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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is my son, the beloved. Listen to him" (Mark 9:7). Painting by Fra Angelico Public Domain. |
본문
열왕기하 2:1-12
시편 50:1-6절
고린도후서 4:3-6
마가복음 9:2-9절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주석(Chris Haslam) - 번역 이 기호 목사(평안교회담임)
열왕기하 2:1-12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즉, 이스라엘(북)과 유다(남)로 분열되었다. 본문의 시대는 BC850-849년이고,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성경은 오직 두 사람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려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두 사람은 에녹(창5:24)과 엘리야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들의 여행을 길갈에서 시작한다. 길갈은 벧엘 북쪽의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다. 엘리야는 여행을 하는 데에 엘리사를 세 번이나(2-3절, 4-5절, 6절)초대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진실로 자신에게 충실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엘리사를 시험한다. 엘리사는 매번 그의 충성심을 증명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길갈(1절)에서 벧엘(2절)로 즉, 남쪽방향으로 여행한다. 그 다음에는 여리고(4절)에서 요단(6절)으로, 즉 동쪽으로 여행한다(4-5절은 2-3절과 오직 장소의 명칭에 있어서만 다르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예언자의 무리들”(3,5,7절)은 엘리야의 추종자들과 훈련생들로 구성된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수도사와 같다.
엘리야의 “겉옷”(8절), 즉 그의 소매 없는 외투는 거의 그의 일부이다. 갈대바다(출애굽기14장을 보라)를 건널 때와 법궤가 요단강을 건널 때(여호수아3:14-17) 물이 갈라진다.
9절에서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에게 충성한 것에 대한 보상을 제의한다. 그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성의 두 배의 몫을 받기를 요구한다(신명기21:17절은 장남이 아버지 재산의 두 배의 몫을 상속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10절에서 엘리야는 이 요구를 그 자신이 들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수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엘리사가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지는 것을 본다면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불”(11절)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의 상징이다(예, 하나님은 출애굽기3:2절에서 불에 타고 있는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나셨다). 12절전반부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엘리사는 아마도 하나님의 병거들(11절)과 이스라엘의 병거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 같다. 엘리사는 아마도 엘리야의 영적 능력이 이스라엘을 위한 안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군대보다 훨씬 더 좋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떠남을 본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 혹은 고통의 표현이다. 13-17절에서 엘리사는 영성의 상징인 엘리야의 겉옷을 줍는다. 예언자의 무리들 중 일부가 엘리야의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엘리야는 하늘로 올려졌다.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다.
시편 50:1-6
이 시편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도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심판을 보이시기 위해서 온 땅과 “하늘”(4절)을 법정에 호출하신다. 예루살렘(시온, 2절)에서 하나님은 전통적인 구약성경의 방식으로 자신을 보이신다. 전통적인 구약성경의 방식은 “불”(3)과 “무서운 돌풍”이다. 하나님은 재판관과 검사(증언하리라, 7절)로 계실 것이다. 진심으로 드려진 동물 희생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다(8절). 그러나 단지 의식으로써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 의식으로써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불필요한 도살이다(9-13절). 율법을 준수하려는 의도 없이 율법을 읽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 도적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친구가 되는 것, 가족을 비방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도 역시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21절)은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을 위한 근거들이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22절)라고 불려지는 자들이다. 사악한 자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23절)과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과 번영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4:3-6
바울은 고린도사람들의 교회로부터 온 편지에 계속해서 대답하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이 바울이 복음을 명확하게 하는 것에 실패한 것 때문에, 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데려오는 일에 있어서 제한적인 성공 때문에, 바울을 비판했던 것처럼 보인다.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3절은 고린도전서1:18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멸망하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멸망당할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의 회심은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
“멸망하는 자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자면”(4절) 마귀 혹은 세상의 신, 즉 물질주의가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어서 그들은 복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조명하는 것과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6절)이 나타내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며,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의 미래의 모습을 위한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다. 5절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로) 그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고통이 따를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섬긴다. 6절에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제일 첫 번째 말씀인)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빛”과 함께 창조의 과정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여기서 빛은 이해의 빛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행하는 목회의 직무를 강화시킨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경험된다. 신자의 변화는 마음속에 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마가복음 9:2-9
예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시작할 것을 예고하셨다. “인자는 배척당할 것이고,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8:31-32). 만약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버려야할 것이다. 자기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8:34-35).
2절의 “6일”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한 이후의 기간을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의 핵심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산으로 데리고 가신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변형되셨고, 형상이 변화되신다. 예수님은 “광채”(3절)속에 나타나신다. “광채”는 하나님의 현존의 표시다(모세도 하나님과 대화할 때 광채가 났다, 출34:29). “엘리야”(4절)는 하늘로 올려졌다. 모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다(신명기34:6절을 보라). 모세도 역시 후대 유대교에서는 하늘로 들려 올려진 것으로 생각했다(다른 사람들은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하고 모세는 유대교의 근본적인 권위인 율법을 대표한다고 지적한다). 베드로는 이 경험을 기뻐한다(“좋다”, 5절).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찬양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축제인 초막절에 임시적으로 세워진 은신처인 “초막”을 지음으로써 이 사건을 연장하기를 바란다. 6절은 베드로가 이 경험으로 너무 놀라서 그가 말했던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름”(7절)도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말해진 선포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의 선포와 같다(1장11절을 보라).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다. 환상은 “갑작스럽게”(8절) 끝이 난다. 오직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때만 이 환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될 것이다.
설교실마리 Sermon Cues
( 김성국 목사- 미 연합감리교회의 사이트 www.gbod.org/site 일부 참조)
설교 함께 구성하기
이번 주 설교에 포함될 다음의 내용들을 숙고하라.
▶ 산들
▶ 변모되심
▶ 자취를 감춘 선지자들
▶ “감추어진” 복음
▶ ‘불병거’나 ‘하늘의 음성’과 같은 돌발적 사건들
묵상에 대한 질문
1. 예수의 변형사건에서 보건대, 예수는 변모하셨는가, 아니면 마침내 감추신 것을 드러내셨는가? 복음은 “감추어진” 것인가(고린도전서 4:3), 아니면 정말 마음과 눈이 둔감하여진 것인가?
2. 뜻밖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엘리야의 승천을 본 이후에 엘리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의 변형을 목격한 제자들에겐 그 다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3. 예수께서 모세 및 엘리야와 맺으신 긴밀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설교구상
열왕기하 2:1-12절 / 후견인의 변형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 이후의 사역을 이어나갈 선지자로 선택하신 사람이다(열왕기하 19:17-21). 단언하건대, 엘리사는 자신이 선지자적 리더십의 차기 물망에 올랐다는 사실을 적어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엘리사는 자신의 멘토인 엘리야의 영적 능력을 두 배나 더 요청할 정도로 엘리야를 대신에(9절) 선지자적 사역에 필요한 여러 은사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원하는 엘리야선지자의 두 배의 능력이 주어질 기회가 오자, 엘리사가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리더십을 갖춤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변화하도록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지도자능력 검증기간이 요청된다(엘리야는 여러 번의 기회를 통해 그를 물리치려 했다. 2,4,6절을 보라). 그리고 마침내,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성공한 바로 그 은사를 엘리사에게 승계하여 소명과 사명이라는 두 가지를 그에게 위탁하게 된다. 과연 이러한 원리 중에 어떤 부분이 오늘날의 교회나 공동체 나아가서 국가에 적용 가능할 수 있는 리더십의 요청과 필요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마가복음 9장 2-9절 / 영원한 동료의식 속에서
산정상에서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러나 과연 이 영광스러운 일이 누구와 상관있다는 것인가? 예수인가,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인가?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대표한다. 두 사람 모두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하늘로 올리워갔다(출애굽기 34:5-8절과 열왕기하 2:1-11절을 보라). 그들은 땅에 묻혔는가, 아니면 에녹처럼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올리워갔는가(창세기 5:24, 히브리서 11:5)? 전통적인 견해는 그들이 일반인들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께서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죽음을 맞이하셨고, 그것을 정복하셨으며,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율법수여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와 함께 하시는 예수에 대한 광경은 그의 제자들의 눈에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스승의 사명의식을 정당화하고 고취시키는 헌신자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 광경은 스승 예수의 영광된 변모로 인하여 오히려 더 낮아지고 겸손해진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광의 순간; 헌신의 생애
감히 어느 누구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목격으로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변모하신 현장의 충격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목격한 영광은 너무나 특별하고도 놀라워서 베드로조차도 감히 뭐라고 떠벌릴 수 없었다. 세 명의 제자는 예수의 부활이 있기까지 그들이 본 광경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침묵의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그들은 그들이 목격한 모든 사실을 전파하였다. 그들 자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님의 부활의 증거로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징표였고, 그 환상에 대한 인용구였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과연 얼마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능히 증언할 수 있는 증거력을 갖추고 있는가? 당신에게 경험되어진 어떤 이해와 체험이, 그리고 어떤 증언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를 기술해나가도록 할 수 있겠는가?
랍비주석
(영월군 흥월교회 이익상 전도사)
열왕기하 2:12
1. 탈굼은 히브리어를 잘 모르던 유대인들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아람어 성경입니다. 이 아람어 성경은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문맥이 불분명한 부분은 성경을 읽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이 아람어 탈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탈무드 베라코트에서 "사람이 공동체와 함께 그 날에 해당하는 성서를 읽어 나아갈 때에 성경을 두번 탈굼을 한번 읽어야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2. 라쉬와 라닥, 그리고 중세의 많은 랍비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탈굼 요나단을 인용하였습니다. 탈굼 요나단에서 요나단 벤 웃시엘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병거와 마병들보다 기도로 이스라엘을 (더 강력하게) 도우신 선생님!"
3. 랍비들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군인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엘리야가 이방신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아합과 싸워 이겼지만, 엘리야는 자신이 직접 군인이 되어서 싸운 것이 아니라,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멜산에서 이방신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후를 왕으로 세워 아합을 징벌하셨지요.
랍비들은 이처럼 엘리야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예언자, 그리고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 선지자로 여겼는데,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이 "기도"였다고 설명하는 겁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기도가 병거와 마병보다 강하다"는 거지요.
설교 예화
1) 주창균 형제의 고백
이 글은 청송감호소에 있는 주창균 형제가 예수님 영접한 후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쓴 글을 저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글을 쓴 형제는 전과8범, 징역19년형으로 교도소 생활 중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형제입니다.
일 년 전, 어느 날, 바람도 숨을 멈추고, 별들도 구름 속에 숨어버린 밤, 나는 당신이 피 흘리신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보았습니다. 머리엔 가시면류관, 어깨에는 내 죄를 대신한 사랑의 십자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난의 골고다 길, 뭇 사람들의 조소를 대신하여 ‘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부르짖은 그 모습에, 내 영혼이 빛을 찾고 용기 얻어서, 애달픈 속 맘 풀어놓고, 창백한 두 뺨 눈물 적시니, 뉘 알았으랴 그 밤부터 예수쟁이 될 줄을!
주여, 나로 하여금 사랑의 불꽃으로 피어오르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보고 듣고 읽고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세상은 변하고 인생은 바뀌어도,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광으로 빛나나이다. 주여! 주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을 이 몸에게도 가득 부어주소서. 채워주소서.
2) 크라카우어의 에베레스트 산 등정기
‘존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Into Thin Air’에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며 겪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1996년 5월 10일, ‘크라카우어’는 산의 정상에 도달했는데, 그는 잠시 동안 정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산소가 부족하여 호흡이 곤란했으며, 또한 근육이 뭉치고, 몸이 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상에 도달한 다른 3명의 동료와 함께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표류하는 구름이 그들을 스치며 지나갔고, 또 얼마쯤 내려오자 번개가 치며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점점 방향을 잃기 시작했는데, 눈바람이 거세지기 직전에 캠프 가까운 곳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어둠이 찾아왔고, 거센 눈보라로 인해서 그들은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피곤에 지친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며, 그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아 태양이 떠오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이 밤을 보낸 곳은, 다름 아닌 에베레스트 산 남쪽에 위치한 4000피트 낭떠러지 바로 옆 가장자리였던 것이다. 만약 그 밤에 몇 발자국만 더 갔어도, 그들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와 같이, 세상의 문화는 상대주의(눈보라)와 불신앙(어둠)으로 우리의 길을 잃게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재난(절벽)의 가장자리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날이 밝자, 그들이 위험한 곳(절벽의 가장자리)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듯이, 복음의 빛은 우리가 세상의 문화 속에서 얼마나 위험한 곳에 있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며, 우리를 안전한 길로 안내해 줄 것이다.
3) 어느 집사님의 신앙고백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죄인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다. 주일만 되면 교회에 열심히 나갔고, 교회봉사도 열심히 했다.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 총무로, 중창단원으로, 집사로 교회 모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도 열심히 했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자선음악회도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반복되는 습관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은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남보다 먼 저 인정받기를 원했고, 남을 판단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분노와 실망으로 억울해 했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이,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을 깨우셨다.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내게 들어오셨다.
나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그 의로우심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둠의 자식이 아니고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제 나는 내안에 계신 성령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살아갈 것이다. 부족한 나의 것으로 드리지 아니하고, 온전하신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4) 당신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던 챨스 윌리엄 엘리옷은 얼굴에 커다란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점은 의술로도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점 때문에 많은 세월을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어느 날, 엘리옷의 어머니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챨스, 비록 네 얼굴에 있는 점은 없앨 수 없지만, 만약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네 마음과 영혼이 크게 자란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네 얼굴에 있는 점은 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얼굴을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혹, 당신에게는 당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약점은 없으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어느새, 당신의 약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을 것입니다.
5) 행복을 만드는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보석과도 같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빛날 뿐,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5% 이내라고 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프로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결정해나가야 한다.
베스 사위는 자신의 저서 ‘멀티 형 인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는 것은 성공이다. 그러나 당신이 뭔가를 추구하면서 좋아한다면, 그건 분명 행복이다.”
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국 일리노이 주에 ‘다우너즈 글로브’란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다. 그 도시에 ‘메리온 웨이브(Marion E. Wade)’란 이름의 젊은이가 있었다. 꿈 많은 한창 나이의 어느 날, 사고를 당하여 두 눈이 멀게 되었다. 절망에 빠지게 된 그는, 방 안에만 들어앉아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제가 왜 이 젊은 나이에 눈이 멀어 폐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는 어느 순간, 하늘로써 은혜가 임하였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용기가 용솟음치게 되었다.
그 후로, 그의 나날이 달라졌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여, 손끝으로 글자를 읽힌 후에 ‘ServiceMaster Co’란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기업경영의 신조로 내세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신조를 바탕으로 삼고는 경영의 목표를 다음 세 가지에 두었다.
첫째, 종업원들의 행복을 추구한다.
둘째, 고객들의 만족을 추구한다.
셋째, 이익증대를 추구한다.
회사는 나날이 번영하여, 99년의 경우 40개국에서 8조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회사로, 지금도 번영을 누리고 있다. 우리 모두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신조이다.
7) 어리석은 당나귀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을 태운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보인다. 국민들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갈채와 찬사를 보낸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서 다 받기 위해서였다. 나귀는 생각하기를,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귀가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순간, 나귀에게는 참수형이 내려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 아래 거하면서 영광을 누린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진다. 하나님이 사라진 세계에는 존귀와 영광이 없다.
8) 어느 수도원의 변화
어느 수도원은, 한 때 영성이 충만했던 수도원으로, 수사 지원자들이 넘쳐났고,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찾는 일반 신도들로 항상 만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언제나 맑고 투명한 에너지로 충만하였는데, 지금은 수사 지원자도 없고, 찾아오는 일반신자들도 거의 없어, 수도원은 스산하고 어둡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수도원에 수도원장의 옛 스승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수도원장은 스승께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스승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스승은 며칠 동안 조용히 기도, 묵상, 명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셨습니다. 스승이 떠난 며칠 후, 수도원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스승의 편지였습니다.
‘여보게, 내가 자네 수도원에 며칠 묵는 동안, 나는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하였는데, 나는 자네 수도원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다네. 그분은 평범한 사람으로 변장하고 계셨네. 예수님은 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명하셨네. 그러므로 변장하신 그분이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네. 그러나 그분이 바로 자네 수도원에 계신다는 사실만은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알려주는 것일세.’
수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떠올려 봤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사실을 자기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수도원 사람 모두에게 스승의 편지를 공개했습니다. 그 편지를 읽은 수도원 사람 모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변장하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원 사람들은, 조금 씩 조금씩 변하였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혹 변장하신 예수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분위기는 눈에 띠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질투, 미움, 교만, 교활함, 게으름, 책임회피 등. 사람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갈등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자박자박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실한 섬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기쁨, 즐거움, 평화, 기도와 찬양, 거룩한 영성이 충만했습니다. 수도사들은 물론이고, 정원사, 주방의 일군, 사무원 등. 수도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변장하신 예수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서로서로를 예수님으로 대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도원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변화의 소리가 천지 사방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사랑, 평화, 거룩한 영성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은 다시 옛 명성을 회복하고, 맑고 투명하며 거룩한 에너지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설교
(학운교회 정수환목사)
제목 : 영광스런 복음의 빛을 보기를 원합니다
(성경 : 왕하2:1-11, 고후4:3-6, 막9:2-8)
프랑스에 있는 어느 수도원의 이야기입니다. 이 수도원은 한 때 영성이 아주 충만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원에는 들어오고자 하는 수사(修士) 지원자들로 항상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는 일반 신도들도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그 수도원은 늘 맑고 투명한 에너지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이 어느 날부턴가 수사 지원자도 없고 찾아오는 일반신자들도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은 아주 스산하고 어둡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수도원에 수도원장의 옛 스승이 찾아왔습니다. 수도원장은 스승께 자기의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러나 그 스승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스승은 며칠 동안 조용히 지내면서 기도와 묵상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떠나셨습니다. 스승이 떠난 며칠 후, 수도원장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바로 그 스승의 편지였습니다.
‘여보게, 내가 자네 수도원에 며칠 묵는 동안, 나는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했다네. 나는 자네 수도원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는데, 그분은 평범한 사람으로 변장하고 계셨네. 예수님은 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명하셨네. 그러므로 변장하신 그분이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네. 그러나 그분이 바로 자네 수도원에 계신다고 하는 사실만은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알려주는 것일세.’
수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떠올려봤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사실을 자기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수도원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스승의 편지를 공개했습니다. 그 편지를 함께 읽은 수도원 사람들은 모두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변장하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원 사람들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장하신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몸가짐을 항상 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수도원 분위기는 눈에 띠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질투와 미움, 교만과 게으름 등, 사람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갈등과 다툼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희생하는 마음과 헌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진실하게 남을 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변장하신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으로 대접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수도원이 이처럼 변했다는 소식은 천지사방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 결과, 진실한 사랑과 거룩한 영성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원은 다시 옛 명성을 회복함으로써 맑고 투명하며 거룩한 에너지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살기가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이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 올바른 믿음을 지켜 산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온전히 지켜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영력(靈力)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힘이 약한 사람은 강한 자에게 끌려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력이 부족할 경우,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의 힘, 곧 영력을 길러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것이 워낙 복잡하고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선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뒷전으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사실 세상일로 인해서 바쁘게 지내다보면, 육신적으로 심히 지치고 고달프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믿음생활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점차 더 성장하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는 믿음마저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우리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세력인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치 않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들한테만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고 만다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믿음의 힘, 곧 영력을 잃어버릴 경우,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자식들한테 인정받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까지 생기게 되거니와, 장차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엄중한 책망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장래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면, 그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영광스럽고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했습니다. 그 옷은,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눈부시게 희고 빛났습니다.
그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베드로가 “정말 굉장하군요. 우리가 여기에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천막 셋을 세워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각각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엉겁결에 한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놀라운 광경에 몹시 무서워하면서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무심코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가운데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그 음성이 들리자마자 즉시, 제자들이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는 그 자리에 아무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영광의 빛이 더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장차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어떤 시험이나 유혹에도 넘어지지 말라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경험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세상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살다가 곧 떠나게 될 이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인생살이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세상에 대해서 당당하지도 못하고 떳떳하지도 못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잘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살아가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치우쳐 살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이 영광스럽게 변형되셨을 때에,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의 내용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요컨대,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하게 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옛날, 임금님이 타고 다니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그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할 경우, 온 백성들이 나와 환호하면서 왕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곤 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이 타시는 나귀도 여러 가지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 때문에, 나귀가 아주 멋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갈채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소리에, 그만 나귀가 우쭐해져서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귀는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서 다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귀가 생각하기를,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혼자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가 임금님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그 순간, 그 나귀는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과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영광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은혜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스승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 스승의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 예수를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열심히 그 가르침을 따라가야만, 주께서 누리신 그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영원한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열심히 살아야, 이 세상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귀가 임금을 자기 등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갈채와 환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받는 환호와 갈채까지 독차지 하려고 했고, 그래서 나귀는 임금님을 내동댕이쳤던 것입니다. 그러자 나귀는 그가 누리던 영광은 고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잘 모시고 살면, 주님께서 누리시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영광을 얻고자 해서 주님을 멀리할 경우,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항상 주님 예수를 가까이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에, 북쪽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습니다.
엘리야가 그 사명을 다 마치고 하늘로 올라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갈에 머물러 있던 엘리야는 제자인 엘리사를 두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선생님, 저는 결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할 수 없이 엘리사와 함께 벧엘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벧엘에서 다시 여리고로 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 다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네는 여기에 머물러 있게나. 나는 여리고로 가야만 하겠네.”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엘리사는 “저는 결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사는 요단강까지 스승인 엘리야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내가 죽기 전에 자네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실 영력 중, 제게는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그래서 스승의 남은 일을 다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했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그리고 명쾌한 엘리사의 답변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자세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여, 저에게 갑절의 영력을 주십시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믿음생활을 함으로써 주님의 남은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뒤를 열심히 따름으로써 지금보다 더 많은 영력을 얻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남은 사역을 끝까지 완수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의 빛이 가려졌다면, 영원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나 가려진 것이다(고후4:3)’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악신(惡神)이 그런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뒤를 열심히 따르지 못하도록, 그래서 주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을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물리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천국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다 두고 가야 할 것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사는 동안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우리가 천국 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청송감호소에 ‘주창균’이라는 사람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과 8범에 징역 19년형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변화되어서 지금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그를 전도한 목사님께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일 년 전 어느 날, 바람도 숨을 멈추고 별들도 구름 속에 숨어버린 밤, 나는 당신이 피 흘리신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보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어깨에는 내 죄를 대신한 사랑의 십자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신 고난의 골고다 언덕길,
뭇 사람들의 조소를 대신해서 ‘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하고 부르짖은 그 모습에, 내 영혼이 빛을 찾았으며, 용기 얻어서 애달픈 속맘을 풀어놓았습니다. 이제 이 순간, 창백한 두 뺨을 눈물로 적시며 고백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사랑의 불꽃으로 피어오르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보고 듣고 읽고 전할 수 있게 하소서! 세상은 변하고 인생은 바뀌어도,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광으로 빛날 것입니다.
주여! 주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을 이 몸에게도 가득 부어주소서. 채워주소서.
오늘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그 사랑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뒤를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따라감으로써 세상 사람과 자녀들에게 빛이 되는 살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갑절의 영력을 구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잘 이겨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짧은 인생, 악한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가 실패하는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뒤를 열심히 따라감으로써 영광스런 복음의 빛을 밝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남은 사역을 잘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