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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의 연혁
한 민족의 문화가 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금호강 원류 지점인 영천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천지역에는 기원전 취락집단의 존재와 정치적 지배자의 출현 및 사회체제를 입증하여 주는 지석묘가 200여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지석묘와 더불어 이 시기의 거석유물인 입석도 여러 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영천지역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녕면과 화산면 일대에서는 기원전 3~2세기경의 세형동검(細形銅劍․동과(銅戈)와 같은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다. 동검․동과와 같은 유물은 지배자의 신분의 상징물인 동시에 실용적인 무기로서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지배권력, 재부(財富)의 축적 상태 등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이는 지석묘 축조단계와는 구별되는 정치․경제적 발전과정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서 북방계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대두되고 있다. 화산면, 신녕면 지역이 아닌 금호읍 어은리에서 북방계 문화요소를 주류로 하는 일괄 유물군이 발견되었다. 이 속에는 방제경을 비롯하여 한경(漢鏡), 대구(帶鉤) 등이 반출되고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유력한 정치집단이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고경면 용전리 일대에서는 기원전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 청동꺾창(동과), 청동노기와 쇠투겁창, 쇠꺾창, 딘조쇠도끼 등 다량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이는 영천지역 선사시대 사회와 문화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영천지역에는 기원전 3~1세기경에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서북부의 북천유역과 동남부의 남천유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정치집단이 성장,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영천지역 최초의 부족국가는 골벌국(骨伐國)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골벌국은 서기 236년 아음부왕이 신라 조분왕에게 스스로 항복하고 영천지방은 절야화군이 되었으며 그 영역에 도동화현, 사정화현, 매열차현이 존치되어 있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절야화군이 임고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영현은 장진현, 임천현, 도동현, 신녕현, 민백현이다. 임천현은 원래 골화소국의 지역을 개칭한 것이고, 도동현은 도동화현을, 신녕현은 사정화현을, 민백현은 매열차현을 개명한 것이다.
고려초에 이르러 임고군에 도동, 임천 2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라 개칭하였고(혹은 고울부(高鬱府)로도 불리어짐) 신녕현은 그대로 존치되었다. 성종 14년(995)에는 종전까지 지방의 호족들에 의해 일종의 자치형태로 운영되었던 지방 통치체제의 변화에 의해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함에 따라 자사(刺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경주에 이속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 다시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부사(副使), 판관(判官)이 파견되었으며, 우왕 9년(1383)에는 지주사(知州事)로 승격되었다. 별호는 익양(益陽), 또는 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작은 지역이면서도 주(州)로 사용하는 군, 현은 주 대신에 산(山)이나 천(川)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개정함에 따라 영주에서 비로소 오늘의 명칭인 영천(永川)으로 개칭되고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였다. 세조 12년(1467)에는 다시 지군사에서 군수(郡守)로 개명되었다.
인조 21년(1644)에는 향인 출신 군관 김석남(金碩男), 심기원(沈器遠)의 역모로 현(縣)으로 격하되었다가 효종 4년(1653) 다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1704년 영천영역이었던 와촌 일대를 하양현으로 할속하였다. 철종 4년(1853)에 김수정(金守禎)의 역모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철종 12년(1861)에 다시 군으로 복구되었다.
신녕현은 본래 사정화현으로 신라 경덕왕때 신녕으로 개칭하였으며 임고군의 영현이 되었다. 그 후 민백현을 합속시켰으며 고려초 임고군이 도동, 임천을 합해 영주로 개칭될 때 신녕현은 그대로 존치되었다. 또는 화산(花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주에 이속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1)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조선 초에 이지현을 내속시켰으며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고 치소를 장수역으로 옮겼다. 연산군 3년(1497)에 현의 아전들이 현감 길수(吉脩 )의 엄하고 사나운 것이 괴로워 고을을 비우고 도망하니 현을 폐현시켜 영천군에 귀속하고 북면 신촌리 땅을 의성에 붙이고, 남면 이부현 땅은 하양에, 서면 치산리 땅은 의흥에 붙였다가 연산군 9년(1503)에 복구시켰다. 1896년 신녕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1909년에는 칙령 제49호로 지방구역 정리의 건이 반포되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기형적인 행정구역인 월경지(越境地), 비입지(飛入地)가 정리됨에 따라 북안면 일대 등이 영천으로 편입되고 입암곡(立岩曲) 일대가 청하면으로 할속되었다.
1914년 부․군 폐합시 신녕군이 폐지되고 영천군에 병합되어 종전까지 방만하고 세부적이던 면이 14개면으로 축소 조정되어 근대적인 행정 체제를 갖추었으며 그 후 점진적으로 축소 조정하여 11개면이 되었다. 즉, 영천면은 1933년부터 연차적으로 5개면(내동면, 내서면, 완산면, 예곡면, 명산면)이 통합되어 이루어졌다.
또한 청통면은 북습면, 산저면이 통합되어 이루어졌고, 화산면은 아촌면, 대량면, 즐림면이 합한 것이고, 신녕면은 현내면, 치산면이 통합되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자양면은 그대로였고, 임고면은 아천면, 환귀면으로 성립되었고, 고경면은 고촌면, 추곡면으로, 화북면은 지곡면, 신촌면으로, 금호면은 고현면, 거여면, 창수면, 칠백면으로, 대창면은 모사면으로 성립되었고, 북안면은 원당면, 비소곡면, 원곡면으로 이루어졌다.
1937년 7월 1일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7월 1일 금호면이 읍으로 승격 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면서 영천군과 분리되어 독립행정을 펴게 되었고, 그 후 다시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1983년 2월 15일 법령 제11027호에 의거 금호읍 도남동과 청통면 오수동, 쌍계동 그리고 화산면 매산동이 영천시로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자로 화북면 삼창출장소(1963년 1월 1일자로 출범)가 대통령령 제11874호로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 법률 제12007호로 임고면 언하동과 신기동이 영천시로 편입되었으며 경산군 와촌면 계당동 일부가 금호읍으로 편입되고 아울러 청통면 죽정동 일부가 경산군 와촌면 상암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1일에는 청통면 서산동이 대통령령 제12557호로 역시 영천시로 편입되었다.
1994년 4월 25일 영천시 ․ 영천군 통합에 대한 주민투표 결과 다수의 찬성으로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1994년 8월 4일 공포)로 다시 시․군을 통합하여 영천시가 되었다.
1998년 10월 20일 명산동과 오미동이 중앙동에 통합되고, 교동․대전동․서산동을 통합하여 서부동으로, 주남동 ․ 봉작동 ․ 영도동을 통합하여 남부동으로 하는 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여 현재는 1읍 10개면 5개 동의 행정구역을 갖추고 있으며 인구는 약 11만여 명, 도시 면적은 919.33㎢로 경상북도에서 여섯 번째로 넓은 도시이다.
◎ 영천의 자연환경
1) 위치
영천시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350㎞여 지점에 위치하고 경상북도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접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중심 도시이다.
2) 지형 및 지세
영천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의 남동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구지역과 연결된 분지이다. 지형적으로 태백의 높은 준령이 동남으로 흘러내려 북으로는 보현산, 동으로는 운주산, 서로는 팔공산, 남으로는 사룡산이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싸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곳에서 뿜어내는 맑은 물이 신녕천, 고현천, 자호천, 고촌천 등 작은 시내를 이루고 있다. 이 시내가 다시 영천 땅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삼백리 굽어 도는 금호강의 원류를 만든다. 시내 좌우로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영천지역은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낙동강 문화권과 형산강 문화권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이들 문화권의 연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독창적인 금호강 문화권을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흔히 영천의 지세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의 명원루 기문과 조양각 시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이수삼산이 어디를 지칭한지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수(二水)는 남천과 북천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고경면 덕정리 동남쪽 어림산에서 발원하여 고경면을 거쳐 영천시를 관류하는 고촌천과 자양면 보현산 자락 도일리에서 발원하여 임고면을 관류하여 영천시 조교동에서 고촌천과 합수하여 남천을 이루고 보현산 왼쪽인 화북면 상송리 노고령에서 발원하여 화북면을 종단하여 화남면을 거쳐 쌍계동으로 흘러드는 고현천과 팔공산 자락의 신녕면 치산리에서 발원하여 부산리를 거쳐 동남으로 흐르다가 화룡동 일대에서 고현천과 합수하여 북천을 이루었다.
이처럼 각각 합류된 남천과 북천이 다시 오수동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의 원류를 이루는데 여기서부터 도동보까지의 구간을 동경도(東京渡)라고 한다. 이는 고려시대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삼산(三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대체로 좁은 의미로는 작산, 마현산, 유봉산을, 넓은 의미로는 보현산, 팔공산, 운주산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인류의 문화가 강 유역에서 전개되고 발전된 것처럼 금호강 원류 지점인 우리 지역도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어 기름진 평야가 넓게 펼쳐져 고대 문화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대 사회에서 영천 지역은 영남 남부 내륙에서는 가장 번성한 농경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그 후 역사 과정에서도 경북권역에서는 항상 웅대한 지역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신라 때는 경주의 관문이었고 그 후에는 영남 남단지역에서 개성이나 한양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근대에 와서는 영남지방 어느 곳으로도 통하는 교통의 중요한 길목이 되고 있다.
◎ 영천 임고서원(永川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鄕老)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이 사림들과 창건을 의논하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시작하여 2년 뒤인 1555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대왕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 재사액(再賜額)받았으며, 인조(仁祖) 21년(1643)에 여헌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正祖)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 인(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峯) 황보인(皇甫仁)을 제배(躋配)하고, 현재 제2차 성역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대왕 9년조에 창건과 사액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상향축문과 제문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지었다.
① 예조가 아뢰기를, “전대(前代)의 서원(書院) 규정을 두루 고찰해 보니 모두 지명(地名)으로 이름을 지었고 별도의 뜻을 취하여 편액(扁頟)을 만든 것은 없었습니다. 송(宋)나라 때의 네 서원도 모두 지명으로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서 총애하고 아름답게 여겼으니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 숭양서원(崇陽書院) · 악록서원(嶽麓書院) · 응천부서원(應天府書院)과 같은 것이며 그 나머지 태실서원(太室書院) · 수양서원(睢陽書院) 등등 많습니다. 이번의 영천서원(永川書院)도 딴 명의(名義)를 세우려고 할 것이 없기에 영천의 별호인 임고(臨皐) · 익양(益陽)을 서계합니다.”하니, ‘임고’라는 이름을 내렸다. 사신은 논한다. 우리 동방에 처음에는 서원이란 명칭이 없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개연(槪然)히 유학(儒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선유(先儒)들이 도를 강론하던 곳에 집을 짓고서 많은 선비들이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곧 주문공(朱文公)이 백록동에 서원을 세웠던 뜻이다. 이후부터 호응하여 주창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에도 서원이 무릇 두서너 군데가 되었는데 영천의 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우리 동방에 문학(文學)이 융성해질 것이 반드시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주세붕의 유학에 대한 공로가 어찌 적다하겠는가.(조선왕조실록 명종 9년 10월 10일)
② 예조가 아뢰기를, “정몽주(鄭夢周)의 도덕과 절행은 안유(安裕)에게 뒤질 것이 없습니다. 그가 생장한 곳에 서원을 세워 학도들이 학문을 닦게 하고 풍화가 도타워지게 장려하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므로, 편액을 하사하고 서책 · 노비 · 전결(田結)을 하사하는 일들을 한결같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예에 의해 시행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노비와 전결은 본도 감사의 계본에 따라 이미 해사에 이문(移文)하여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서책은 소수서원의 예대로 사서오경 1질을 문무루(文武樓)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내려 보내고, 『강목(綱目)』 및 『사문유취(事文類聚)』는 남아 있는 것이 1질뿐이어서 내려주기가 곤란하니 이 밖의 교서관이 사온 책 중에서 『소미통감(少微通鑑)』 · 『통감속편(通鑑續編)』을 1질씩 내려 보내되 책마다 첫째 권에 연월일과 ‘내사임고서원(內賜臨皐書院)’이라고 써서 내려 도타이 장려하는 뜻을 보이고 편액은 ‘임고서원(臨皐書院)’ 4글자를 큰 글자로 쓰되 아래쪽에 연월일과 ‘선사(宣賜)’ 등의 글자를 함께 새겨서, 공사(公事)를 보는 사람 편에 부쳐 그 도의 감사에게 교할(交割)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정몽주의 충절은 완악한 사람을 감격시키고 야박한 사람을 도타워지게 할 수 있으므로 뒷사람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서책을 하사하고 편액을 큰 글자로 써서 내린 것은 충절을 장려하여 후학들을 흥기시키는 훌륭한 뜻이다.(조선왕조실록 명종 9년 11월 2일)
퇴계 선생이 지은 제문과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다.
임고서원 제문(臨皐書院祭文)
아, 아! 우리 동방의 한 모퉁이는 기자(箕子)가 다스리던 곳인데, 세상이 퇴폐하기에 이르러 대도(大道)가 묻혀 없어졌으니, 선각(先覺)이 없으면 누가 인심을 착하게 하겠습니까? 혁명하고 개물(改物)하는 것은 천지의 대변(大變)이므로, 거룩함이 하늘에 어울려서 이미 상제의 돌봄을 받았으나, 대충(大忠)이 없으면 백성의 윤리를 누가 보겠습니까? 아, 아! 우리 부자(夫子 : 포은 선생)께서는 천성이 빼어난 인걸(人傑)로서 성인을 바라는 학문과 하늘을 지탱하는 힘을 지니어,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충성하며, 매우 어려운 세상을 만나 임금을 위해 애쓰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완악한 자를 복종 시키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황제를 감동시키며, 경륜(經綸)에 힘을 다하여 쇠망하는 것을 일으키고 피폐한 것을 보충하며, 큰 집이 넘어지매 나무로 버티고 강물이 터지매 배로 건너셨으나, 예전부터 영웅은 운수가 가면 성공이 없는 것이므로,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여기고 홍모(鴻毛)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기셨습니다. 아조(我朝)의 성덕은 포전(褒典)이 매우 융숭하여 예관(禮官)에 명하여 거룩한 공자(孔子)와 같이 종사(從祀)하매, 위로 국학부터 아래로 주현(州縣)까지 향사(享祀)하는 의식이 양양(洋洋)히 크게 나타났는데, 더구나 이 고천(古川)은 기름진 들이 망망(芒芒)하고 맑은 시내가 혼혼(混混)한 부자(夫子)의 유허임에랴? 정문(旌門)은 엄연하고 손공(孫公 : 名 舜孝)의 찬사가 있어 고산경행(高山景行)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격시키는데, 어찌하여 사학(祠學)을 세워서 공경하고 숭상하는 뜻을 명백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송나라에서는 서원을 창제하여 선정(先正)을 높이고 후인이 본받게 하여 오도(吾道)를 크게 밝힌 것이 여기서 가장 아름다웠거니와, 우리 임금께서 그 법칙을 따라서 저 풍시(豊始)를 허가하셨는데, 우리가 이어받아 분발하지 않으면 한 지방의 부끄러움이 됩니다. 그래서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이 합의하여 이 언덕을 보고 재물을 내어 일을 도탑게 하니, 향리(鄕里)와 열읍(列邑)에서 모두 희사하매, 사당을 훌륭하게 짓고 당사(堂舍)가 늘어서고 온갖 것을 장만하느라 일이 쉽게 끝나지 않는데, 이 말이 방백(方伯)에게 미치어 임금에게 아뢰어지매, 서적을 반급(頒給)하고 편액(扁額)을 내리시어, 교화의 근원이 밝게 열리었습니다. 몇 해가 다시 지나 경사스럽게도 일이 끝나매 길일을 잡아 사당 안에 모시려 하니, 동호(同好)가 많이 모여 와서 엄숙하고 온화하며 준조(樽俎)가 정결하고 서직(黍稷)이 향기롭고 풍성한데, 향이 비로소 오르니 영풍(英風)을 뵙는 듯 합니다.
아, 아! 우리 부자께서는 해동(海東)의 유종(儒宗)이신데, 후학이 불행이도 논저(論著)를 미처 보지 못하였으므로, 반궁(泮宮)에서 횡설수설하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실마리를 찾으려 하여도 증거 할 데가 없고, 오직 성취하신 것을 살펴보면 먼저 그 대체를 세워서 천지의 강유(綱維)가 만세에 길이 힘입었으며, 학구(學求)를 이렇게 하는 것이 도의 표준이므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성현이 끼친 경적(經籍)을 발휘하여 교화를 밝히는 것을 힘쓰고 도를 넓히는 것을 영예로 여기셨으니, 부자에게 우러러 바라지 않으면 누구를 맹주로 삼겠습니까?
신명이 오시거든 우리 정성을 살피시어 우리가 올리는 음식을 흠향하시고 우리에게 광명을 주시며, 이제부터 비롯하여 대대로 편안하소서.
상향축문
學造天人 학문은 천인(天人)에 이르고
忠貫日月 충성을 일월(日月)을 꿰시니
光前啓後 전성(前聖)을 빛내고 후학을 열어주는 것을
永世無斁 영세토록 그치지 않으오리다.
◎ 인조기사모본(仁祖己巳摹本) 정몽주 영정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된 인조기사모본과 2본이 더 있는데, 그 전체적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제작연대, 필자 ․ 세부묘사 등은 각기 다르다.
동일본에서 중모(重模)되어 내려온 모본으로 모두 오사모(烏紗帽), 청포단령(靑袍團領), 각대(角帶)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며 포석(舖席)과 배경은 묘사하지 않았다.
숭정기사모본은 견본채색(絹本彩色)에 169.5× 98㎝이며, 김육(金堉)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그림의 오른쪽 아래편에 ‘숭정기사모본’이라고 흑서(黑書)되어 있어 1629년에 중모(重模)된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포은 선생 영정으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오사모에 담청색의 단령포를 입고 있는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으로 좌안부분(左顔部分)의 안모(顔貌)를 하고 있는 연폭의 비단에 그려져 있는데 의습(衣褶)도 먹선이 아닌 청색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면에 걸쳐서 비단이 떨어져 나오고 훼손이 심한 편이나 고격(古格)을 지니고 있고 또한 현존 작품 중에는 연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 조옹대(釣翁臺)
선생이 여묘를 지낸 도일동에는 현재 임고서원이 있으며, 서원 북동쪽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선생이 낚시를 한 곳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조옹대라 부르고 있는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선생의 방후손인 함계 정석달(鄭碩達)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조옹대에서 놀다(遊釣翁臺)
潭照濂溪月 못에는 염계의 달이 비치고
臺傳洛社風 대에는 낙사의 바람이 전하였네
古人今不見 옛 사람을 지금 보지 못하였음에도
千載起湥衷 천재의 깊은 충심을 일으키네
◎ 포은 정몽주 유허비각(圃隱 鄭夢周 遺墟碑閣)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태어나신 유서 깊은 마을이다. 고경면 창하리를 통해 임고면 우항리로 접어들다가 좌측 들판너머로 자그마한 비각이 하나 보이는데 그 비각아래 포은 선생 유허비가 우뚝 서있다.
화강암으로 되어있는 비(碑) 중앙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우측에는 공신 찬성사 대제학 정몽주 익양군 경오 봉충의군(功臣贊成事大提學鄭夢周益陽郡庚午封忠義君)이라 새겨져 있으며 좌측에는 홍무 기사 3월 석영수 정유 입비(洪武己巳三月○永守鄭宥立碑)라고 새겨져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72호 지정된 이 비를 세운 유래를 살펴보면 포은 선생이 19세이던 공민왕(恭愍王) 5년(1355) 정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廬墓) 3년을 지내고 그 후 10년 후인 공민왕 14년(1365) 11월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여묘 3년을 지내는 등 지극한 효성을 다하니 이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니 조정에서 그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해 당시 태수인 정유(鄭宥)로 하여금 선생의 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愚巷里)에 효자리(孝子里)란 비를 세우니 그 때가 선생이 53세 되던 해인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이다.
그로부터 약 100여년이 지난 뒤인 조선 성종(成宗) 18년(1487)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손순효(孫舜孝)가 순력(巡歷) 도중에 이곳에 이르러 유숙(留宿)중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땅속에 묻혀 있으니 꺼내주기를 청한다.”라는 꿈을 꾸고 난 그 다음날 촌노들과 더불어 땅속에 묻혀 있던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비각 전면에 1각(一角) 대문을 두고 주위에는 토담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비각에는 조선 성종(成宗) 17년(1486) 경상감사 손순효가 지은 기문과, 명종(明宗) 19년(1564) 정거(鄭琚), 선조(宣祖) 40년(1607년) 황여일(黃汝一)의 기문이 게판(揭板)되어 있다.
중종 10년(1515) 권벌(權橃)이 지은 효자비 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아! 선생을 동방에 내니, 말세에 나시어 몸으로 지키셨습니다. 강물이 이미 터졌는데 손을 기울여 막으시니, 몸이 있으면 나라도 있고 나라가 망할 때 몸도 망하셨습니다. 충성이 일월을 꿰어 강상을 심으셨으니, 넋은 돌아와 고향에 계실 것입니다. 누가 비를 세웠는지 용의가 큰데, 사전(祀典)이 거행되지 않으매 내 마음이 상합니다. 칠휴(七休 : 손순효의 자(字))가 한 번 제사하매 오도가 빛났거니와, 이제 그 글을 읽으매 추상처럼 늠렬(凜冽)합니다. 부끄럽게도 내가 어리석은 자질이 이 고장을 지키니, 고산경행이 나를 발돋움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여 한 잔 올리니, 신령이 계시거든 제 진심을 비추어 아소서.
◎ 포은 선생 신도비
포은 선생의 신도비는 묘역에 이르는 마을 좌측과 영천 임고서원 내에 있다. 묘역 아래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임고서원의 신도비는 묘역의 신도비를 탁본하여 1998년 임고서원 성역화사업 일환으로 세워졌다.
신도비명 : 서(序)를 아울러 적는다
포은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백팔십 여년 뒤에 후학 은진인(恩津人) 송시열은 이를 위하여 이렇게 설(說)한다.
천하에 있는 도는 없어지는 것이 없으나, 그것이 사람에 의탁된 것은 절속(絶續)이 있으므로, 그것이 세상에 행해지는 것에는 명회(明晦)가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주부자(朱夫子)가 이른바 이는 다 천명이 하는 것이고 사람의 지력(智力)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다. 아아! 선생 같은 분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호걸(豪傑)한 재주를 빼내고 특립(特立)한 자질을 타고나서 고려의 운수가 끝나갈 때에 섬기는 바에 노고를 다하여 신하의 도리를 다 갖추신 것은 본디 이미 사책(史冊)에 전하여져서 옛사람과 나란히 전하여지거니와, 고려에 선생이 계셨던 것이 어찌 불행이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선생은 하늘이 우리 동방을 위하여 낳으셨다. 우리 동국은 동쪽 벽진 곳 오랑캐 가운데 있었는데, 주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 은태사(殷太師)가 와서 임금이 되어 8교를 베풀었으니, 이는 반드시 그의 조상인 순(舜)의 사도(司徒)가 공경히 베푼 것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이어서 일어난 이가 없어서 이천년 동안 자취가 살아지고 말이 없어져,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 사라져 가더니, 호원(胡元)의 때를 당하여 오랑캐의 풍속이 동방에까지 물들여 윤리가 더욱 쇠퇴하여, 진실로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여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는 때가 되었다. 선생께서 퇴환첨묵이(妥歎帖睦爾, 원나라 순제의 이름) 5년 정축(충숙왕 복위6년, 1337년) 십이월 무자일에 나셨다가 홍무(洪武) 임신년(공양왕 4년, 1392년) 4월 4일에 돌아가시고, 용인 모현촌(慕賢村) 문수산(文秀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의 언덕에 장사하니, 휘(諱)는 몽주(夢周)이고 자(字)는 달가(達可)이시다.
나시기 전에 이미 아름다운 징조가 있었고, 조금 자라셔서는 곧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여, 부모의 상(喪)에는 다 여묘(廬墓)하여 상제(喪制)대로 마치시니, 비록 예법에 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벼를 먹이고 비단옷을 입히고 부처를 공양하는 중을 먹여주는 풍속이 점점 그 구습을 바꾸게 되었거니와 의관문물(衣冠文物)은 중국의 제도를 따라 쓰고 가죽신과 풀옷의 비루한 풍속을 고쳤으니, 중국 제도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꾼 조짐이 이미 여기서 보였다. 경서를 강독하고 이치를 논하는 데에는 주자(朱子)를 주로하되 횡설수설이 다 꼭 들어맞으니, 어지러운 고주(古註)가 사람을 그르치지 못할 뿐더러, 옳은 듯하되 그른 강서(江西, 양명학파를 이름), 영가(永嘉, 영가학파를 이름) 같은 것도 행하여지지 않게 되니, 마치 온갖 냇물이 바다로 가고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듯하게 되었다. 주자가례에 따라 사당을 세워서 제사의 예가 바로 잡히고, 북로(北虜)를 거절하고 의주(義主)에게 귀부(歸附)하여 춘추(春秋)의 법이 밝아졌으니, 대게 그 굉장한 강령과 성대한 작용은 다 귀신에게 물어도 의혹이 없고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이러하므로 본조(本朝)의 선비들이 근본을 미루어 그 도학의 연원을 연역(演繹)하여 전장문물(典章文物)이 낙건(洛建)에 까지 올라가고 은주(殷周)에 까지 점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다 선생에게서 시작된 것이니, 나라를 다스려 보전하고 충성을 다하여 인(仁)을 이룬 것은 선생의 여사(餘事)이다.
본조에서 국초(國初)부터 점점 더 포숭(褒崇)하고 중묘조(中廟朝)에 이르러서는 정암(靜庵) 등 제현(諸賢)이 나서 더욱 천명(闡明)하여 드디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하였으니, 숭상하여 보답하는 법이 지극 하였다.그러나 설총, 최치원, 안유 등 제현과 조관(條貫)을 같이한 것으로 말하면 상론(尙論)하는 사람이 혹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신우(辛禑), 신창(辛昌) 때의 일은 사책(史冊)에 빠진 글이 많으므로 선생이 진퇴한 의리에 대하여 후세 사람 중에 혹 의심하는 자가 있으나, 선생의 의(義)가 정(精)하고 인(仁)이 익숙하여 도(道)로 주선하였거니와, 군자가 한 일을 어찌 뭇사람이 알바이겠는가? 예전에 이것을 퇴계 이 선생에게 물은 자가 있었는데 이 선생이 말하기를, 과오가 있는 가운데서 과오가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과오가 없는 가운데서 과오가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거니와, 이것은 지극한 말이다. 아아! 선생은 위태로운 나라에서 마음껏 다하다가 마침내 몸을 나라를 위하여 바치셨으니, 그 충성이 성대하고 상제(喪制)의 예에 있어서 옛 풍속을 능히 바꾸셨으니 그 효도가 성대하였다. 그러나 예전부터 충효에 독실한 사람은 세대마다 없지 않으니, 선생의 효와 충은 오히려 유(類)가 있거니와, 호원(胡元)을 배척하고 황조(皇朝)에 귀부하여 중국의 제도에 따라 중국에 속한 나라가 되어 울연(蔚然)히 예의의 나라가 되게 한 것은 선생의 큰 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춘추(春秋)를 상고하면 현(弦), 황(黃) 등 여러 나라가 멀리 형초(荊楚)에 떨어져 있으면서 중국을 사모하다가 멸망하게 되었어도 후회하지 않는 일이 있으니, 이런 것으로는 선생의 공도 아름다움을 오로지 할 수는 없다. 오직 선생이 유자(儒者)의 학문을 자기 임무로 삼고, 학문하는 방법에 있어서 반드시 주자를 으뜸으로 삼은 것이야 말로, 후세의 학자가 다 경(敬)을 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아는 것을 지극히 하고, 자신을 돌이켜서 그 실지를 밟아가게 하였는데, 이 세 가지는 성학(聖學)의 주체가 되는 요령이니, 그 공을 누가 짝하겠는가? 또 주자 이후로 중국의 도학이 나뉘고 갈라져서, 양명(陽明), 백사(白沙)의 무리가 황당하고 알 수 없는 말로 천하를 바꾸려 생각하여, 수사(洙泗), 낙민(洛閩)의 종맥(宗脈)이 어두어지고 막혀서 전하여지지 않았으니, 이는 그 피해가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 심한 것이었는데, 우리 동방만은 택하는 것이 정(精)하고 지키는 것이 전일(專一)하여 나뉘고 갈라지는 미혹이 거의 없었으니, 이것이 선생 뒤의 어진 이들의 공이기는 하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선생을 두고 그 누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전후의 상론(尙論)한 선비들이 다 선생이 동방 이학(理學)의 으뜸이다. 라고 하니, 이는 바로 사림(士林)의 공론이다. 예전에 문중자(文中子, 수나라 王通의 시호)가 말하기를, 통(通)은 부자(夫子)에게서 끝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동방의 선비가 선생에게 또한 이러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아! 이는 참으로 하늘이 우리 동방을 위하여 철인(哲人)을 독생(篤生)하여 도학의 연원을 열어서, 끊어진 것은 이어지고 어두워진 것은 밝아지게 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지력(智力)이 미치는 것이겠는가?
선생은 영일인(迎日人)이다. 상조(上祖)는 습명(襲明)인데 고려 때 명유(名儒)로서 벼슬이 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고, 증조는 인수(仁壽)이고, 조는 유(裕)이고 고(考)는 운관(云瓘)인데 모두 현관(顯官)에 추증되었고, 비(妣) 이씨는 서승(署丞) 약(約)의 따님이며, 선생의 두 아들은 종성(宗誠), 종본(宗本)이다. 세조 때 이름을 보(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육신(六臣)과 벗하여 친하였다.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늘 강개하더니, 한명회의 첩이된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말하기를, 공은 어디 갔는가? 하니, 옥사를 추국하러 대궐에 갔습니다. 하매 공은 만세의 죄인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한명회가 이를 듣고 곧 대궐로 가서 고하니, 임금이 친국을 하였는데, 정보(鄭保)가 말하기를, 늘 성삼문, 박팽년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여겼으므로, 참으로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환형(轘刑)을 명하였으나, 좌우가 이는 정모(鄭某)의 손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득 감사(減死)를 명하여 말하기를, 충신의 후손이니 영일(迎日)로 귀양 보내라. 하였으니, 그 유(類)를 숭상한 것이라 하겠다. 세대가 지나 더욱 떨치지 못하므로 식자(識者)가 의심하더니, 근세 이래로 점점 번창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현달한 사람은 우의정 유성(維城), 판중추 응성(應聖), 인평위 제현(齊賢), 통제사 역(역), 통제사 부현(傅賢), 동지 척(倜)이며,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조정에서 으례 녹용(錄用)하는데 지금 상서직장(尙瑞直長) 찬광(纘光)은 선생의 십일대 손이 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은 반드시 뒤가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선생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명(銘)을 한다.
堪輿磅礴一理充塞 하늘 땅이 광대하되 일리로 채워졌고
風氣周旋開有後先 풍기가 주선하되 열림에 선후가 있다
昔者全閩一蠻夷區 예전에는 민 땅이 오랑캐의 구역인데
洎紫陽生爲魯爲鄒 주자가 나게 되선 공맹학문 피었다.
惟此東方寔惟九夷 오직 우리 동방은 오랑캐의 지방이라
父師之後入敎漸微 기자 이후로는 팔교 점점 희미하여
勝國謠俗猶是椎髻 고려 때의 풍속은 오히려 추계인데
惟我先生崛起其季 우리 선생 그 말기에 우뚝 빼어나서
豪傑之才純粹之體 호걸의 재주에다 순수한 본성으로
不由師承黙與道契 스승에게 안 배우고 가만히 도와 맞아
修之於已行滿鄕里 닦기를 몸에 하여 그 향리에 가득하고
行之於國風動遐邇 행하기를 나라에 하니 그 풍습이 원근을 움직이네
庠序旣設俎豆莘莘 학교를 설립하매 예식이 성하였고
士誦詩書民趨作新 선비가 시서 읽으매 백성추향 새로왔다
當時天下陸沈胡虜 그 때는 온 천하가 오랑캐에 빠졌으되
維玆用夏周禮在魯 중국 제도를 쓰니 주례가 노에 남고
義主攘夷背陰向明 의주가 이를 치매 어두움 등지고 밝음 향하니
春秋大義炳如日星 춘추의 큰 의리가 해 별처럼 빛났으나
未盡底蘊天柱忽傾 포부를 못다 펴고 나라 문득 기울어
其身旣沒其道益壽 몸은 돌아갔으되 도는 더욱 길이 남아
若山有岱如北有斗 마치 산의 태산이오 북천의 두성이다
蓋先生道乃紫陽學 대개 선생의 도는 주자의 학문이라
祖述憲章躬行心得 본받아 밝히어서 실천하여 심득했고
其在丈席攘斥百家 스승의 지위에선 백가를 물리치어
橫說竪說一此無他 횡설수설 모두가 여기에 귀일하건만
第所論說聽者疑惑 논설을 듣는 자가 의혹도 하였으나
及得胡通無不符合 호씨의 사서 통을 보매 모두 맞으니
地遠世後若航斷港 먼 곳의 후세에서 단절된 도학 다시 이어져
因言得意痕血摑棒 말에 따라 뜻을 앎이 흔혈처럼 선명했다
爾後諸賢承繼張皇 그 뒤로 여러 현자 계승 장황했으나
歷選前後其功莫當 전후 두루 가려도 그 공 당할 이 없어
若宋濂翁始建圖書 송나라 염옹이 태극도설 처음 세워
以授關洛以傳閩甌 관락으로 민구로 전수함과 같았다
此殆天啓統會宗元 이는 필시 하늘에 근본이 모이게 하여
凡我後學永溯其源 우리 후학이 길이 연원을 찾게 한 것이다
추기(追記)
고려사를 살피건데, 임신년(공양왕 4년, 1392년) 사월에 대부(臺府)가 조준, 정도전 등을 안죄(按罪)할 것을 청할 때에, 선생의 아우인 예조판서 과(過)와 사재령 도(蹈)가 실로 참여하여 들었는데, 두 분께서 도리어 추국 받으매 법리(法吏)의 의결은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하였으나, 우리 태조의 관대한 덕에 힘입어 다만 먼 곳으로 귀양 갔다. 아아! 선생이 세운 것이 참으로 이미 저렇듯 뛰어났고, 이 두 분도 마음을 같이하여 변하지 않고 죽는 것을 당연히 갈 곳으로 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오백년의 정기가 다 한 집에 모였다. 이 일이 원문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삼가 위와 같이 적어 넣어서 후세 사람이 증거를 상고하게 한다.
이어서 가만히 생각하건데, 선생의 큰 절의는 사람들이 누구나 다 우러르나, 오직 지난 성인의 학문을 잇고 후세 학자의 길을 열어 큰 공은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우리 우암(尤庵)에 이르러서야 남김없이 천명되었다. 그렇다면 신도비가 수백 년 뒤에 이루어진 것은 또한 기다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겠다. 이 역사(役事)는 노봉(老峰) 민상공정중(閔相公鼎重)이 실로 그 시작을 맡아 돌보았으므로 힘입어 완성할 수 있었으니,그 어진 이를 존중하고 도를 지키는 정성을 사림이 몰라서는 안 된다.
◎ 임고서원 소장전적(所藏典籍)
임고서원에는 200여 책의 전적이 소장되어 있는데 문화재 당국에서 조사한 서책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등 42종 186책인데 그 중에서 전적문화재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10종 25책만 선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판본은 정충록(精忠錄) 등 임고서원 내사본(內賜本)과 임진왜란 이전본으로 3종 12책이며, 나머지 7종 13책은 필사본(筆寫本)이다.
이들 판본은 낙질(落帙)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전기 판본으로 서지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필사본은 비록 창건 당시부터의 것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것은 아니나 임고서원의 운영 사적 및 이에 관련된 그 시대의 사회 경제적인 일면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조선조의 유교문화와 관련된 학술자료의 하나로서 서원제도의 연구에 참고자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각 서적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성리군서(性理群書)’는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 송대(宋代) 제유(諸儒) 18인의 시문(詩文)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명종(明宗) 8년(1553)에 국왕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내린 책으로, 표지 이면에는 내사기(內賜記) 즉 ‘가정(嘉靖) 32년(1553) 4월 일 내사성균관대사성이황성리군서일건명제사은(內賜成均館大司成李滉性理群書一件命除謝恩) 좌부승지신윤(左副承旨臣尹) 수결(手決)’이 있고, 첫장 상단에 ‘선사지기(宣賜之記)’란 선사인(宣賜印)이 있으며, 그 하단에는 임고서원이란 소장인이 찍혀있다.
뒷표지 이면에는 가정(嘉靖) 갑인(甲寅) 즉 명종 9년(1554)에 퇴계 이황이 성리군서 한질을 후학을 위하여 임고서원에 증정한다는 기록이 있다.
낙질(落帙)이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내사기의 연대를 간행연도로 정하였다.
②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정충록(精忠錄)’은 송대(宋代) 충신인 악비(岳飛)의 정충기사(精忠記事)와 포전(褒典), 유사(遺事) 등을 수록한 것이다.
이 책은 선조 18년(1585)에 국왕이 임고서원에 내린 선사본(宣賜本)이다. 표지 이면에는 내사기(內賜記) 즉 ‘만력(萬歷) 13년(1585) 7월 일 내사경상도영천임고서원정충록일건(內賜慶尙道永川臨皐書院精忠錄一件) 우부승지신정(右副承旨臣鄭) 수결(手決)’이 있고, 첫장 상단에는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도장이 있으며, 하단에는 임고서원상(臨皐書院上)이란 기록이 있다.
이산해(李山海)의 서문과 내사기 연대가 일치되고 있어 간행한 해에 내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③ 논어언해(論語諺解)
이 책은 표지가 가표지로 되어있어 내사본인지 알 수 없지만 첫 장 상단에 ‘선사지기(宣賜之記)란 도장이 있으며 하단에는 임고서원이라는 도장이 있으며 한글에 방점이 있어 희귀본이므로 연구의 가치가 있다.
④ 심원록(尋院錄)
‘심원록’은 임고서원 창건 이후부터 조선조 후기까지 이 서원을 내방한 인사들의 명부이다.
(1)제1책 : 가정(嘉靖) 계축(1553) 월 일
임고서원이 창건된 명종 8년(1553)부터 기록된 것으로 군수 이의(李義), 직장(直長) 권동보(權東輔 1508-1592), 구봉령(具鳳齡 1526-1586), 김언기(金彦璣 1520-1588), 조목(趙穆) 등 368명의 좌목(座目)이 열록(列錄)되어있다.
기록 체제는 1인을 1행에 쓰고 관직(官職), 성명, 자(字), 거주지 순으로 적었다.
(2)제2책 : 천계(天啓) 을축(1625)-을묘(1675)
인조(仁祖) 3년(1625)부터 숙종(肅宗) 1년(1675)까지의 기록이며 전적(典籍) 김종일(金宗一 1597-1675), 권경(權璟), 이형욱(李亨郁) 등 552명의 좌목이 열목되어 있다.
성명 위에 관직 또는 본관을 밝혔고 이어서 자(字), 거주지 순으로 기재하였다.
(3)제3책 : 현묘(顯廟) 무신(1668)-숙묘(肅廟) 기미(1679)
현종(顯宗) 9년(1668)부터 숙종(肅宗) 5년(1679)까지 남주명(南冑明), 박수천(朴守天), 조경하(曺慶夏) 등 190인의 좌목이 열록되어 있고, 기록체계는 본관, 성명, 자, 거주지 순이며, 자(字)와 거주지 밑에 무신(戊申) 3월 15일, 무신 3월 17일 등의 주기(註記)가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것은 방문일자를 기록한 것이다.
(4)제4책 : 숙묘(肅廟) 기사(1689)-정유(1717) 9월
숙종 15년부터 숙종 43년 9월까지 박중규(朴重圭) 등의 좌목을 열록하였고 본관, 성명, 자, 방문일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5)제5책 : 무술(?) 3월 7일-무진(?) 정월 25일
남윤명(南胤明), 정원석(鄭元錫) 등 230명의 좌목이다. 기록체계는 본관, 성명, 자, 생년, 거주지 순으로 기재 하였으며 간지 연대는 조선조 후기로 추정된다.
(6)제6책 : 갑진(?) 4월-경진(?) 원(元)월 25일
송지일(宋志一), 이장유(李章瑜), 이정경(李鼎慶) 등 432명의 좌목을 열록하였고, 기록체계는 본관, 성명, 자, 방문일자, 거주지 순으로 기재하였다.
⑤ 임고서원 고왕록(考往錄)
고왕록은 임고서원의 연혁과 당시의 원장 유사 등 서원과 관련된 중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제1책에는 임고서원 창건이래 영조(英祖) 초까지의 연혁이 기재되어 있으며, 제2책에는 숭정후재갑인(崇禎後再甲寅)인 영조 10년(1734) 6월 26일부터 영조 27년(1751)까지의 기록이다.
⑥ 임고서원 전곡집물범례등록(錢穀什物凡例謄錄)
조선 후기에 임고서원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자산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이 등록에는 먼저 임고서원의 전곡(錢穀), 예물(例物), 집물(什物) 등을 차례로 기록하고 그리고 각관어람복정등록(各官魚籃卜定謄錄), 각사지지복정등록(各寺紙地卜定謄錄), 각처복재위전등록(各處伏在位田謄錄) 등도 수록하였다.
각사지지복정등록에는 하양 환성사(環城寺), 공산(公山) 운부사(雲浮寺), 의흥 인각사(麟角寺), 영천 성혈사(聖穴寺), 정각사(鼎角寺) 등 5개 사찰의 지(紙)와 지세(地稅)를 기록하였고, 각처복재위전등록에는 개령전답(開寧田沓), 인각사위전답(麟角寺位田沓), 하양 환성사 위전답(位田沓)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⑦ 임고서원 장학계안 부 절목(獎學稧案附節目)
이 장학계안은 임고서원 유생의 향리의 자제의 교육을 위해 각 문중들과 결성한 것이다.
내용은 장학계안 결성에 대한 서윤보(徐綸輔)의 서문과 정하원(鄭夏源)의 후서(後序)가 오천정씨 등 56문주의 수곡기(收穀記)와 절목이 기재되어 있다.
⑧ 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
임고서원과 5개 사찰인 하양 환성사, 공산 운부사, 의흥 인각사, 영천 성혈사, 정각사와의 분쟁에 관한 입안문(立案文)이다.
⑨ 임고서원 범규(凡規)
이 책은 임고서원의 제향 원규와 사례를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고서원범규식(臨皐書院凡規式), 춘추대향도(春秋大享圖), 의도제용잡물식(依圖祭用雜物式), 제식(祭式), 제문(祭文), 금사후유연(禁射侯遊宴)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말미에 가정(嘉靖) 41년(1562) 3월 15일 행군수(行郡守) 수결(手決)이 있다.
⑩서원규범
임고서원의 원규와 제향 때 소요되는 각종 제수품인 제물식(祭物式), 그리고 임고서원 신증원규 등에 관한 기록이며 말미에 숭정(崇禎) 4년(1631) 3월 25일 원중유안수정시완의(院中儒案修正時完議)가 있다.
◎ 은해사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해인 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 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 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 효종 2년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격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1712년 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에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는 왕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신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
조선조 영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송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 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 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의 그 가운데 하나인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보화루, 불광,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 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천년 고찰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 제 10교구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방식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이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역사속의 은해사 출신 스님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조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 중이시다.
은해사의 성보문화재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불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보문화재를 보존, 관리 전시할 수 있는 성보문화재를 건립하고 있는 중이다. 은해사와 말사, 암자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많은 성보문화재를 수집해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이다. 성보 문화재가 도난, 훼손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보박물관 건립은 불교계의 숙원사업이다.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유산을 은해사 성보문화제를 중심으로 연구 보존할 계획이다.
은해사는 천년의 역사와 수많은 고승,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유익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대 사찰이다. 팔공산 자락에서 대중포교 사업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평화통일 앞당기기 위한 통일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 은해사에 모두들 한번 와 보시기 바랍니다.
◎ 거조암 영산전
거조암은 산내 암자로서 신라 효성왕 2년(서기 738) 원참대사가 창건하였다. 그 뒤 고려 우왕 13년 혜림법사(慧林法師)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 나한을 모신 유서 깊고 영험 있는 나한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목조 건물로 가장 오래된 거조암 영산전(서기 1375)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물로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중한 문화재가 되고 있다.
영산전이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設)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중심으로 지은 법당이다.
이 영산전은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영산전 보수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조암 영산전을 얼핏보면 건물 전체가 경판고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으나 건물 내부에는 석가여래, 문수, 보현,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다. 간결하고 단순한 맛배집 건물이지만 내부공간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공간감이 훌륭하다. 또 중앙칸 벽에도 널직한 살창을 두어 조명과 환기의 구실을 하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기둥의 모습을 볼 때도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되어 배흘림(엔타시스)이 특이하고 천장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주심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산전은 사언화상이 그렸다는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앞산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526분의 나한성중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은 현재 국보 제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영천 보성리 암각화(永川甫城里岩刻畵)
지정사항 : 유형문화재 제286호
소 재 지 : 영천시 청통면 보성리 666-2
지 정 일 : 1994년 4월 16일
영천 보성리 암각화(永川甫里岩刻畵)는 영천시와 청통면 은해사를 잇는 지방도로변에 있는 보성리 봉수마을 앞에 위치하며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본래 마을앞 산기슭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전한다. 지정당시 바윗돌은 도로변 버스정류장 옆에 시멘트로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보기 좋도록 올려져 있었다. 긴 타원형으로 생긴 암괴로서 밑면은 편평하게 손질되어 있고 둘레도 약간씩 다듬어 타원형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고인돌의 개석일 가능성이 많다. 암각화가 새겨진 전면의 크기는 최대 길이 337cm, 최대 폭 130cm이다. 확실하게 드러나는 암각은 모두 쪼기수법으로 전면에 6개, 후면에 2개가 보인다. 암각은 고령 양전동식 인면(人面)과 같은 형식이다. 상하로 긴 장방형의 양측변을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호형으로 처리하고 중간 허리에 직선을 그어 아래 위로 양분한 후 각각의 칸에 두 개씩의 점을 찍은 것인데 전면 좌측의 것은 양측선이 직선에 가깝고 내부에 점이 없으며 윗변이 아랫변에 비해 긴 편이다. 전면 가운데 3개의 그림은 모두 윗변에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짧은 선을 수직으로 그렸다.
현재는 영천시에서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더 이상 마모되면 암각을 확인할 수 없을 지도 모르므로 정밀모사를 통한 자료를 남기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 영천 청제비(永川菁提碑)
지정사항 : 보물 제517호
소 재 지 : 영천시 도남동 산 7-1
지 정 일 : 1969년 11월 21일
영천 청제비(永川菁提碑)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이다.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가 114㎝이고 폭이 94㎝이며 두께는 16㎝이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두 동강으로 파손되어 아래 계곡에 매몰되면서 세인의 관심밖으로 벗어나 있었는데 그 고적이 전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긴 방수열(方守悅), 최일봉(崔一奉), 임언량(林彦良) 등 3인이 수창(首唱)하고 박생(朴生)이 감고(監考)하여 숙종 14년(1688)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 그 뜻을 전하기 위해 같은 해 9월에 건립된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이 비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1968년 12월에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는 청못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이 없고 가공된 양면에 각자되어 있지만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이 실려 있다. 한 면에는 병진년(丙辰年) 즉 신라 법흥왕 23년(536)이라는 간지가 적혀 있어 청제(菁堤)가 처음 축조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축제기(築堤記)라 할 수 있고, 다른 면에는 정원(貞元) 14년(원성왕 14, 798)이라는 절대 연대가 적혀 있어서 청못의 일부 무너진 저수지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수치기(修治記)라 할 수 있다.
이 병진축제기(丙辰築堤記)는 현재 마모와 훼손이 심하여 거의 반 가량의 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로서 전문은 10행에 각행 9자 내지 12자로 새겨진 총 150자이다. 이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해독이 가능한 정원 14년 수치기(修治記)에는 수리기간, 동원된 인원수, 청못의 규모 및 년(年), 사수(史須), 옥순(玉純) 등의 인물과 소내사(所內使)라는 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에 나오는 인명․관직명․이두문 등은 신라시대 사회사와 언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이 신라시대 벼농사와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될 수 있다.
◎ 완귀정(玩龜亭)
지정사항 : 민속자료 제20호
소 재 지 : 영천시 도남동 595
지 정 일 : 1980년 6월 17일
완귀정은 조선조 중종 때 시강원(侍講院) 사서․설서(司書․說書)로 왕세자의 스승이었던 완귀 안증(安嶒)이 을사사화에 혐오를 느껴 낙향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정자이다.
완귀정은 금호강의 지류인 호계천(虎溪川)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를 골라 점정(占定)하였다.
완귀정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그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인 식호와(式好窩)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남․북단 한 칸씩은 루(樓)처럼 꾸며졌다.
완귀정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협문을 통하여 정침(正寢)에 드나들게 되었고 정침 역시 방형(方形)의 흙담으로 쌓였다.
완귀정으로 들어가면 반듯한 정원이 있으며, 정면 좌우로 보이는 어간(御間)의 문비(門扉)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청이 전개된다.
대청은 좌우 협문의 각 한 칸 방을 제외한 전역을 차지하고 있어 매우 넓직한 느낌을 준다.
방의 측면 벽에 쪽문이 달린 것은 광창(光窓)의 용도로 쓰인 듯 하며, 머름 바친 것은 정면 문비와 동일하다.
측면 벽에서 보면 이 방문과 그것에 이웃하는 마루와는 머름 높이에 낙차(落差)가 있다. 그 낙차의 꾸밈은 매우 중요한 묘미가 있어 그 기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청의 후면 벽과 측면 벽은 판벽(板壁)이며 바라지 창이 달려있다. 바라지 창 밖으로 난간이 돌려졌고 난간 계자각(鷄子脚) 아래 누주(樓柱)가 높직하게 버티고 서있다. 좌우 끝의 누주는 팔각인데 안쪽의 평주는 환주(丸柱)로 모두 자연석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식호와라 편액된 건물은 정면 5칸과 중앙 3칸은 방이고 좌우 각 한 칸은 누(樓)가 되어 우물마루를 깔았다. 시를 읊는 등의 소연(小宴)을 베풀기에 알맞은 공간이며, 남북에 있는 청은 계절이나 달의 유무(有無)에 따라 쓰임이 선택되었던 것 같다.
남․북루 중 북루는 완귀정과 같이 누사형(樓榭形)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면 벽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흐르는 개울이 훤히 트여 있다.
정침과 완귀정 사이에는 낮은 흙담이 있어 구획되었고 여기에 사주문(四柱門)이 있어 출입하게 되었다.
대문이 있는 행랑채는 지붕이 한 가지로 구성되었다. 대문 역시 솟을대문이 아니다. 벼슬을 하였으나 선비의 소박성을 엿볼 수 있다.
대문 행랑채는 판벽이 있는 곳간(庫間)으로 구획되어 있다. 원래 이것이 중간이고 그 외곽에 대문채가 또 있어야 격이 맞을 터인데, 세거하는 후손들 도 별도의 대문채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완귀정 입구의 화장실 구조도 눈 여겨 볼만한 가치를 지녔다.
◎ 영천 정재영(鄭在永) 가옥
소재지 :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지정별 : 중요민속자료 24호
지정일 : 1970년 12월 29일
정재영씨의 10대조인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 선생이 원래 살던 선원리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정일감(鄭一鑑)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매산 선생은 1727년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이 건물의 위치는 매곡동네에서도 10여리 가량 깊숙히 산속으로 들어간 곳에 맑은 시냇물을 앞에둔 경사지에 서있다. 대문은 원채보다 1.5미터 가량 낮은 3칸짜리의 솟을대문이나, 이와같은 대문형식은 예가 없는 것이고, 전하는 말에 따르면 대문 양측면에 고방동(庫房棟)이 있었다고 하나 이는 역시 통례대로 대문 3칸 양측으로 평행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채 평면형태는 경주의 관가정(觀稼亭)이나 손동만(孫東滿) 가옥과 같은 계열이다. 단지 여기서는 사랑채 루(樓)마루가 직교(直交)하여 궁전에서 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점이 다른 점이다. 지붕형식도 영남형의 맞배지붕이 중첩된 합각(合閣)지붕형이 아니고 온전한 팔작지붕임을 참고하면 전형적인 안동지방의 평면형으로 사랑채에 직교하여 루마루를 연접한 보기 드문 예이다.
이 건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루마루가 어울리지 않게 본채에 연접한 점으로 미루어 의식적으로 어떤 가옥을 본뜬 것 같은 부자유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안채 대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부재(部材)도 연약하며 볼품이 없다.
단지 안채는 원주 위에 초익공의 공포를 짜고 있고, 익공이나 보아지형이 매우 견실하여 힘찬 선각으로 만들어 졌고 제형(梯形)의 마루대공(臺工)에는 행공(行工)첨차로 마루도리 밑의 장혀를 받들고 있다. 그 형태 또한 매우 견실하여 수작이라 하겠다.
동북쪽의 사당은 건물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훌륭하다.
◎ 영천 선원동 철불좌상
소재지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70
지정별 : 보물 제513호
지정일 : 1969년 7월 30일
이 불상은 현재 불신(佛身)만 남아 있으며 두 손이 없어졌고 주조(鑄造) 후에 때움한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 그 외에는 완전한 편의 철불상(鐵佛像)이다. 높직한 육계(肉髻)에 중앙 계주(髻珠)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 모양 얼굴 면적에 비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작은 코와 입, 융기된 인중을 나타낸 굳은 얼굴 표정은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넓은 어깨, 발달된 젖가슴, 잘룩한 허리 등 몸의 굴곡이 잘 표현된 건강한 신체로 앞 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가늘어진 팔, 양감(量感)이 줄어든 다리는 다소 어색한 느낌을 준다. 안정된 신체에 얇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가 간략한 옷주름을 형성하여 몸에 밀착되어 흐르고 있다. 이처럼 이 불상은 고려 전기의 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 영천 정용준 가옥
소재지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지정별 : 중요민속자료 107호
지정일 : 1979년 12월 28일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집은 지금의 소유자인 정용준씨의 9대조가 1756년에 지었다고 전한다. 일심당(一心堂)은 그때 붙여진 정침의 당호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등이 직각으로 결합하여 口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집앞 개울가에 있는 연정(蓮亭)은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에서 뚝 떨어져 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고 대청이 4칸인데 안방의 뒤쪽에는 골방과 툇마루가 있고, 안방의 아래에는 3칸 정도의 큰 부엌이 있다.
안방 아래로 부엌이 가로로 길게 굽어나가는 ㄱ자집 형식은 영남지역의 대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또 부엌끝으로는 3칸의 긴 광채가 이어져 있다.
2칸의 안방은 가운데 장지를 두어 아랫방과 윗방으로 구분하여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대청의 건너편에는 한 칸이 조금 넘는 크기의 건너방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작은 방이라 부른다. 이 작은 방 아래에서 직각으로 꺾어 붙인 외양간과 방앗간, 광을 가진 아래채가 부엌밑 광채와 마주하였으며,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사랑방, 대청, 대문, 광, 작은 사랑, 마루방 등으로 이어져 있다.
사랑방은 1칸의 온돌방이며, 전퇴를 제외한 대청에는 3면에 분합을 달아서 사랑방의 협소함을 보완하였다. 대청의 전퇴마루 끝에는 긴 평난간이 갖추어져 검소한 가운데 운치를 더하고 있다.
외양간과 여러 광채의 벽은 판재로 탄탄히 꾸민 판벽이다. 사랑채 단하 마당 끝에는 대략 3칸 크기의 마판이 있었으나 철거된지 오래이다.
연정은 마당가를 굽어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있는데 건너편 급준한 언덕에 노송과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소리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정자 아래 연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의 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만큼 자연스럽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4개의 퇴기둥을 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개울을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주는 향원유적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고택이라 할 수 있다.
◎ 함계정사(涵溪精舍)
소재지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203-2번지
지정별 : 문화재자료 230호
지정일 : 1990년 8월 7일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1660-1720)이 만년에 자작(自作)한 것으로 추정되는 함계정사기(涵溪精舍記)에 보면, 1702년 공(公)이 43세 되던 때에 함계정(涵溪亭)의 건립을 시도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안락재(安樂齋)라는 소재(小齋)를 건축하였고 그 후로도 수삼차에 걸쳐 역사를 시작하였으나 빈번히 우환질고(憂患疾苦)로 정지 되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또 상기 정사기 말미에 보면 ‘방금 재목을 모으고 목공을 불러서 계당(溪堂)을 지어 우유종노지(優遊終老地)를 도모하니 지장이 없이 성취할는지 꼭 알 수 없다’라고 끝을 맺고 있어 그가 말년에 또 한 번 공사를 시작한 듯 하나 역시 끝을 맺지 못하고 타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함계공의 손자인 죽비(竹扉) 정일찬(鄭一鑽 1724-1797)의 행장에 보면 기해년 즉 정조(正祖) 3년(1779)에 함계공 만년의 소망을 준유의(遵遺意)하여 함계지상(涵溪之上)에 양심당(養心堂) 즉 함계정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따라서 본 정사는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던 함계 정석달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손자인 죽비공이 1779년에 건립한 것을 알 수 있다.
임고면 선원마을 입구 작은 언덕위에 본 정사가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남쪽의 언덕 아래에 소계(小溪)가 있으나 지금은 사과밭에 편입이 되어 유수(流水)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옛 물줄기를 따라서 자갈 줄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정면 3칸의 정사 앞쪽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뽑았는데, 전면에만 루하주(樓下柱)를 세워 앞에서 보면 루마루처럼 꾸미고 3면에 헌함을 돌렸다.
난간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우고 하엽장식(荷葉粧飾)을 놓아 도란대를 받았다.
정면의 원주(圓柱)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아 초익공(初翼工)으로 장식하고 내단(內端)은 보아지를 두었으며, 전퇴(前退)부분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몄다.
우물마루를 깔아놓은 어간(御間)은 연등천장으로 꾸미고 뒤쪽 벽 위에는 양심당(養心堂)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 뒷벽의 쌍여닫이 널문은 문울거미의 형태로 보아서 후에 고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정사의 좌측 온돌방에는 정존협(靜存夾), 우측 온돌방에는 동찰협(動察夾)이라는 작은 편액을 각각 걸어 놓았는데, 이는 함계공의 유의(遺意)를 따른 것으로, 그는 정존(靜存)을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동찰(動察)은 서책을 간수하고 손님과 벗을 영접하는 방으로 꾸미고자 하였었다.
정존협은 천장은 칸살이 매우 넓은 우물반자로 꾸몄고, 대청쪽은 3분 합문을 들어 열 개문으로, 정면과 측면은 양개(兩開) 띠살문, 배면(背面) 토벽에는 정자살 광창을 내는 등 4면에 창문을 내어 채광과 통풍을 여의케하여 거처를 편하게 하였다.
동찰협도 천장과 정면 및 양측면의 창문은 같은 형식으로 하였으나 배면(背面)은 처마 밑으로 반 칸을 내어 밀어 위쪽에 책을 갈무리 할 벽장을 설치하였다.
구조를 살펴보면 막돌로 기단을 쌓았으며, 막돌 초석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나 동찰협의 뒤쪽 받침부분만 각기둥 2개를 사용하였다.
마루의 윗쪽은 삼량가(三樑架)로 마루 양측 벽위의 보위에 놓인 제형판대공(梯型板台工)의 몸에 소로를 끼우고 그 위에 첨차와 소로를 놓아 종도리 장혀를 놓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박공지붕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낮게 달았으나 언덕위에다 비바람에 세찬 듯 근년에 전면 처마 끝과 측면 풍판 하부에 함석을 채양으로 덧붙여 놓았다.
◎ 돌할매
돌할매의 무게는 약 10㎏, 직경 약 25㎝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자신의 운세를 점치는 영험한 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들면 쉽게 들리나 이 돌에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난 뒤에 들어보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요컨데 소원을 말하고도 쉽게 들려지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돌의 역사는 350년 쯤 되며 마을 주민들이 길흉화복이 있을 때마다 돌을 찾아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관리에 들어오기 전 오른쪽으로 가면 자포리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돌할매와 크기가 비슷한 돌할배가 있다.
◎ 마현제설창기적비(馬峴堤設創紀蹟碑)
마현제는 통정대부를 지낸 경주 김씨인 김효달(金孝達)이 임진왜란 이후 나라살림이 어려울 때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만든 저수지이다.
기적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통정공은 1661년부터 1667년까지 20만평 규모에 5천 4백 71냥 8전을 들여 마현제를 완공하니 3리 아래에 보가 쌓여지고 5리밖까지 도랑이 통하니 6백여 마지기에 물을 eof 수 있는 즉 수백명의 인명이 의지하게 되었는지라 가히 혜택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재도 마현제는 자포, 임포, 원당, 반정, 반계, 신촌지역 몽리민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를 수 있다. 또한 통정공의 뜻에 따라 몽리민들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3월과 8월에는 못을 보수하고 운영에 관한 의논을 하고 있다.
통정공은 마현제뿐만 아니라 고경면 칠전리 칠전못과 북안면 임포리의 두어제도 창설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조양각(朝陽閣)
지정사항 : 유형문화재 제144호
소 재 지 : 영천시 창구동 1-1
지 정 일 : 1981년 4월 25일
조양각의 원래 명칭은 명원루(明遠樓)였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副使)였던 이용(李容)이 보현산(普賢山)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이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원목증쌍면(遠目增雙明 : 훤히 트인 먼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 마저 밝아오는 듯 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가 서거정(徐居正)이 밝힌 것처럼 아득한 주남평야(朱南平野)를 거슬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采藥山)까지 이르는 원경은 속인의 감회라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전해오는 말로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영남삼루(嶺南三樓)라고 하며, 안동의 영호루(暎湖樓),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 김천의 연자루(燕子樓)와 합쳐 영남칠루(嶺南七樓)라고 적혀있다.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淸凉堂), 서를 쌍청당(雙淸堂)이라 이름을 고쳤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1637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그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이름하였다.
다시 1742년 당대의 명필가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조양각을 중창하여 손수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 달았다.
현재는 좌우 별실 등 부속 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양각 건물만은 포은 정몽주(鄭夢周), 사가 서거정(徐居正),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율곡 이이(李珥), 노계 박인로(朴仁老) 등 당대 명현들의 시액(詩額) 70여 점을 간직한 채 날아갈듯 웅장하게 서 있다.
문화재 지정 당시 건물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그 중 한 칸이 구둘방이다. 구둘방은 전면에서 건물을 향하고 서서 어간(御間) 다음의 협칸(挾間)에 있는데 고주(高柱)에 전단(前端)을 의지하여 전퇴일칸(前退一間)이 형성되어 있다.
방의 천장은 평천장(平天障)이나 우물로 꾸몄고 단청을 하였는데 원형이 이런 모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주(高柱)에는 벽선을 세워 문얼굴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문짝을 설비하였다. 현재 4면의 벽이 모두 열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원형인지 불분명하다. 보통의 경우는 후면벽은 벽체가 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방 이외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다. 우물마루는 마루가 큼직하여 청판이 길쭉길쭉하다. 이들 청판은 고색이 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수된 것 같다.
방의 고주 주간(柱間)의 인방(引枋) 위는 흙벽이다. 지금은 분벽(粉壁)이나 원래는 사벽(沙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량(退樑)은 고주에 걸렸다. 고주는 더 높이 솟아 중대공이 되었는데 이는 매우 견실한 가구법(架構法)이다.
청의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이다. 긴 대량(大樑)이 결구(結構)되었는데 그 단면이 두형(頭形)에 가까운 원형이다. 이는 口形의 선박처럼 생긴 조선조 일반적인 대량(大樑)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형상이다.
대량상(大樑上)에 종량(宗樑)이 있다. 삼분변작(三分變作)한 기법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중대공은 일종의 포대공이다.
대량상(大樑上)에 주두(柱頭)를 놓고 보아지를 두공(頭工)처럼 짜고 중도리 및 바침 장혀를 받는 이중의 첨자를 결구시켰다. 포대공으로도 그리 흔한 양상은 아니다.
종대공(宗台工)은 거대하다. 판대공(板台工)인데 종량(宗樑)의 길이만큼을 다 차지하는 범위에 안좌(鞍坐)를 정하고 삼각상(三角狀)으로 솟아올라 종도리를 받았다. 파연대공(波蓮台工)의 일종이다.
천장은 연등이다. 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전부 서까래를 올려다 볼 수 있는데 단지 층량보 위에서만은 눈썹천장에 가려졌다.
측면이 3칸이어서 충량(衝樑)은 두 가닥 휘어 올라 대량(大樑)에 걸렸다. 자연히 중대공에 결구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포대공의 일원이 되는 방안은 그리 흔하지 않는 기법이다.
우미량처럼 충량이 휘어 올라서 중도리의 왕찌 부분이 충량의 등에 타고 앉게 되었다. 따로 바침을 두지 않게 된 것도 흥미 있는 구성이다.
눈썹천장은 우물이고 소란천장이다.
평주상(平柱上)의 공포 구성은 익공형(翼工形)이다. 쇠서의 존재로 보아서는 이익공형(二翼工形)이나 실제의 구성에서는 전형(典型)에서 벗어났다.
귀공포에서 쇠설을 절단 생략한 기법도 특색이 있으며 익공(翼工)의 전형적인 양식에서는 벗어나는 양태이다. 창방머리가 점차로 발전한 예도 보기 드문 법식이다.
이런 양식은 익공이나 익공이 아니며 그렇다고 주심포도 아니다. 결국 절충형인데 창방과 짜인 주두 아래의 헛점차와 대량바침의 보아지가 뒤쪽에서는 한몸의 보아지가 되었고 앞머리에선 그것이 이제공(二諸工)이 되었다.
이 구성으로 익공 전형의 두 주두의 설치는 벗어나고 말았다.
주심포계가 아니어서 외목(外目)이 없다. 그리고 주간(柱間)에는 화반(華盤)이 있다. 앙화반(仰華盤)이다. 각간(各間)에 2매씩이나 전후 퇴간만은 1매씩이다.
누 아래 기둥은 짧고 원형으로 된 나무기둥이다. 손질한 주초(柱礎)에 정초(定礎) 좌우 우주(隅柱)는 콘크리트 두 겹을 씌워 주초도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樓)는 전면이 고상식(高床式)이고 배면은 접륙(接陸)하였는데 이 부분의 화강석 기단은 후에 설치한 이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때인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조물이다.
인조 15년(1637)에 궁수 한덕급이 명원루 터에 누사(樓榭) 15칸을 중건하고 조양각이라 하였다. 숙종 2년(1676)에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하고 이 보다 26년 후인 1702년에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하였다.
영조 18년(1742) 군수 윤봉오가 세 번 째로 중창하였다. 불과 40년 만에 중건설인데 어떤 까닭에 이 때에 다시 충창했는지는 의문이 간다. 아무래도 전대의 공정에 하자가 있었던지 아니면 증대 등의 변형이 있었던지 어떤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군수 윤봉오는 중창한 누사(樓榭)에 서세루(瑞世樓 : 현재 배면에 현판되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람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구문(崑邱門)이라 하였다.
이 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당시 조사자는, 본 건물은 조선조 중기 이후의 누사로서는 단아(端雅)하다. 금호강의 경관과 어울려 영천의 면모처럼 보인다. 만일 이 건물이 철거된다면 그 썰렁함에 영천 주민들은 안타까울 것으로 짐작되므로 생존 조치를 취하고 문화재로 지정보호 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