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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브로 보기 https://youtu.be/r0lcML1Y784
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5. 소리를 듣고 도(道)를 깨닫고
[운문선사가 어느 땐가 법을 보이셨다.
"소리를 듣고 도(道)를 깨닫고, 색(色)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고 하신 옛 분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운문선사의 초구로 “소리를 듣고 도(道)를 깨닫고, 색(色)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말하여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무엇입니까?
조사선선은 “마음(心)”으로부터 “사람(人)”에 이르러, 지금 당장(當下)의 일거일동, 견문각지로써 자기 본래가 부처임을 체득함을 더욱 강조한다. 임운이란 사람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행하여 자연자재한 자신의 심신 전체 그대로가 부처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조사선에서 주장하는 “임운자유”와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혜해선사의 법문에 이러한 문답이 있다.
원율사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도를 닦음에 노력을 합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노력한다. 어떻게 노력합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모든 사람이 전부 그렇게 하는데 스님의 노력과 같지 않습니까?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백 가지로 분별하며, 잠잘 때 잠만 자지 않고 천 가지로 계교하니 따라서 다른 것이다. 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대주혜해는 우리들에게 닦음(修)과 닦지 않음(不修)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임운수행(任運修습)은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즉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의 당하지심(當下之心) 가운데서 체현하는 것이다. 조사선선에서 이른바 견문각지는 진여본성의 작용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견문각지가 원래 너의 본성이며 또한 본심이다. 다시 이 마음을 떠나서 별따로 부처가 없다.
이것에 대해 황벽희운 또한 해석하기를,
다만 견문각지 그곳에서 본심을 깨달아라.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견문각지 위에서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 위에서 생각을 움직이지 말라. 그리고 견문각지를 떠나서 마음을 찾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하지 말라.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 불즉불이(不卽不離),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불주불착(不住不着)이라,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
일체 모든 법이 담연(湛然)하고 공적하여 필경공(畢竟空)이요 필경정(畢竟淨)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본성, 본심의 작용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성은 비록 견문각지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견문각지 가운데서 그 성품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아 같지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아서(不卽不離), 자연히 곧 번뇌 가운데서 보리를 증득하고, 세간사 가운데서 불사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유마경』에 또한 제시하기를, “법은 견문각지가 아니다. 만약 견문각지를 행하면 곧 견문각지일 뿐이어서 법을 구함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오염이 없다. 만약 세간법에 대해 여전히 집착한 바가 있고 내지 열반에 대해 역시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더러움에 탐착한 것이라 불법을 구할 수 없다. 불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견문각지를 구하면 그것은 견문각지의 감수와 마음의 의식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불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조는 불성의 작용(有)의 입장에서 “견문각지가 본성이다.” 라고 말했고,『유마경』은 불성의 본체(空)의 각도에서 “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문각(文覺)선사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평술하고 있다.
불법의 두 글자는 오직 부처에게만 이 법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중생에게는 이 법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불법이라 말한다. 부처(佛)란 깨달음(覺)의 뜻이니 깨달음은 곧 법이다. 깨달음은 미혹으로 인해 세운다. 어떤 것이 미혹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를 만들어 인식하고, 견문각지에서 바로 견문각지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어떤 것이 깨달음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라 부르고, 견문각지에서 견문각지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똑같이 산하대지를 보고 똑같은 견문각지인데 어째서 미혹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가? 돌!
산하대지, 견문각지여! 몇 번이나 너를 향해 미혹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했던가. 결국 깨달음을 말하고 미혹을 말해도, 참됨을 말 하고 거짓을 말해도,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중생을 인도하니, 나와 그대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은 본래 스스로 이루어지고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고, 미혹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다. 오직 중생을 위하여 집착과 집착 없음, 걸림과 걸림 없음을 말하고, 망견으로 공도 있고 유도 있으며, 참됨도 있고 거짓도 있으며, 미혹도 있고 깨달음도 있음을 말한다. 만약 일념을 회광반조하면 자연히 만법이 갖추어지리라. 이 도리를 알고자 하는가? 나귀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또 온다.
혜능이 일찍이『단경』에서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곧 견문각지해도 만 가지 경계에 물듦이 없고 항상 자재하다”라고 제시한 이후, 신회가『어록』가운데서 또한 “비록 견문각지가 있으나 항상 공적하다.”라고 설했다. 신회는 견문각지의 “공적영지(空寂靈知)”를 강조했는데, 즉 공적의 영지요 영지의 공적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성은 공적하면서 신령스레 알고, 신령스레 알면서 또한 공적하다. 자성의 공적영지에서 보면, 눈으로 보되(見) 봄이 없고 봄이 없되 본다. 귀로 듣되(聞)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되 듣는다. 몸으로 느끼되(覺) 느낌이 없고 느낌이 없되 느낀다. 마음으로 알되(知) 앎이 없고 앎이 없되 안다.
그러므로 황벽은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불즉불리(不卽不離),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부주불착(不住不着),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이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眞)도 아니요 거짓(妄)도 아니고, 미혹(迷)도 아니고 깨달음(悟)도 아닌” 불이중도성(不二中道性)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선자가 일념 가운데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면 자연히 만법이 청정공적함을 단박에 깨달아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된다. 청안납자(靑眼衲子)를 놓고 말하면, 견문각지는 산하대지의 견문각지요, 산하대지는 견문각지의 산하대지이다. 그러므로 “산하대지, 견문각지여! 몇 번이나 너를 향해 미혹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했던가. 결국 깨달음을 말하고 미혹을 말해도, 참됨을 말 하고 거짓을 말해도,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도인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라 부르고, 견문각지에서 견문각지하게 하는” 임운자재한 무사인(無事人)인 것이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대대법(對對法)이며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이며 오직 모든 것은 다 있는 그대로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견문각지를 말씀하시고는 다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이 소리를 듣고 도(道)를 깨치는 것이며, 색(色)을 보고 마음을 밝히는 것이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부정해 버립니다.
왜 긍정하고 부정해 버릴까요? 이것라햐면 저것이 생겨나고 저것이라 하면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가 됩니다.
모든 것은 명색(名色)이니 이 명색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알면 깨달은 것일까요? 아니면 미혹인 망상(妄想)일까요 불법이나 조사선도 항상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를 이용한 팔만사천방편문(八萬四千方便門)일 뿐인 것입니다.
조사선 또한 집착하지 말라 속지말라 있는 그대로가 진실여상(眞實如常)한 진여(眞如)이며 진리(眞理)이며 부처이며 불성(佛性)인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밝혔는데
조사선은 왜 전부 사구백비(四句百非)로 부정해 버릴까?
이것은 모든 것은 본래공(本來空)이요 무일물(無一物)임으로 본래부터 한 물건이건 한 생각이건 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치지만 언제이건 다 소멸해 버려 공으로 돌아가며,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하니 시간상으로 보면 다 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길이 없다.
조사선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있는 그대로가 진리인데 왜 인정하지 않을가 상대성을 다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백장선사의 열가지로 벗어나는 길이 바로 본래공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다 부셔버리면 다 공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견문각지는 아뢰야식의 여래장(如來藏)인 것이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본다면 다 배우고 익혀 만들어진 관념이며 사상이며 철학이며 종교적 관념임으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길만이 도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사람은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럼으로 사람이라는 개체도 우주의 법칙속에서 살아갈 수 있지 우주의 질서가 깨어지며 인간은 그 어떻한 방법으로도 우주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란 우주의 법칙 자연의 법칙속에서 사람도 살아가는 것이지 그 법칙을 벗어난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이것은 자연과 우주의 광대무변한 삼천대천세계에서는 융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리는 바로 우주의 법칙 자연의 법칙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른 사람의 능력으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말하는 한 생각은 다 여래장(如來藏)의 소현이고 자기의 관념일 뿐인 것이다. 그럼으로 이것을 인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불입문자(不立文字) 심행처멸(心行處滅)인 것이다. 그래서 오직 전오식과 육실과 칠식과 아뢰야식까지를 합하여 여듧가지의 의식 작용은 사실 우주의 법칙 자연의 법칙에는 이것을 피해가는 방편이지 이것을 뛰어 넘는 진리의 세계는 오직 이 의식의 작용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만이 자연적으로 사람이는 모든 생명은 우주의 생멸과 자연의 생멸은 다 같은 영각성(靈閣性)인 불성(佛性)을 가지고 태어났음으로 의식의 작난이 거침으로써 있는 그대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여 깨달음이며 본래공이며 진여(眞如)의 세계 불국토(佛國土)미며 니르바라의 세계이며 극락이며 화엄법계(華嚴法界)이며 일진법계(一眞法界)이며 제법실상(諸法實相)인 불이중도(不異中道)인 것이다. 돌~~~~~~~!!!!!!!!!!!
[이어서 말씀하셨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돈을 가지고 와 호떡을 사는구나."]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제법실상임으로 전제하여 본다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누구입니까?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세음은 범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의 한역이며,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로 음역(音譯)되기도 한다. 밀호(密號)로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현장(玄奘) 이전의 구 번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음(觀音), 관세자재(觀世自在) 등으로 번역했으나, 신역에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번역했는데 원어 아바로키타(Avalokita, 觀하다)와 이슈와라(i○vara, 신 또는 自在天)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더 정확한 번역이지만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역의 관세음보살이다.
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이므로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 시무외자(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 대비성자(大悲聖者), 그 밖에도 원통대사(圓通大士),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 특히 고통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을 듣는 존재이다. 그는 열반(涅槃)에 들 수도 있었으나 모든 살아 있는 무리의 신음을 듣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열반을 연기하고 세상에 남아 있기를 결심하였으므로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반드시 온다. 위급할 때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나타난다. 길 잃은 사람, 가난한 사람, 환난에 빠진 사람, 불행한 사람, 아픈 사람, 노환으로 고통받는 사람, 여행 중인 사람, 침몰하는 난파선에 탄 사람, 강도를 만난 사람, 농부, 뱃사람 할 것 없이 관세음보살은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자연재해· 인재뿐만 아니라 짐승, 심지어는 귀신으로부터 구한다. 관세음보살은 특히 여성· 어린이· 상인· 뱃사람·장인· 죄수의 보호자다.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관세음보살은 수호성인· 수호천사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이며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시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경전이 둘 있는데 묘법연화경 속의 관세음보살 보문품과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정성을 다해 지송(持誦, 경전․진언을 지니고 독송함)하는 천수경이다.
묘법연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차분히 읽어 보면 관세음보살과 관련해서 해야 할 이야기들을 모두 다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단어가 나온다. 노닌다. 라는 말이다. 한문 경전에서는 노닐 유(遊)를 쓰고 있는데 유람한다, 돌아다닌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말 자체를 놓고 보자면 관세음보살님이 이 중생의 세상을 다니며 교화하는 모습이 진지하고 엄숙하고 간절하기보다는, 마치 유람하듯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놀이를 하듯 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처하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반야심경에서 지혜 제일 사리불에게 공(空)의 이치를 들려주는 관세음보살인 만큼, 도통한 분들이 세상을 대하는 모습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물 흐르듯 자유롭다는 뜻일까?
무진의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묻는다. 부처님, 관세음보살은 이 사바세계에서 어떻게 노닙니까? 어떻게 중생에게 설법합니까? 중생들에게 어떤 방편으로 대하십니까?
① 불의 재난(火難) ② 물의 재난(水難) ③ 바람의 재난(風難) ④ 무기의 재난(刀杖難) ⑤ 나찰 귀신의 재난(鬼難) ⑥ 형벌의 재난(枷鎖難) ⑦ 원수와 도적의 재난(怨賊難)에 직면한 중생이라면, 그리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바람을 품고 있는 중생이라면, 또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중생이라면 관세음보살을 떠올리고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다 구제된다는 법문을 부처님에게서 들은 직후라 이 무궁무진하고 무애자재(無礙自在)한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에 그만 말문이 막힌 무진의 보살은 대체 그런 능력을 어떻게 세상에서 부리고 다니는지, 혹시 사바세계 중생을 교화하는 관세음보살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이 보살(菩薩)이 세상을 교화(敎化)함에서는 중생의 근기(根機, 사람 됨됨이)에 알맞게 여러 가지 형체로 바꾸어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이는 곧 관세음보살이 중생(衆生)을 그 됨됨이에 맞추어 제도하기 위하여 그 몸을 각각 다르게 바꾸어 나타내는 것으로 모두 33신(三十三身)이라 한다.
서른세 가지는 ① 부처 ② 벽지불 ③ 성문 ④ 범왕 ⑤ 제석천 ⑥ 자재천 ⑦ 대자재천 ⑧ 천대장군(天大將軍) ⑨ 비사문(毘沙門) ⑩ 소왕 ⑪ 장자 ⑫ 거사 ⑬ 재관(宰官) ⑭ 바라문 ⑮ 비구 ⑯ 비구니 ⑰ 우바새 ⑱ 우바이 ⑲ 여성 장자 ⑳ 여성 거사 ㉑ 여성 재관 ㉒ 여성 바라문 ㉓ 남자아이 ㉔ 여자아이 ㉕ 하늘 ㉖ 용 ㉗ 야차 ㉘ 건달바 ㉙ 아수라 ㉚ 가루라 ㉛ 긴나라 ㉜ 마후라가 ㉝ 집금강신 등이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은 서른세 가지 몸으로 자유자재하게 자신을 변화시킨다. 어찌 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대목을 접할 때면 가슴이 뛴다.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먼저, 관세음보살이 부처로도 몸을 바꾼다는 항목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 설법까지 할 수 있을까?
이미 부처의 경지에 충분히 이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므로 관세음보살이 부처보다 낮은 경지인 보살의 차원이 아님을 알 수 있을뿐더러, 어쩌면 이미 부처님이요, 그런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더 걸림 없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의 경지마저 사양하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두 번째로 짚어볼 뜻은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가 관세음보살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내 주위의 직간접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분노를 느끼게 하여 내가 얼마나 감정에 잘 휩쓸리는 사람인지, 수양이 덜 된 사람인지를 반성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 자신의 민낯을 보기 힘들었을 텐데 이들 중에 분명히 관세음보살이 계시리라 생각한다면 세상은 즐겁다. 관세음보살은 내게 행복한 순경계(順境界)만을 안겨주는 분이 아니라, 역경계(逆境界)를 드러내어 나를 마음공부 시켜주는 선지식(善知識)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동물로까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는 말에 담긴 뜻도 짚어봐야 한다. 앞서 원효 스님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준 파랑새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 동물, 개·고양이·참새·비둘기·개미·코끼리 심지어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해 죽은 바다생물 등 온갖 동물 중에 관세음보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수도 없이 소비하고 낭비하고 쓰레기로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을 일깨우기 위해 죽어가는 동물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 이렇게 관세음보살은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분이기도 하지만, 지독한 번민과 욕망과 어리석음과 분노에 사로잡혀 악업을 일삼을 때도 등장한다. 딱 그 사람에게 적합한 대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아차하는 마음이 들어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말이다.
네 번째로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33이란 숫자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33신(身)을 중시하는 것은 3이란 숫자가 지니는 의미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3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성스러움을 의미한다. 10이란 숫자도 완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33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성스러움을 의미하는 숫자가 겹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모든 형상, 모든 존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불상도휘(佛像圖徽)에서는 나뉨이 또 다른 33인데, 이는 경전이나 의궤(儀軌)의 33신 관세음보살과는 다르다고 한다. 당(唐)나라, 송(宋)나라 이후 민간(民間)에서 신앙되는 것을 모은 33관음(三十三觀音)이라 하며 그 이름은 1) 양류관음, 2) 용두관음, 3) 지경관음, 4) 원광관음, 5) 유희관음, 6) 백의관음, 7) 연와관음, 8) 농견관음, 9) 시약관음, 10) 어람관음, 11) 덕왕관음, 12) 수월관음, 13) 일엽관음, 14) 청경관음, 15) 위덕관음, 16) 연명관음, 17) 중보관음, 18) 암호관음, 19) 능정관음, 20) 아뇩관음, 21) 아마뎨관음, 22) 엽의관음, 23) 유리관음, 24) 다라존관음, 25) 합리관음, 26) 육시관음, 27) 보비관음, 28) 마랑부관음, 29) 합장관음, 30) 일여관음, 31) 불이관음, 32) 지련관음, 33) 새수관음이다. 또 관세음보살은 6 관음이 일반적이며 그중에서 성관음(聖觀音)이 본신(本身)이고 나머지 다섯 가지 모습은 보문시현의 변화 신이다.
① 성관음(聖觀音), ② 천수관음(千手觀音), ③ 마두관음(馬頭觀音), ④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⑤ 준제관음(准提觀音), ⑥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이며 혹은 위의 준제관음을 제하고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을 넣어 6 관음이라 하며, 그 모두를 7 관음(七觀音)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십일면관음과 수월관음, 천수관음이 가장 많이 신앙 되었고, 관음보살 화로는 고려 시대의 수월관음도가 많다. 관음보살은 관음전 또는 원통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심법계(心法界)에서 본다면 열반과 극락세계의 서방정토 대교주이신 아미타불과 좌보처 관세음보살과 우보처는 대세지보살을 삼존불로 보듯이 관세음은 바로 마음의 본체를 무량수무량광인 아미타로 칭하였으며 마음의 작용을 관세음보살로 그리고 그 형상은 보신불인 대세지로 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돈을 가지고 와 호떡을 사는구나”라고 하시는 것은 지금 여기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다 관세음의 화신인 것처럼 지금 여기서 호떡을 사는구나라고 하시여 비추이는 상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운문선사는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만두였구나."]라고 말을 다시 하십니다. 이 말씀은 호떡이로 하나 만두라고 하나 그 본원은 밀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니 본원으로 돌아가면 다 하나인 일진법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운문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