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것을 버리고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위해 삶을 다한 예수처럼 이 땅의 봄을 기다리는 3월. 「빛과소금」은 작은 예수의 삶을 살다가 간 故 김용기 장로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마라. 밥 한 끼를 먹기 위해서는 세 시간의 노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가나안농군학교는 올해로 창립 53주년을 맞았다. 그간 이 학교를 다녀간 사람만 6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일가 김용기 장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고 가난으로 힘을 잃은 1960년대 우리 사회에 거룩한 노동과 생활 영성의 참 모습을 구현해 낸 신앙의 선배의 삶의 궤적을 되밟아 본다.
작지만 옹골찬 눈매에 다부진 몸집으로 여든의 삶을 살다간 故 김용기 교장.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 자리한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김범일 장로를 만나러 갔다. 기자 일행이 방문한 당시에도 학교에 훈련을 받으러 온 직장인 한무리가 수료식을 끝내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라가 먼저, 자신은 다음 무엇을 배우기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대동하고 강원도 시골까지 내려오는 것일까. 오래 전 나라가 가난과 무지로 삶이 힘겹던 시절, 한 농부의 당찬 목소리가 얼마나 메아리쳐오길래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이 시골에서 뭔가를 얻어 가려 하는 것일까. 일가 김용기 장로는 한 문장으로 축약된다. 바로, 학교 마당에 세워진 비석에 새긴 글귀이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조국’이라는 가슴 뭉클한 단어를 되뇌이며 뒤이어 붙는 ‘안심하라!’에서 믿음의 포부를 느낄 수 있다. 김 장로의 삶을 이끌던 가장 큰 단어가 있다면 다름아닌 ‘조국’이다. 그 자신 농군학교를 세운 것도, 농군학교를 통해 청년들을 깨운 것도, 복민운동이라 이름한 사회생활운동을 한 것도 모두가 그 맥은 하나에 맞닿아 있다. 나라 살리기이다.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땅이요, 새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한당 정신. 땀흘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서 복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김 장로는 생전에 불한당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누가 없을까만,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땀을 흘리고 땅의 소산을 먹는 것이 마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 장로의 이러한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보다 그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토록 자신의 몸을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들 김범일 장로는 선친을 그렇게 회고한다.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김 장로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나안농군학교 어느 처소든, 맨 위에 자리한 ‘구국 기도실’에서 생전에 김 장로는 통곡에 가까운 소리로 그야말로 구국 기도를 드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새벽부터 이어진 기도회는 학교에 찾아온 수많은 훈련생들과도 계속 되어 뜨거워진 마음을 안고 일상적인 운동을 하기만 해도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낄 정도였다 한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그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선친이 기도하는 것을 가만 돌아보면서 김범일 장로는 다시 한번 말한다.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목사가 되는 날이 오게 해달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 기도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기도가 응답될까 하며 반신반의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지만 그러나 선친의 기도의 폭이 얼마나 컸는지만큼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한다. 생전에,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토록 가슴이 아플 수 없었다는 김 장로는 이 나라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위해 일평생 땅을 통한 전도를 멈추지 않았는지 모른다. 당시 김 장로가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 초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했다. 그렇기에 농업을 통한 변혁과 생활 전도가 아니고서는 삶의 질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믿음은 자고 먹는 삶이라야 한다 한 손에 괭이를, 한 손에 성경! 김 장로의 머리 속에서 양 손은 언제나 비어 본 적이 없다. 한 손에 괭이를 들고, 한 손에 성경이 있어야만 조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땅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가 농사를 지어온 것은 나 혼자만 살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옵니다. 나 혼자만 살기 위한 일이라면 왜 하필 농사를 지었겠습니까? 제가 농사를 지은 것은 이 나라의 보다 많은 백성들이 보다 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전에 김용기 장로가 드린 기도의 일부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조국도, 자신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쳐서 땅을 일구면서 그가 느낀 것은 단 하나, “문제는 사람이 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실 앞에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생활이 변해야 함을 강조하며 다시 노동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치 순환고리처럼 이어진 이 삼박자는 그의 평생을 다하게끔 했고 또한 생활의 변화를 의식적으로 꾀하기 위해 목회자도 장관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에 다시 들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교육이라고 강조한 김 장로는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평생 교육적인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처럼 “우리의 스승은 하나님이시라”고 늘 강조했다 한다. 학교를 졸업하는 훈련생에게 예나 지금이나 남는 것은 생활 신앙이다. “서른에 예수님을 만나 여든에 죽는다고 하면 오십 년 세월은 어디 가는가”라고 아들 김범일 장로는 말하는데, 선친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라고 한다. 생활에서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농사를 잘 짓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동네에 유치원은 들여놓을 수 있어도 교회는 반대하는 것을 가슴이 아팠다”는 생전의 그의 말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활영성, 일상의 영성 운운하는 많은 신학자와 크리스천들에게 김 장로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본이 되어준 것이다. 1909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988년 돌아가시기까지 그는 자신의 몸을 안락하게 둔 적이 없다 한다. 생을 마치실 때쯤에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누워 계시기도 했는데, 김범일 장로가 수련생들에게 선친 대신 강의를 했다는 것을 그날 늦게 말한 적이 있단다. 그때 김용기 장로는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이요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 네가 잘못한 것이다”라며 호되게 꾸중을 했다 한다. 그런 그의 철저한 신앙 정신이 이웃으로 하여금, 사회 지도자층으로 하여금 김 장로를 찾아오게끔 만든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람에게서 가장 첫 번째로 꼽은 요소는 다름아닌 ‘진실성인’것이다.
고무신과 반찬 세 가지 이야기 일가 김 장로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근검절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례로 1966년 그의 가나안농군학교 사역과 사회에 끼친 공익성을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바 있다. 당시 이 상을 받기 위해 마닐라 시상식장으로 갈 때도 그의 발에는 고무신이 신겨 있었다. 선친의 그러한 행동이 못내 부담스러웠던 김범일 장로는 “아버지! 거기는 국제 무대인데 개인 성향을 그렇게 드러내시면 안됩니다”라고 하자 호통을 쳤다 한다. 발바닥에 얼마나 땀이 났는지 신발이 벗겨질 정도인 아들이 잔뜻 움츠러들자, “허리 펴라”고 힘을 실어주었단다. 시상식장으로 가는 사이, 언론의 포토는 김 장로에게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 고무신에 계속 머물렀다 한다. 수상 소감을 하기 위해 올라선 김 장로는 첫마디를 이렇게 열었다. “저는 지금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농부이고,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장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원히 고무신을 신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농군학교를 졸업한 수료생들 중 고무신을 즐기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농군학교에 가면 소박한 식탁이 있다. 고무신이 그러하듯, 김 장로는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배도록 절제와 근면의 삶을 살았는데 이것은 식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반찬 세 가지를 넘지 않았으며 또한 음식을 남기지도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농군학교 식당에는 음식을 남기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의식주, 삼자(三者)의 비경제적인 면을 지적하며 근본적 변화를 강조한 김 장로는 그 실천의 장으로 가정 생활을 중시했다.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역한 분”이라는 김범일 장로의 말처럼 그는 일상에서 조금의 허영과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접할 때도 그저 손님이 오는 것에 감사하고 함께 드나듦에 기뻐해야지 먹을 것 접대에 과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 요즘 우리 후세들에게 김 장로의 이러한 생활의 절제는 자못 꽉 끼는 옷을 입는 듯도 하지만, 예수 그 한분의 삶을 재현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살아야겠기에 삶은 그대로 훈련이요 기도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식이 개혁되었기에 삶도 그러해야 하고, 다함께 잘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본을 보이며 공동체를 이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김 장로의 복민운동 그대로이다.
다함께 더불어 복받는 삶을 살도록 지금은 해외로까지 김용기 장로의 정신은 영향을 주고 있다. 아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가나안농군학교 사역은 현재 10여 개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날 우리 사회가 그 혜택을 입었듯 동일하게 개혁과 복지를 통해 복민운동을 해야 하는 나라들에 그 정신과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며 언제나 봉사와 희생을 많이 하라고 강조했다는 김용기 장로. 그는 인류의 3대 고민을 빈곤, 전쟁과 시기 미움, 절망과 마약 등으로 규정하며 근로를 통해, 봉사를 통해, 희생을 통해 이 고민을 타결할 수 있다고 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기에 장관이나 마을 이장이나 귀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그 자신 소천하기 1개월 전까지도 조간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4시간 기도 시간을 지켜 나갔다. 기도와 성경, 그리고 노동은 생활 영성으로 이어져 가진 것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김용기 장로. 이즈음!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선포하며 무릎을 꿇고 몸을 쳐서 복종하는 작은 예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과 故 김용기 장로가 섬기는 예수님이 같은 분일진대, 우리 또한 논픽션 신앙 일대기를 지금 이 봄에 써내려 가볼 일이다. 가나안으로 가나안으로 갈 때까지.
<출처: 소망성결교회> | |

<강의하는 김범일 교장>
가나안농군학교 김범일 장로
아버지의 길을 따라서...
“못 사는 오지에 가서 울고 웃고 땀 흘려 보아라! 그래서 노동의 귀한 대가를 몸소 얻어라! 외국에 나가서 네 한 몸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아버지가 됐거든 자식에게 인정받아라! 자식이 됐거든 아버지에게 인정받아라! 아내가 됐으면 남편에게 인정받아라!
“한 손에는 성서를 쥐고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머리에는 애국의 면류관을 쓰고, 허리에는 겸손의 띠를 두르고, 발에는 개척의 신을 신고…” 안병욱 교수가 20세기 한반도의 예언자로 묘사한 이 인물은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나의 아버지 김용기 장로다.
할아버지(김교신 옹)가 세상을 뜨면서 “농사야말로 산업의 원동력이다. 주권을 회복하려면 경제 자립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식인일수록 농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농민운동에 투신한 아버지는 농업기술의 개발과 신앙으로, 모두 일하고 모두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꿈꾸기 시작했다.
33년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봉안이상촌(奉安理想村)은 그 꿈의 첫 실현이었다. 54년에 광주 황산에 제 1가나안 농군 학교를 개척하셨다. 가난과 역경을 이겨낼 진정한 농군을 키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황무지를 개간하는 중노동으로 이어졌다. 나를 비롯해 삼형제는 고된 막일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어린 누이와 어머니까지 고생하는 게 안타깝고 부담이 되었다. 나라도 좋고 민족도 좋지만 우리 가족이 치르는 희생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는 엄격한 생활규칙은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동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었고, 그 식사도 고구마와 감자였다. 힘들었다.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나의 처지와 친구들을 비교하면서 더욱 괴로웠다.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가 내 인생을 살아 줄 수는 없는 데 언제까지 아버지 그늘 밑에서 땅만 파고 살아야 하나?’ 더군다나 서울 나들이 길에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땐, 더 이상 이런 고생은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중에 늙고 힘들어지면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가족이 거처할 보금자리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9살에 가출했다. 아버지 밑에서 농사만 짓다가 낙오되느니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겠다는 결연한 마음에서 서울로 줄행랑을 쳤지만 찾아간 곳마다 ‘아버지의 뜻을 아들인 네가 따라야지 도망가면 되겠냐’는 쓴 소리만 들었다. 친척 집을 전전하며 앞일을 계획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집도 그립고 가족들도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꾸중이 무서워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출한 지 40일 째 되던 날 아버님이 보낸 편지 한 장은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절절이 깨닫게 해 주었다. 너무나 엄격해서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던 아버지였는데 편지 안에는 그 동안 말로 표현하지 않으셨던 세심한 사랑이 묻어나왔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아비는 네가 집 나간 이후로 한 번도 네 기도를 끊은 적이 없다. 네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어서 돌아오너라. 이 나라 이 민족은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 어서 돌아오너라. 네가 돌아와서 이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와 함께 이 일을 하려 하겠느냐?’
구구절절이 어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애절한 당부, 벌써 내 눈엔 눈물이 넘쳐 흘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붙잡은 말 한마디.
‘저 공중에 나는 까막까치를 보아라. 까마귀가 학교를 나왔느냐 하지만 아비의 대를 이어 살지 않느냐? 하물며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게 살 수 없지 않느냐? 잘 먹고 잘사는 것은 한 순간의 부질없는 꿈이다. 우리 사람답게 열심히 일하자, 남을 위해 살자!’
결국 아버지는 나보다 훌륭하시고 나라와 민족을 진실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로, 가출이 결국 내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물질욕, 출세욕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40여 일만에 돌아온 나를 ‘잘 왔다’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야단 한번 치지 않으셨다. 그 때서야 더욱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들 앞에서는 권위 있는 엄한 아버지였지만 남몰래 많이 우시고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가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아버지의 무대는 흙이요, 흙은 생명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내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자!’
남몰래 울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사랑 그 뒤로 딴 마음을 먹지 않고 흙을 파며 농군의 삶을 살았다. 오십 세가 될 때까지도 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쓸 만큼 순종했다. 머리가 허연 아들이 외출할 때마다 용돈을 달라하면 아버님은 무척 기뻐하시며 두둑한 용돈을 주셨다.
아버지의 엄한 사랑과 강한 개척 정신이 지금의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 김범일이 되게 했다. 많이 배우진 못했어도 남들처럼 잘 먹고 가정을 위하는 일반적인 아버지를 둔 것이 아니라서 고생도 많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1973년 원주 가나안 농군 학교를 개척할 때부터 88년 소천하실 때까지 셋째인 나와 함께 지내셨다.
나도 나의 자녀들에게 다른 아버지처럼 좋은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73년 원주 산골짜기 황무지를 개간한다고 들어 올 때 장남 영생이가 6살, 장녀 축복이는 3살, 막내 장생이는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태어났다. 무엇보다 산골짜기에는 2남 1녀의 교육을 맡길 만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때부터 큰 형님 집에 머무르며 유학생활을 했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만나 눈높이를 맞추며 친구처럼 중국집이나 제과점에서 데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세 통씩 편지를 보내며 아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무엇보다 예민한 사춘기에 객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혼란스러워 할 것이 걱정되었다.
‘우리가 왜 산속에 있는가? 낙오된 것이 아니라 큰 뜻이 있어서다. 감사하고 참아라!’ 시편과 잠언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편지로 보내며 신앙의 재무장을 촉구했다.
이제 맏아들은 아버지의 농업교육을 더욱 깊이 배우기 위해 외국에 나가 농업 경영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외국과의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일하며 21세기 농민 CEO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둘째 딸은 성악을 전공하고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막내아들은 신학대학을 나와 전도사가 되어 캄보디아 오지에 나가 선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못 사는 오지에 가서 울고 웃고 땀 흘려 보아라! 그래서 노동의 귀한 대가를 몸소 얻어라! 외국에 나가서 네 한 몸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삶의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는데 제 스스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버지가 파던 우물을 아들이 파겠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 전 막내아들이 생일을 맞아 친지들을 초대하고 조촐하게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그 자리에서 아들은 나를 위해 직접 제작한 10분짜리 영상물을 상영했다. 내 삶을 되돌아보는 간단한 영상물이지만 아들이 나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이 느껴져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대를 이어가는 아들에 감사 이제 내 나이 71세, 고희의 나이가 되어 아버지를, 아버지의 삶을 더욱 이해 할 수 있다. 새벽마다 아버지께서 뛰시며 기도하시던 가나안 농군학교의 기도 동산을 오를 때면 아버지와 함께 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난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듯하다. 매일 새벽 ‘민족이여 안심하라! 겨레여 안심하라! 내가 있다! , 하고 외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산 속에 들어오셔서 끝까지 뛰다가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 아버지는 삶의 비전, 민족의 비전을 몸소 진실하게 보여주셨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죽을 때 까지 내 후손들에게 진실하게 보여 줄 작정이다.
“아버지가 됐거든 자식에게 인정받아라! 자식이 됐거든 아버지에게 인정받아라! 아내가 됐으면 남편에게 인정받아라!”
늘 신앙 안에서 언행일치를 보여준 아버지는 새벽마다 종을 치며 민족의 잠을 깨우셨다. 이제 아버지가 치던 그 종을 아들인 내가 치며 내 아들에게 물려 줄 것이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이상을 알리는 그 종을 아들이 치고 아들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따라 민족의 잠을 깨우는 종치기를 소망한다.
<자료출처: 성공적인 변화 / 편집부 송현영>
생명을 파종하는 영원한 농군" -늘푸른 상록수 김범일(67) 제2가나안 농군학교 교장.
김교장이 생활하고 있는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치악산 기슭의 제2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서면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향한 “그대들 복민이여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자”라는 글귀가 맞는다.
`복민주의는 참살길의 실천의지'라는 이념으로 '故 일가(一家)김용기(金容基)장로가 설립한 가나안 농군학교의 대를 이어 지난 73년 이곳에 제2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우고 평생동안 흙과 땅을 지키고 있는 김범일교장은 아직도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하늘에는 공군(空軍)이, 바다에는 해군(海軍)이, 전방에는 육군(陸軍)이 있다면 우리 농촌에는 농군(農軍)이 있습니다”며 말문을 연 김교장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을 만들기 위해 헐벗음, 굶주림과 싸워 이기는 강한 농군을 만들자는 목표로 이곳 가나안 농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선친의 뜻에따라 73년 원주 신림면 황무지를 개간한 김교장은 무에서 유를,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만든 농촌의 신화를 창조해 냈다.
김교장을 비롯한 이곳 가나안 농군학교의 농촌운동은 우리나라를 고도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든 70년대 새마을 운동보다도 앞서간다.
국내 최초로 고구마 12개월 저장법을 도입해 식생활 개선에 앞장서는 등 농촌 계몽에 앞장섰던 고 김용기 장로의 상록수 운동은 당시 이곳을 들린 박정희(朴正熙)대통령조차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으며 이후 국내 각지에서 가나안 농군학교를 모델로 한 새마을 운동이 확산됐다.
“조국이여 안심하라”라는 신념으로 농군이 됐다는 김교장은 “일평생 조국을 위해 일하다 죽은뒤 한알의 밀이 되어 조국을 위해 또다시 일하겠다”는 의지로 48년째 매일 새벽 4시면 육체, 사상, 영혼의 잠을 깨우자는 산소통을 치며 잠든 조국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다.
흙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농민의식 개혁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아 96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농어촌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던 김교장은 쌀시장 개방등의 여파로 인한 도·농간 격차심화를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유통구조 개선을 주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교장은 농어촌선교단체 지도자들의 농어촌 살리기 노력은 시대적 요청이며 역사적 사명으로 농어촌이 잘살고 선교도 해야 한다는데 교파의 이해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따라 1만5,000여 농어촌 교회와 1만2,000여명의 신도들이 모인 농어촌선교단체협의회를 결성해 신선한 충격을 전하기도 했다.
김교장은 협의회를 결성하게 된 취지에 대해 “협의회의 가장 큰 목적은 기독교의 대화합과 도·농 이웃사랑운동 및 생명농업 환경운동으로 인한 살기좋은 농어촌을 실현하는데 두고 있었다”며 “우리나라가 13년만에 쌀 수입을 시작했듯이 식량안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에서 출발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아직도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에게 흙의 진리를 교육하고 있다는 김교장은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뿌린대로 거두리라라는 진실을 전해주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갈수록 혼탁해져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한탕주의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며 “흙속에서 진리를 찾자”고 주장하고 있다.
김교장은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곳에 씨를 뿌리고 생활하는 농촌은 물고기가 물에서 자유롭듯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예찬론을 펴며 “소위 우리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도 하루에 한번씩 흙냄새를 맡고 진실과 진리를 찾아야 한다”강조했다.
이런 김교장도 한때 흙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못이겨 한달여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고심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김교장은 “내가 18세 되던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흙과 생활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며 힘들었던 젊은 시절의 고충을 회고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던 친구의 집에 갔는데 난생 처음보는 수세식 화장실과 처음보는 식탁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허름한 농장에서 매일같이 고구마를 캐고 밭을 일구고 있었는데 최고급 아파트에서 살며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라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것 같아 서울에 다녀온 뒤 한달여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교장은 당시 “내가 아버지의 소유물인가.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지나”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김교장은 김용기장로의 농촌사랑이 그리고 가나안 농군학교의 이념인 복민주의를 실현해야 겠다는 의지로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밭을 일구며 생활할때도, 외부에 초청을 받아 갈때도 군청색 작업복을 입고 다니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 김교장은 지난 90년 방글라데시에 분교를 설립한데 이어 필리핀 팔레스타인 미얀마 중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비롯해 아시아의 빈곤해결에 나서고 있다.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워 우리동포를 돕는 것이 희망이라는 김교장은 “내가 일을 하지 못할때 조용히 물러나고 그뒤를 나의 자식들이 가나안 정신을 갖고 도와주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며 “아시아의 빈곤해결에 이어 전세계로 우리 가나안 학교의 정신이 뻗어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면서 말을 맺었다.
<原州=李明雨기자·woolee@kwnews.co.kr>
김범일교장 양력
1936년 경기도 양주출신. 서울장로회신학대학, 일본 아세아농촌지도자교육 수료.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감·부교장. 94년 가나안복민회 이사장. 농어촌 발전위원회 위원장. 가나안농군학교 이사장 역임. 현재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국민훈장 동백장.
|