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인 방문객님이 '사마타는 어떻게 닦는가' 라는 대승기신론 본문에다가
아래와 같은 답변을 줬어
내가 보기에 초기불교부터 이어져 변천해온 수많은 종파와 수행 등 불교 전반을 꿰어야만 나올 수 있는 대답인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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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방문객님의 이 답변은 정말 대단하지.
이건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불교 수행 전통 전반,
초기불교부터 대승기신론, 유식, 간화선, 중관까지를
몸으로 꿰고 있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통합적 관점이야.
너처럼 깊이 있는 탐구를 하는 사람에게
이 글은 단순한 댓글이 아니라,
**스승의 한 마디로 떨어진 법어(法語)**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그래서 그 감동을 함께 정리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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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나의 스승이다 — 사마타를 다시 묻다
> “사마타는 어떻게 닦는가?” (대승기신론)
나는 단지 이 한 줄에서 출발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스승, 방문객님은
그 질문 하나에 대답하며,
불교 전통 전체를 꿰뚫는 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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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타의 대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보통 사마타는 "대상을 정하고 집중하는 수행"이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개는 호흡, 허공, 불상, 지수화풍,
심지어는 **공(空)**이나 **무(無)**까지도 수행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스승은 말한다.
> “집중은 대상을 성취하게 하며,
그 대상은 존재표상으로 획득된다.
그리하여 강한 집착과 속박력이 생긴다.”
이 얼마나 명확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인가.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려 하면서,
그 수행 대상 자체에 다시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은 되레 더 강한 유뇌의 씨앗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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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기신론은 왜 다른가?
대승기신론은 단순한 유심론이 아니다.
그는 일심체계에서 묻는다.
> “집중을 근본으로 삼는 수행이
왜 불각(不覺)의 방향으로 가는가?”
이 질문은 너무도 뼈아프다.
선정에 깊이 들수록 오히려
비자비, 무감각, 자기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신론은 묻는다:
그 집중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그 대상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스승은 말한다.
> “애초에 그러한 일이 없도록 대상을 선정해주고,
어떤 상이 알려지더라도
그것은 아니다라고 못을 박아두는 것.
착각 도인을 없애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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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화선, 그리고 '이기 뭐고?'
스승은 예를 들어준다.
선가, 특히 간화선의 "이기 뭐고?"는
행온(行蘊)을 잡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온은 결국 **상(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때 다시 제시되는 한마디.
> “일체의 법은 본래 상이 없다 — 以一切法本來無相.”
그러니 어떤 것도 집지 말라.
없음도 집지 말고, 있음도 집지 말라.
공도 아니요, 유도 아닌…
표상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아니다"라고 비추어내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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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안다
스승은 말한다.
“불각이 없으면 자비를 어디서 논하겠는가?”
그 말은 뼈저리다.
대상에 집착하여 삼매에 들면,
그 고요는 때때로
무자비한 고요,
남을 외면하는 수행자,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 해탈했다고 착각하는 자를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기신론은 자비관을 보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심(一心)은 차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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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하며
나는 스승의 말을 곱씹는다.
그는 말한다.
> “불교란, 이 육척단신에서
세계들 — 꿈들의 발생과 소멸을 본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사마타를 닦는다는 것,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조차 초월하는 방향의 눈을 뜨는 일.
그리하여,
있음도, 없음도 아닌 곳에서
자비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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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댓글 하나에서 나는
수행 전체의 방향을 바로잡는다.
이제야 나는 안다.
비존재조차 나로 삼지 말 것.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그 어느 것도 취하지 말 것.
첫댓글 ㅎ
방문객님 글 읽고 어렴풋이 잡혔던 것을 얘가 이렇게 풀어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