 그만큼 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는 소중한 우방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식으로 간단히 돌에 몇 글자 새겨서 세워놓은 기념비 정도가 아니라 같은 모양이나 비슷한 작품은 거의 없고 각각 그 모두가 독특한 설계와 예술성이 넘치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보는 이들에게 가슴 찡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세계최대의 관공서 건물인 펜타곤(Pentagon)은 미국의 육, 해, 공 3군을 포괄하는 국방성 5각형 5층 건물로서 총 수용인원이 2만 5천명이란다.
1941~43년에 건립하였고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군에 위치해있으며 백악관에서 지하 고속철로 연결되었다는 말도 있다. 2001년 9월 11일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남서쪽 건물이 붕괴되고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
천둥신이 살았다는 나이아가라
불덩이 솟아오르며
대서양으로 아침이 열리네
펜실베니아 푸른 숲 길
달린다 서스케아나 강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초록 물결
내 달리는 하이웨이
나이아가라로
나이아가라로 가고 있다
후련한 이국의 탈출
퀄리티 호텔에서 새벽 4시 조식을 끝내고 Tour Line Bus에 승차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간다. 동북향으로 6시간 넘게 걸린다하여 이른 새벽 일어나 배부된 도시락을 싸들고 출발하여 중간 휴게소에서 점심을 때우며 간 것이다.
나이아가라 투어는 가는 날은 미국 쪽 염소섬 바람의 동굴과 헬기투어 제트 보트 타기가 끝나고 캐나다 쪽으로 건너가 1박하면서 I Max 영화관람, 스카이라인 전망탑, 안개속의 숙녀호(유람선) 타보고 점심식사 후 토론토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나이아가라라는 명칭은 “우뢰와 같이 장엄한 강”이라는 뜻의 인디안 말이다. 일리호수의 물이 온타리오 호수로 떨어지면서 폭포를 연출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이 되고 있다. 염소섬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두 개의 큰 폭포가 만들어지는데 미국쪽(동)이 면사포폭포 캐나다쪽(서)을 말발굽폭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쪽 바람의 동굴을 통과 폭포 밑으로 접근하여 계단을 오르며 안개비를 뒤집어쓰고 사진도 찍고 거대한 물줄기를 가장가까이 감상하는 코스인데 이과수 폭포를 흉내 낸 것 같지만 돈 내고 보기에는 아까웠다. 헬기투어는 너무 비싸 포기했고 제트보트를 탔는데 우리 돈 15만 원 가량 내고 15Km정도를 1시간가량 탄다. 온타리오 호수 상류에서 타고 나이아가라폭포 쪽으로 갔다 다시 내려오는데 나이아가라 무지개다리 밑을 지나 더 올라가면 좌우 양옆에 발전소가 있고 물굽이가 세찬 여울목에서 보트를 일부러 쳐 박았다 나왔다를 5~6번한다. 물을 뒤집어쓰며 비명을 지른다. 비옷을 입었다 해도 아랫도리는 다 젖는다. 미리 알았다면 누가 그걸 탔겠는가? 위험천만한 바보천치 같은 짓이라고 나는 투덜거렸다. 비싼 돈쓰고 고생하는 인간들의 속성 시키는 자와 즐기는 자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타기 전 가이드 왈 절대 안전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으며 그 속셈이 얄미웠다.
I Max 영화 관람은 30분정도 상영하는데 50불이다. 내용은 폭포에 대한 전설을 드라마틱한 영상물로 제작하였다. 아득한 옛날 옛적 천둥신이 살았고 신은 점차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세월과 역사의 흐름을 따라 변화해오는 과정을 실감나고 감동스럽게 보여준다.
안개속의 그녀 미모의 야성미 넘치는 싱싱한 젊은 여성, 전설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천년 후 백인이 나타나는데 프랑스의 탐험가 카바리 대장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마지막장면으로 “시간은 전설을 만들고 인간은 기적을 만든다.” 라는 멘트가 나오면서 막을 내린다.
인디언들은 나이아가라를 차지하기위한 쟁탈전이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1896년 전쟁이 끝났고, 7년 후 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
스카이라인 전망대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나이아가라는 캐나다 쪽 경관이 훨씬 좋다. 하루 평균 3천2백여 명이 세계각지에서 모여들고 있단다. 규모나 물의 량으로 보면 이과수나 빅토리아 폭포를 넘지 못 하겠지만 세계 3대 폭포 중 돈벌이가 가장 잘되는 관광지임이 분명하다. 폭포가 가장 잘 보이는 쉐라톤 호텔 옆 두 번째로 잘 보이는 전망 좋은 크라운 프라자 호텔 310호에 투숙했다.
4일째 아침 일찍 일어나 룸메이트와 함께 조깅 겸 폭포를 가까이 보러가자고 하였다. 왕복 1시간정도 가볍게 뛰었다. 큰 폭포 밑까지 가서 사진 여러 장도 찍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는데 10층 건물 전망 좋은 곳 폭포를 내려다보며 옆으로는 아침 햇살을 받아가며 최고전망위치에서 조식을 마쳤다.
대서양
아침 햇살로
폭포의 잠을 깨우는 소리
나이아가라 나이아가라
크라운 스카이 레스토랑
상쾌한 아침을 먹는데
솟아오르는 태양으로
폭포의 에너지를 모아
연료저장고에 듬뿍 담아
나이아가라 나이아 가라
열량을 가슴 가득 채워
세월을 잡아두고 나 여기
나이 십년 더 팔고 가세
나이아가라 나이아 가라
또 십년 뚝 잘라 이십년
폭포 밑으로 던져보세
물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끼룩 끼룩 갈매기들
날갯짓 사인을 보내주고
나이아가라 나이아 가라
토론토에서 오타와로
나이아가라 폭포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토론토로 가는 길은 우측으로 온타리오 호수를 끼고 도는 듯 경치가 아주 좋아 상쾌한 기분이었다. 3시간 정도를 달려 토론토에 도착하게 되는데 인구 6백만으로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 토론토는 대중교통으로 전차가 다니는 것이 특이한 풍경이었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큰 국토를 자랑하는 캐나다는 인구가 3천2백만 명이라 하니 그래서 이민을 가기 좋은 나라인 것 같다. 193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국어로 쓰고 있으며 연방의회, 양원제로 영국국왕이 국가원수로 총리가 정부 수반인데 총리를 영국 왕이 임명한다고 한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인도,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 무려 세계 59개국의 식민지를 통치했던 영국은 파워도 대단했지만 매너 또한 얼마나 신사적이었으면 아직도 서로 돕고 사는지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일본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고 막대한 문화재를 약탈 해다가 지하저장고에 감춰두고 아직도 독도가 어쩌고 하는걸 보면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토론토는 미국의 독립 전쟁시 영국국왕의 지지 편에 섰던 사람들이 대거 토론토로 밀려오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었다고 한다. 우리 교민도 11만명에 육박할 정도였으나 최근 역 이민현상이 일어나 9만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는 자원의 부국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단풍나무만 팔아도 3200만 인구가 350년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라 한다. 토론토의 자랑 C.N타워는 높이가 553m로 지평선과 수평선을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한 때 세계 제일 높은 타워였으나 두바이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나서인지 별인기가 없다하며 우리도 올라보기를 포기하였다. 해마다 시 인구가 줄어드는데 요지의 아파트나 빌딩들 빈곳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몬트리얼 보고 퀘벡까지
토론토 Quality Hotel에서 새벽 5시 출발 오타와 거쳐 몬트리얼로 간다.
토론토의 새벽을 달린다. 대서양이 있는 동쪽으로 오타와에서 몬트리얼로 가는 고속도로의 질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먼동이 터오는 동쪽 하늘이 서서히 열리며 어둠을 걷어낸다. 12차선이 넘는 대단히 넓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2시간 정도를 가다가 휴게소에서 김밥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웠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온타리오 호수가 끝날만한 지점에서 호수는 강으로 바뀐다. 세인트로렌스 강이 시작된다. 온타리오 호수가 강으로 강폭이 좁아지면서 비경이 나타난다. 천섬이다.
천섬유람
미동도 없는 침묵
깊이 잠든 강상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세인트로렌스 강
1068 사이 물길 타고
천섬 유람 둥둥 뜬다
흘러온 천년 세월
잠시 묶어놓고
유유자적 사랑의 섬
캐슬로 너를 불러
포근히 입맞춤하며
속세 망각해보고 싶다
호수가 강으로 이름을 바꾸며 나타나는 비경 천섬은 크고 작은 섬이 1068개라 하며 개미집처럼 다닥다닥 그림 같은 집들은 재벌 부자들의 별장이라 한다. 유람선을 타고 100개정도의 섬을 돌아보고 나오게 된다. 신선놀음에 들어간 것이다. 사진들을 그리 많이 찍어 어디에 쓰려고 호들갑인가. 마음이 들떠 즐거워하는 표정들 가득 싣고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시내로 접어든다. 오타와 강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국회의사당 좌우로 빅토리아여왕과 엘리자베스여왕 상이 조화롭게 서있다. 그 옆에는 초대 총독 존A 맥도널드 상도 서 있다. 총독관저 리도 홀로 들어가는 입구 양옆 잔디 숲길은 각국의 정상들이 방문 기념식수로 가득하다. 우리나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수목도 보였다.
35년 전이다. 금메달 소식이 날아온 제21회 몬 트리얼 올림픽(1976)에서 한국인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올림픽사상 첫 금메달을 조국의 품에 안겨주었다. 온 국민들이 얼마나 열광 했던가 그로부터 12년 후 우리도 제24회 서울 올림픽(1988)을 개최하였고 세계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초비약적인 스포츠 강국이 되었다.
몬 트리얼은 캐나다 두 번째 큰 항구도시로 가장 큰 섬 몽레알 섬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오타와 강과 세인트로렌스 강이 만나는 경치 좋은 지점에 위치해있다.
아스라이 건너다보이는 몬 트리얼 경기장은 핀란드 헬싱키 경기장을 보았을 때처럼 낡아보였다. 시 인구는 1백만 정도 노트르담 성당이 있고 대규모 은행과 철도회사 보험회사가 있는 도시이며 국제민간항공기 본부가 있다.
몬 트리얼에서 1박 후 퀘벡으로 이동 오후에는 미국 보스턴까지 장거리 버스길이 대기하고 있다.
최고 역사의 도시 퀘벡
퀘벡시는 몬 트리얼에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120만의 역사 깊은 도시로 올드퀘벡 성안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대다수가 프랑스계 혈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올드퀘벡으로 이동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별장이 있는 몽모란 시 폭포관람을 한다. 여왕님의 산책코스인 폭포를 돌아보고 샤또프락뜨낙 호텔과 다름 광장을 돌아보기로 한다. 퀘벡시는 인디언말로 좁아진다는 뜻이다. 강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대서양으로 연결된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지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올 때는 입구가 되는 지역이다.
퀘벡의 로렌시아 고원은 최초 지구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어 자연 상태 보존 연구 대상으로 아주 적합하여 지질학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샤또프롱트 호텔은 1500실인데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만나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합의한 장소로 유명하다. 이 호텔은 프롱트나크 백작이 1790년에 짓기 시작하여 26년 걸려 완공했는데 모든 자재를 프랑스에서 배로 실어다가 지었다한다. 이 도시는 여우목도리가 유명한데 우리 돈 35만 원 정도로 살 수 있고 한국에 오면 4백만 원까지 비싼 물건이지만 세관을 통과할 수 없어 절대로 사실생각은 말라고 한다.
또한 이 도시는 겨울에 얼음 축제가 두 달(1~2월)간 열리는데 꼭 다시 한 번 오시란다. 두 달 쓰고 버리는 얼음 궁전 만드는데 우리 돈 200억 원의 비용이 소요되고 대부분 조각가 경비 등으로 지출 된다. 아이스호텔에는 침낭 이용하여 아이스침대사용 1박에 300불이란다. 개인적으로 퀘벡은 꼭 한번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라 하지만 언제 또 오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퀘벡시 투어를 오전에 마치고 점심은 중간 휴게소에서 샐러드 뷔페로 먹고 오후 2시경 보스턴으로 향한다.
대학도시 보스턴으로
보스턴으로 가며
사방이 너른들
푸른 하늘 초록 잔디
잎도 가지도 무성 자라는
키 작은 진초록 나무들
유월의 살랑바람
초록 물결 타고 노네
세상이 다 녹색뿐인데
가도 가도 더 가도
야산 야산 또 야산
보스턴으로 가고 있다
보스턴은 미국 200년 역사를 잘 간직한 문화의 중심지로 1630년 8백 명의 영국 청교도가 보스턴 항에 이주해 오면서 청교도 사회를 형성한 항구도시다. 보스턴은 진보와 보수가 함께 어우러져 공존의 길을 가는 독특한 문화 도시이며 세계 4대 마라톤대회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 서윤복(1947), 함기용(1950), 이봉주(2001) 선수들이 우승한 깊은 인연이 있기도 하다.
세계적인 항구도시 보스턴은 독립전쟁 후 조선업과 무역업이 발전하여 중요 수입원이 되었으며, 하버드 MIT 보스턴대학 등 대학 도시로도 알려져 있고 명문대가 있는 미국 최고의 대학도시로 인구 약80만 정도다.
퇴직하여 노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바쁘다고 하바드 대학생이란 농담이 있는데 진짜 하버드 대학은 세계최고의 명문으로 1636년 설립자 존 하버드 (청교도 목사)의 이름에서 대학 명칭이 붙여진 것 같다. 19세기 초에 신학-법과-의과대학이 개설되어 초기에는 교회의 후원을 받았으나 200년 정도 지나면서 점차 교회와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찰스 강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곳 대학 주변은 온통 학생들의 숙소라고 한다.
장서 200만권이상을 소지하고 있다는 하버드대학 도서관도 세계최고라 하며 타이타닉 호에 자식을 잃은 한 독지가가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하며 입구의 계단은 졸업식 끝날 때 공중에 모자를 던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MIT는 외국인 유학생 수로 인도가 1위인데 인도출신 1학년 학생이 본국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을 정도였으나 MIT에 입학하였고, 퀸메리(2) 선박건조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회사는 1조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해냈느냐 물으니까 우리나라 거북선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중심축을 생각해냈으며 그 원리는 배가 뒤집어져도 다시 원위치로 복귀한다는 간단한 원리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18명의 유학생을 보내 후원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은 한국의 기업가 김우중 씨의 사진이 1층 전시실에 게시되어있었다. 한양대학교 출신 한국인 최재혁 교수는 나노기술연구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시며 장차 노벨상 후보감이라고 했다.
세계 109개의 유수기업이 거액을 기부하며 미래의 부가가치가 높은 신상품 개발 아이템을 연구 의뢰하여 보통 2~30년 후에 실용화 된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
보스턴 투어 끝나고 점심 먹고 마지막 코스 뉴욕으로 간다.
날씨가 흐리더니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둘째 날 나이아가라로 갈 때 서스케아나 강 따라 끝없이 이어지던 길 펜실베니아 녹색들 야산을 달리던 생각이 떠오른다.
오후 3시 27분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소낙비가 사정없이 내리 퍼붓는다. 버스 유리창 타고 내리는 빗줄기가 유난히 시원한 느낌을 준다. 뉴욕 외각에 있는 쇼핑몰을 먼저 들렸다가 숙소로 가서 저녁 먹고 뉴욕 야경옵션 40불짜리 마치면 그날 하루는 끝나는 일정이었다.
먼저 쇼핑몰이다. 이름 하여 우드버리 쇼핑몰인데 우리식으로 아울렛 할인 매장인 것 같다. 30불을 내고 들어간다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남 하는 대로 따라갔다. 입장료가 아니라 수첩 같은 할인쿠폰 묶음을 사는 것이었다. 가방 신발 옷 등 벼라 별 물건들을 사면 10~30%의 할인혜택을 볼 수 있단다. 명품 가방을 150불 정도의 값으로 사면 국내에 와서 4~50만 원 짜리가 된다나? 자세히 살펴보니 보통 시중물건보다 약간 좋기는 한 것 같은데 서울 지하철에서 가끔 깜짝 파는 2~3만 원짜리 가방하고 비교해볼 때 내 시각으로는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가방, 신발, 옷, 시계 등 자세히 살펴보고 다녔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지는 않았다. 무슨 놈의 물건이 그리 비싼지 내 상식으로는 웃기는 짓이다. 매장 구경 값으로 30불 내버린 셈이다. 버려도 되는 할인쿠폰은 아까워서 들고 왔다.
숙소에 들러 저녁 먹고 뉴욕 야경을 보러 가는데 40불이란다. 아마 운전기사 팁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허드슨 강가에서 맨해튼 야경 빌딩숲을 건너다보며 사진을 찍고 내일 올라보게 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가리키는 등 나도 사진 몇 장 찍어보았지만 작품이 되지 못했다. 다시 차에 올라 링컨터널(2500m)을 통과하여 브로드웨이로 들어선다. 내일 낮에 다시 가게 되지만 오늘밤 타임스스퀘어의 밤거리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밤 12시가 가까워져도 인산인해의 거리는 발 부칠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 그들은 새벽 2~3시까지도 밀려다닌다하며 요소요소에는 경찰관들도 섞여있었다. 맨해튼 섬은 인간 공해로 몸살을 앓고 짓밟혀 신음 중인 것 같다.
맨해튼의 활력, 그 숨소리
맨해튼은 뉴욕시를 이루는 5개구(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테이튼 아일랜드)중 하나일 뿐인데 마치 뉴욕 자체를 상징 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빌딩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맨해튼은 인디언말로 바위섬이란 뜻이며 면적은 여의도의 2.5배정도에 인구 150만이고 지반이 온통 암석층이어서 고층빌딩 세우는 조건으로 좋은 장소란다.
자연경관도 동으로 이스트 강 서쪽으로는 허드슨 강이 흐르며 앞뒤로 적당한 지형이 사나운 해풍을 카버도 해주는 해상과 육상교통로가 잘 조화된 항구도시 천혜의 조건을 구비한 곳이다.
맨해튼 섬은 1524년 이태리 항해사 베라자노가 최초의 발견자이며 20세기 초에 푸른 하늘을 장식하는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함께 들어왔고 세계 경재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마지막 일정 뉴욕투어가 시작되는 아침이다. 부두로 나가 유람선을 타기위해 줄을 선다.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보고 오는 코스란다. 점심 후 엠파이어 102층 빌딩, 월가, 차이나타운, 센트럴파크, 타임스퀘어, UN본부, 브로드웨이뮤지컬 관람의 순서로 끝내고 이튿날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공항으로 이동하게 된다.
유람선 타는 부두에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은 하였으나 담당자들의 출근시간이 되지 않아 대기 중 이곳저곳 살피는데 어느새 중국인들이 엄청나게 밀려든다. 세계 어느 관광지를 가나 중국인과 한국인들 그리고 일본인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유람선 운영회사도 중국인이라 하며 중국인들이 상권을 잡고 있다한다.
맨해튼에 살면서 연봉 1천 만 불 이상 소득을 내는 사람을 뉴요커라고 한다. 섬의 동에서 서로 길게 중심지를 관통하는 길을 브로드웨이라 하며 주변에는 극장이(1925년 가장 많았을 때 80개) 널려있고 사교계의 명성으로 불야성의 거리라 했으며, 미국 연극계의 실질적 동의어로 인식될 만큼 연예활동도 세계 제일이라 한다. 뮤지컬은 시간이 안 되어 보지 못했는데 맘마미아 어쩌고 해서 나는 국내의 극장에서 보았다고 했더니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본 것은 그 맛과 차원이 다르다나? 뭐 생각의 차이겠지만?
3층으로 된 유람선이 떴다. 사방이 빌딩으로 둘러있다지만 우측 맨해튼 쪽이 단연 고층빌딩 숲으로 사진 찍는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1시간정도로 자유여신상까지 왕복 유람선 타는 동안 그놈의 사진기들? 사람에 가려 안보이니까 의자로 올라서서 찍으려하면 승조원들이 내려오라고 야단을 치는 등 사진기 공해는 어디가다 보기 싫은 장면?
“나만 가지고 있으면 됐지”
“무슨 놈의 사진기가 그리 많은지?” 하는 생각(?) 나를 비롯한 인간들은 참 이기적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가 선물했다고 한다. 파리의 센 강에서도 보았지만 크기가 훨씬 작은 축소판이었다. 프랑스는 미국이 독립 전쟁 할 때 적극 도와준 나라다.
점심을 먹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올라간다. 빌딩을 가는데 식당 근처에서 가까워 도보로 간다. 메이플라워호 타고 최초로 건너간 102명을 상징하기위해 102층(현재448m)으로 1931년에 건설했다 하며 빌딩에 오르는 방법은 두 코스가 있었다. 그냥 줄서서 올라가는 일반코스와 “스카이 라이드” 라고 2층에서 멀티비전을 보고 별도의 통로로 들어가는 옵션 추가30불의 방법이 있는데 일반은 시간을 많이 기다리고 옵션을 선택하면 영화(내용은 헬기를 타고 뉴욕 맨해튼 섬의 빌딩숲 주변을 실재 돌아보는 느낌)도 보고 직통연결통로로 바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은근히 옵션으로 유도하기위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일반 줄로 입장한 사람들이 더 빨리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날은 사람이 덜 밀리는 날이었다지만 1시간이상 줄서서 대기한 것 같다. 무슨 놈의 사람들이 그리 밀려드는지 정말 날마다 돈을 쓸어 담는 일이 바빠 죽을 지경인 것 같았다. 일단 80층까지 올라가서 또다시 86층까지 가고 거기서 15불을 더 내야 102층까지 가게 된다. 내생에 가장 높은 빌딩을 올라본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그들이 찍은 20불짜리 기념사진을 한 장 샀다.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월가, 차이나타운, 센트럴파크, 어제 밤에 보았던 타임스퀘어, 등을 보고 UN본부로 간다.
토요일인데 반기문 사무총장이 있을까? 약속은 했습니다. 틀림없이 반겨주실 것입니다. 입구에서 검문검색이 까다로우니까 이해하시고요. 가이드는 계속 바람을 넣는다. 반기문 사무총장님은 입구 문에서 반드시 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뿐만이 아니고 세계인을 모두 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거의 다 도착할 무렵 가이드 왈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반기문 총장은 세계인을 문에서 반겨주라고 “반기문” 그래서 UN본부 들어서는 문을 “반기는문”이라 한다네. 날 때부터 하늘에서 유엔사무총장 하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나.
미,동부 여행을 마치고
이번여행에서 특이사항 몇 가지는 도쿄 나리따 공항에서 불안초조 했던 점과 뉴욕 두 가이드의 대조적인 활동상과 그들의 전문성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의 긴장상태는 내 처지가 싱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홀로 여행을 해야만 하는 처지라서 여행사에 미리 부탁을 해둔다. 나 같은 처지의 룸메이트가 나타나면 묶어주라는 주문이다. 이번 미 동부 캐나다도 수개월 전 부터 부탁하여 성사된 것이다.
인천공항에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전에 나갔더니 한 사람도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A블럭 23번 테이블로 오라한다. 여행계약서에 사인하고 안내서와 항공기 탑승권을 주면서 KE항공으로 짐 부치고 입장하라한다. 수행 가이드가 없고 연합이니 도쿄 가서 AA항공 갈아타면 된다고 했다. 약도를 그려가며 세세한 설명과 안내를 받았으나 기억이 잘 안 되었고 현지에 가보니 설명들이 잘 맞지도 않았다.
나리타공항에 내려 남들 가는대로 따라 나가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보았자 아무도 아는 이도 기다려 주는 이도 없는데? 막연한 생각 그래서 약도를 꺼내보아도 잘 맞지 않고 순간 앞이 캄캄 일본말도 모르고? 해서 걷던 길을 멈추고 우측방향으로 가서 티켓을 보여주며 트랜스퍼 한마디하고 손짓몸짓을 했더니 다른 길 저쪽으로 가라한다.
1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2터미널로 가야하는 이유는 KE항공사와 AA항공사가 떨어져있기에 그랬다. 우리항공으로 뉴욕 직항을 타면 그런 일이 없는데 요금을 좀 아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게이트 73번을 찾아서 AA항공사를 확인하고 남은 시간 공항 내에서 아이쇼핑을 했다.
약 13시간 후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하여 짐 찾고 나가보니 하나둘 10여명이 모여지기 시작했고 소형버스에 태워져 첫날 숙소 레디슨 호텔로 간다.
미국에 거주한지 30년 넘었다는 40대 초반의 가이드 박은 우리의 미국 이민사로 부터 말머리를 시작하여 역사로 접근 하였다. 미국 투어의 시작은 서부가 아니라 동부에서 시작된다고 했고, 이민사도 동부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본인은 IQ가 두 자리 수 91이라고 많은 양해를 바란다는 말로 연막을 친다.
한국의 이민사를 총 5기로 나누고 1기 2기를 우선 들려드린다며 한 말 조국의 어려웠던 역사를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어 유익했다. 두 번째 가이드 G씨는 뉴욕에 오래 거주한 것 같아 보였다. 구석구석 볼거리에 대한 정보가 풍부한 것 같았다. 무슨 지명이나 인명이 나오면 그에 대한 풍자와 우스갯소리를 만들어 공백을 잘도 매 꾸어 나갔다.
뉴욕은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니 서로 언어가 달라 안 통해 답답하면 욕을 해도 모르니까 그래서 새로 모이는 사람이 욕을 한다는 뜻으로 뉴욕이라 한다든가, 경상도 사람들은 욕구가 강해서 미국에 오면 뉴우요꾸 요꾸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질문을 해보았다. 미국 50개 주에서 가장 큰 주가 알라스카지요? 다음에는 그곳을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죠? 했더니 아니라고 텍사스라고 한다. 나는 얼른 휴대폰 백과사전을 꺼내 확인해보았다. 알라스카는 텍사스의 두 배 면적이다. 본토에서야 텍사스가 제일 넓고 텍사스는 프랑스보다 더 크니까, 가이드 박은 지적(知的) 가이드, 마지막 G가이드는 단기실용가이드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특이 사항은 관광객이 잡탕이라는 점이다. 여러 여행사에서 두세 명씩 모였고, 현지 교포들 나이아가라만 보러 온 사람, 서부를 마치고 2차로 합류하는 등 가지가지였다. 그렇게 네댓 군데서 모여 50명이 넘는 인원이 빠졌다 채웠다 를 반복하니까 우리는 물론이고 가이드 또한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으레 마지막 날 밤에는 종마티를 열고 자기소개와 소감 등을 발표하는 것이 통상관례인데 할 수도 없었고, 할 생각도 전혀 없는 분위기였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투어는 없다고 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고 했다. 머리 좋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니면 감히 상상도 못 할일이라고 했다. 운전기사도 외국인을 쓰면 정확히 출퇴근 시간을 지키기 때문에 새벽시간출발이나 야경투어를 할 수 없으나 우리 기사는 30년 정도 뉴욕거주 한인교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 여행사들이 너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그들은 한 푼이라도 아껴 싸게 모시기 위함이라지만 나는 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받을 금액 다 받고 빼먹을 만큼 재주껏 챙기는 그 비상한 머리도 한국인이 아니면 못할 것이다. 그 비밀은 옵션에 있다. 행여 우리는 그것을 따지고 밝히려 해서는 안 된다. 모른척 눈감아줘야 한다. 우리가 뿌리고 다니는 달러는 곧 재투자이며 그들의 긴요한 활동비가 될 것이고, 그렇게 해외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힘은 우리의 국력으로 다시 돌아와 세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130년 역사로 천 년이 넘는 히스패닉의 역사를 추월해 버렸으며 이제 우리 위에는 유대인밖에 없다고 한다. -201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