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시, 봄》
1부 ― 우산을 돌려주지 않은 남자
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서윤은 기차역 앞에 서서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늦가을의 비는 여름비와 달랐다. 세상을 적시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렸다. 오래 잊고 있던 기억 하나쯤 슬며시 꺼내 놓고 가는 비였다.
“하필 오늘이네.”
서윤은 혼잣말을 하며 가방을 뒤졌다. 우산이 없었다.
분명 카페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었다. 짙은 자주색 천에 손잡이가 나무로 된 우산이었다. 오래 사용해 손잡이에 작은 흠집이 생겼지만 그래서 더 정이 들었다.
기차 출발까지는 7분.
다시 카페로 뛰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개찰 안내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 우산 하나쯤이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플랫폼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기어이 찾으러 갔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줄었다는 점이었다.
물건도 그렇고 사람도 그랬다.
떠날 것은 떠나고 남을 것은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조금 편해졌다.
서윤은 창가 좌석에 앉았다. 젖은 플랫폼 너머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길게 흘러내렸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톡톡.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플랫폼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니, 뛰고 있었다.
짙은 회색 코트에 검은 머리카락이 빗물에 조금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는 낯익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
“내 우산!”
남자가 우산을 들어 보였다.
서윤은 창문을 열 수도 없는데 엉겁결에 손을 흔들었다.
기차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그 남자는 몇 걸음 더 따라왔다.
서윤은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냥 가지세요!”
물론 들릴 리 없었다.
그런데 남자는 알아들은 듯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천천히 말했다.
“싫은데요.”
서윤은 피식 웃었다.
별난 사람이네.
기차는 곧 플랫폼을 벗어났다. 남자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산을 잃어버렸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웃겼다.
‘싫긴 뭐가 싫어.’
서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웃었다.
그렇게 끝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스침이 있다. 여행지에서 길을 알려 준 사람, 식당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 기차에서 잠깐 눈이 마주쳤던 사람.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
그 남자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삶은 가끔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를 핑계 삼아 사람을 다시 데려다 놓는다.
⸻
사흘 뒤였다.
서윤은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참석했다.
오래 알고 지낸 후배가 기획한 전시였다. 제목은 ‘시간이 머문 자리’.
오래된 골목과 폐역, 빈집의 창문, 낡은 의자 같은 것들을 찍은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서윤은 그런 사진을 좋아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사진.
그녀는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비어 있는 나무 벤치였다.
벤치 뒤로 늦가을 나무가 서 있었고, 바닥에는 낙엽이 수북했다.
“저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을 것 같죠?”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돌아보았다.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봤더라.
남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알아본 쪽은 남자였다.
“우산.”
그 한마디에 기억이 돌아왔다.
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남자도 웃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서윤은 그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그날은 비에 젖어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인상이 부드러웠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있었고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조금 먼저 올라갔다.
“우산 도둑.”
서윤이 말했다.
남자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둑이라뇨?”
“남의 우산 가지고 갔잖아요.”
“제가 가지고 간 게 아니라 서윤 씨가 두고 갔죠.”
서윤의 표정이 멈췄다.
“잠깐만요.”
“네?”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남자가 갤러리 입구 쪽을 가리켰다.
방명록이었다.
“아까 쓰는 걸 봤습니다.”
“남의 이름을 훔쳐봐요?”
“우산 도둑에 이어 이름 도둑까지 됐군요.”
“상습범이시네.”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서윤도 웃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제 우산은요?”
“집에 있습니다.”
“왜 안 가지고 왔어요?”
“서윤 씨를 여기서 만날 줄 알았으면 가져왔겠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한 번 더 만나야겠네요.”
서윤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별말도 아닌데 묘하게 들렸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우산 돌려드리려면요.”
“택배로 보내셔도 되잖아요.”
“주소를 모르는데요.”
“주소 알려드리면 되죠.”
“그건 좀 재미없지 않습니까?”
서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사람이 다시 만났는데 우산만 택배로 보내는 거요.”
참 이상한 남자였다.
그런데 싫지는 않았다.
“성함은요?”
서윤이 물었다.
“도현입니다. 한도현.”
“직업은?”
“취조입니까?”
“우산을 돌려받으려면 범인의 신원을 알아야죠.”
이번에는 도현이 크게 웃었다.
“건축합니다.”
“건축가?”
“네.”
“그래서 오래된 건물 사진을 좋아하나 봐요.”
도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부터 새 건물 사진에는 별 관심이 없었잖아요.”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글 쓰는 사람은 사람 구경이 직업이거든요.”
“작가세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냥 씁니다.”
도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눈빛이 잠시 달라졌다.
“그냥 쓰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데.”
“왜요?”
“평생 쓰겠다는 뜻이니까.”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뜻밖의 말이었다.
그 말이 마음 한쪽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
전시를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밖에는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윤이 처마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도현이 물었다.
“우산 없습니까?”
“누구 때문에요.”
“아.”
그가 웃었다.
도현은 자신의 검은 우산을 펼쳤다.
“같이 가시죠.”
“괜찮아요. 택시 부르면 돼요.”
“택시 타는 곳까지라도.”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젊은 날 같았으면 별 의미 없이 우산 아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달랐다.
한 우산 아래에 선다는 일이 왜 이렇게 의식되는지.
“싫으면 제가 비 맞고 갈까요?”
도현이 물었다.
“왜 선생님이 비를 맞아요?”
“서윤 씨가 제 우산 아래 들어오기 싫다니까.”
“누가 싫다고 했어요?”
“그럼 들어오세요.”
도현이 우산을 조금 높이 들었다.
서윤이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어깨가 가까워졌다.
빗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툭, 툭, 툭.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도현은 우산을 서윤 쪽으로 기울였다.
덕분에 서윤의 어깨에는 비가 닿지 않았지만 도현의 오른쪽 어깨는 조금씩 젖고 있었다.
서윤이 말했다.
“우산 똑바로 쓰세요.”
“똑바로 쓰고 있는데요.”
“어깨 젖잖아요.”
“괜찮습니다.”
“왜 괜찮아요?”
도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윤 씨 안 젖으면 됐죠.”
서윤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이 나이에 이런 말 하나에 마음이 흔들릴 줄 몰랐다.
그녀는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여자들한테 원래 그렇게 친절하세요?”
“아닙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서윤이 웃었다.
“대답이 수상한데.”
“정말 아닙니다.”
“그럼 왜 저한테만 그래요?”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서윤도 따라서 멈췄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저도 그게 좀 궁금하네요.”
가슴 한쪽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서윤은 먼저 시선을 피했다.
“택시 왔어요.”
마침 길가에 택시가 멈췄다.
도현이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이 타려다 돌아섰다.
“제 우산.”
“네.”
“꼭 돌려주세요.”
“그럼요.”
“언제요?”
도현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다시 만나면.”
“언제 다시 만나는데요?”
“그건 서윤 씨가 정해야죠.”
서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산 가진 사람이 정해야지 왜 제가 정해요?”
“그럼 제가 정해도 됩니까?”
순간 둘 사이가 조용해졌다.
서윤은 대답 대신 택시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돌아보았다.
도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검은 우산 아래에서 택시가 멀어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서윤은 책을 읽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한도현입니다. 우산 보관 중입니다.〉
서윤은 피식 웃었다.
곧이어 두 번째 문자가 왔다.
〈보관료가 많이 밀렸습니다.〉
서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얼마인데요?〉
답장은 금방 왔다.
〈커피 한 잔이면 됩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집어 들었다.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비싼 우산이네요.〉
잠시 후.
〈우산이 비싼 게 아닙니다.〉
서윤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다시 만나는 게 귀한 거죠.〉
서윤은 한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밤의 비는 차갑지 않았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 하나가 마음 어딘가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몰랐다.
우산을 돌려받기 위해 만나게 될 다음 약속에서, 도현이 아주 태연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서윤 씨, 우산은 돌려드릴 수 있는데요.”
“그런데요?”
“이제 다른 핑계를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