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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띠알로 띠알로]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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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알로 띠알로]
정현옥 시집 / 미학시선 / 도서출판 가림토(2012.03.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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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알로 띠알로
정현옥
망초 꽃 총총한 빈터엔 한때
침을 총알처럼 튀기며
띠알로 띠알로를 하던 아재가 살았다
안방 고구마퉁가리에 달려 있던 팔 남매 따라
안 간다며 버티다 서울로 진격한 아재
무거운 발길이 돌아보던 집은 사라졌다
치매가 새치보다 먼저 들이닥치자
전쟁터에서 받은 훈장 번득이며 도망쳐 온 아재
내 집은 내가 지킨다
아비 모시러 온 자식들에게 막대 총을 쏜다
집도 없는 마당에서 킥킥대는 망초 꽃들
침 튀기는 총소리 빗발치던 빈터는
기억을 억류하는 아제의 영토
띠알로 띠알로 고향을 지키는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건재한 노병처럼
꽃 지고 잎 진 패전의 가을에도
막대 총을 겨눈다
나무의자
정현옥
쥐똥나무 단풍나무 대추나무 감나무가
줄지어 바람을 풀어 놓는다
새들이 하늘을 물고 내려와
나무들 속에서 소리로 키워낸다
단풍나무 아래
머리칼처럼 작은 햇살을 만지는 노인들
쥐똥나무 하얀꽃 성글어진 틈새로
아이들 웃음소리 쏟아진다
의자 되기 전 저 나무
산과 산 팽팽하게 떠받들고
흔들리면서 하늘을 키웠을 것이다
길과 길 사이, 아파트 숲 속으로
나무의자가 하늘을 내리고
어느 날 내 등에서는 푸른 수액이 돌았다
원에 관한 소묘
정현옥
두 여자가 콩을 심는다
서로에게 묻어준다
조심스레 둥글어지는 봄
때구루루 굴러
열아흐레 기울어진 달은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다
온 몸에 돋은 순이 배겨
여기저기서 숨소리 터지고
둥둥 더 높이 떠오르는 달은
달을 낳아
너무 환한 밤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누르면 두 개로 갈라지는 콩
껍데기만 맺힌 유실수有實樹엔
콩이 업ㅅ다는 소문만 나풀거렸다
흉년에 든 책임을 지고
마을을 떠난 두 여자만이 콩을 까는 밤
나눠 먹은 한쪽과 한 폭이 겹치기 쉽다
만삭으로 부풀지만
상상의 달은 뒤늦게 갈라진다
카프카의 집
정현옥
탄력은 돌아오지 않아
주름 제거수술도 보톡스도 먹히지 않지만
탱탱했던 호시절이 있었지
꺾거나 잠복하거나 선택은 하나
선호하는 청순가련형에 맞춰
낯 두꺼운 복면을 벗겨낸다
감을 깎는다
한 꺼풀 한 꺼풀 속살 드러낸 때처럼
단내를 풍기고 싶었는지 몰라
주목하지 말고 외면하지도 마
감쪽같이 걷어내는 박피술에
폐기처분 기다리는 피질들
보기 좋은 곳감이 더 비싸다고
단념은 노화의 지름길이라 한다
발전을 거듭하는 가면무도회가 준비 되는 곳
예리하게 말해주는 칼의 집이 있다
안면몰수가 필요한 이유와 함께
변신의 절대적인 사유가 거기 있다
수직
정현옥
달도 별도 없는 밤이면
아이는 학교에 간다
반겨주는 텅 빈 운동장에서
수업은 시작된다
과목은 홀로 걷기
절뚝절뚝
쳐다보는 아이는 없고
웃는 아이도 없는 10시
집에서만 노는 아이는
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11시처럼 걸어서
11시 너머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네를 미는 아이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때서야 팽팽해진다
비로소 열리는 길이
12시를 가리킨다
품
정현옥
꾹꾹 눌러담은 된장을 싼다
붉은 감잎에 장아찌를 싼다
방금 짜온 참기름과
멍석에 널어놓은 마른고추도 쓸어 담는다
투둑 모과 떨어지는 소리
담 너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평상에 앉아 노는 햇살이며
발치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눈빛이며
배 밭에 까치소리도 담는다
열어 놓은 현관문 앞에서
늙은 보자기엔 싸놓은 것도 많은데
펼쳐놓은 가슴을 닫지 않는다
가을처럼 저무는 나를 담고
놓아 주지 않는 어머니
조침문
정현옥
달빛에 가시를 박고
탱자나무 꽃들이 핀다
술집 색시를 태우고 왔던
자전거 바퀴는 바람이 탱탱했다
아부지의 등 뒤에 숨긴 요염한 웃음은
탱자나무 억센 가시처럼
어메의 가슴을 찔렀다
자전거 바퀴살이
달빛을 게워내고 있었지만
어메의 눈길은 달빛을 닫았고
문마저 걸어 잠궜다
이후부터 밤은 길어져
탱자나무 가시로 성근 문틈을 꿰메곤 했는데
아부지의 등에 박힌 웃음으로
한 땀 한 땀 긴 밤을 더듬던 길은
꽃길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문을 열자
바람 다 빠진 아부지
꽃 진 탱자나무처럼 기다리고 있었고
나무에 기댄 녹슨 자전거는 길을 묻고 있었다
법고
정현옥
어머닌 체기가 있을 때마다
어깨를 훑어내려 손끝을 땄던가
가슴을 두드리던 주먹의 힘도
가슴팍에 든 탐을 없애진 못했는지
어머닌 이불홑청 둘둘 말아 개울로 가고
머릿수선을 벗고 방망이를 두둘겼다
짓누르던 응어리 때 구정물로 빠져나가고
엇나가던 방망이소리가
지붕을 두드리고 산을 흔들었다
덕숭산 수덕사 북소리 따라
장삼자락이 너울거린다
살도 내장도 핏물까지 다 내주고
껍질이 되어서야 살려낸 소리 하나
공명을 일구는 북채 두 개
질긴 살을 두드린다
더는 쌓아둘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묵음들이 풀어지듯
니르바나의 노을이 지고 있다
별들을 찾아서
정현옥
동굴 같은 입안으로 국수를 밀어 넣다가
하늘을 본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모깃불에 피어오르던
마당가 생풀들의 영혼
나와 동생은 멍석에 앉아 국수를 먹었다
막내동생 오목한 입속으로 빨려들던 국수가락 끝
후루룩 별들이 따라 들까봐 고개를 젖히곤 했다
다랑이 논에 물대는 소리 마당까지 흐르고
해질녘 삶아 건진 국수가 불어터질 때쯤
논물에 찰랑찰랑 별을 담구고
돌아오시던 아버지
어느 입으로 빨려 들었을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하늘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변차선
정현옥
어미를 요양원에 버리고 왔다고
친척들이 모여 성토를 한다
첫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둘째는 울기만 했다
마땅한 명분이 없었으므로
잘난 자식들 졸지에 돌상놈이 되었다
패륜이 된 10년
몇몇 어른은 떠나시고
남은 분들은 요양원으로 가셨다
요즈음 세상이 바뀌어 집보다 편하다고
법도와 실리 사이에서 요양원을 선택했다
요즘 요양원은 효성이 지극하다고
이미 자자한 소문이 따라간
허공의 집
정현옥
빠져 나갈 수 없는 올들을 엮어놓은 채
어디로 가는지 하루가 간다
고래심줄 같다던 인연들은
매듭짓지도 못한 채
씨줄 날줄 풀린 낡은 껍질
서쪽 하늘에 내걸었다
스타킹 올을 뜯어 먹는 굳은살은
이빨을 세워 날刀을 만들고 있었다
비가 새는 집을 열어놓고
거미는 어느 집에서 노는지
추적의 실마리를 풀리지 않는데
굴곡
정현옥
물의 파장이 이어진다
일어서는 물결을 따라 떠오르는 새는
발자국이 길어진다
저 굴곡을 쫓아가면
어느 새 저만치서 노을을 만나는데
머물 곳은 보이지 않는다
유모차를 앞세운 할머니가
무거운 어깨를 지고 간다
길을 다 삼킨 언덕까지
휜 다리가 더 휘어진 길을 붙잡고 간다
사라진 파문처럼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
쌓이는 파지처럼
구겨진 기다림 사이로 길을 만들어,
언덕 위를 흐르는 강
물결지는 주름위로 날아간 종이는
한 척의 배가 되든 편지가 되든
어쨌든 도착할 것이다
점묘화
정현옥
고기들이 수면의 햇살을 털자
강물에 발을 담그는 그리메를 타고
구불텅 어스름이 내렸다
투망 사이로 새버린 하루
물비늘에서 별이 되어 반짝였는데
아이들은 물속에서 고기 흉내를 냈다
물속에서 별이 피어오르고
강물은 저들끼리 바위를 돌다 뒷걸음치며
상류의 소식들을 모래톱에 새겼는데
달맞이꽃처럼 피어나는
이이들 웃음으로
늦도록 강은 반짝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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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한 번도 빨지 않은 그대로
함께 너덜거리던 옷
고골리의 훔친 외투를
오늘 비로소 벗어 던졌다
잘가라 희망아
2012년 봄 정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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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옥 詩集 [띠알로 띠알로]
[ 해설 ] -
마음의 토속土俗과 풍물風物의 창조
유종인 시인•문학평론가
종종거리던 두발에
논두렁의 쥐구멍만 메워져 있다
— <밥술 벌기> 중
1. 시속時俗이라는 마음의 구릉
시류時流라는 말은 유동적이다. 바야흐로 이색의 시절이 우리 앞에 놀고 있다. 때 時가 갈아가고 있다는 말일 터인데, 그 특색이 이만저만할 것이 아니라서, 여느(어느) 시대와의 변별점을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하겠다. 그런 말 끝에 ‘요즘에는 하여튼’ 하는 말로 작금을 개탄하고 마음에 든 옛시절과의 두동진 부분을 은연중 그리워하는 말들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류時流는, 정착되지 않고 끝없이 부유하는, 그 행락객들로 북적이는 유원지처럼 분방하고 늙은이들의 논밭처럼 고적하며 도심 군상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밤의 활기처럼 발산하며 자기 모양새를 갖추는 ‘여기 오늘의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저속함으로 불릴 수도 있으나, 어떤 가치평가의 가늠자 말로 되새길 필요는 없는, 당대의 흘러넘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난장이라는 것.
시류는 그야말로 갖가지 모양새다. 궂긴 게 있고 화창한 것도 있으며, 음란한 것과 맑은 것, 음전하고 웅숭깊은 것도 있으며, 경박하여 오히려 가벼이 넘나들이 번지는 유행도 있다. 더 헤아린다는 것이 무색할 지경으로 번다하다. 그런 중에, 정현옥의 시류는, 시속이 급격하지 않은, 그리하여 아직 놓칠 수 없어, 농놀고 있는, 농놀면서 풀어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시속時俗/時速을품어 묵은 듯 새뜻하다. 범박하게 말해서, 유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그녀의 시적 기억은, 단순한 반추反芻의 인상만을 추수하는 서정의 형식만은 아니다. 회고라는 낭만의 무뢰배들로 우리 시는 언제나 현재의 속악한 세태를 질타했다. 아니 질타하는 듯 보이나, 그 질타를 가장한 고루한 서정의 어법 속에서 상투화돼 왔다.
옛것이 융승깊고 그럴 듯한 것이면 그 맥락을 오늘의 정수박이에다 서늘한 죽비를 놓는 겨를이 없을 수 없다.
버선 속에서 나온 엄마의 발은 푸르딩딩하게 부어 있었다
문틈 칼바람에 윗목호롱불이 까불대고
둥근 왕겨베개에 누워 호롱불 그을음이 바람 타고 노는 걸 바라본다
벗어던진 옷들이 문지방에 엎디어 바람을 막는다
얼음 배긴 발이 콩 자루 속에서 자륵자륵 앓는 소리를 낸다
노랗게 살진 콩들에 얼음발이 벌건 비명을 쏟는다
낡은 광목자루 속에서 투덜대는 콩들의 소리가 울퉁불퉁하다
언 발을 콩 자루 속에 넣으면 거짓말처럼 낫는다는
재 너머 할매 콩알 같은 누런 이빨이 뱉는 속설은
풀 먹인 이불 속에서 마른 콩깎지처럼 부스럭댄다
바람을 문풍지가 박수 치며 응원하는 겨울밤
노곤하게 잠이 익어 갔다
-<얼음 콩>부분
속설俗說은 토속土俗이 지닌 관대한 너른 입말들이다. 속설은, 지역 공동체가 공유하는 다양한 생태적 문화적 효용의 담론談論의 가능성이다. 거기엔 논리적 구체가 결핍돼 있다는 말로 폄훼되는 패설悖說의 혐의를 지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익명화된 경험과 경박한 논리로 구조화할 수 없는 감각의 직관이 상통하는 패설悖說로 더 오롯하다. ‘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더라’는 말은 믿지 않다가도 믿을 수밖에 없는 모두의 관심 화두가 되기 십상이고, ‘항간巷間에 떠도는’ 이런 류의 말들은 다양한 테마와 요긴한 섹션들로 우리들을 위무하며 민간속설의 힘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떠도는 컨텐츠의 입말이다. ‘언 발을 콩자루 속에 넣으면 거짓말처럼 낫는다는’ 속설은 그대로 토속의 시구詩句로 자연스럽게 재탄생한다. 그것은, ‘거짓말처럼’이란 재래적 수사修辭에 의해 오히려 더 불가해한 효험으로 신비의 뉘앙스를 품어왔다. ‘거짓말’이란 말과 ‘거짓말처럼’은 그 간극이 넓고 깊다. 속설은, 그 비과학적 비논리적 언술의 맥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해함과 그 규명되지 않는 신비성神秘性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언술 전략이다. 그리하여, ‘거짓말처럼’은 시적 수사가 아니라 시적 맥락이며, 속설이 가진 토속의 힘을 간명하게 규정하는 무위無爲의 힘에 대한 믿음의 원천인 셈이다. 그것은, 소박하게나마 종교적 차원으로 속설의 서사敍事를 끌어올리는 핵심어, 논리로 규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을 드러내는 속설의 요체, 즉 가장 자연스러운 민간의 항간경巷間經인 것이다. 비유적 수사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이 속설은, 비논리적 비과학적 현상 이해의 틀을 신앙적 관점에서 보게 하는 묘한 전환의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논리의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토속적 신앙의 단계이면서도 오히려 비종교非宗敎적이다. 콩자루 속에 언 발을 넣는 행위는,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신비한 토속土俗적 방편으로 자연스럽다. ‘언 발을 콩 자루 속에 넣는’ 행위는 일반적으로는 비현성에 속한다. 그런데 이걸 현실로 바꿔내는 매개는 바로 속설의 민간요법과 신비한 효과체험의 끌림이다. 이 끌림의 서사敍事가 바로 정현옥에게 있어 도시의 논리적 속성보다는 시골농촌의 공동체적 속성, 즉 토속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본원적인 견인牽引으로 다가온다. 그 한가운데는 폭넓은 우주적 심성으로 비유되는 모성母性이 자리잡는다. 이런 화자가 보기에 지극한 모성도 현실적인 문제, 즉 배우자의 외도에 의해 ‘탱자나무 억센 가시처럼/ 어메의 가슴을 할퀴고 찔’(<조침문> 부분)러대는 상처로 드러나고, 이에 모성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눈길은 달빛을 닫고/문마저 걸어 잠’그는 자폐적인 성향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그 모든 무례를 덮는 천상의 잉여물剩餘物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무량無量한 우주에도 또 다른 배우자의 짝인 우주가 있다면, 그 한 우주의 외도와 불륜에 꽃차례의 미리내 같은 미소만을 띄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 피붙이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사랑의 잉여, 아니 당신 자신에게도 하나도 잉여 될 수 없는 사랑의 전폭적인 굽어봄이 그려진다.
꾹꾹 눌러담은 된장을 싼다
붉은 감잎에 장아찌를 싼다
방금 짜온 참기름과
멍석에 널어놓은 마른고추도 쓸어 담는다
투둑 모과 떨어지는 소리
담 너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
평상에 앉아 노는 햇살이며
발치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눈빛이며
배 밭에 까치소리도 담는다
열어 놓은 현관문 앞에서
늙은 보자기엔 싸놓은 것도 많은데
펼쳐놓은 가슴을 닫지 않는다
가을처럼 저무는 나를 담고
놓아 주지 않는 어머니
-<품> 전문
모성이라는 가잘빌 데 없는 사랑은, 골백번 무엇이든 내주고도 끝내 ‘쓸어 담’아서까지 건네주어야 하는, 당신에게는 어떠한 남김도 없는, 당신 몫의 잉여剩餘의 소진이거나 탕진을 全景化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나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 당신의 여백은, 자못 당신을 더 깊은 울림으로 열어놓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의 ‘소리’와 ‘눈빛’으로 바림된 시적 여운餘韻인 것이다. 강퍅한 작금의 풍속의 입장에선 눈독이 더 깊어지는 이 담백하고 유현한 세계는 곧 그대로 토속土俗의 복권이면서 탈속이고, 재우쳐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통속通俗의 이미저리(imagery)들이다. 2연에서 보여지는 자연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소리들과 빛깔들은 그 자체로 모성母性의 사물화된 이미지들이며 화자의 마음에 바림된 풍경의 풍속화인 셈이다. 이것은 결코 어머니가 자연에서 나온 것을 바리바리 싸줌과 함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은연중에 펼쳐내는 소박한 운치韻致로, 결국 어머니와 자연이 하나의 ‘품’을 늡늡하게 열어놓고 있음을 본다. 화자의 눈길이, 어머니가 싸주는 물질의 마음이 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품을 보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현상계가 열어주는 평화의 운치를 같이 꿰고 있음을 일별하게 된다. 마음, 즉 모성이라는 ‘품’에서 싸여져 건네지는 물질의 다양성은 사랑이라는 빗물질적 속성에 의해 얼마든지 더 다양하게 수용될 수 있는 자연의 잉여물인 셈이다. 자연의, 즉 토속적 잉여물이나 풍물이 그 자체로 개성적 존재와 기능을 우선으로 발현하고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넓고 웅승깊은 빗물질적 품(성)에 의해 여러 자연의 잉여물들이 모성의 잉여들로 수습되고 대체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품이다.
2. 토속土俗의 견인과 풍속風俗의 창조
현재, 이 세속이라는 시공간은 그 어디든 갈등과 분열의 조짐들을 사약처럼 뿌려놓은 곳일 수 있다. 그런 시풍時風들은 화자의 일정한 눈길 속에 분열을 견디며 걷는 국면으로 조명된다. 가령,
노래방에서 마지막으로 달맞이꽃을 부르고나니
밤은 이미 저물고
벼틀바틀 십리길 걸어오면서 흥얼거린다는 게
애인이 옛날 애인을 위해 부르던 노래라니
달 없이 달맞이 가는 흰소리 같은 시간이네
-<화이트홀> 부분
위의 시편은 화자가 일찍이 <조침문>에서 아버지의 외도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과는 대비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시풍은 바뀌었다. 시인과 화자를 동일시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애정의 풍속도는 분명 그 선친(아버지)과는 다른 맥락을 낳고 있다. 여기에 조응되지 않는 관계의 결락缺落이 자리한다. 이제 화자가 보는 모든 관계의 의미는 단순히 외도外道의 유무나 도덕성의 문제로만 귀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존재의 소통과 마음의 위로라는 존재의 조건에 대한 지향으로 넓혀지기에 이른다. 노래방기계의 도움을 받아 부른 ‘달맞이꽃’은 어쩌면 가상의 음률이다. 그러니까, 그 사연 있는 노래를 부르더라도 우리는 잠시 떠올릴 뿐 결국 공허해지게 이른다. 사람이 부르는 것 같지만, 결국 기계가, 프로그램이, 자본이 부르는 서정인 셈이다. 화이트홀(white hole)의 세계는 무조건적인 발산과 발악은 가능해질지언정 그 이상의 넘나들이는 요원한 일방의 세계다. 그냥 소비되는 노래일 뿐이다. 왜 울림의 공명共鳴은 없는 것일까. 즉 노래방에서 나온 화자는 왠지 허우룩한 밤길을 걸으며 ‘애인이 옛날 애인을 위해 부르던 노래를 막연히 떠올리게 된다. 왜 하필 그런 무반주의 흥얼거림이 주목되는 것일까. 그것은 치정의 노래가 아니라, 위로와 관심이 깃든 육성肉聲아런 사라지지 않는 모성母性을 이끌어내 살아가는 토속의 사랑을 거느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밤길 저편에 있는 넘나들이가 가능한 따뜻한 ‘블랙홀(black hole)'의 세계로서의 자연과 모성인 것이다. 출구를 가지고 있는 블랙홀로서의 모성적 공간을 정현옥이 버리지 못하고 견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나가버린 것으로서의 풍속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의 한 귀퉁이와 마음의 변방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는 토속土俗은 작금 그녀가 살아가게 하는 존재의 생기生氣인 셈이다.
귀탱이 한쪽 비바람에 내어주고도 꿋꿋하게 서있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똥통을 가로지른 발 디딤이 간들거려 온몸을 후들거리게도 했었다
정월 대보름 윷판을 빠져나간 어매는 통시에서 동생을 낳았다 핏물 범벅 흙 범벅인 갓난쟁이 광목치마로 싸안고 나온 통시에는 초가지붕에서 걷어낸 썩은 새끼줄이 널부러져 있었다 할배는 큰걸 보고 난 후에 썩은 새끼줄로 뒤를 싹싹 문질렀다
가마니때기 문에는 부고장이 꽂혀 있기도 했었는데, 그런 날은 여지없이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어둠만 살짝 내려도 동생을 문 앞에 세워두어야만 했다
-<통시> 부분
토속의 공간엔 ‘통시’라고 하는 재래의 뒷간이 이채롭게 자리를 틀고 있다. 요즘말로 하면 복합문화공간에 가잘빌 수 있겠다. 단순히 대소변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급한 ‘어매’가 ‘핏물 범벅 흙 범벅’의 동생을 낳아 ‘광목치마’에 싸안고 나온 분만소이기도 하며, 마을의 궂긴 일이 생기면 ‘부고장’이 ‘가마니때기 문’에 꽂히는 전별이 닿는 비상 연락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종요로운 곳이 대문간도 아니고 통시라는 뒷간 화장실인 것이다. 단순히 화장실의 기능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그런 기능들은 어디에서 기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똥’에서 번져 나온 생래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도시적 분별심은 똥오줌이 오염원에 불과하지만 시골에서는 똥오줌은 모든 숨탄것들을 살려내는, 거름의 전단계인 셈이다. 생명력의 자양분인 똥오줌들이 발효를 위해 독기를 걸러내는 곳은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럽다. 다른 무언가로 전환되는 순환의 생기가 감도는 곳이다. 똥이 똥이 아니고 오줌이 오줌이 아닌 곳, 그곳은 고정된 형태形態가 아닌 무형無形의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웅숭깊은 자연 곡간인 셈이다. 거기서 새로운 똥과 오줌을 누고, 다급한 아이를 낳고, 궂긴 소식이 바로 전달될 수 있게 부고장訃告狀이 가마떼기 문에 꽂힌다. 그것은 통시가 갖는 흉凶이 아니라 길吉이며 누구든 넘나들 수 있게 열어놓은 맘이 거느린 몸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귀신도 기웃거리는 곳이지만 때로 헛기침 한 번이면 내외의 분별이 오롯해지며 통시 앞의 ‘복숭아나무 열매가 먼저 얼굴을 붉히곤’하는 정겨움이 미만 彌漫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토속의 정서는 유년의 먼 기억에서부터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기억, 가장 최근의 현재적 삶의 체험이 녹아든 기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개진된다. 요즘의 도시적 시속時俗과는 현격한 거리를 둔 토속에서부터 누구나가 경험하거나 그 가능성이 있는 현재의 도시적 풍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드러난다. 주로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들로부터 삼투된 토속성은 그것이 현재적 삶의 결손된 가치를 대안代案하는 형식을 보이는 반면에, 현재적 삶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시속時俗들은 세태世態라는 형식으로 비판적 분위기를 곁들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미를 요양원에 버리고 왔다고
친척들이 모여 성토를 한다
첫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둘째는 울기만 했다
마땅한 명분이 없었으므로
잘난 자식들 졸지에 돌상놈이 되었다
패륜이 된 10년
몇몇 어른은 떠나시고
남은 분들은 요양원으로 갔다
요즈음 세상이 바뀌어 집보다 편하다고
법도와 실리 사이에서 요양원을 선택했다
요즘 요양원은 효성이 지극하다고
이미 자자한 소문을 따라간
-<가변차선> 전문
그야말로 세속도시에 사는 우리들의 풍속도라 할 만한 이 시는, 우리의 전통윤리가 어떻게 토속土俗에서 세속世俗적 가치로 급격하게 와해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법도와 실리’ 사이에서 현실적인 선택이 가해지는 작금의 현실이 갖는 아이러니를 비유적으로 적확하게 예시한다. ‘요즘 요양원은 효성이 지극’한 문명의 자식으로 활유화하는 대목은 그 희화화를 넘어 어딘가 씁쓸한 노경老境을 보여주는데, 그 ‘가변可變’의 노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자한 소문’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정현옥이 바라보는 작금의 세태에 대한 풍물風物의 속성, 그 한 켜를 일별하게 된다. 그것은 곧 도농都農을 포함해 우리네 삶의 생기生氣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화자의 의식과도 일정부분 관련을 맺는다. 얼마 전 ‘패륜悖倫’이 얼마 후에는 ‘법도와 실리’의 갈등 끝에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바뀌는 시속을 그녀는 단죄할 수 없다. 그것은 단죄의 속성이 아닌 그저 새로운 풍물風物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풍물은 새로운 가치일 따름이다. 과거의 혹은 잔존하는 현재의 시각으로 단죄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선택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새로운 풍물과 세태는 가치의 확장이라는 보다 열린 시각을 요구한다. 새로운 완장을 찬, 아니 새로운 가능성과 현실논리를 두루 꿰찬 현실은, 시인의 기억 속에서 고정 불변의 온전한 토속土俗과는 다른 윤리와 적응논리를 부려놓는다.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거대한 담론이나 사회적 이슈에 못 박혀 있지 않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체감되는 여러 소소한 문제들로 부각된다.
주름 제거술도 보톡스도 먹히지 않지만
탱탱했던 호시절이 있었지
깎거나 잠복하거나 선택은 하나
선호하는 청순가련형에 맞춰
낯 두꺼운 복면을 벗겨낸다
……(중략)……
감쪽같이 걷어내는 박피술에
폐기처분 기다리는 피질들
……(중략)……
발전을 거듭하는 가면무도회가 준비 되는 곳
예리하게 말해주는 칼의 집이 있다
안면몰수가 필요한 이유와 함께
변신의 절대적인 사유가 거기 있다
- <카프카의 칼> 부분
피부 ‘박피술’과 ‘안면몰수’ 사이에는 아이러니가 개입된다. 젊음을 구가하는 세태는 보기에 따라서 절실하다. 그 본능적인 욕망을 위해서는 ‘박피술’로 대변되는 최신 미용 수술에 대한 불가피한 믿음과 과감한 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더불어 그걸 통해 젊고 아름다워진 얼굴을 보일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잠재돼 있다. 그러나 그런 박피술에 대한 위험을 무릅쓴 감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면몰수’라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화자는 일갈한다. 몸과 마음의 불일치를 통해서만이 여성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태, 그런 풍속에는 분명 현대인들의 보편적 갈등의 구조가 개재돼 있다. 일시적인 마음의 몰수를 통한 외적 아름다움의 확보는, 토속적 미의식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전통적인 미의식만을 대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태풍속의 보편적 자아의 목소리로 말한다. ‘가면무도회’ 라고 ‘절대적인 사유’가 거기에 있다고 회유한다. 풍속의 칼날은 은근하면서도 날카롭게 그 풍속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벤다. 여기에 어떤 윤리적 잣대나 전통적 미의식의 강제가 최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풍속은 그 자체로 당대적 삶의 자연스런 속성이기에 미풍양속이라는 도덕적 규범과는 별개의 실상實像으로 바라보게 된다. 가치판단이나 선택은 그 다음에 따라온다. 도래한 삶의 진경眞景들을 어떤 일방의 잣대로 폄훼하지만 않는 것, 오히려 당대적 보편의 자아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화자의 용기는 오히려 진솔한 풍속을 그리는데 일조한다.
시공간을 달리하는 모든 시속時俗들은 그 속에 사람을 품고 있다. 그것이 토속적인 패턴이든 세속도시의 풍속적 현상이든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병들고 또 죽어간다. 시간적으로 먼 거리의 토속적 삶의 기억과 또 아주 가까운 혹은 작금의 시간 속 풍속들은 서로 별개의 외딴 몸짓들만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의식과 기억 속에서 다양한 시속時俗들은 점멸을 거듭하며 여전히 생사生死를 반복한다. 서로 갈마들었다가 이내 갈등을 재연하고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가 이내 마음의 진정이 다시 반대편의 시속時俗으로 기울기도 한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기억들, 소위 ‘왕년에~’로 시작하는 모든 애틋하거나 쓸쓸한, 아득한 기억의 소산들은 현재를 문제 삼기도 하고 현재의 의미를 추인하기도 한다.
불쏘시개로 타오르는 샛길 노래방
……(중략)……
엉덩이를 문지르는 어느 놈의 아랫도리에
노래가 꼬여
모니터의 문장은 더욱 빨라지더라나
세종대왕은 근엄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배추이파리 같은 푸른 행렬은 이어져서
테이블에 올라 스스로를 벗기는 그녀
……(중략)……
목마른 마이크는 길어지고
꼬리를 흔드는 줄은 더 엉기는데
사그라질 때를 아는 여자였다지
-<불꽃놀이> 부분
어디까지가 미풍양속의 시속이고 어디까지가 퇴폐의 풍속인지, 그것을 가려야 하는 게 그녀의 시적 결단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는 일의 속절없음과 살아가야 하는 당위의 가치들을 다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인에게는 개성적인 수사修辭의 체위나 독특한 문법文法보다는 지극한 삶의 품(성)을 어떻게 유지해 가느냐가 더 갈급해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샛길 노래방인지 노래방의 샛길(탈선)인지가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오히려 그런 현실의 풍속을 거부하지 않고 늠연히 응시할 수 있는 보다 유연한 심성과 객관적 시각이 더 중요해 보인다. ‘세종대왕의 빳빳한 행렬에/테이블에 올라 스스로를 벗기는 그녀’들의 풍속을 시의 품으로 받아들이는 것, 퇴폐냐 관용적 풍속이냐로 양분하여 분별하지 않고 읽어내는 것, 여기에 그녀의 시적 생장점生長點이 있다. 가치 이전의 관심으로 보아내는 당대 현실의 풍속風俗은 시인을 키웠던 토속土俗적 성장과정과 대척적인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걸 거부하지 않더라도, 이제 시인은 자신을 키웠던 토속의 경험과 잔존의 기억들을 보다 근원적인 정신의 질료나 매질로 삼아야 하는 시기에 도달해가고 있어 보인다. 추억과 기억의 복고주의復古主義로 토속土俗의 세계를 다루기에는 생기生氣의 파장이 일천하고 당대와 미래를 헤쳐갈 시적 변전變轉의 추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현옥이 애써 오롯하게 마음의 구릉을 일으켜 펼쳐 보인 습습하고 절실한 토속의 세계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의 풍경’만을 예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인의 어머니가, 아니 시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끝없이 내리사랑으로 전해준 우주적 모성母性과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풍속적 초상肖像을 깨닫는데 먼저 받쳐져야 한다. 그것은 애틋한 그리움의 원천으로써만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 살아갈 모든 날들의 ‘잊혀지지 품성의 유연성’으로서의 토속성土俗性을 현재화하고 내면화 하는데 있다. 갱신이 되지 않는 토속은 고물古物의 회고담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모든 시대의 다양한 시속들은 하나의 시속이고, 그 시속의 연장선상에 현재의 삶은 얹혀져 있다. 넘나들이로 ‘그때’와 ‘지금’이 서로 양가성兩價性,(ambiva-lence)을 가지고 손겪이하듯 갈마들고 변주해내지 않으면 예전의 시속時俗은 시르죽고 말 것이다. 정현옥에게 옛 토속의 정서가 완연하고 중요한 것은 현재의 풍속을 단순히 비판하고 복고적 공동체의 아우라와 모성의 지극함만을 추수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더 종요로운 것은 공동체적 아우라의 정서와 모성의 지극함이 현재의 풍속과 어떤 경로를 통해 갈등하고 융합融合하는 시적 활로活路를 부려내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아니면 소멸의 벼룻길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토속을 시적 화수분으로, 판도라의 상자로 원용하고 리모델링하는 구원투수가 되어야 한다. 선발 라인업들이 다양한 구종球種의 시적 패러다임을 보이며 화려하게 승부하고 또 패배해가는 사이에, 시인은 오롯하게 그녀를 있게 한 토속의 구종을 다양한 구질球質로 분절分節하고 또 추슬러내는 오기와 오지랖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순수와 혼탁의 한가운데, 우리는 혼돈을 하나의 정체성처럼 받아들이며 풍속을 열어나가고 있다.
동굴 같은 입안으로 국수를 밀어 넣다가
하늘을 본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모깃불에 피어오르던
마당가 생풀들의 영혼
나와 동생은 멍석에 앉아 국수를 먹었다
막내 동생 오목한 입속으로 빨려들던 국수가락 끝
후루룩 별들이 따라 들까봐 고개를 젖히곤 했다
다랑이 논에 물대는 소리 마당까지 흐르고
해질녘 삶아 건진 국수가 불어터질 때쯤
논물에 찰랑찰랑 별을 담구고
돌아오시던 아버지
어느 입으로 빨려 들었을까
하늘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별을 찾아서> 전문
아마 쉽게 읽힐 수는 있어도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생풀들의 영혼’이 흔들어 지어내는 생사와 소멸의 아릿하고 청아한 이 시속時俗은 눈물빛으로 이미 ‘별’을 일구어낸 아가雅歌다. 여기엔 ‘동굴 같은 입안으로 국수를 밀어 넣’는 허기진 현재의 시간과 ‘막내동생 오목한 입속으로 빨려들던 국수가락 끝/ 후루룩 별이 따라 들까봐 고개를 젖히던’ 동화적인 토속의 시간이 서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엄존하는 아버지, 세상의 한버팀목인 아버지가 ‘논물에 찰랑찰랑 별을 담구고’ 오는 어둑함이 있다. 그 엄존의 대상인 아버지조차 국숫발처럼 빨아들이는, 그러나 ‘어느 입으로 빨려 들’어 갔을까 뒤미처 바라보는 우멍한 눈빛의 외경畏敬이 있다. 살았던 토속의 시간과 살아가는 풍속의 시간이 한 하늘의 별을 궁구하고 있는 것. 이것이 정현옥의 시속에서는 하나의 궁극적인 시속의 연대, 임계臨界가 사라진 눈물빛 서정의 완숙으로 돌올해진다.
아련한 기억 속의 토속을 현재적 삶의 풍속과 함께 진작하는 것은 그녀의 시가 지향하는 한 모토일 수가 있다. 적대적인 분별심과 경쟁의 구도에 내몰린 도시적 풍속의 만연과 위악들은 그녀가 눈썰미 좋게 발굴한 또 다른 완미한 풍속 안에서 완화되고 치유돼야 마땅하다. 그것은 토속의 창조적 수혈인 동시에 새로운 풍속의 창조라는 화두를 동시적으로 깨쳐나가는 시업일 것이다. ‘염소가 마루 위에서/ 주인을 내려다보’는 자연은, 그것이 낡지 않은 천혜의 풍속으로 속악해진 세속을 맑게 품어나가는 재야在野의 기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그녀의 시들이 품는 오래된 전위前衛의 기풍임은 당연하다.
쫄깃쫄깃한 산닭이 산다는 집
수염이 수풀 같은 사내
염소가 먹다 남긴 배추를 씻어
김장을 한다
산닭은 산 채로 두고
염소 이빨자국이 안주다
산과 마주 앉아 대작을 했던가
너 몇 잔 마셨냐
벌겋게 단풍보고 묻기도 하는데
소백산 골짜기 산닭이 사는 집에는
염소가 마루 위에서
주인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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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정현옥의 시류는, 시속이 급격하지 않은, 그리하여 아직 놓칠 수 없어, 농놀고 있는, 농놀면서 풀어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시속時俗/時速을 품어 묵은 듯 새뜻하다. 범박하게 말해서, 유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그녀의 시적 기억은, 단순한 반추反芻의 인상만을 추수하는 서정의 형식만은 아니다. 회고라는 낭만의 무뢰배들로 우리 시는 언제나 현재의 속악한 세태를 질타했다. 아니 질타하는 듯 보이나, 그 질타를 가장한 고루한 서정의 어법 속에서 상투화돼 왔다. 옛것이 융숭깊고 그럴 듯한 것이면 그 맥락을 오늘의 정수박이에다 서늘한 죽비를 놓는 겨를이 없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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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옥 시인∥
∙계간 『시와 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발전을 거듭하는 가면무도회가 준비 되는 곳 / 예리하게 말해주는 칼의 집이 있다 / 안면몰수가 필요한 이유와 함께 변신의 절대적인 사유가 거기 있다 ― <카프카의 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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