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의 차 위에, 그리고 구석진 바닥으로 모여 있는 노란 먼지를 손에 묻혀 보고서야 송화(松花)가루인 것을 알았다. 아미산 기슭에 자리잡은 아파트이니 송화가 날려 올 거리이다. 靑松(경북)을 떠나 온 후로 얼마 만에 송화가루를 묻혀 보는가. 어느새 시구절처럼 송화가루날리는 윤사월, 문설주에 기대선 소녀적으로 되돌아간다.
벽촌인 청송은 지명대로 사철 푸른 소나무가 으뜸이다. 특히 봄에는 울창한 솔숲사이로 진달래나 산수유가 꽃을 피우면, 소나무는 더욱 청정한 빛을 띠었다. 이사 와서 처음 맞는 봄이 경이로웠다. 새로 사귄 동무네는 대대로 이 곳에서 사는 집안이었다. 나는 도시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약간 우대를 받으며 자주 그 집에 들락거렸다. 봄이 무르익으면 동무의 할머니 제삿날이 있었다. 산골마을의 봄은 푸성귀만 흔할 뿐이었는데, 동무네 집은 더욱 가난한 살림이었다. 밥상에는 늘 보리밥이 올랐고 가족들의 옷이면 살림살이도 시장에서 구입한 게 드물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찌든 궁핍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청빈한 느낌이었다.
대구에서 명덕초등학교를 다녔기에, 가난 때문에 세상을 울렸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영화의 어느 장면엔가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촬영에도 참여했었다. 그때 철부지의 간접체험으로도 가난은 엄청난 슬픔이고 무서운 것이라 짐작했다. 영화의 주인공 집이나 동무네가 다같이 가난한 형편인데도 '이윤복'의 상황은 어쩐지 칙칙한 유화 같은 이미지로 무겁게 기억되고, 동무네는 맑은 수채화처럼 산뜻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건 아마 사철 푸르게 배경으로 자리한 소나무의 영향이었지 싶다.
제사 전날이면 동무를 따라 앞산의 솔숲으로 갔다. 송화가루를 털기 위해 광목천을 넓게 펴서 맞잡고 소나무를 올려다보면, 싸아한 솔내음에 절로 기분이 좋았다. 동무 오빠가 장대로 소나무를 칠 때마다 가루가 자욱하게 날리며 우리들 머리 위에, 펼쳐든 베위에 노랗게 내려앉았다. 노란 가루에 둘러싸였던 환상적인 경험이 있어 동무네의 간소한 제사 준비가 서글퍼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그루에서 송화가루를 털어 모아서는 놋양푼에 담았다.
안방의 윗목에 걸려 있던 다식판이 내려지고. 저 연장으로 무엇을 할까 늘 궁금했던 나는, 호기심을 꼴깍 삼키며 다가 앉았다. 다식판에는 완자문양·국화무늬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반죽한 송화가루를 모양 틀에다 꼭꼭 눌러 담은 후 나무판을 위로 쏙 올리면, 노란 국화송이 같은 다식이 만들어 졌다. 두어 개를 얻어 들고 집으로 오면서 손바닥을 살며시 오므려 냄새를 몇 번이나 맡았다. 내가 먹어본 과자나 음식에는 없던 낯선 향이 풍겼다.
이듬해부터 동무네는 봄 제삿날이 다가 와도 송화다식마저 만들지 못했다. 어쩌다 한 번씩 동무 어머니가 행주치마로 다식판을 닦기만 하는 것을 봤다.
늘 누르스름한 베옷에 옷의 일부 같은 행부치마를 두르고 있던 동무어머니는 화동댁이라 불렀다. 시집오기 전에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택호로 삼는 풍습이었으니, 분명 어느 꽃 동네에서 시집오셨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노래 속의 동네가 떠올랐다. 연지 찍고 가마 탄 새색시는 복숭아꽃처럼 곱고 화사했으리라. 그러나 살구꽃이나 복숭아꽃보다 소나무가 많은 동네라서 그랬을까. 소나무에서 피는 봄꽃이지만 송화를 꽃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이 화동댁은 송화를 닮아 보였다. 젊은 여인네인데도 화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언제나 누런 얼굴에 무채색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가난을 원망하는 기색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들로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 화동댁은 그만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무덤앞에서 목놓아 우는 동무를 달래며, 도시의 큰 병원을 찾았으면 고칠 수 있었는 병일 텐데...,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 같아 더욱 슬펐다. 그때도 황토 봉분 위로 송화가루가 날아와 앉던 봄날이었다. 동무는 봄이면 어머니의 제사까지 제손으로 모시느라 힘겹게 보냈다. 가끔 송화다식을 만들기도 하는 동무를 보면 화동댁 얼굴이 겹쳐갔다. 그곳을 떠나 온 후로 소나무와 멀어진 채 화동댁 모녀도 잊은 듯 살았다.
지난 가을 박물관을 찾았을 때다. 갖가지 다식판을 진열해 둔 장소에서이잊었던 솔내음을 맡았다. 국화문양에서 순한 친한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고, 송화다식을 내 손에 쥐어주던 화동댁이 새삼 그리웠다. 다식판에 묻어있던 추억이 한꺼번에 떠올라 내 발길을 붙잡았다. 의식주가 풍요로운 요즘과 그 시절의 궁핍이 비교되어 가슴 한 쪽이 아릿해졌다.
집에 돌아 와서는, 동무가 시집간 후에도 모서리가 깨진 채 화동댁 안방에 걸려있던 다식판이 궁금해졌다. 불현 듯 거실과 주방사이 벽에다 그 다식판을 걸어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친정에 간 김에 다식판을 찾아 나섰다. 진작에 다식판을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화동댁에는 낯선 며느리가 부엌에 있었다. 느닷없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새삼스레 다식판을 어디에 쓸 요량이냐고 되물었다. 하기는 그 다식판으로 송화다식을 만들기는 어려운 일일 테고, 그저 장식용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으니.
요 며칠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황사가 태반인 노란 가루를 자꾸 쓸어모아 보곤 한다.
첫댓글 고향냄새 물씬 나는 글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아름다운 풍경 하나가 눈앞을 스쳐갑니다. 누구나 가난하고 허기졌던 그 시절이 이리 그리운 것은 송화를 잊은채 살아가는 우리의 메마른 마음 탓이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송화, 그 이름의 어휘만으로도 고향이 물씬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