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기념일이었습니다. 3세기 초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순교하신 두 분은 주인과 하녀였습니다. 그분들에 관한 이야기가 동향 출신이신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쓰신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에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때의 박해에, 어린 아들을 둔 22세의 어머니이며 신자인 페르페투아와 임신 8개월 차이며 예비신자인 펠리치타가 감옥에서 지내면서 자선과 선교를 베푼 이야기, 페르페투아 보았던 영적인 환시 이야기, 그리고 맹수형에 처해서 고통을 받았지만 주지 않자 다시 참수를 당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분들은 초대교회에서 공경을 받아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감사기도인 감사기도 제1양식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모두 어머니였던 점에 주목합니다. 펠리치타는 출산하고 딸을 입양한 뒤에 고문과 죽임을 당합니다. 모성을 넘어서는 신앙을 증언한 분이기에 더욱 신앙의 감동을 줍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에서 그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녀를 하느님께 맡기는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비정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가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19) 가톨릭성가 146번에 보면 성령송가가 있습니다. 라틴어로도 가사가 나와 있는데 3절에 보시면 “digitus Paternae dexterae”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부분이 “아버지의 오른 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쓰신 방식은 성령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이라는 영어가 바로 이 손가락이라는 단어 “디지뚜스”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마귀를 끊고, 마귀의 유혹과 허례허식인 우상을 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의 의미는 악의 세력과 결별하면서 오로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빛 안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셔서 이끄시는 것인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우리가 행동하고 난 다음에 정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요?
이런 질문은 우리가 늘 하는 질문이고 어쩌면 그 답도 대충 알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답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살았던 삶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삶의 윤곽에 대한 질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너무 무겁고 그것만해도 바쁜데, 그 일의 행로에 대해 앞뒤 전후좌우를 다 살피는 생각들은 사치스러울 때가 많이 있지요. 생각도 못하고 살기도 쉽습니다.
성경 말씀 두 가지를 묵상하시라고 드립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오셔서 이미 와 계신 성령을 다시 일깨워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이 성령을 체험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의하시면서, 순명의 대답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대답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바오로 사도께서 신앙과 선교의 여행의 한 순간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때까지의 모든 일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성령께서 이끄셨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의 하느님 체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상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을 새롭게 영적으로 만난 놀라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 7,23)
(비전동성당 주임신부 정연혁 베드로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