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생(盧生)의 꿈
박병탁 (신경정신과 전문의)
1991년말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그 다음해인 1992년 가을에 학회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무렵 러시아의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때이고 1993년 이후로는 석유 개발 등으로 경제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우스개로 ' 러시아 사람들은 줄 서다가 인생을 다 보낸다 ' 했듯이 모스크바 길거리 마다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끊임없는 줄이 늘어 서 있고 국립 백화점은 겉모습은 거창해 보였지만 진열장은 상품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백화점 앞에 노점상들이 허름한 음식이나 인형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도착하는 곳마다 손에 손에 구 소련군의 모자, 계급장 , 훈장, 시계, 망원경 등을 들고 나와 '몇 달러'라고 외치는 소년들. 내국인의 출입이 통제된 일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던 콜걸들. 상트 페테르부르크 (구 레닌그라드) 시내 곳곳에 있던 400여 개의 레닌 동상의 목에는 밧줄이 걸려 철거되고 있었다. 현지 안내를 하던 20대 후반의 러시아 청년은 능숙한 우리말로 시내 곳곳을 소개 하면서 ' 이제 러시아에서 따바리쉬(동무)라는 말을 하면 촌놈 소리를 듣습니다. 러시아는 이제 세계 제일의 반공국가가 될 것입니다' 했다.
인류는 20세기 중에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실험을 하였다. 1922년에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소련)이 탄생되었고 이 연방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동구나 아시아, 중미에도 많은 공산국가들이 들어섰다. 1990년 동독이 와해 되는 것을 신호로 그 다음해 소련이 해체가 되면서 인류의 이 거대한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공산주의의 이상 즉 '함께 생산하여 함께 분배한다, 계급없는 세상', '평등과 분배의 원리'는 인간 세상에는 실현되지 않는 이상인 모양이다. 중국은 예외로 경제가 급팽창하여 미국과 대등하다. 못해 조만간 미국을 앞지르느니 하는데 이것은 1980년대 등소평의 등장 이후 겉만 공산주의지 속은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 자본주의 적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중국인이 '중국은 예부터 상업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였다. 세계 곳곳에 화교가 진출하고 있다. 지금은 공산주의라는 독주를 마셔 잠시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그해에 소련을 방문하기 전에 체코에도 들렀는데 체코는 유리가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안경을 하나 사러 안경점에 갔는데 여자 종업원들이 저들끼리 수다를 떤다고 손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우크라이나의 서기장 시절 겪었던 실화 감자를 배달하는 트럭 운전사가 운반 도중 감자가 차 밖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고프바초프가 불러서 '당신은 감자가 떨어지는 것을 몰랐느냐'고 물었다. 그 운전자는 '알고는 있었지만 내 임무는 그 감자를 여기까지 운반만 하면 되지 감자가 떨어지는 것은 나하고 상관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 감자이고 내 가게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는 인간의 욕망 그 중에서도 소유욕을 무시했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를 삼계(三界)라고 하는데 삼계는 다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뉜다. 인간 세계는 욕망이 들끓는 욕계에 속하며 인간 세계 보다 못한 욕계의 세계로 수라, 아귀, 축생, 지옥등 4악도(四惡道)가 있다. 인간세상 위에는 욕계에도 여섯 하늘 세계가 있는데 이를 육욕천(六欲天)이라고 한다. 욕망이 끊어지고 물질만 남아있는 색계에는 18개의 하늘 세계가 있고 물질마저 사라지고 정신적인 것만 남아 있는 무색계에는 4개의 하늘 세계가 있다. 이와같이 불교에서는 삼계를 통털어 28개의 하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하늘 세계는 실제 우주 어느 곳에 존재하고 있다기 보다 마음의 수양 단계나 경지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당시 인도에서 최고의 스승들을 두명 만났는데 첫 번째 스승을 만나 배워서 단번에 27째 하늘 세계인 무소유천(無所有天)에 이르렀고 두 번째 스승을 만나 28번째 하늘 세계인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 경지 마저도 자신의 화두(話頭)인 생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다고 하여 스승을 떠나 홀로 수행의 길에 들게 된다. 어쨌든 28단계 중 27번째 단계가 무소유의 경지라는데 그 높은 경지를 일반 국민들 모두에게 적용하고 강요하니 어떻게 그런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었겠나 싶다. 소유욕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 생활은 수사나 승려와 같은 수도하는 집단에서도 원리원칙대로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중국 고사에 당나라의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한 여관에서 여옹(呂翁)이란 도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그의 베개를 빌려 잠이 들었는데 메조(황량 黃梁) 밥을 짓는 사이 80년간의 온갖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것을 한단의 꿈(邯鄲之夢), 노생의 꿈(盧生之夢) 또는 황량몽(黃梁夢)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비슷한 노생(盧生)이 있어 계급과 권위가 없는 사회, 평등과 분배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부자는 좀 못살게 되고 서민은 좀 더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꿈을 꾸었는데 그 결과는 일장춘몽 노생의 꿈으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자결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공산주의는 시장 경제까지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 감시해야 하여 자연히 정부 구조와 기구가 비대해질 수밖에 없고 감시와 통제하는 새로운 계급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작은 정부가 될수도 없고 또 국민은 모든 것을 통제 받다 보니 자립심이 없어지고 정부에 극단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계급없는 사회에 계급이 생기고 평등한 사회에 권위적인 비대한 정부가 들어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평등을 너무 강조 하다 보니 정당한 권위 마저 무시되고 한 방면의 전문가가 이루어 둔것을 비전문가 집단이 힘으로 부수고 고치려고 하는 병폐도 생겼다.
미국의 사회학자이며 정신분석가였던 에리히・프롬(Erich Fromm)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정당한 권위(authority)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어느 사회나 전문가의 권위가 인정, 보호 받지 못하면 그 사회는 발전이 없고 또 발전하는 동기도 없어진다. 다만 권위를 앞세워 정신적, 물질적 이용을 일삼는 다면 그것은 권위주의이며 그것은 마땅히 타파되어야 한다.
러시아에는 요즈음 고르바초프를 비판하고 옛 소련시절로 되돌아 가자는 목소리가 꽤 높다고 한다. 역사는 우로 갔다 좌로 갔다 하기 마련인데 어쨌든 우리는 민족과 나라가 잘 발전하는 방향으로 좌우를 잘 조정하고 운용하여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좌우 편향은 직장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한다. 어느 내과 의사가 '에볼라 바이러스(ebola virus)는 참 바보다. 자기가 붙어 사는 숙주인 인간을 단 며칠 사이에 죽게 만들면 자기도 그 만큼 빨리 죽게 되는데' 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첫댓글 논리정연하고 새겨 읽을 좋은 글입니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도인들이 모여 꾸려나가는 세상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소유욕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평등심이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자아비판을 한다곤 하지만, 오히려 탐진치만 기른다고 봅니다. 따라서 범부세계에서는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 아닐지요? 마르크스는 인간 심리를 너무 몰랐던 것 같고... 레닌이나 스탈린, 우리나라의 노생처럼 성격상 문제있는 사람들이 실천한다고 내세울 사상은 더구나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노생은 중국 전기(傳奇)소설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작자는 심기제(沈旣濟)입니다.
노생이 꿈만 꾸지 않았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