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시조 2019년 봄호>
반 컵의 물/ 강현덕
반 컵의 물이 있다
그대가 마시다 둔
조금은 흔들린다
그대의 오후 세 시
내게도
남아있는 날들과
지나온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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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복습/ 김보람
엎드렸다 일어나며
한 감정에 도달한다
촛불의 음모 같은
나, 라는
편애에 대해
어제를
벗어난 어제, 일주일의 형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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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박초란
저렇게 용감하게
어느 사나이 지폈을가
봄비에도 붉게붉게
타오르는 불빛 불빛
내 가슴 당신 꽃으로
붉게 핀 줄 아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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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고성기
‘사는 게 꽃 같네’
툭 던진 어느 시인
맑았다 흐렸다 비오다 햇빛 나네
고희를
갓 넘긴 아침
곱씹어보는 내 삶은
그 꽃이 떨어져서
뿌리를 덮는 것은
달려올 검은 겨울을 온몸으로 막아섬이니
그렇다!
아름다움은
그래서 핏빛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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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 박홍재
하루를 노끈으로 목줄 하나 매어 달아
수신기 높이 올려 귀 쫑긋 열어 놓고
휴대폰 호출기 소리 반응하는 로봇이다
손님의 횡설수설 골목길이 답답하며
무엇이 곤죽 되게 버무려 놓았을까
오늘만 맡기고 싶다 내 하루도 대리 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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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를 기다리는 까만 양/ 유순덕
불안만으로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을까요
하늘에 핀 하얀 구름에 웅크려 잠이 들었죠
이력서 쓰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거든요
두 귀 쫑긋 세워 봐도 피리소리는 안 들리고
산등성이 눈보라만 양떼들처럼 몰려오는데
새하얀 구름을 입으면 출근할 수 있을까요
양치기를 기다리는 이곳은 깊은 동굴
까만 모습 이대로 좋다는 벨소리가 들린다면
휘어진 들길을 돌아 난, 화들짝 달려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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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겨울 바닥에 엎드려 흘린 눈물이 봄날의 잎을 틔운다/ 노창수
영국인들은 절름발이 거지를 돕기 위해서는 동전 한 푼 안 내놓지만 죽은 인디언을 보기 위해서라면 열 푼도 내놓는단 말이야.
- 셰익스피어의 『탬페스트』 중에서 어릿광대 트린큘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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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19년 여름호>
상춘/ 박정호
보여주고 보는 일이다
말없어도 끄덕하며
스쳐가듯이 혹은, 손 꽉 잡고 이 땅에서 우리 만나
그렇게 놀아지는 것을,
싫든 좋든 꽃피는 시절.
그것 말고 뭐 있겠나
그렇겠나, 안 그렇겠나.
함흥차사 걸음으로 터벅터벅 헤아려 와서
꽃에게 날 보여주네
꽃이 날 보고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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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 김소해
게으른 나의 서기는 타자술을 개발했다
깊은 울림 시구들을 받아 적으라니까
빗소리 창을 두들겨 자판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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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마라/ 김제현
1.
‘그래도 지구는 돈다’지만
언제 쉴지 모르고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 제 먼저 알고
긴 줄 뒤에 서 있네
2.
그래도 내일은
좀 낫겠지, 나아지겠지
많은 날의 많은 생각
허물어지는 기대여
인생은 널 속인 적이 없다
너에게 속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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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박영식
봄 일기 쓰기 위해 초록 연필 깎았어요
참새도 곁에 앉아 뭘 쓰나 기웃기웃
채점을 매긴 이슬비 유리구슬 상줘요
햇볕이 놀러 와서 떡잎양산 펼쳤어요
일개미 고물고물 꽃밭은 동화나라
모두들 쉬게 하려고 그늘 내어 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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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뎃잠이다/ 정혜숙
휘파람새 소리를 좇아 맨발로 달려갔다
대청마루에 엎드려 빗소리도 들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다정하며 환했다
살 꺾인 우산을 쓴 복사뼈 붉은 아이
바람 많은 먼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이따금 돌부리에 채여
우는 날도 있었다
낙서뿐인 노트와 빛바랜 책들 위로
어둠이 내린다, 참 오래 걸었지만···
오늘도 한뎃잠이다
눈물 없이 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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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시의 뮤즈가 나타날 간구(懇求)의 글쓰기/ 노창수
뮤즈를 기다리지 말라.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일곱 시부터 세 시까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뮤즈에게 알려 주는 일이다. 그걸 알게 되면 뮤즈는 당신 앞에 나타나 시를 질겅질겅 씹으며 마술을 부리기 시작할 것이다.
- 스티븐 에드윈 킹(Stephen Edwin King) 『유혹하는 글스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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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19년 가을호>
사랑과 이별에 대한 몇 가지 해석/ 서숙희
사랑은 현금이고 이별은 외상이다
사랑은 총론이고 이별은 각론이다
사랑은 입체적이고 이별은 평면적이다
그 모든 것 한데 섞인 소용돌이가 사랑이다
그 모든 것 눌어붙은 지리멸렬이 이별이다
그 모든 사랑과 이별은
아, 낙화이며 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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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혈을 하며/ 정용국
비밀은 늘 그 안에 다 숨어있다
내 혀를 속이고 눈감아준 방심들을
낱낱이 수치로 보여줄
단 한 방의 압수수색
한계치를 훌쩍 넘고 경고가 난무하는
그늘진 난수표에 며칠은 슬프지만
또다시 걱정을 마신다
출두할 날을 기다리며
비장의 카드도 없이
포토라인에 설지라도
당당하게 말하리라
파렴치한 장관처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모두 하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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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파트/ 박홍재
하루씩 키를 높여
제 모습 감추었다
무더기 군상들이
앞산 일부 가려졌다
먼 곳을 바라보던 눈
발 아래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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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고성만
그 여자 속눈썹이 함초롬 젖어있다
온몸 검은 상제나비 얼룩덜룩 나는 밤
못다 한 노래 소리로 차츰차츰 밝는 아침
깨끗이 씻긴 산허리 깊어가는 계곡물 이틀 사흘 내리고 또 내리는 우
중에 산 넘어 강을 건너서 수수밭 마을 지나
매캐한 연기 내음 군불을 지필 때
진초록 잎새 사이 분홍으로 타오른다
손 모아 합장하는 이마 물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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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짜다면 짜다*/ 송태준
느끼한 미사여구는
감히 나대지 마라
단돈 서 푼 반에
배포는 덤이라
맘 편한
혼밥을 먹다
모처럼, 손님답게
*서초동 ‘남부버스터미널. 2층 구내식당 벽에 붙여 놓은 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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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만 한 사람/ 이서연
피었다
지는 꽃엔
씨앗이 지문이다
붙들던
푸르름엔
사랑끝이 단풍이다
어떤가
가을만 한가
그대에게 이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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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점/ 이송희
이제 그만 일어설까
막차가 떠나간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는 손을 내밀며
빈속에 부서진 밤을
마저 털어 넣는다
오래전 멈춘 시침은
자정에 가깝고
빚 문서 사르던
파란 불꽃 보인다
서로의 끝이었던 길
서서히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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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인은주
시커먼 뒷산이 어제처럼 울었다
배신당한 사람처럼
굵다란 목청으로
보란 듯 세상을 향해 한쪽 팔을 잘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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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를 위한 변명/ 정광영
그리도 숨죽이며
심장을 겨누었으나
당긴 화살들은 모두
과녁을 벗어났고
버려진 말의 뼈들은
비바람에 삭고 있다.
간절한 네 눈빛을
애써 외면한 나는
이제 잡초 무성한
묵정밭으로 가서
뒤늦은 후회를 꺼내
다시 호미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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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시조의 샘, 그 ‘깊이’에의 도달을 향한 점층/ 노창수
네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라! 그 밑에 샘이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외치게 놔두어라.
‘아래로 가면 오직 지옥뿐이다’라고 해도.
-니체 『즐거운 지식』(제155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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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19년 겨울호>
어느 날의 일기/ 김정연
밤새 뒤척이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벼르던 힐을 사고 햄버거 두 개 먹었다
오호라 깜빡할 뻔했네 세상 떠났다 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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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 독거노인/ 김종욱
오늘은 누구에게
소식이 올 것 같아
갈걷이 마무리도
서둘러 끝내 놓고
가지 끝 잎새 하나가
마음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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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먼지/ 노창수
오르던 이곳 언덕에서
나 떠돌이를 멈추었다
큰 저택이 지어지자
웃음마저 누르던 긴장
비바람 닳아진 거실에 걸
화려한 생애 화필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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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도 동백/ 리강룡
떠나고 돌아옴이야 하늘의 뜻이지만
연둣빛 바다 저쪽 성채(城砦) 닮은 작은 섬 하나
한 백 날 피 쏟는 울음 울어 새는 꽃이 있다
기쁨도 쌓으면 그 또한 짐인 것을
단장(斷腸)의 슬픔이야 울음으로 풀릴까만
피어서 통으로 울다 툭툭 지는 꽃이 있다
팽팽한 바다 저 건너 꽃소식이 오는 날은
오히려 제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꽃
외진 섬 교체의 자리가 산실(産室)처럼 뜨겁다
선홍 빛 울음들이 떨어져 슬픈 벼랑
그 끝을 씻는 바다 지느러미 새로 돋으면
유쾌한 자맥질을 나서는 숨비 소리 듣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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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放生)/ 박복영
기왓장 위 잔설이 새 발자국 물었다가 후끈해진 햇살에
어금니를 풀고 있다
호로롱, 날아간 새 울음이 나른한 잠을 깨듯
제 몸을 녹여가며 꽉, 깨문 감금을 허물어진 눈물로
애틋한 듯 풀고 있다
아찔한 허공 뚫고 온 눈초리도 무너져
근육 진 소유마저 스러진 눈물무덤. 울부짖듯 놓아
버려 속내 참 편안하다
울음도 사라진 자리, 어머니가 얼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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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차는 제로다/ 박희정
떨어지는 물 폭이나 소용돌이 그 사이
폭포가 되고 싶냐, 웅덩이가 되고 싶냐
너와 나
낙차는 제로다
따지거나 재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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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화자와 함께 걷는 유유함, 그 자동기술을 따라가다/ 노창수
마음 상하는 온갖 일 눈앞에 있어, 추운 서재에서 밤새도록 잠 못 이루었네
옷걱정, 밥걱정, 근심은 그치질 않은데, 다시 병오년을 맞이하게 되었네.
(萬事傷心在日前 寒齋撤曉袛無眠 虞衣虞食虞無止 更與相逢丙午年)
- 남효온(南孝溫)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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