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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문헌에서 나타난 태극 사상
소위 태극이라는 것은 곧 사도(斯道)의 본체(本體)요 만화(萬化)의 근본으로 자사(子思)가 말한「하늘이 명한 성(性)」이라는 것이다. 《회재집 晦齋集》
태극도(太極圖)에는 무극(無極)으로서 태극(太極)이라 했다. 상천(上天)의 일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실상은 조화(造化)의 추뉴(樞紐)이고 만물의 근저(根量)이다. 그러므로 무극(無極)으로서 태극이요, 태극 밖에 다시 무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 태극이라는 것은 천지 만물의 뿌리를 가리킨 것이요, 무극이라는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묘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숭조 柳崇祖/성리연원촬요 性理淵源撮要》
대개 천지의 조화가 생기고 생겨 궁진(窮盡)하지 않아서 가는 자는 쉬고 오는 자는 잇대어서 사람, 짐승, 초목이 천형(千形) 만상(萬狀)으로 각각 성명(性命)을 정(定)한 것이 모두 한 태극(太極) 가운데에서 흘러 나왔으므로 만물이 각각 한 이(理)를 갖춘 것이요, 만 가지 이가 함께 한 근원에서 나와서 한 풀, 한 나무가 각각 한 태극이어서 천하에 성(性) 밖의 물건이 없다. 《권근 權近/입학도설 入學圖說》
대개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생(生)하였지만 양의는 도로 한 태극이니 곧 충막(沖漠)하여 형기(形氣)가 없으되 만상(萬象)이 이미 구비되어 있고 만물이 분산되어 각기 다르되 하나로 관통되었으니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둘이라고 할 수도 없다. 《정여창 鄭汝昌/일두집》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儒學者) 주돈이(周敦)의 저서. 우주의 생성, 인륜의 근원을 논한 249글자의 짧은 글이지만 그 뒤 남송(南宋)의 대유(大儒) 주자(朱子)가 그의 정치(精緻)한 해석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서술하였으므로 주자학(朱子學)의 성전(聖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태극도'의 설로서 그 5위(五位)의 순서에 따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음정양동(陰靜陽動)·오행(五行)· 건곤남녀(乾坤男女)·만물화생(萬物化生)의 전개를 나타낸다. 즉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기오행(二氣五行)의 정(精)과의 묘합(妙合)으로 건남곤녀를 낳고, 만물이 화생하나 만물은 결국 하나의 음양으로 그리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음양 5행의 수(秀)를 얻은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은 인의중정(仁義中正)을 정하여 정(靜)을 주로 하는 인륜의 규범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위의 일원(一元), 무극이태극에 관하여 도가연원설(道家淵源說)을 취하는 학자는 무극에서 태극이 일어난다고 보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제창하지만 주자는 주자자득설(周子自得說)을 취하여 무극이므로 태극일 수 있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창하여 이른바 송학(宋學)을 형성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사진 설명 위의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사진은 주염계의 태극 도설에 나타나는 태극 음양도를 가운데 담고 있다.
이황의 聖學十圖 중에서 第一 太極圖 풀이 <이상은 역, 삼성출판사>에서
第一 태극도
<무극, 태극>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생하고 동(動)이 극(極)하면 정(靜)하나니 정하여 음(陰)을 생한다.
<음정양동> 정이 극하면 다시 동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갈리고 양으로 갈리니 양의(兩儀)가 맞서게 된다.
<오행>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를 생하니 오기(五氣)가 순차로 펴지어 사시(四時)가 돌아가게 된다.
또 오행은 하나의 음양(陰陽)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이요,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오행의 생함이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지니 무극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응결(凝結)된다.
<건곤남녀> 건도(乾道)는 남(男)이 되고 곤도(坤道)는 여(女)가 되어 두 기가 서로 감(感)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한다. 만물이 생하고 생하여 변화는 다함이 없다.
<만물화생> 오직 사람이 그 수(秀, 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靈)하다. 형(形)이 이미 생기니 신(神)이 지(知)를 발(發)하고 오성(五性)이 감하여 움직이니 선과 악이 갈리면서 만사가 생겨난다. 성인은 이것을 정하되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써 하고 정을 주로 하여 (무욕함으로 정(靜)한다) 인극(人極)을 세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명(明)이 합하고, 사시와 더불어 그 서(序)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이 합한다. 군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어김으로 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天)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지(地)의 도를 세워 유(柔,부드러움)와 강(剛,굳셈)이라 하고, 인(人)의 도를 세워 인(仁)과 의(義)라 한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시(始)에 원(原)하고 종(終)에 반(反)하면 사생(死生)의 설을 안다고 한 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것이 그 지극(至極)이로다.
퇴계의 설명
(가장 위의 무극태극도) ○ 此 所謂無極而太極也. 卽陰陽而指其本體不雜乎陰陽而 爲言耳. - ○ 이것이 이른 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음양에 즉하여 그 본체가 음양과 섞이지 아니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둘째 음정양동도)⊙ 此○之動而陽 靜而陰也 中○者 基本體也. (오른쪽 하나의 양) 者 (왼쪽 둘의 양)之根也. (왼쪽 하나의 음) 者 (오른쪽 둘의 음)之根也 - ⊙ 이것은 ○이 동하여 양이 되고 정하여 음이 되는 것이다. 맨 속에 있는 ○은 그 본체요, (우일양) 은 (좌이양)의 뿌리요. (좌일음)은 (우이음)의 뿌리이다.
(가운데 오행도)此 陽變陰合而 生 水火木金土也 -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화목금토를 생하는 것이다.
(가운데 오행도 가장 아래의 ○)此無極二五所以妙合而 無間也. - 이것은 무극음양오행이 묘합하여 틈새없이 되는 소이이다.
(넷째의 건곤남녀도의 ) ○乾男坤女以 氣化者言也 各一其性而 男女一太極也 - ○<건의 도가 남이 되고 곤의 도가 여가 된다>함은 氣化한 것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가짐으로 남녀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가진다.
(맨 아래의 만물화생도의) ○萬物化生以 形化者 言也 各一其性而 萬物一太極也 -○<만물이 화생한다>함은 형화(形化)한 것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가진다.
최초의 태극기 그림 발견/서울시 직원 도쿄 도서관서 찾아
기제 1997년 8월 15일 동아일보 1면 (종합) 기획
박영효가 제작…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시사신보 신문 게재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882년 10월 2일자의 이 신문은 「조선의 유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의 국기(태극기)는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청색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신문 자료는 서울시 총무과 송명호(47)씨가 최근 일본 도쿄(동경)시부야구 히로오 도립 도서관에서 찾아낸 것.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단국대 사학과)교수는 『과거 신문의 주요 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 편년사나 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 동안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 1882년 일본의 시사신보에 기재된 태극기의 모양. 박영효가 일본에 게양했다는 최초의 태극기 아닌가 추정된다. 바탕이 옥색이며, 4괘의 모양이 지금까지 발견된 태극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오른쪽) 시사신보에 기재된 배치와 색깔 설명에 따라 칼라로 처리해 본 태극기의 모습이다.
다음은 당시 시사신보 기사의 끝 부분으로 고종의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을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 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했으나 국왕(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 용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최초 태극기의 건곤감리 4괘의 배치는 지금과 크게 달라 좌측 상단에는 양효 2개를 그린 뒤 음효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를 먼저, 음효 2개를 나중에 그렸다.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박영효는 1882년 8월(음력) 일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고종에게 일본에서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재 1998년 2월 16일 세계일보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인 「고려 국기」의 4卦(괘)가 청색임이 기록돼있는 국내 최초의 문헌이 발견됐다.
사단 법인 대한민국 국기 선양회 金永煥(김영환) 회장은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국기 보감 발간 작업을 벌이던 중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通商約章類纂 (통상약장유찬)」이란 문헌에서 이 같은 태극기 원형을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책자는 1874년 당시 청 정부의 조약 및 외국 사신의 서한 등을 모아 엮은 책으로 당시 59종의 각 나라 국기가 실려 있으며, 우리나라의 국기가 「고려 국기」로 수록돼 있다.
이 문헌에는 고려 국기의 旗面(기면)은 황색, 太極(태극)은 청색과 홍색, 4卦(괘)는 청색으로 4괘와 태극이 동일 색상으로 기록돼 있다.
국기 선양회 金회장은 『그 동안 발견된 태극기의 경우 색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이번 사료의 발굴로 태극기의 명확한 색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재 1998년 7월 10일 KBS 9시 뉴스
황수경 앵커 태극 무늬와 궤가 그려진 깃발이 지금부터 270년 전 조선 영조 때부터 사용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화첩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화첩에 그려진 태극 깃발은 오늘날의 태극기와 너무나 흡사해서 태극기의 효시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윤재춘 기자 조선 영조 1년 1724년 조선을 다녀간 청 사신이 그린 봉사도라는 화첩에 나오는 태극 깃발. 태극의 빨강과 파랑의 위치가 뒤바뀌고 궤가 두 개만 있지만 오늘날의 태극기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황유복 교수(중국 중앙 민족 대학) 조선 왕조의 국가의 신분으로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면서 그린 것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재춘 기자 국내 학계의 전문가들도 이 깃발이 오늘날의 태극기와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는 견해입니다.
김원모 교수(중앙대, 태극기 전문가) 조선국을 상징하는 깃발으로써 청 사신들을 환영하는 그런 뜻에서 그 깃발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재춘 기자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에 가면서 사용했다는 태극기. 이 보다 150년 이상 앞서는 봉사도의 태극 깃발이 태극기의 효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고증이 좀 더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화첩 봉사도는 경원대학교와 중국 중앙 민족 대학 조사단이 중국 북경의 한 박물관에서 발견해 국내 학계에 사진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가로 60cm 세로 47cm의 비단에 그린 20폭 짜리 화첩에 청 사신 환영 연회와 영조 책봉식 농경 풍경 등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조선 후기 민속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게재 1998년 7월 14일 (화) 조선일보
학계, 奉使圖 내용에 비상한 관심…바퀴 달린 기암 괴석도 의문
18세기 초반 조선의 상징으로 현재의 태극기와 비슷한 깃발이 있었을까?
10일 공개된 청(靑) 사신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 奉使圖 중 중국 사신이 여행 중 묵었던 숙소(행관·行館) 부근에 걸린 태극 문양의 깃발에 학계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길 중간에 두 개의 대를 세워 건 이 깃발은 태극기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도 흡사하다.
사괘 중 광명과 정열을 뜻하는 '리(離)'와 지혜와 활력을 의미하는 '감(坎)'이 위 아래에 있으며, 가운데 음양의 위치가 바뀌어 적색이 아래로, 청색이 위에 위치했다.
현존 유물로는 7세기 말 통일 신라 시대에 세운 경주 감은사 탑이나 고려 중기 돌로 만든 한 관에도 태극 문양이 나타나긴 하지만 19세기 말 박영효 등에 의해 태극기가 제정되기 이전에 태극 문양과 사괘 를 사용해 국가의 상징으로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김원모 단국대 교수는 "국기는 아닐지라도 중국 사신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어쨌든 조선의 상징으로 걸지 않았나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중국 사신이 묵었는데 조선을 상징하는 기를 걸었다는 것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진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의미의 조선 상징물로 보이는 깃발. 태극 음양 양의를 가운데 두고 4괘 중 '리'괘와 '감'를 위아래로 두고 있다.
위의 바퀴 달린 기암괴석은 일종의 사신 환영을 위한 장식품의 일종으로 보이나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영조 책봉례와 관련한 장면이나 도성 안 기방의 모습 등은 현재 우리 그림으로는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 18세기 생생한 역사적-사회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학계는 강조한다.
특히 광대들의 놀이를 묘사한 장면 중 '바퀴가 달린 기암괴석'은 우리 자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기암괴석에 대해서는 책 서문에 '자라처럼 생긴 산이 뭍으로 갔다'고만 기록했다. 괴석 중간 중간에는 집이 장식됐으며, 사람(혹은 인형)도 타고 있다.
안휘준(문화재 위원) 서울대 교수는 "중국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옮긴 거대한 장식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영조 책봉례를 마지막으로 모두 4차례 조선을 다녀간 아극돈의 필치에 대해 안휘준 교수는 "문인화의 경지를 넘어선 작가"라며 "남종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17∼18세기 청조 정통 화풍을 계승했다"고 말했다.
'봉사도' 중 영조가 청 사신을 맞기 위해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 친히 마중나간 장면이나 대궐 봉례 장면중 청 사신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은 약소국의 비애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봉사도'는 중국에서 우리로 치면 국보에 해당하는 '선본(善本)'으로 지정됐다.
게재 1998/ 08/13 (목) 조선일보
광복절인 15일 오전 7시 50분 서울 여의도 공원 한 가운데에 가로 12m, 세로 8m 크기의 대형 태극기가 50m 높이 게양대에서 펄럭인다.
국내에선 판문점 옆 대성동 마을의 96.5m 짜리 국기봉 다음으로 큰 규모다.
서울시는 지난 11일 이 대형 깃대를 공원 가운데에 세우는 공사를 끝냈다. 깃대는 높이 50m, 무게 13.5t,지름이 아래쪽 70㎝, 위쪽 30㎝나 되는 스테인리스 강관으로 만들어졌다.
워낙 규모가 커 태극기를 손으로 게양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쪽에 태극기를 올릴 전동 장치가 부착됐고, 야간 조명 장치도 설치됐다. 깃대와 7백여 평 규모의 기단 조성에만 3억 9천여 만원이 들었다.
태극기를 만든 오주 기획은 "태극기가 너무 커 '실폰'이라 불리는 가벼운 나일론 천으로 흰색 바탕 기를 만든 후 태극과 괘를 따로 만들어 미싱으로 박아 완성했다"고 말했다.
태극기 1개 제작비는 117만원. 서울시는 태극기가 더러워질 때에 대비, 모두 8개를 준비했다.
게재 1998/08/18 조선일보
우리나라 주부들은 태극기하면 류관순 의사와 3·1운동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LG백화점이 8·15 광복절에 즈음해 구리점과 부천점 문화 센터 회원인 20∼40대 주부 152명을 대상으로 태극기에 대한 이미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 태극기하면 떠오르는 인물의 순위에서 절반에 가까운 주부가 류관순(47%)이라고 응답했다. 이어 김구(11%) 안중근(8%) 안익태-안창호(각 6%) 손기정-박영효(각 4%) 순을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을 꼽은 주부도 3%나 됐으며, 소수지만 박세리-차범근이 떠오른다는 주부도 있었다.
태극기하면 연상되는 역사적 사건으로는 3·1운동(50%)을 가장 많이 들었고, 광복절(33%)이 2위, 6·25전쟁(4%)이 3위였다. 다음 제헌절 4·19혁명 88올림픽 개천절 등의 순이었다.
태극기와 연상되는 노래는 애국가(51%), 동요 태극기(32%), 3·1절의 노래(6%), 울 밑에 선 봉선화(3%)를 많이 꼽았고, 우리의 소원, 독도는 우리 땅, 아침 이슬, 아리랑도 순위에 들었다.
그 밖에 광복절에 태극기 게양 여부를 묻자 93%가 게양했다고 응답했으며, 태극기를 디자인으로 상품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92%가 찬성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 수복 48돌 태극기 게양 재연 행사
게재 1998/ 09/ 28 조선일보
해병대 사령부는 28일 오전 이갑진 사령관을 비롯, 역대 해병대 사령관과 해병 전우회 등 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 중앙 박물관 광장에서 9·28 서울 수복 48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날 행사는 전황 보고와 중앙청 국기 게양 실존 인물 소개, 국기 게양 재연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국기 게양 재연은 서울 수복 때 태극기를 내걸었던 박정모(72·예비역 해병대 대령)씨와 최국방(66·예비역 하사)씨가 당시 착용했던 군복 차림으로 철거된 중앙청 건물 왼편에 마련된 임시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 48년 전 그 날의 감격을 되새겼다.
마라도에 대형 태극기 연중 게양
게재 1998/10/13 조선일보
국토 최남단인 제주도 마라도에 대형 태극기가 연중 게양될 전망이다.
제주도는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에 연중 태극기가 게양돼 국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마라도에도 연중 태극기를 게양, 마을 주민 및 관광객들에게 국토의 소중함과 마라도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13일 밝혔다.
제주도는 이 달 중 도 건축사 협회 회원과 도가 합동으로 마라도를 현장 방문 해 마라도의 기상-지형 등을 고려하여 높이를 결정하고 업체 스폰서를 통해 시공, 내년 상반기 중 완공할 방침이다.
서울 여의도 공원 국기 게양대는 높이가 50m, 대성동의 국기 게양대는 높이가 99.8m이다.
국기 모독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는 한 프랑스선수는 청(靑), 백(白), 적(赤) 3 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다닌다. 자기네 국기를 본뜬 국기 머리다. 헝가리의 한 여자 선수는 적(赤), 백(白), 녹(綠)의 역시 자기 나라 3 색 국기를 본뜬 국기 귀고리를 하고 다닌다. 영국 선수의 핫 팬츠는 유니온 잭의 국기 팬츠요, 신발은 유니온 잭의 국기 신발이며, 미국 선수의 트레이닝복은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Stars and stripes)다.
태극 팬츠 팔괘 귀걸이? 얼굴에 성조기 화장을 한 미국 사나이와 역시 얼굴에 폴란드 국기 화장을 한 아가씨가 키스하는 보도 사진도 보았다. 자기 국적을 과시하는 애국심이란 시각에서 보면 애교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선수가 태극무늬를 머리에 염색하고 태극기로 팬츠를 지어 입으며 팔괘(八卦)를 귀에 주렁 주렁 달고서 껌을 짝짝 씹고 다녀도 애교있다고 볼 것인가. 존엄한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당장 지탄받을 것이다.
그 만큼 유럽 사람들에게는 국기가 친근화, 통속화되어 있는데 비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멀리 높게 고고하게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국기를 둔 이 같은 인식 차이가 왜 생겼을까. 대체로 유럽 국가들은 각기 다른 민족, 각기 다른 언어,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이질 요소가 복합, 한 나라를 이루고 살아왔다. 이 세상에서 단일 언어, 단일 문화를 지닌 단일 민족이 단일 국가를 이루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13개국 밖에 없다 한다.
태극기는 그 자체가 민족이요, 애국심이다 국기는 국제화 시대의 필요 이전에 국내의 이질 요소를 구심시킬 필요에서 탄생하고 있다. 국기에 가장 친근한 나라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가장 많은 이질 요소가 복합된 미국이다. 미국 어디에 가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하루에 평균 열 번 이상 국기를 보고 산다는 통계도 있다. 피부 색도 다르고 믿는 종교가 다르고 쓰는 말은 다를 망정 성조기 아래 숙명적으로 미국과 결속돼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면서 산다.
그래서 국기가 친근해지고 친근해지다 보니 통속화된다. 이 실용성에 비해 우리 한국의 국기는 오로지 그 자체가 국가요, 애국심이요, 내셔널리즘이라는 존엄성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국기로 팬츠를 지어 입고 국기로 신발을 지어 신는다는 것은 국체의 모독이요, 매도가 된다.
물론 외국에 있어서도 국기는 존엄한 것이지만 그에 대한 오염이 내셔널리즘과 직결되는 민감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미국 NBC 방송 요원이 태극기의 태극 속에 지난 번 권투 난동을 빗대는 권투 시합 도안의 티셔츠를 주문했다는 것은 그 저의는 고사하고라도 국기 모독이요, 그 모독이 한국 사람의 감정을 덧들이는 가증 요소가 됐음을 알았으면 한다.
태극기와 일장기 국기는 두 가지 쓸모에서 생겨났다. 그 하나는 그 나라를 알리는 상징적 쓸모요, 다른 하나는 그 나라의 국민을 결속시키는 구심체(求心體)로서의 쓸모다. 지금도 대외용 국기와 대내용 국기 두개의 국기를 가진 나라도 적지 않다.
태극기는 한미 수교 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태극기가 태동한 것도 한말 중국의 사대권(事大圈)에서 국제권(國際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미 수교 조약(韓美 修交 條約)을 준비하면서 국기의 필요성이 거론된 것이다. 당시 이 조약을 간섭하러 조선에 와 있던 중국 사신 마건충(馬建忠)은 이 국기 도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국기의 바탕은 흰빛으로하여 백성을 나타내고, 푸른 구름을 아래로 깔아 관원(官員)을 나타내며, 그 위에 붉은 용을 그려 임금을 나타냄으로써 군관민(君官民)의 조화를 표방하자고 했다. 다만 중국 국기의 용(龍)과 구별하기 위해서 용 발톱을 중국 용처럼 다섯 개로 하지 말고 네 개로 하자는 것이었다. 굳이 용을 도입시키려 한 것이며, 그 용 발톱에 차등을 두려 했음은 중국의 속국임을 국기에 나타내려는 음흉한 저의가 드러나고 있다.
태극기는 사대주의 탈피에서부터 탄생하였다 이에 김홍집(金弘集)은 홍룡 청운(紅龍靑雲)은 그리기가 번잡스럽다 하고, 우리 조정의 절충 안인 태극-팔괘안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태극의 반홍(半紅)이 홍룡(紅龍)이요, 반청(半靑)이 청운(靑雲)이며, 둘레의 팔괘를 팔도로 절충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기를 사대(事大)에서 해방시키는 데 성공시키고 있었다.
이 태극기가 국민의 구심체로서 힘을 발휘한 것은 3.1 만세운동 때였을 것이다. 그 후 해방이 되고 태극기가 올랐을 때 민족 심정의 공약수가 그토록 그 깃발에 농축됐던 적 또한 없었을 것이다.
국민의 정신적 구심체로서의 국기에는 나라에 따라 두 가지 목적이 깔려 있었다. 그 하나는 미국처럼 각기 피가 다른 인종이 각기 다른 용모와 각기 다른 언어와 각기 다른 종교와 각기 다른 문화를 지니고, 한 나라를 이루고 살려면 상징적 구심점(求心點)없이 나라를 결속시킬 수가 없다. 그 구심점으로서 성조기(星條旗)가 갖는 뜻은 막중하다. 미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열여덟 번 성조기를 보며 산다는 통계가 있다. 그 만큼 건물 안팎 도처에 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국기가 선용된 경우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히틀러의 나치스기(旗)나 제국주의 시대의 일장기(日章旗)처럼 국민의 역량을 독재 체제에 결집시키려는 구심(求心) 수단으로서의 국기 이용이다. 물론 국기가 악용된 경우다.
2차 대전 후 일본에서는 이 악용에 반발하여 국기를 모든 의식에 강제하지 않음으로써 그 존엄이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이번 개정시킨 각급 학교의 `신 지도 요령'에서 국기 게양을 강제 규정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고까지 강화시키고 있다. 공교롭게 그 때를 맞추어 우리 나라에서는 관공서나 교실의 정면에 붙은 태극기를 붙이지 않아도 되고, 국기 하강식은 폐지하는 등의 국기 조항의 개정을 서두르고 있고. 국기를 둔 악용-선용을 잘 가려 국기 조항이 개정돼야 할 일이지만 한-일간의 국기를 둔 동시 반전(反戰)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떨떠름하다.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다 흔히들 태극기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가 일본 가는 배 안에서 급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박영효는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우리 조정에서 국기에 대해 처음으로 눈뜨게 된 것은 청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비롯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개화와 외교에 막중한 영향을 끼쳤던 이 소책자에 조선이 독립국이려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국기 도형을 중국의 용기(龍旗)를 본떠서 만들되 사각(四角)으로 하지 말고 삼각기(三角旗)로 해서 청의 허락을 받도록 할 것을 권하고 있는 점이 고약하다. 이 `조선책략'에 좇기로 한 조정에서는 1880년 동지사(冬至使) 가는 편에 중국의 국기가 어떻게 생겼으며, 조선 국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에 북양 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용 모양을 그려 속국임을 표시하고 그 이름을 용방기(龍方旗)라 함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고종과 김홍집이다 이 같은 속국 표시에 불만을 품었던 고종과 개화 내각에서는 이를 묵살하고 없었던 일로 덮어 두고 있다. 그 후 국기 문제가 재론된 것은 1882년 한미 수교 조약을 맺을 때였다. 수교의 실무를 돕기 위해 보낸 청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이 조선측 대표인 김홍집(金弘集)에게 먼 나라와의 수교에 있어 국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 조정에서 생각하고 있는 기식(旗式)이 일본 국기를 닮았다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조정에서 청 속국을 탈피한 나름대로의 국가 도안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조야의 관원을 뜻하는 푸른 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던 것 같다.
`임금님은 붉은 옷을, 관원들은 푸른 옷을, 백성은 흰 옷을 입기에 발상된 도식' 이라고 김홍집이 설명하자 교활한 마건충은 다음과 같은 수정안을 내놓고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국기의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임금을 붉은 용 그림으로, 관원을 파란 구름 무늬로 타나내되 용 발톱을 네 개로 함으로써 중국 국기의 다섯 용 발톱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김홍집은 마건충 안에 다시 수정을 가한다. `홍룡 청운(紅龍 靑雲)은 그리기에 번잡하니 흰 바탕에 반홍 반청(半紅 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자도를 뜻하는 팔괘(八卦)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비슷함을 면할 게 아니요' 했다.
이런 일이 있는지 넉 달 후에 태극기가 국기로서 공식 채택되고 있다.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이라는 심오한 태극의 이념이 복합된 것이기도 하려니와 태극기가 태어나는 데는 약소국으로서 혹심한 주체적 진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광복 45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는 태극기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대 태극기 전시회를 갖는다기에 태극기 탄생의 주체적 진통을 되뇌어 본 것이다.
태극기 달기 중세 유럽에서는 열십자의 깃발을 꽂아 수도원임을 표시했었다. 성지 회복의 원정이 시작되자 이 깃발을 뽑아 들고 종군했다. 그래서 십자군이요, 이 십자군 기가 뿌리가 되어 십자국 기가 탄생됐다.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인 스위스-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의 십자군 원정 동맹국들 국기는 십자가 원형이다.
종교 집회소의 표시였던 깃발이 그 가호를 비는 뜻에서 군기가 되고, 이 군기가 국기로 정착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애나폴리스 해사 박물관에 가면 신미양요 때 강화도서 노획해 간 대형 군기가 전시돼 있다. 이 깃대 아래 조선 병사들이 몸을 꽁꽁 묶고 지켰으며 빼앗기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총부리를 가슴에 끌어대며 쏴 죽이라는 시늉을 했다던 그 군기다.
나라 지킴이의 최후 보루인 이 군기가 국기 차원으로 승화 못했음은 중국에의 사대 때문이었다.
사대주의 탈피에서 탄생한 태극기 한미 수교 조약 때 국기의 필요성에 쫓기자 김홍집은 복안인 태극 도안을 청 특사 마건충에게 보이고, 임금은 붉은 옷 관원은 푸른 옷 백성은 흰옷을 입기에 그 화합을 상징하는 도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마건충은 일본 국기와 비슷하다 하여 홍룡 청운으로 하되 용 발톱을 네개로 하여 속국임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에 그리기 복잡하니 반홍 반청으로 하고 팔도를 상징하는 팔괘를 둘러 일본 국기와 달리 하여 태극기가 탄생된 것이다. 사대 탈피의 노력이 역력하다.
지금 국난 극복의 의지로서 그 태극기 달기 운동이 온 세계에 감동을 주고 있다. 태극기 만드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중국, 그 중국 인민일보는 건국 기념으로 다는 태극기가 아닌 강력한 국난 극복의 구심점을 그에서 보았고 진취적 포즈를 한 박세리의 배경에 태극기를 나부끼게 한 타임지의 표지에서도 그런 의지를 표출시켰다. 경제 문화의 사대 논리에 짓눌려 빈사 상태에 있는 정체성의 광복을 내외에 선언하는 태극기 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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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극기에 대한 역사적 정리로 많은 지도를 받았습니다. 잘 정리 보관되어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