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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希望)의 끈
(String of hope)
커다란 굴뚝이 완성(完成)된 후에 사람들은 그것을 세우기 위해 설치했던 작업대(作業帶)를 제거(除去)하고 있었다. 굴뚝 위에 마지막 한 사람만이 남아 마무리 작업(作業)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업대를 모두 제거한 후에야 꼭대기에 밧줄을 남겨놓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事實)을 알게 되었다.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작업대를 다시 설치(設置)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굴뚝 위에 혼자 남은 작업자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렇다고 굴뚝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다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가족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始作)했다. 모두 절망
(絶望)에 빠진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아내가 남편(男便)을 향해 외쳤다.
“여보, 당신 양말(洋襪)을 벗어보세요.”
굴뚝 위의 남편은 양말을 벗어 들었다. 아내가 정성(精誠)껏 실로 짜준 양말이었다.
그의 아내가 다시 외쳤다.
“양말의 실을 풀어 보세요”
남편은 양말의 실을 풀기 시작하여 실이 길게 풀어졌다.
아내가 다시 외쳤다.
“이제 그것을 길게 이어서 아래로 내려보내세요.”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장면(場面)을 지켜봤다. 남편은 어내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실이 내려오자 아내는 거기에다 질긴 삼실을 묶은 후 남편에게 외쳤다.
“이제 끌어 올리세요.”
질긴 삼실이 남편의 손에까지 올라갔다. 아내는 그 삼실에다 밧줄을 이어 묶어 남편에게 외쳤다.
“이제 당기세요.”
드디어 삼실을 끌어올린 그가 밧줄을 손에 넣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굴뚝 꼭대기에 밧줄을 단단히 묶은 남편은 밧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남편은 울면서 아내를 안았다. 보잘 것 없는 한 가닥의 실이 생명(生命) 을 구(求)한 것이다.
'세르반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잘 것 없는 재산(財産) 보다 훌륭한 희망(希望) 을 가지는 것이 더 소망(所望)스럽다.”
'게오르규'도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때에도 인간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세계(世界)의 종말(終末)이 명백(明白)하더 라도 자기(自己)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이다.”
희망(希望)은 긍정(肯定)적인 생각에서 시작된다. 역사상 안 된다는 생각이 이뤄놓은 일은 한 가지도 없다. 항상(恒常) 긍정적인 생각이 역사(歷史)를 바꿔 놓는다.
최악(最惡)의 상황(狀況) 일수록 긍정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비록 한 가닥 실날 같은 희망일지라도 그것은 기적(奇蹟)을 낳는다.
희망은 연줄이다. 구름에 가려서 연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팽팽한 연줄만 보면 우리는 연줄 끝에 연이 달려 있음을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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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김
오래 전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영국, 독일, 프랑스, 한국, 일본, 미국 등 나라 별로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중국학생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가장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매주 실시하는 검사에서 중국학생 화장실이 늘 지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07년이 되자, 놀랍게도 중국학생 화장실이 제일 깨끗하였습니다.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총장이 학교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어둠 속에서 불이 켜져있는 방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불이 켜진 방을 보면서 총장은
‘늦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면서 한 학생이 대야에 걸레와 비누, 수건을 담아 중국인 화장실 쪽으로 가더니
열심히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총장은 이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
“예! 총장님...”
“학생은 매일 밤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가?”
“예.”
“훌륭하네! 헌데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텐데 학생은 어찌 화장실 청소를 하나?”
“저는 중국인 신입생인데, 우리나라 학생 화장실이 가장 더러워서 매일 청소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겠습니다.”
“자네 이름은?”
“제 이름은 장개석입니다.”
“장개석이라…”
총장은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장개석은 특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훗날 중국의 총통이 되었습니다.
섬김은 사람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따르게 하며,
존경을 낳기에 결국 성공의 자리까지 이르게 합니다.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장로의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는 청년시절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비록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머슴을 본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는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조만식은 제자들이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여러분은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가르쳤습니다.
섬김은 능력이고 성공의 첩경입니다. 섬김은 열매의 지름길입니다.
당신의 '섬김'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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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
🧑🦱논개에 대한 오해
논개의 본명은'주논개' 입니다.
조선시대 1574년 전라북도 장수에서 선비였던 부친 '주달문' 과 모친인 허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양반가의 여식이었습니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자
숙부의 집에 어머니와 함께 몸을 의탁하고 지냈는데 어린 나이지만 용모가 출중하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능했다고 전해집니다.
평소, 이를 눈여겨 보아왔던 장수 고을 어느 부호가 논개를 어여삐 여겨 민며느리로 삼고자 그에 대한 댓가로 그녀의 숙부에게 쌀 50석을 지불 하였습니다.
그러나 논개 모녀는 이를 거부하고 모친의 고향인
경상도 땅으로 도주해
어느 지인의 가택에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소문 해 추적해 온 고을 부호에게발각되어
장수현감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을 현감으로 충의공 최경회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넉넉하고도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논개 모녀의 억울하고도 딱한 처지를 소문으로 듣고 있던 터였기에 무죄석방 하였으며,오갈 데 없는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자신의 관저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배려까지
해주었다고 합니다.
논개가 성인이 되면서
아리따운 처자가 되어갈 무렵 장수현감 최경회는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몸이 된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평소 아름답게 보아온
논개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현감 최경회는 넌지시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알렸고, 논개의 승낙을 받아내자 곧바로 자신의 후부인(후처)으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현감 최경회는 전라도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해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훗날 조정에서는 최경회의 공로를 인정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봉하고 경상도 지역 병권을 줌으로써 왜구와 맞서게 했으나 격전지에서
그만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잃고 비통해 하던
논개는 애국과 남편의 복수를 동시에 실현할 방법으로 왜장을 죽일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왜군 장수들이 승전에 도취되어 연회에서 술에 취해 있을 때 논개는 자신의 눈부신 용모를
기생으로 분장하여 가파른
바위끝에 서서 왜군의 장수를 유혹했던 것입니다.
모두들 겁을 먹고 절벽에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지만 적장의
우두머리는 자신의 용기를
과시라도 하듯 논개에게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논개는 자신의 계획대로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채 적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뛰어들어 꽃다운 나이를 그렇게 조국에 바쳤습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변영노 시인의 '논개'
라는 시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았습니다.
논개가 기생이었다는 잘못된 현장기록 때문에 그녀의 존재가 안타깝게도 정사에는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어우야담' 의 저자
유몽인의 지적도 있었습니다.
논개는 분명 해주 최씨인 경상도 병마절도사(종2품의 벼슬) 최경회의 엄연한 후부인이며,
선비 주달문과 모친인 허씨 사이에서 태어난
양반가의 여식입니다.
또한 열녀이자 뜨거운
애국충정 열사인 것이죠.
여기, 그녀의 충열을 기린
변영노 시인의 멋진
시가 있어 올려드리오니
함께 감상해 보세요.
🌤1.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 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2. 아리땁던 그 아미
(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븕은
그 마음 흘러라.
🌊3. 푸르른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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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하는 마음
서울대 병원장을 지내신 한만청 선생님입니다.
직경 14cm의 간암이 폐로도 전이돼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97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올해 88세 임에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계십니다.
결론은 그냥 즐겁게 살자는 겁니다.
집사람과 저는 선문답처럼 "감행조”란 말을 주고 받습니다.
"감사하고
행복해 하고
조심하자."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감행조" 하십시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위대한 일이고, 생존한다는 것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으며 위험성이 도처에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정말 인생 80까지 살면 90점이고, 90살이면 100점이라고 평소에 공언해 온 것이 타당함을 새삼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화두처럼 여기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1. 기적은 특별한
게 아니다.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보내면
그것이
기적이다.
2. 행운도 특별한
게 아니다.
아픈 데 없이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이
행운이다.
3. 행복도 특별한
게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웃고 지내면
그것이
행복이다.
하루하루가 하늘에서 특별히 주신 보너스같이 생각됩니다.
오늘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은 내가 부활한 날입니다. 어제 밤에서 다시 깨어났습니다.
70세 부터는 하루 하루가 모두 특별히 받은 보너스 날입니다.
오늘을 인생의 첫날 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처럼
즐기며 사십시요.
천국은 감사하는 사람만 가는 곳이랍니다.
건강하게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음이 엄청난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부디 매일매일 매사에 감사하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로 항상 기쁨이 충만한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프지 말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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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대 1 의 승리 / 재탕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 라고 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하며 임금을 압박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하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公)은 공(公), 사(私)는 사(私)" 라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 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 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말에 선조도 체념하고 오직 1명의 곧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꺾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1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당부했다.
"나를 위해 부고도 하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400년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은 정정당당했던 청백리(淸白吏)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