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나 시대의 정신을 우리는 쉽게 ‘이즘(-ism)'으로 표현한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 로마교회의 신학의 중추를 이루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토미즘 Thomism’으로 부르고, 영지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등 각 가지의 신학적 카테고리로 사람이나 시대를 정형화하려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따라서 사상을 논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급진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폐쇄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어떤 그룹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드러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특정 ‘주의(主義)’에 자신을 억지로라도 포함시키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로 향한 비난을 피할 목적으로 특정의 ‘이즘’과 자신의 연관성을 극구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개인이나 공동체, 혹은 특정 시대를 하나의 ‘이즘’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2005년 2월 26일 미국 캔사스주의 한 도시에서 체포된 래다(Radar)라는 사람은 그의 이웃 사람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91년까지 있었던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잡힐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그간 자행된 10건의 살인사건에 그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의 행위를 BTK로 표현하여 그동안 BTK미제 살인사건으로 불려왔다. Bind, Torture, Kill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자기 정체에 필적하는 그의 잔인한 행동은 1991년 이후 드러나지 않아 해결되지 못한 채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는데, 최근 들어 11번이나 계속적으로 방송 언론에 편지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 마침내 덜미가 잡히게 되었다. 딸이 제공한 DNA 자료를 통하여 혐의사실이 드러난 그가 사회에 충격을 준 것은 단순히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같은 동네에서 30년을 살았고, 그동안 그 곳에서 늘 이웃들과 얼굴을 대하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고 충실한 루터교회의 교인으로 금년에는 교인들의 대표로 선발되어 일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충격의 도를 더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을 보여 인간이 무엇이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예에서 보는대로 인간은 누구나 단순히 한 가지 용어로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이 통상의 바보보다 더 바보스러운 행동을 할 때가 적지 않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너무도 순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유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속으로는 분노에 몸을 떨고 기회가 닥치면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려는 포악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이드와 지킬박사의 이야기와 같은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습은 사실 멀리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경우가 많다. 개인이나 시대의 특징을 간단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나 시대가 그러한 간단한 용어로 다 표현해 낼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이며, 단순해 보이는 한 시대도 표현할 수 없는 다양성으로 가득차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흔히 휴머니즘을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번역하고 신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15-16세기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휴머니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개혁 직전 유럽을 풍미한 르네상스를 통한 휴머니즘의 확대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16세기의 휴머니스트들은 대부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종교개혁 당시의 휴머니즘은 오늘날의 과격한 휴머니즘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며 인간다움을 찾아가려는 노력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일반인들도 연구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한 중세의 교회나 신학자가 아니라 에라스무스와 같은 휴머니스트가 희랍어 원어 성경을 편찬하는 '이상 현상'이 생겨났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사제나 교회의 결정보다 성경의 언어가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되자 결국 절대권력을 가진 '교회의 과오'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자 하는 인간미를 가진 휴머니즘이 차츰 과격해지기 시작하였고, ‘은총의 빛’이 아니라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이 심화되면서 결국 은총의 세계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러 휴머니즘은 인문주의(人文主義)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배경으로 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변질되기에 이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이름으로 정의되는 사상도 세월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어로 정의될 수 없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무리 개괄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여도 인간이 하나님을 몇마디 자기 시대의 용어로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한 언어’인 신학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만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 하나님과 인간, 세상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수받은 전통과 획득한 지식, 경험의 세계를 통하여 성경을 읽으며, 깨닫게 된 ‘자신의 하나님’을 표현하게 된다. 아무도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예기다.
종교개혁자들이 형성한 개혁신학은 로마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왜곡된 역사와 전통을 통과하며 얻게된 쓰라린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살아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돈으로 얻는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로마교회의 이그러진 길이 루터와 칼빈, 그들 이전의 개혁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같은 길을 걸었으나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죽음이 만들어 낸 새로운 역사를 기억하도록 제정한 성찬에 관하여 서로 이해를 달리하여 다른 형태의 교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유럽 대륙을 통하여 형성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에서 꽃을 피운 장로교회는 때로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라는 다른 이름의 신학으로 역사 앞에 설명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운동과 직접적 연관성 없이 종교개혁 이후에 출발한 감리교나 성결교, 순복음 교회 등은 개혁주의라는 말보다는 자연히 복음주의라는 말을 즐겨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을 갖고 있다. 우리말 사전은 개혁주의를 ‘보수주의의 반대말’로, 복음주의는 ‘복음을 받들어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는 주의. 특히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나 복음주의라는 개념은 태생이 다를 뿐,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라는 용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복음주의라는 말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주의라는 말을 익히고 살아온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란 보수주의자, 근본주의자와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인 신학. 그러나 특정의 신학으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이론으로 남게 되어있다. 삼신론, 양태론 등의 위험이 나타나는 것은 삼위일체의 논리가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누구나 이해가 되는 일이라면 또다른 논리가 나타날 수 없다. 역사적인 교리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우스가 등장하고, 알미니우스가 소리를 낸 것도 결코 그들이 처음부터 교회를 해치고 풍파를 일으키고, 이단이 되려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이론이 받아들여졌지만, 그 후 수백년간 논쟁은 계속될만큼, 교회는 아리우스 일파를 쉽게 설득하지 못했다. 알미니우스가 본래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었던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임하는가’를 두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중심이 되어 여전히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현재 세계 신학계의 모습은 구원의 본질에 관한 문제조차 완전한 일치를 보기 어려운 면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한 루터도 알고보면 결코 균형잡힌 시각을 갖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마 영원히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성자께서 승천하신 이후 본격적으로 땅위에 얼굴을 드러내신 성령의 역사는 역사의 끌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곳곳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이다. 로이드 존스와 존 스타트가 성령에 관하여 일치할 수 없었으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무지하거나 전통과 신학에 어긋난 사람으로 매도당하지 않았고 두 사람 모두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따라서 매우 정당하다. ‘나와 다름’이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다른 쪽의 틀림’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대적(對敵)’으로 보는 경향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신학계의 흐름은 지극히 우려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용어로 정의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대만의 하나님일 수 없고, 특정한 사람이 이해한 수준에 머무를 수도 없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임을 명백하게 하신 것(마22:32)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의 왜 칼빈주의자가 아닌가?’(2004, IVP)라며 칼빈주의가 취하는 신학적 철학적 헛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제리 월스(Jerry L.Walls)와 조셉 돈겔(Joseph R.Dongell)이 ‘나는 왜 알미니안주의자가 아닌가?’고 다시 알미니안주의에 비판의 메스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인간이 만든 신학으로 설명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신학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 신학공부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 혹은 신학이라는 규격화된 신지식을 경원시 하는 사람들까지, 인간과 인간이 동원하는 지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곁에 임마누엘로 존재하심을 감사할 뿐이다.
첫댓글인간지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한다고 해서 신학의 "어중간함"이 변명될 수도 없고 "상대주의"에 빠져들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 정체성을 허물어버리는 "타협"이나 "화해"도 자제함이 좋을 것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주의"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개혁신앙"이라고 불려지기를 기
뻐했습니다. 영어권에서도 Reformism이나 Reformedism같은 말이 없습니다. 단지 Reformed Faith라는 말은 있지만....그리고 Calvinism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카이퍼 등의 "신칼빈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말입니다. 개혁신앙인들이 그냥 따라가고 있는 셈이지요.
첫댓글 인간지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한다고 해서 신학의 "어중간함"이 변명될 수도 없고 "상대주의"에 빠져들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 정체성을 허물어버리는 "타협"이나 "화해"도 자제함이 좋을 것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주의"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개혁신앙"이라고 불려지기를 기
뻐했습니다. 영어권에서도 Reformism이나 Reformedism같은 말이 없습니다. 단지 Reformed Faith라는 말은 있지만....그리고 Calvinism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카이퍼 등의 "신칼빈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말입니다. 개혁신앙인들이 그냥 따라가고 있는 셈이지요.
http://www.kts.ac.kr/Commu_menu/board_detail.asp?Menu=pboard&Category=8&Idxno=179&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