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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심사평/당선작
제7회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인사말>
예함 줄리아 헤븐 김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대표
안녕하세요? 따사로운 봄볕에 스민 꽃향기가 온 지면을 감도는 아름다운 이 계절에 제7회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당선 작품을 선정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기쁨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해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글로 나눠 주신 청소년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은 한 번도 응모하지 않은 학생은 있어도 한 번만 응모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해에 당선이 되었어도 올해 또 수상할 수 있기 때문에 연이어 응모하는 학생이 적지 않고 격년마다 응모하는 학생은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감사와 격려의 의미로 2회부터 7회까지 연달아 6년을 응모한 두 학생에게 ‘개근응모상’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상을 시상하기로 했습니다. 이처럼 수상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해마다 글로 적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인지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삐뚤빼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며 응모하던 학생들의 짧은 시가 해가 갈수록 산문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신앙 고백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저에겐 이 또한 은혜의 기적으로 감동을 전해 줍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청소년 여러분께 한마디 전하고 싶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꿈을 가지세요. 꿈은 복된 미래를 창조하는 재료이자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요.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을 성장하게 하시고 그 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은혜에 감사하는 여러분의 글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감사를 깨닫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꿈,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꿈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1•5세대들에겐 한글로 글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하기를 당부하며 다시 한번 수상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문정영 시인 /계간『시산맥』발행인
요즘과 같은 인공지능 시대에는 글을 쓰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많아졌다.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을 잘 정리해서 경험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은 AI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깊은 성찰을 통해 긴 문장보다 짧고 명료한 글이 독자에게 전달되기 좋다. 어느덧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이 7회를 맞이했다. 그동안 함께한 학생들의 작품이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취우수상인 사랑상을 받은 홍연지의 수필 <미지근한>은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내적 갈등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였고, 믿음에 대한 긍정적인 소신을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써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소망상을 받은 김시온의 수필 <침묵하시는 하나님 곁에서>는 언어의 감각도 도드라지고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믿음상을 받은 조민선의 수필 <감사의 발견>은 깁스라는 오브제를 사용하면서 감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특히 일상의 사소함에서 감사와 믿음을 끌어낸 발견의 눈길이 돋보였다. 나눔상 부문은 8작품으로, 먼저 김준영의 시 <나무가 서 있는 방식>은 직접 드러내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을 나무가 서 있는 방식을 통하여 잘 나타냈다. 특히 “쓰러지지 않는 방식”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고 보았다. 김하담의 수필 <그래도 괜찮아>는 반성을 통하여 발전해 가는 모습을 진정성 있게 그리며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박하음의 수필 <나의 여정>은 일상의 잔잔한 삶에서 얻어내는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저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이 반짝였다. 틈틈이 감사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다듬어가면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유다현의 수필 <”나에게 기도란 무엇일까?”>는 ‘기도하고 있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는 모습이 좋았다. 진심이 담아 있는 기도처럼 생활에서 은혜받을 수 있는 글쓰기도 꾸준하게 하기 바란다. 김준이의 수필 <그날, 십자가가 나에게 닿았습니다.>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이 단단하게 느껴지고 “여전히 부족하고, 지금도 넘어지는”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미가 느껴졌다. 꾸준하게 반성과 감사의 글을 써 보기를 권한다. 장혜나의 수필 <하나뿐인 위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의 울림에서 얻어가는 과정이 진솔했고, 좀 더 문장력이 늘 수 있도록 한국어책도 많이 읽기를 권한다. 오시온 학생의 수필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어둠에 대한 속성을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전도하고 싶은 솔직함이 좋았다.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세밀한 글쓰기를 권한다. 이우림 학생의 수필 <하나님의 사랑>은 당연했던 일상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좋았다. 좀 더 감동이 있는 글쓰기를 위하여 세심하고 깊이 있게 감사를 깨달으며 글로 적어 보기를 권한다. 다음은 4편의 기쁨상이고 저학년들의 작품이다. 강혜인의 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는 시적 완성도는 부족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손지아의 시 <하나님의 사랑>은 시적 리듬감이 잘 표출되었다. 시인의 체험이 잘 녹아서 드러나는 글을 쓰기 바란다. 황하준의 수필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은 평소에 가진 의문점들을 예수님을 통하여 잘 드러내었다.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 한국어책을 많이 읽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김하이의 시 <예수님과 사과?는 사과와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잘 드러내었다. 틈틈이 비유적인 글쓰기를 하면 더욱 글이 좋아질 것이다. 사실 신앙이라는 특정한 소재로 글쓰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이 겪은 일들을 진솔하게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을 시행하는 방향일 것으로 생각하며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전한다. 아울러 이번 7월에는 그동안 글로만 대한 수상자들을 밴쿠버에서 만난다는 것에, 그래서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시상식 부록으로 진행하는 바비큐 파티가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사랑상 $300> 홍연지/수필- 미지근한
주은혜교회, Centennial Secondary School Gr. 11
미지근한
‘Lukewarm’. 캐나다에 와서 새롭게 배운 단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미지근한’ 상태를 뜻하지만 나에게 이 단어는 단순히 온도를 넘어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나는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너무 뜨거워 데일 일도 없고, 너무 차가워서 얼어붙을 일도 없는 딱 적절한 온도의 선. 그 적당한 거리감은 언제나 나를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갑게 외면할 용기도 없었던 상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 내 삶의 모든 것을 내어드릴 열심도 아닌 그 사이 어중간한 관계였다. 그런 잔잔한 나에게 하나님은 그 온도를 끓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어느새 미지근할 줄 알았던 나의 온도도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캐나다에 온 지 6개월 차가 된, 이른바 ‘캐나다 새내기’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베트남이라는 또 다른 나라에서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내 삶의 뿌리를 내리고 모든 나의 삶을 안정화 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안정을 넘어서 나의 학업, 관계, 그리고 일상생활은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흘러갔다. 평일에는 학교와 학원, 과제의 반복이었으며 주말에는 봉사활동과 대회 준비, 동아리 활동까지 열심히 달려갔다. 누구나 떠올릴 법한 전형적인 한국 고등학생의 삶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매주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로 향해 찬양팀으로 서고 주일학교 봉사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잃지 않았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삶. 어쩌면 지루할 법한 이 삶의 온도를 나는 그 누구보다 만족했다. 너무 뜨겁게 올라 스트레스받을 일도, 차갑게 식어 방황하는 일도 없는 그 적절함이 나의 삶을 유지하고 지켜주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견고한 울타리는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캐나다라는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캐나다에 갈 수도 있다 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내가 그토록 유지해 왔던 안전한 온도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변화의 시작은 2025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본 이 변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선택처럼 내게 다가왔다. 어쩌면 입시를 앞두고 가장 치열하게, 동시에 가장 안정적으로 보내야 할 고2 시기에,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옮겨야 한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학업에 집중하기도 바빴던 나의 삶에 이런 변화는 없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불안이 찾아오자 나는 급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묻기보다는 간절한 애원에 가까웠다. ‘가기 싫어요’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라도 한 듯, 연초부터 신청했던 캐나다 비자는 1학기가 다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비자가 나오지 않는 하루하루가 길어질수록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어쩌면 안 갈 수도 있겠다’라는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부모님은 확고하셨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 예비하신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 비자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1학기가 끝나기 전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의 학교 전학 처리를 마치셨다. 그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고등학생 때 전학을 가면 행정적으로 ‘자퇴’ 처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자퇴는커녕 일탈도 없었던 내 인생에서 자퇴는 엄청난 파동이었다. 서류에 적힌 ‘자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충격 때문이었을까. 비로소 나는 캐나다라는 변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감했고, 조심스럽게 주변 친구들에게 이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비자로 인해 언제 나올지, 아니 나올 수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별을 고하는 마음은 늘 허공에 붕 떠 있었다. 이제는 온 가족이 확정된 결과만을 기다리며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시간이 지나 여름방학마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부모님은 2학기 개학 전까지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베트남에 남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받아들일 준비도, 이별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나는 나대로 입시를 준비하며 폭풍 같은 시간 속에 던져졌지만, 나 역시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의 솔직한 심정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신뢰보다는 현실적인 걱정이 앞서 있었다. 비자가 안 나오면 이미 자퇴 처리한 학교와 작별 인사를 나눈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라는 나의 민망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벼랑 끝에서 일어났다. 새 학기 개학을 단 하루 앞둔 8월 13일, 우리 가족은 마침내 비자를 받게 되었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지 않고 믿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이 극적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미지근했던 믿음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걷게 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가족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셨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평온하고 안정된 삶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도록 나의 잔잔한 일상에 파도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 폭풍 같은 변화조차 사실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의 일부였다. 비자가 나온 후, 나에게는 뜻밖에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졌다. 그 시간 덕분에 방학 동안 준비해 온 언어 시험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들과 충분히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별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에게, 마음을 정리하고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익숙한 땅을 떠나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잘 살아냈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짐했다.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새로운 땅에서는, 이전보다 한 걸음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고. 그리고 현재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불안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는 내 삶의 중심이 ‘나’가 아닌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어떤 미래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함께하심을 믿는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따르기에, 그리고 그분이 지금도 내 곁에 계시기에 나는 더 이상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 내 마음의 온도는 ‘적당함’이라는 핑계 뒤에 숨은 미지근한 그런 애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으로, 그리고 도전으로 나는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땅을 또다시 걸어간다.
<소망상 $200> 김시온/수필- 침묵하시는 하나님 곁에서
밴쿠버 평안교회 École Riverside Secondary Gr. 9
침묵하시는 하나님 곁에서
기도를 하려 책상에 앉지만, 끝내 하지 못한다. 방안은 조용하고, 비는 더 거세게 창문에 깨진다. 책상 옆 스탠드는 나를 더 부추기듯 환하게 빛난다. 책상 위에는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성경책이 쓸쓸히 놓여 있다. 하나님께 할 말이 없던 건 아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많은 말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잠에 든다. 나는 기도를 미뤘고, 미루는 일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 기도를 미룬다는 건 단순하고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 속에는 나의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쌓여 있다. 기대했다가 또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은 마음, 괜히 진지해졌다가 막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할 것 같은 마음. 그렇게 나는 내 자신을 핑계로 설득하며,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점 멀리 미뤄갔다. 그 거리는 어느 순간부터 편안 해져갔고, 편안해진 만큼 더 좁혀지는 것은 어려워졌다.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변화는 찾아오지 않고, 나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다. 나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나는 나의 믿음과 신앙을 점점 내 마음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버렸다. 이런 행동들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겉에는 멀쩡해 보여도, 생각으로 “난 괜찮다고” 다독여도, 나의 마음속의 두려움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버렸다. 나는 하나님이 점점 아무 말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나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침묵은 생각보다 큰 소음을 낸다. 아무 말이 들리지 않는 암흑 속에서 나는 더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 계신 지, 나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 아닌지, 질문은 계속 흘러 들어오고,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수록 난 오히려 하나님을 더 피하게 됐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게 덜 아프지 않을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제일 멀리 있었다. 믿음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고, 나의 신앙은 나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점검하는 기준이 되었다. 나의 믿음은 참된 믿음인지,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지, 남들만큼 잘하고 있는지. 그 질문들 앞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마저 부담이 되었다.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기도하지 않은 채로 하루를 보내고, 심지어 성경책에서도 손을 점점 떼버렸다. 다음날이 오면 또 같은 루틴으로 하루를 보냈다. 어떨 때는 변화를 결심하고 잠에 들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이런 반복된 실패는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나는 하나님의 침묵을 부재로 해석했고,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그분의 존재를 의심했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그 시간들 속에서도 완전히 혼자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도하지 않은 날에도 하루는 흘러갔고,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일들, 예를 들면 누군가의 따뜻한 인사나, 친구들과의 작은 순간들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완전히 버려진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제야 질문을 바꾼다. “왜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지”가 아니라, “왜 나는 하나님의 침묵을 그렇게 두려워할까?” 하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꼭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야만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던 건 아닐까. 응답이 없으면 곁에도 없을 거라고, 너무 쉽게 단정 지은 건 아닌가. 생각해 보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과도 말이 없는 시간은 존재한다.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들. 그 순간들은 결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 관계를 더 단단히 묶어준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나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응답이 없는 침묵은 나에게 부재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침묵은 나를 무시하시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기다려 주시는 것 같았다. 내가 준비 안 된 말들을 억지로 뱉어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왜 그렇게 침묵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침묵을 바로 부재로 단정 짓진 않는다. 말씀이 없다고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나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도는 쉽지 않다. 여전히 하나님은 조용하시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도, 나와 함께 계실 수 있다는 생각이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기도를 건너뛰는 날도 많고, 침묵이 두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나님이셔도, 나는 여전히 그분 곁에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사실은 나를 갑자기 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덜 도망치게 해준다. 오늘 살아가고 있는 하루도, 여전히 조용한 하나님 옆에서, 나는 완벽하지 않은 채로 서 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하루를 살아간다.
<믿음상 $200> 조민선/수필- 감사의 발견
늘 푸른교회, Burnaby North Secondary School Gr. 12
감사의 발견
이번 겨울, 운동을 하다가 넘어져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 바로 응급실로 가서 깁스를 차게 되었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적어도 한 달은 고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뼈가 부러진 것은 처음이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픈 생각보다는 깁스를 한 내 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에게 싸인도 받고 격려도 받을 수 있겠다는, 다소 즐거운 상상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찬 깁스는 물에 쉽게 녹기 때문에 샤워할 때마다 항상 랩으로 감싸야 했고, 석고는 내 손목의 작은 움직임까지도 꽉 잡아 주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지내는 일이 얼마나 불편한 경험이 될지 크게 상상하지 못했다. 2주가 조금 지나자, 깁스 안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왼손가락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다 보니 점점 불편함이 커졌다. 3주 정도가 지났을 때는 이제 뼈도 다 붙은 것 같아 빨리 깁스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좋아하는 악기도 연주하지 못하게 되었고, 컴퓨터 타이핑도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당연하게 해 왔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니 현실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기나긴 한 달이 지나고 2월 초에 드디어 깁스를 풀게 되었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가서 깁스를 딱 푸는 순간, 처음으로 바람이 살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기뻤다. 집에 와서 한 달 만에 깨끗이 손을 씻고, 양손으로 세수도 하고, 머리도 시원하게 감았을 때 나는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한 달 동안 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다시 가능해지자,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이번에 손을 다치면서, 한 손만을 사용해야 하는 삶을 경험하며 ‘작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을 다치면서 왼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큰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쉽게 감사할 수 있었지만, 작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는 다소 무관심했던 것 같다. 이 세상에는 내가 ‘당연히’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매일 마시는 물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지 못하는 사람들, 팔이나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가 보는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작은 것들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일을 겪고 나는 일상의 작은 소중함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 ‘감사’를 중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더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기쁠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지나갈 때에도 불평하기보다 내 앞길을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로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한 달 동안 깁스를 차고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항상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지는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하지 못하거나 편안한 일들만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깁스’를 주신다. 이 ‘깁스’는 나를 위한 중요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고 많은 불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깁스를 풀면서 의사 선생님께서는 새로 붙은 뼈가 이전보다 더 두껍고 단단해졌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더 강해진 이 손을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더욱 열심히 사용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악기를 잘 배우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이제 나는 두 손과 두 발을 사용하여 교회에서 악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 거실에는 가훈처럼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사실 작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나는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을 느꼈다. 상황이 그리 쉽지 않아 내 미래에 대해 혼자 고민하는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 나는 감사의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구하며 미래를 바라보고 싶다. 앞으로 9월에 대학교에 가게 되면 좋은 일도 많이 있겠지만 어려운 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시는 ‘깁스’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나눔상 $100> 김준영/시- 나무가 서 있는 방식 외 한 편
밴쿠버 순복음교회, Port Moody Secondary School Gr. 12
나무가 서 있는 방식
한때 나는
빛이 있는 쪽으로만 자라야 한다고 믿었다
더 위로, 더 빠르게
그늘은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지들을 한 방향으로만 뻗었다
하지만 바람은
내가 고른 쪽에서만 불지 않았다
휘어지고 부러질 듯
흔들리던 날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뿌리를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 말 없이 깊어지고 있던 것들
올라가는 일보다
버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더 이상
빛 만을 따라 자라지 않는다
비를 맞고 그늘을 지나며
내가 닿지 못하는 아래쪽으로
조용히 나를 내린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미 나를 살게 하고 계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서 있다
조금 느리게
조금 깊게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방식으로
<나눔상 $100> 김하담/수필- “그래도 괜찮아”
밴쿠버 중앙장로교회, Yorkson Creek Middle School Gr. 8
“그래도 괜찮아”
저는 아빠가 목사님이고, 또한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저는 제 신앙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특별 새벽기도회는 정말 아플 때를 빼고는 빠짐없이 늘 개근했고, 매주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는 당연했으며, 주일예배는 주일 오전 예배와 교육 부서 예배, 그리고 저녁 예배를 당연하게 갔었습니다. 그냥 예배만 가는 것이 아닌 항상 예배 시간보다 1시간 정도는 더 일찍 갔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설교 내용을 노트에 적는 것도 당연했구요. 또 매일매일 큐티와 성경 통독은 기본이고, 몇 년 전부터 그날의 큐티 내용과 감사기도를 적는 큐티 일기도 매일매일 써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교회 성도님들께 “어른들도 이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너무 대단하다” “하나님이 진짜 기뻐하실 거야.”라는 칭찬을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행동들에, 제 신앙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들은 놀 동안 어린 저는 항상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나와 예배의 자리를 지켰고, 기도 시간에도 열심히 기도했고, 친구들은 방학에 친구들을 만나서 놀고 가족들끼리 여행 다닐 때 저는 항상 수련회에 가서 열심히 설교도 듣고 저녁 집회 때는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이 모든 행동들에 자부심을 느낀 것이 너무 부끄러워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서울에서 4년 정도 사역을 하시고 광주로 다시 내려오셔서 사역을 하시면서 이 사건은 시작됩니다. 저희 가족은 광주에 있는 서현교회라는 굉장히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제가 그동안 스스로의 신앙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부끄러워진 순간은 은혜를 많이 느끼는 수련회 저녁 집회도, 찬양 축제도 아닌 아주 평범한 주일 저녁 예배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아동부일 때 키즈셀라라는 찬양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날 주일 저녁 예배는 아동부 헌신 예배라서 키즈셀라가 찬양 인도를 했었습니다. 저는 늘 그랬던 것처럼 교회에서 키즈셀라 친구들과 밥을 맛있게 먹고 찬양 리허설을 하고, 예배 시간에 강단에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도 친구들과 떠들거나 장난치지 않고 여느 때와 같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노트에 설교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저녁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가 저에게 꺼내신 말씀은 평소처럼 잘했다는 칭찬이 아닌, “그럴 거면 키즈셀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은 제게는 정말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말이었습니다. 아빠는 그 이유에 대해 “키즈셀라 연습할 때는 본당에서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서서 대충대충 하고, 예배 때는 찬양을 제대로 부르지도 않고, 계속 바닥만 보면서 찬양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빠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짜증도 났고 어이도 없었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인데, 내가 얼마나 성실한데, 그냥 바닥 좀 봤다고 그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저는 그날 제 신앙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잠이 들기 전 갑자기, ‘내가 여태까지 자부심을 느껴왔던 내 신앙이 진짜 신앙이 맞나?’라는 의문이 문득 들었고 그 답은 “아니요”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매번 빠지지 않고 가던 특별 새벽기도회의 말씀 내용은 학교를 가는 순간, 아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었고, 매주 빠지지 않고 가던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는 가기 전부터, 아니 매주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으며 교회에 가서도 툭하면 졸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멍하게 있거나 밖에서 노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게 일상이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그냥 보고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던 큐티와 성경 통독은 사실 자주 빼먹고 잊어버렸으면서 잘 해왔던 척했었고, 큐티 일기에 매일 적는 감사기도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들을 적고 나서 '일상에서 감사기도를 찾으라잖아'라는 합리화를 했었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할 때도 가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기는커녕 수련회 가서 뭘 입을지, 뭘 먹을지만 생각했었고, 저녁 집회 때 흘린 눈물은 정말 은혜를 받아서가 아닌 주변 친구들이 우니까 분위기에 휩쓸려서, 또는 평소에 세상에서 힘든 일들로 참고 있던 눈물이 흘렀던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적은 말씀 노트는 자기만족에 가까웠고, 친구들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를 되돌아보면 늘 교회 안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전도는 교회가 멀다는 핑계로 친구들에게 교회 다니는 걸 드러내지 않고, 아니 숨기며 신앙생활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목사님의 딸이라는 이유로 저를 합리화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요. 핸드폰 배경 화면을 말씀으로 설정하고, 욕을 안 쓰고, 예배를 꼬박꼬박 나오면 뭐 해요, 일상생활에서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그런 행동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예요. 저는 겉으로는, 말로는 겸손한 척, 내가 하는 행동들이 당연한 척, 내 삶에서 교회가, 말씀이, 하나님이 전부인 것처럼, 성실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이 정도 칭찬은 받아도 되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데’ 같은 세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그냥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런 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런 신앙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친구들에게는 예배 시간에 떠들지 말라고, 장난치지 말라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왜 교회를 다니냐 물으면 대답 못 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너무나도 작고 하찮은 믿음으로 지금까지 뻔뻔하게 지내왔다는 게 하나님께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죄스러웠어요. 내가 봐도 작고 연약한 믿음밖에 없으면서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 나온다고 하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눈물을 흘렸던 게 너무 부끄러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더 안타까워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고민을 하다 며칠 뒤 수요 예배 때,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이렇게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제가 봐도 제 믿음이 너무나도 하찮고 작아 보이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제 믿음이 너무 하찮고 작아 보이셨죠? 너무 죄송해요. 하나님. 저의 교만함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네가 생각하기에 작고 하찮은 너의 그 믿음마저도, 그 마음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인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또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항상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에게까지도 도움을 청하고 안 되면 그때서야 겨우 하나님께 기도하는 정도였는데, 하나님은 항상 내가 먼저셨구나. 이 작고 연약한 나의 믿음마저 기쁘게 받아주시는구나. 우리가 정말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 순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께 소중한 나를 생각하고 계셨구나’라는 사실이 정말 크게 은혜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항상 목사님을 통해 말씀하시던, 내가 항상 말씀 노트에 적던 “돌아와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야”라는 말씀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하나님이 하시던 말씀이셨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저의 믿음은 그리 대단하지도, 칭찬받을 만하지도 않고 아직도 너무나도 연약하고 너무나도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하찮고 작은 믿음마저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쓰는 걸 사실 굉장히 망설였습니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만한 자랑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저의 작고 초라한 믿음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제 스스로 다시 한번 느끼고,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느끼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눔상 $100> 박하음/수필- 나의 여정
파티마 성당, Archbishop Carney Regional Secondary School Gr. 11
나의 여정
대부분의 천주교 아이들과는 달리, 저는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천주교 생활을 강조하신 것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성당에 다니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천주교 유치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유치원의 놀이터가 크고 좋아 보여서 가고 싶어 했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당김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었는지, 어쩌면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인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기회를 통해 이 길을 걷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교육을 추구하던 저를 위해서 어머니께서 예비신자 교육을 받으러 다녔고, 그때부터 온가족이 세례받고 지금까지 가톨릭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매주 빠짐없이 성당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왜 성당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습관처럼, 또는 당연한 일처럼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알터 서빙을 시작하면서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비슷한 시기에 농구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저는 미사가 지루하게 느껴졌고, 긴 시간 동안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자주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천주교의 삶은 저에게 아직 깊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농구 역시 비슷했습니다. 저는 농구 자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를 위축시켰고, 그로 인해 스스로 더 노력하기보다는 멀어지려는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성당에 직접 가지 못하게 되었고, 미사는 온라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결국 처음으로 미사를 빠지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인 생활이 점점 느슨해졌던 시기였습니다. 7학년 때 저는 오랫동안 기대해 왔던 견진성사를 받았지만, 막상 받고 나니 특별히 달라진 것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기대했던 순간이었기에 오히려 더 머리가 아팠습니다. ‘왜 나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8학년이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천주교 교육안에 머물렀고, 농구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했고, 스스로 많은 기회를 피하곤 했습니다. 실패가 두려웠고, 그로 인해 도전하기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안 좋은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존재를 분명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제 삶에 있었지만, 제 마음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9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의 삶과 농구, 모두에서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제가 바라는 모습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더 잘하고 싶었고, 더 성장하고 싶었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10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어린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시니어 팀에서 뛰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실력은 점점 오르고 있었고,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출전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리를 얻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즈음에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걸어야 하는 길을 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매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시즌 후반이 되었을 때 저는 선발 라인업에 들 수 있었고, 그것은 저에게 큰 의미를 가진 순간이었습니다. 11학년이 되면서 많은 것들이 점점 더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력도 안정되었고, 좋은 경기를 치르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매 경기 전에 하나님께 작은 기호를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좋은 경기를 뛰게 된다면, 하늘색 차를 제 앞에 보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기도를 마친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실제로 하늘색 차가 제 앞을 지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비가 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맑은 날에 무지개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은 저에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소소한 경험들은 저의 믿음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런 기호를 경험한 날에는 경기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그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신다고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다시 성당에 나가는 것이 조금 느슨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저는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천천히 다시 믿음 속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학교 ‘캠퍼스 미니스트리’ 활동에 참여하면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믿음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아보면, 저는 결코 하나님의 완벽한 딸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고, 종교적인 생활에서 멀어졌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늘 저와 함께하셨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고, 하나님께 전적인 믿음을 두며 인도를 구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들의 삶의 계획에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랑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나눔상 $100> 유다현/수필- “나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밴쿠버 삼성교회, Lord Byng Secondary Gr. 10
나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나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신앙의 시간을 흘려보낸 날들이 정말 많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기도는 나의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주변을 따라가는 것이었고 믿음은 온전히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부모님을 통해 주어진 듯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따라 나가는 공간이었던 교회에서의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말을 듣는 자리일 뿐으로 느껴졌었다. 목사님의 진정성 있는 설교를 들어도 내 마음속 깊은, 곧 어딘가 가 울리는 느낌은 거의 없었을뿐더러 성경 구절을 읽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머릿속까지 닿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머리는 분명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정작 나의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지 고되었던지를 떠나 하루의 끝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만큼은 늘 달랐다. 주로 혼자였지만 종종 엄마나 할머니가 내 곁에 앉아 조용히 손을 잡고 소리 내어 기도해 주시던 그 시간은 낮 동안 쌓였던 나의 불안과 걱정을 하나, 둘 내려놓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류라기보다는 하루를 버텨낸 나 자신을 달래고 돌아보기 위한 시간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화려하지 않았고 길지도 않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잠잠하게 만들고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던 기도를 마친 후 눈을 감으면 잠들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내 생각과 마음을 가득 채우는 느낌과 그 고요한 평안함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 초여름 저녁, 엄마가 자주 하시던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시며 말했다. “다현아, 오늘 같이 기도드리고 자자.” 그때의 나는 그 말이 늘 반복되던 일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특별한 의미 없이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기도는 내 신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소중하다. 엄마는 내 손을 평소보다 꼭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날 하루 받았던 스트레스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걱정들, 그리고 생각보다 곧 다가올 학교생활의 끝에 대한 두려움까지, 나는 막힘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하나 내려놓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기도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날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통해 진짜 성령님께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다음 날, 이상하게 내 마음에는 평안함과 함께 죄송함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친구들,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시고 계셨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쉽게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루에 한두 번 형식적으로 드린 기도만으로, 과연 내가 당당히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깨어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거 같다. 그 이후로 나는 기도를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밤마다 혼자 그리는 기도, 엄마와 함께 드리는 기도,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에도 이전보다 더 진심을 담게 되고 기도를 단순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목적이 아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교회에서 찬양을 부를 때도 그저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 데서 멈추지 않으며 그 찬양이 전하려는 진짜 메시지를 마음으로 들으려 노력하기 시작하니 가사 하나하나가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부를 수 있어서 이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다. 그 후로 갑자기 모든 것이 완벽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나는 확실하게 마음으로 느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걱정에 방황하던 나에게 더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시 시작할 힘이 생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성경 구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모든 변화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덕분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나는 당연히 완벽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본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날의 작은 기도 후 얻은 용기를 통해 나는 전과 비교하여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속 하나님의 은혜를 더 열심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숨 쉬는 것부터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것,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까지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드리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때 한 번의 기도를 통해 내 마음을 여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신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깊다. 오늘도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롭다.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앞으로도 열심히 기도하고자 한다. 내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그 응답은 늦더라도 반드시 주어질 것이고 그 과정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나눔상 $100 > 김준이 /수필- 그날, 십자가가 나에게 닿았습니다.
밴쿠버 순복음교회, École Dr. Charles Best Secondary Gr. 10
그날, 십자가가 나에게 닿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매주 교회에 나갔지만, 예배는 그저 ‘참석하는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찬양은 대충 하거나 서 있기만 했고, 설교도 제대로 집중해 들은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 역시, 오래전부터 들어온 익숙한 이야기일 뿐, 솔직히 제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작년에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019년, 저희 가족은 캐나다에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를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기에 저희 가족은 가정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식탁에 모여 기도하면, 며칠 뒤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곁에서 듣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저 “와, 신기하다. 기도하면 이뤄 주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여전히 저에게 익숙한 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저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의문이 잘못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25년 3월, 교회에서 침례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음이 움직여 침례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신청을 하고 나서도 마음 한편이 허전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해 봄, 저는 밴쿠버 유스 코스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에서 한 찬양의 가사가 제 마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채찍질과 모욕, 그리고 십자가 위의 고통이 제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작은 상처에도 아파하는 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저를 위해 온몸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높은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며 고통 속에서도 저를 바라보시고 묵묵히 그 모든 고뇌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같은 자리에 서야 했지만 두려움에 도망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를. 갓난아기 때부터 들어왔던“예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그날 처음으로 제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달라지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믿음도 생겼습니다. 그 믿음으로 침례 교육을 마쳤고, 부활절 예배에서 많은 성도님들 앞에서 침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제 기대와 달랐습니다. 순종하기 싫을 때가 많았고, 학교 선생님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쉽게 세상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정에서는 형과 다투며 서로를 미워했고, 제 마음대로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제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글을 쓰는 이유조차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몇 주 동안 글쓰기를 멈추고, 이 마음을 외면한 채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3월 29일 주일, 청소년부 예배에서 들은 말씀이 다시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죽음이 가장 큰 고난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저는 다시 십자가의 사랑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감당하신 그 고난을 생각하니, 이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다시 글을 쓰던 중,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날, 이 말씀이 처음으로 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부족하고, 지금도 넘어집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제 의지가 아니라,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저는 오늘도 그 사랑을 붙잡고 살아가려 합니다.
<나눔상 $100> 장혜나/수필- “하나뿐인 위대한 사랑”
주님의 제자교회, Centennial Secondary School Gr. 9
“하나뿐인 위대한 사랑”
위대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봄이 오면 내가 누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듯이 아름다운 사랑이 트이는 걸까? 가족에 대한 사랑, 내 취미, 내 성취감, 또는 내가 너무 아껴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나 재능일까? 어렸을 때 나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고 했으나, 나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현재만큼 많이 깨우치지 못했다. 그저 밥을 먹기 전에 기도를 한다거나, 우리 가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많다는 걸 알았을 뿐. 하나님에게 감사해라, 기도해라, 찬양해라, 사랑하라 등등 여러 가지를 많이 들었다. 왜 그래야 할까? 어렸을 때의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답을 했다. “그야, 나는 크리스천이고 내 가족처럼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렇다. 그때의 난, 그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게 내다보거나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호기심과 의지가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달라졌을 때는 내가 7학년이었을 때다. 나는 생에 처음으로 “코스타”라는 곳에 가게 되었고, 그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의 울림으로 느꼈다. 그때 당시의 나는 너무나 힘들어서 절벽 끝에 매달리는 신세에 가까웠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나를 다시 땅에 안정되게 착지할 수 있게 하셨다. 난 무대 위에 있는 큰 십자가를 보고 울고, 나에게 상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알아가게 해 준 상담사를 꽉 안으며 울었다. 나는 잠시 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빛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난 감격의 눈물인지, 드디어 진실의 빛을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고, 나의 마음은, 나의 믿음의 씨앗은, 자라나서 성장이 되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난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걸 말하자면, 우리는 사실상 죄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죄를 지니고 있던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말, 욕망, 이기심 등등, 우리의 인생의 시험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 지구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살고 있다. 그들 중에서 우리보다 더 부자이고, 더 잘 사는 자들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재능과 권리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은 틀렸다.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이유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고, 그들이 이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위대한 사랑 덕분이다. 하나님은 나무의 튼튼한 줄기와 뿌리이고 우리는 열매들과 같다. 우리가 당분을, 즉, 성취와 행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건 하나님 덕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생각해 보면 정말 얼마나 대단한 건지 또 바로 알 수 있다. 우린 누군가가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를 보면 우린 그 범죄자를 욕하고 한심하게 쳐다본다. “대체 왜 저런 죄를 지었을까.” “저 녀석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들을 하게 된다. 그럼,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같았다면 어땠을까?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 둘은 뱀의 꼬임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실망하셨다. 둘이 옷이 없어서 무화과잎들로 옷의 역할을 하자, 하나님은 둘에게 옷을 입혀 주시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럼 생각해 보자. 만약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자비와 용서를 주지 않았다면은 그렇다. 우리의 존재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순수해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하나님은 우주, 지구, 심지어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굉장히 분노하셨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또한 이 말고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은혜들도 많다. 우리를 사랑의 옷으로 입혀 주시고,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오늘 하루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만들어 준 은혜, 지혜, 회복, 등등 여러 가지로. 한 번은 내가 감기 기운이 심해, 여름성경학교에서 조금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 밤에 기도를 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찬양을 열심히 한 모습을 본 하나님이 나의 목감기를 단 거의 2일 만에 회복시켜 주셨다. 내가 5학년 때 찬양팀으로서 연습한 찬양 중에 “코람데오”라는 찬양이 있었다. 그 찬양의 가사에서 예수님을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는 예수님을”이라고 표현하였고,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언제나 나를 바라보시는 분”이라고 표현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하나님 덕분에 금방 나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신뢰해 가기로 마음을 더 먹었다. 그럼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무엇일까? 솔직히 생각해 보면 참 많긴 하다. 시편에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찬양하라, 섬기라, 가족처럼 편안하게 대해라, 사랑하라는 말들이 있었다. 내 교회에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그것보다 여러 가지가 더 자세하게 나왔다. 예수님을 어떻게 섬길지, 느낄지, 받아들일지, 또는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영원한 가족”이다. 다시 말하자면, 옛날에 나는 사실 예전에 하나님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지금만큼 깊은 뜻을 몰랐으니. 그래서 지금보다는 당연히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죄 때문에 희생하셨고, 내 옆에 항상 있으셨고, 내 예수님은 언제나 나에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몇 년 동안 기다리셨다. 그리고 7학년 때 나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드디어 예수님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이 과정을 거쳐 간 난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눈을 더 뜨게 된 것이다. 내가 늦게 깨달았어도 예수님은 날 꽉 안아 주시면서 받아 주셨다. 사춘기가 된 아이들은 어쩔 때는 스마트폰과 그 밖의 세상을 돌아보곤 부모와의 거리를 둔다. 인터넷에 눌러진 하트들의 수를 눈으로 보고 자신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AI와 같은 기계로 답을 찾고. 이 스마트폰이 자신의 답을 찾는 해설지와 같은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때로는 짜증을 팍 내고, 화를 낼 때도 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계속 남아 있었다. 이 아이가 어두운 방에서 스마트폰 속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왔고 결국 고개를 들어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깨우친다. 이와 같이,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오직 쉬운 답만 찾으려 하고 예수님의 진실되고 뜻깊은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7학년 때, 그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사춘기 아이들은 AI가 알려주는 답들과 스마트폰을 통해 받은 하트 수와 댓글 수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교회에서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라는 찬양을 나레이션 역할로 연습한 적이 있었다. 그 찬양의 가사 중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하였다. 이 가사와 같이, 우린 이 사랑과 믿음을 가슴에 깊이 새겨둬야 한다. 이것은 정말 글로도 표현을 다 못하는, 위대한 불멸의 사랑이다.
<나눔상 $100> 오시온/수필-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
밴쿠버 하임교회, Dr. George M Weir Elementary Gr. 7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은 왜 사람들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누어 볼 겁니다. 밤에 잘 준비를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또 몇 주 전에 유스예배에서 전도사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어두운 밤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었어요. 그리고 이런 질문이 생각났어요. “왜 사람들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걸까? 우리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게 하나님과 관련이 있나?” 그래서 생각을 해 보았는데, 우리가 왜 어둠을 무서워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2개 찾은 것 같아요. 첫 번째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고 죄를 짓지만, 사실은 죄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죄를 안 지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아직도 죄와 아무 상관 없이 살고 싶은 거예요. 두 번째 이유는 성경책을 보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곳엔 죄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니까, 어둠이 죄와 악을 상징해서 우리는 어둠을 무서워하고 싫은 거예요. 사람들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왜 썼냐면, 친구들을 전도할 때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는 증거를 쉽게 알려 주고 설명할 수 있어서 이걸 쓴 거예요. 제가 특히 전도하고 싶은 친구가 누구냐면, 그 친구 이름이 Jeffrey예요. 저는 Jeffrey라는 친구랑 아주 친해요. 학교에서 같이 놀고, 학교 끝나고도 같이 놀고, 후에 같이 집에 걸어가요. 이제부터 제 친구들에게 이 주제를 가지고 많이 많이 전도할 수 있게 하나님에게 기도할게요.
<나눔상 $100> 이우림/수필- 하나님의 사랑
밴쿠버 중앙장로교회, Gordon Greenwood Elementary School Gr. 7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뭘까?”, “우린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까?” 문학상 대회를 앞두고 엄마가 저에게 물어보셨습니다. 평소에 신앙적인 이야기를 엄마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문학상을 앞두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와 하게 됐습니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엄마와 신앙적인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엄마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조건이 없고, 기다림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배움과는 다르게 일상,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문학상에 참여하면서 제 삶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저는 ‘친구와 다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캐나다에 와서 가장 먼저 사귄 친구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같이 놀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각자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친구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감정이 점점 더 북받쳐서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는 생각이 들어 방에 혼자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가 강해질 수 있게 해주세요. 친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해주세요. 이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는 정말 하나님이 저를 강하게 해주시는 것 같았고, 하나님이 제 곁에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어려울 때 제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저를 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둘째, 저는 ‘입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 들었던 노래가 ‘입례’입니다. 노래 자체가 좋지만, 특히 가사가 좋았습니다. ’주가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하시고 마르지 않는 샘물로 우릴 채우시리라’라는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찬양하게 함으로써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또 마음의 치유, 위로, 사랑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례’라는 노래를 통해 저를 예배하는 자 되게 만드셨고, 찬양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어디서나 느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셋째, 저는 ‘스키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엄마와 둘이 지냅니다. 아빠는 한국에서 일하시다가 제가 방학이 되면 캐나다로 오십니다. 올해 2월 겨울방학 중에 아빠가 캐나다로 오셨고,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스키장에 갔습니다. 한국이었으면 당연하게 매일매일 봤던 아빠를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방학 때만 아빠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를 만나는 것이, 또 우리 가족이 함께 즐기는 스키를 타는 것이 저는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당연했던 일상들이 당연하지 않게 됐을 때 우린 속상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상한 마음도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런 작은 일상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7절 말씀입니다. 정말 저의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부터 일상생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번 문학상을 통해서 제 삶에 하나님이 얼마나 깊숙이 들어오셨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마태복음 22장 37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기쁨상 $50> 강혜인/시- 우리 모두가 가진 은혜 외 한 편
쥬빌리교회(Jubilee chapel), Katzie elementary Gr. 4
우리 모두가 가진 은혜
예수님은 우리모두에게 주신 게 있어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셨어.
하나님은 하나 박게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시고
우리에 죄 때문에 그 아들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어
우리는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어.
그래서 우리도 아낌없이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해.
<기쁨상 $50> 손지아/ 시- 하나님의 사랑 외 한 편
밴쿠버 한인장로교회, J.W.Sexsmith Elementary School Gr. 5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산처럼 크고 그 무엇 보다 강해요.
그분의 사랑은
포근한 담요처럼 나를 감싸줘요.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감사해야 해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곳곳에 나누어야 해요.
그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요.
하나님의 사랑은
푸른 바다처럼 깊어요.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머물러요.
<기쁨상 $50> 황하준/수필-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
밴쿠버 하임교회, Nestor Elementary G5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
나는 교회를 마치고 집에 올 때 오늘 예배 들은 것을 생각했다. 오늘 목사님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밥을 안 먹고 그냥 40일 동안 기도했다고 말했어. 그게 나한테는 엄청 신기했다. 왜냐면 만약에 사람이 40일 동안 밤을 안 먹으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죽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걸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밥을 먹었다. 그런데 또 이 생각이 생겼다. 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40일이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굶은 채 앉아 있었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마귀가 예수님 앞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마귀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어요. 그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했잖아요. 그래서 마귀가 이렇게 예수님한테 물었어요. 니가 40일 동안 금식했으니 많이 배고프면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마귀가 얘기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 라고 했다. 그게 나한테 진짜 신기했다. 왜냐면 그 몸으로 싸운 게 아니라 말씀으로 마귀한테 싸운 게 나한테는 신기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 마귀와 예수님이 엄청 높은 데로 갔어요. 그리고 마귀가 물었어요. 만약에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높은 데서 점프해 보라 만약에 천사가 너를 잡아 줄꺼야 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것도 멋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니가 만일 엎드려 절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라고 말했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또 얘기했어요. 사탄아 썩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겨라 라고 말했어요. 와! 그렇게 말하니 예수님 엄청 대단한 거 같아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나중에 이런 사건이 있으면 저는 말씀으로 최대한 해볼게요. 아 참 또 저는 말씀 암송도 열심히 할게요. 예수님 대단해요.
<기쁨상 $50> 김하이/ 시- 예수님과 사과 외 한 편
밴쿠버 평안교회, Castle Park Elementary School Gr. 3
예수님과 사과
사과는 달콤하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음이 달콤하시다.
그리고 사과는 빨갛다.
예수님은 마음이 아주 예쁘게 빨갛다.
사과는 향기롭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향기가 정말 향기롭다.
하나님의 사랑은
산처럼 크고 그 무엇 보다 강해요.
그분의 사랑은
포근한 담요처럼 나를 감싸줘요.

첫댓글 제7회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시상식은
5월 2일 토요일 오후 2시 밴쿠버 평안 교회에서 합니다.
청소년들이 들려 주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은혜의 자리에 함께하시기를 청합니다. ~~
제7회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시상식
2026년 5월 2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밴쿠버 평안 교회
주소: 8765 Government St.
Burnaby BC V3N 4G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